어렸을 때부터 덩치가 크고 아둔하며 눈치를 잘 보지 않는 성격이었습니다.

종교는 모태신앙으로 기독교를 믿고 있었지만, 강압적인 부모님의 태도에 신앙심은 그리 강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께서는 항상 바쁘셨습니다. 질문은 넘기셨고, 제안은 어리다며 무시되었습니다.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는 저는 점점 고립되어 갔습니다.


본래도 성격이 나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제 성격은 점점 뒤틀려갔습니다.

조그마한 일에도 쉽게 화를 내고, 누가 건들면 제게 위해를 끼칠까 봐 방어기제를 펼치며 밀어내었습니다.

많은 친구를 가진 사람을 보았습니다. 부러웠지만 저 자신은 나쁘지 않다고, 그때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누구도 제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중학생이 되고 혼자가 된 저는 쉽게 남들에게 업신여겨졌습니다.

왕따라는 개념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더 이상 제 옆에 누군가가 오려 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때 깨달았습니다.

너무 늦었다고, 절망해서 등교를 거부할 때도 있었고, 학교에 가더라도 싸우거나, 맞고 돌아오기만 했습니다.

제게 학교는 배움의 장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항상 금욕을 추구하셨고, 교리에 따라 남의 잘못을 따지기보단 스스로 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괴롭힘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머니께서는 남들을 보기보다는 제 문제를 보려고 하셨습니다.

제게 병이 있다고 믿고, 서울이고, 대구고 부산이고 대전이고 가릴 것 없이 심리상담을 하러 다녔습니다.

우울증 약도 처방받았었습니다. 자해도 하게 되었습니다. 생각을 하는 것이 괴로워져 갔습니다.

점점 더 저는 멍해져 갔고, 사회성을 극도로 잃고 만화와 게임에 빠져 살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하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만화와 게임은 제게 있어서는 최고의 도피처였으니까요.


그러다, 그렇게 크지 않은 병원에서 좋은 상담사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도 마찬가지셨습니다. 남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네게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제 탓이 아니라고 해주셨습니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흐르려고 합니다.

그때, 울면서 상담사 선생님께 소리쳤습니다. 이렇게 억울한데 탓할 사람이 없으면 대체 뭐가 잘못된 거냐고요.

상담사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조용히 안아주셨습니다.

저는 더 말할 수 없었습니다. 어쩐지 목이 메서 더 말이 나오지 않았었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무엇이 제게 필요한 것인지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저는 그때, 너무 어렸을 뿐입니다.



시간은 흘러, 저는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저를 괴롭힌 애들의 친척들이 있는 학교로 진학했습니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발표하라고 해서 발표하면, 수업 시간에 입을 열었다는 이유로 슬리퍼로 뺨과 입을 맞았습니다.

책을 찢고, 가방을 정화조에 빠뜨리고, 저를 욕한 사람이 있다면서 싸움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리고, 선생님께 말해 제가 사람을 때렸다면서 몰아갔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악할 수가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자살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손목의 상처는 이미 아물었었으니까요.

견디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을 견디다가는 제가 먼저 망가질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전학이라는 선택지를 골랐습니다.


전학을 가고 나서도 저는 좋은 일을 겪지만은 못했습니다.

사람이 무서웠습니다. 첫 마디에 심장이 떨렸고, 두 문장에 턱이 떨렸습니다.

복잡한 감정이었습니다. 무서움 것 외에도 내가 사람과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긴장되고 들떴습니다.

그로 인한 실수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따돌림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지만, 이전의 저와는 다르게 반응했습니다.

신경 쓰지 않고, 저는 제 인생을 살면서 남을 도왔습니다.

아침에 먼저 일어나서 교실을 청소하고, 하교 때는 늦게 남아있다 책상의 간격을 맞춰두었습니다.

만화에 보면 흔하게 있는 방법이었죠. 제게 세상을 보는 방법은 만화와 게임뿐이었으니까, 거기에 따랐었습니다.

물론 이런다 해서 친구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대화하기도 어렵고, 기대감에 실수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저를 더 이상 나쁘게 보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무엇을 하더라도 남들은 신경 쓰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아니면, 애초에 신경 쓰지도 않았는데 제가 과민반응했을 수도 있겠죠.


이즈음 밴드부를 들어갔습니다.

애니메이션을 보지는 않았지만, 그즈음에 케이온이 유행해서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요.

보여주기식이었지만 마을 축제도, 학교 축제에도 나서서 한 곡씩 연주했었습니다.

잘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하려고 했습니다. 근데도 남들보단 열심히 안 했던 것 같습니다.

밴드부 활동이 끝나고 생각했습니다.

나 정말 게으르구나.

아침에 먼저 일어나서 교실을 청소하고, 하교 때 책상 간격을 맞추고

음악실에서 홀로 연습하고 결과를 보고 끝마쳐도

남들은 앞으로 나아가는데 저는 제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드러머는 스틱을 너무 세게 쳐서 3세트가 부러졌습니다. 그런데 너무 세게만 쳐서 3세트가 부러진 걸까요?

일렉은 초크가 닳아서 소리가 째지는 거 같답니다. 걔 초크 8개 가지고 다니던데.

음악실에 항상 보이지 않던 보컬은 목소리가 허스키했습니다. 근데 왜 무대 서는 날은 목이 풀렸을까요?

제가 노력했다고 생각했던 게, 남에게는 그저 삶을 살아가는 수준이었던 거죠.

여태까지 계속 적어왔듯이 저는 계속 저만 보아왔습니다.

남을 보지 않았습니다. 사회성이 결여되어서, 제 기준을 만들고 거기에만 만족하며 안위하고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계속 변화하고, 저를 고쳐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남들에게 따라가기 위해서, 남에게서 배울 것을 찾고, 제게서 문제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대학을 가도 저는 부족했습니다.

훈련소에 갔다가, 몸무게로 공익을 다녀와도 저는 여전히 문제가 많았습니다.

직장을 다니는 지금의 저도 여전히 부족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저는 옆에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말하면 들어줄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배울 것이 있고, 제 문제를 비추어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중학생 때는 상담사 선생님이 말없이 안아주었던 것을 무어라 형언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버팀목이 필요했던 겁니다.

옆에서 보고, 기대고, 제 문제를 비추어줄 버팀목.

그러면서도 너무 기대지 않아 넘어지지 않게 관리하는 법을 배우게 될 버팀목.

같이 이야기하면서 서로 세상을 넓혀갈 버팀목 말입니다.


채널 이름인 버팀목은, 이 채널에 오시는 힘드신 분들과 길게 이야기하며

이런 버팀목이 조금이나마 되어드릴 생각으로 지었습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