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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일이 훨씬 지났는데... 할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았다. 처음엔 원래 있던 곳과 위상차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랫배에서 통증이 점점 느껴져 왔다. 미미하지만 하루하루가 지날 수록 점점 통증의 강도가 강해졌다. 그리고 오늘은.... 일어나고 보니 무시 할 수 없을 만큼 통증이 심해져 있었다. 알 수 없는 현상에 두려움이 느껴진다.

아, 아니면 설마?




일단 통증을 무시하고, 출근할 채비를 했다. 정말, 차라리 그 쪽이면 다행일텐데... 아니 그쪽도 다행은 아닌 건가? 불안한 마음에 메시지를 먼저 써내려갔다.




[시윤 씨. 오늘은 퇴근하고 같이 있어 주실 수 있나요?]

[얼마든지 가능하긴 한데... 무슨 일 있어요?]

[조금만 일찍 나와주세요. 조금 상의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





항상 같이 출근하려고 기다리던 장소에 나와 시윤 씨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니 조금 멀리서 달려오는게 보였다. 순식간에 내 앞으로 달려와서 나를 끌어안고 숨을 골랐다.




"아...! 천천히! 안 뛰셔도 되는데..."

"후- 어떻게 안 뛰어요. 느낌이 안 좋아서 빨리 왔어요."

"그게..."

"..."



내가 말하기를 망설이니까 시윤 씨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나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결심이 서고... 입을 열었다.




"...생리를 안 해요."

"오래 됐어요?"

"원래 시작해야 하는 날보다 일주일이 더 지났는데 하질 않아요. 거기다가... 아랫배도 이상하게 자꾸 아프고..."

"많이 아파요? 일할 수 있겠어요?"

"그, 그게... 막 심하게는 아닌데..."

"그래도 아프면 약을 먹어야..."

"만약... 그... 그거면..."

"... ..."

"약을 먹기가 좀 그렇지 않을까요...?"





걱정과는 달리 시윤 씨는 미소를 지어 보이곤 나를 끌어안았다. 만나기 전까지 했던 걱정이 눈 녹듯 깨끗히 녹아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ㅅ..시윤 씨! 너무 세게 안으셨어요...!"

"카린 양. 저는 다 괜찮아요. 그냥 아프지만 않으면 좋겠어요."

"시윤 씨..."

"...테스트라도 해볼까요."

"네, 아무 것도 안 하는 것 보단..."













-





오늘은 다행히 관리부 업무만 맡아서 했지만, 시윤 씨가 현장으로 나가는 바람에 조금 기다려야 했다. 하루 종일 아랫배가 신경 쓰였지만, 일단 누군가에게 들키기도 싫고...

관리부실에 앉아서 시윤 씨만 돌아오길 기다리는데 사장님이 들어오셨다. 물론 원격 조종하는 로봇으로.







"카린 양. 퇴근은 안 하는 가?"

"아. 시윤 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냥 기다리고 있는거니 야근수당 같은 건 신경쓰지 않으셔도 돼요!"

"흐음- 컨디션은 괜찮고?"

"요즘 아픈 부위가 좀 있긴 한데 심하진 않아서 괜찮습니다."

"흐음..."






로봇이다 보니 표정 변화를 알 수가 없었다. 기계 팔로 팔짱을 낀 상태로 나를 지긋이 보더니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5분 정도 뒤에 기계 손에 무언가 쥐어진 상태로 나타났다.





"그건..."

"많이 아플 때 먹게. 모양은 그냥 초콜릿처럼 생겼네만, 성능은 확실하지."

"약 같은 건가요?"

"이해가 빠르군! 카페 스트레가에서 고가에 구입한거니 정말 힘들 때만 먹게나. 펜릴 소대도 이제 작전이 끝났다고 하니, 시윤 군이 곧 올걸세."

"카페...?"

"하하하! 이름만 그런거라네. 그리고 이상 있으면 반드시 나나 부사장에게 말하게. 그럼 이만 나는 가 보도록 하지. 할 일이 아직 많아서 말이야."

"앗, 감사합니다. 사장님."






말 그대로 정말 초콜릿이었다. 이게 약의 역할을 한다고...? 출처가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그냥 의미 없이 주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윤 씨가 관리부실 문을 열고 나를 불렀다.





"카린 양!"

"아, 시윤 씨. 다친 덴 없으신 거죠?"

"카린 양이야 말로 괜찮아요?"

"괜찮아요. 참을 만 해요."

"오는 길에 부탁 한 거 사왔어요. 일단 같이 얼른 퇴근해요."





시윤 씨가 가자며 손짓했다. 가방을 챙기고,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시윤 씨의 손을 잡았다. 괜찮을 거라는 주문을 외우면서.

















*







예상하는 건 두 가지다. 기쁜 일이거나, 최악이거나.

그리고 지금 저 테스트기가 결과를 말해줄 것이다. 아니 최악을 알려주더라도 확신 할 수 없었다. 그냥 단순히 스트레스로 안 하거나, 아니면....







"확인 할까요?"






테이블 위에 결과 값이 뒤집어진 테스트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뒤집는다.

테스트기에 그어진 단 한 줄이 최악이라고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 ..."





최악인 이유는 간단했다. 이미 몸이 망가지기 시작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으니까.

나는 말없이 카린 양을 안았다. 단순히 그냥 아픈 걸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처한 상황에선 무시 할 수 없는 징조였다. 카린 양은 부정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순진해서 인지 몰라도, 나에게 왜 말이 없냐고 안겨서 물어왔다.




"시윤 씨...? 왜 그래요?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그냥 아프지 말라고 안아 주는 거에요."

"... ..."




그녀도 나를 안는다. 나의 행동의 뜻을 알았다는 듯 세게 안는다.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진실을 마주하기 두려웠다. 눈을 질끈 감고, 나도 더 세게 안았다.




"아프지 마세요. 아니 변하지만 않으면..."

"... ..."

"그냥 이대로 있어주세요."





나 답지 않게 말이 꼬였다. 카린 양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내 품에서 떨어져 나와서 웃어 보였다. 이상하게 무슨 기분인지 읽을 수가 없었다. 순진해서 일까, 애써 웃어 보이는 걸까.





"시윤 씨가 그런 표정 짓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요."

"네? 제 표정이 어떻길래..."

"엄청 바보 같아요~"

"카린 양만 볼 수 있는 특별한 표정인 걸로 하죠."

"헤- 그게 뭐에요~"






카린 양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끌어 안았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던 그 날 이후로 운 적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도 카린 양을 끌어안았다. 말 없이 품 안으로 들어온다.






"시윤 씨."

"...네."

"오늘은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좀 있네요. 평소엔 못 보는 모습이라 새로워요-"

"... ..."

"이상한 점 있으면, 얘기하라던데- 내일은 면담을 해야겠네요."

"그래요. 내일은 조금 바빠지겠네요. 아직도 통증 있어요?"

"조금요.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에요. 임신 같은 거도 아니니 진통제라도 챙겨 먹어야겠어요."




씁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나 지났던가 여기 온 지...

아니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카린 양 말대로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으니까, 그저 추측이니까.




"... 자고 가면 안돼요?"

"그럴까요."

"같이 있을래요."





자연스럽게 카린 양에 집에 가져다 뒀던 내 여분 잠옷을 서랍에서 꺼냈다. 그냥 같이 살까.







... ...














-







마침 투약일이기도 하고해서, 보고를 올렸다. 이전의 CRF 소모량과 시작된 통증에 대해서.

최대한 해보겠다는 답변 뿐이었다. 애초에 회사 내에 그런 장비들이 존재하는 것도 신기한데 이번에도 해보겠단다. 가끔 저 로봇이 전지전능한 신처럼 보일 때가 있다.

로봇 뒤에는 분명 사람이 있겠지...


1초가 1분처럼,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진다. 같이 있을 땐 순식간에 지나갔는데, 반대로 되면 참 좋겠다.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아니었던 것 같다. 의자에 앉아 땅을 바라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행복은 늘 짧고, 곁에 있는 건 사라지는구나.

...






"시윤 군."






부사장님의 부름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잠깐 보더니 따라오라고 손짓한다.





"같이 듣는 게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사장님이요?"

"... ..."





침묵만이 감돌았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걷고, 병실의 문을 열었다.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카린 양과 사장님이 있었다.





"말씀 하신 대로 데려왔습니다."

"바로 결론부터 말하지. 이미 조금씩 내장 기관의 원소 붕괴가 진행이 되고 있네."

"..."

"이미 이 방법이 영구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걸 자네들도 들어서 기억은 하고 있겠지. CRF출력이 과소비 되는 것도 그 때문이라네. 자기 몸부터 지키려는 것이지."

"다른 방법은... 없나요."

"모든 게 아직 불확실해서 확신 할 수 없네. 지금 이렇게 빠르게 증상을 보이는 거도 예상 밖의 일이고."

"..."

"나도 마냥 손 놓고 있는 게 아니란 걸 그래도 기억해줬으면 좋겠군. 단지... 카린 양의 시간이 그때까지 버텨야 한다는 게 문제지만."

"후우..."






꽉 주먹을 쥔 손이 떨려왔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나와 달리 카린 양은 침착하게 말문을 열었다.






"버텨보겠습니다. 저 같은 일개 사원을 위해 힘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장님."

"그렇게 말해주니 내가 더 고맙군. 나는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네. 최대한 빨리 좋은 소식을 가져오도록 하지. 그리고 시윤 군도 옆에서 잘 챙겨주게나."

"...알겠습니다."






사장님이 먼저 요란한 기계음을 내며 병실의 밖으로 나가고, 부사장님과 카린 양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카린 양. 상태가 더 나빠지면 혼자 일상생활 하기도 힘들어질텐데... 정말로 계속 업무를 수행 할 건가요?"

"아직 괜찮습니다. 그리고 베풀어주시는 호의에 비하면 제가 하는 일은 한 없이 작습니다. 작은 일이라도 제가 힘이 닿는데까지 계속 하고 싶어요."

"그럼 일단 그렇게 알고는 있겠습니다만. 언제든 필요한 부분은 이야기하도록 하세요."

"감사합니다."

"시윤 군도 너무 침울해 하지 말고, 힘내면 좋겠군요."







그 말을 끝으로 부사장님까지 자리를 뜨고, 카린 양과 나만이 병실에 남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침대에 걸터 앉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나를 보고, 여전히 상냥한 미소를 짓는다. 어떻게 저렇게 잘 웃을 수가 있을까.







"카린 양. 아파요?"

"안 아파요! 적어도 당분간은..."







안으려고 손을 뻗는데 내가 보기에도 내 손 끝이 떨리는 게 보였다. 내가 채 안기도 전에 카린 양이 일어나 나를 안았다. 항상 따뜻하기만 했던, 밥 먹듯이 했던 포옹이 슬프게만 느껴졌다.






"이번에도 못 보던 표정을 짓고 계시네요."

"... ..."

"저 당장 죽는 것도 아닌데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준비되지 않은 이별을 겪으며 슬프고 힘든 건 무뎌졌다고 생각한 내가 어리석었다. 여전히 나에게 시간이 약이라는 법칙은 통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낙관적으로 살아갈 시간은 나에게 사치고, 지금 이 순간은 숨쉬기 힘들 정도로 마음이 아렸다.






"미안해요. 시윤 씨."

"왜... 미안해요?"

"이렇게 슬퍼하는 게 저 때문이니까요."

"그냥... 이렇게 있어주면 되잖아요. 계속 이렇게요."

"..."







나도 모르게 떼를 쓰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어제도 그렇고 자꾸 말이 꼬여간다. 다른 사람이 봤다면 엄청 비웃었겠지. 


이미 어느 정도 예견한 이별임에도, 아니 당장 그 이별이 눈 앞에 닥친 게 아닌데도 온갖 감정들이 솟구쳤다.

사람은 누구나 어리석고, 욕심을 부리는 실수를 한다. 그리고 그 대가는 너무 쓰고 고통스럽다.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에 무너져가는 어리석은 나.





"시윤 씨."





내가 살아온 시간에 가득한 해프닝과 짧은 이야기의 끝.

이번에는 제발 다르길 바라고 바랬는데, 결국 또 헤픈 엔딩을 맞이하게 되는 걸까. 다들 뭐가 그리 급해서 빠르게 나를 떠날까.






"시윤!"

"아..!"

"아파요..!"





처음으로 격식을 차리지 않고 부르는 내 이름에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아프다고 울상을 짓는 모습에 다급히 안았던 팔을 풀어버렸다.







"그리고 저 아직 안 죽었다니까요!"

"카린 양..."

"시윤 씨. 저도 슬퍼요. 괴롭기도 하고요."

"... ..."

"그치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고 싶지도 않아요."

"카린 양... 저는-"

"살아남아서 누리는 행복들도 마다하지 말라고, 죽지 말라고 했으니까. 마지막까지 버티고 버텨서 방법을 찾을 거에요."






그녀가 다시금 나를 안는다. 이제서야 눈에 눈물이 고이고 떨어지는 게 보였다. 내 머리에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진다. 슬픈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늘 그랬듯이 우리 최선을 다 하는 거에요.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저 열심히 버텨볼테니까... 슬퍼하지 마요."

"..."

"어제도 오늘도 정말 어린애 같아요. 평소에는 능구렁이 같았는데."

"...아, 너무해요."

"히히- 시윤 씨도 울어요?"

"저 안 울었어요."

"정말요?"

"카린 양이야 말로 눈물 때문에 제 옷이 축축한데요?"

"아! 죄송해요!"

"괜찮아요. 그냥 여기다 닦아요."








미안하다며 떨어지려는 걸 두 팔로 안아서 막았다. 제일 힘든 건 자기자신일텐데 나까지 위로하는 게 ... 역시 나보다 조금 더 어른인 걸까.

이번에는 헤픈엔딩이 아닌 해피엔딩으로 만들 수 있을까?






"어? 초여름인데 눈이 내려요."

"네?"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정말로 뒤를 돌아 창문을 보니 여름인데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맘때쯤이면 꽤 더워야 하는데 별로 그렇지 않더라니.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 진눈깨비가 꽤 많이 내리고 있었다.






"시윤 씨가 만들어 준 쭈글쭈글한 눈사람이 생각나네요~"

"쭈글쭈글이라니... 그 땐 나름 열심히 만들었는걸요."

"헤헤- 그럼 오늘은 동글동글한 눈사람 만들어보는 건 어때요?"

"그건 안되겠어요. 함박눈이 아니라서 쌓이진 않을 것 같아요."

"아... 아쉬워라..."

"... 겨울에 함박눈 내리면 같이 만들어요."

"...네!"






겨울이 올 때까지 만이라도 있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눈사람 만들기를 약속했다. 뒤에서 나를 확 끌어 안는 게 느껴졌다. 





"꼭 같이 만들어요."

"하하- 그때까지 멋대로 사라지시면 정말 곤란해요."

"저 안 죽는다니까요! 그보다 시윤 씨 우산 있어요?"

"음... 그냥 맞으면서 갈까요?"

"저 있어요! 맞지 말고, 같이 쓰고 가요!"

"역시 카린 양이에요."






슬픔을 뒤로 하고, 우리는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같이 퇴근 준비를 했다.

















-



그 뒤로 카린 양은 조금씩 상태가 나빠지는 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아랫배가 아프다더니, 어느 날부터는 발도 아프다며 매일 신던 구두 대신 단화로 바꾸었다. 그 다음엔 다리가 붓는다고 했다가 근육통에 시달리더니 이젠... 걷는 것 조차 힘들어한다. 시간이 지날 수록 하반신부터 잔인하게... 망가져 가는 듯 했다.



결국 다리가 거의 망가져 카린 양은 집에서 혼자 생활하기도 힘들어하는 지경까지 오고 말았다. 처음 봤던 그때처럼 다시 휠체어를 타게 됐다. 오늘은 그 문제 때문에 원래 살던 곳에서 나오고... 우리 집에서 생활하기 위해 이사를 하는 중이다. 이젠 아예 옆에 붙어서 봐줘야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계속 회사 의무실에 눌러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여전히 관리부 일을 하기를 원했으니...





"시윤 씨- 미안해요."

"어차피 짐도 얼마 없네요. 미안해하지마요. 그 상태론 물건 못 옮기잖아요."

"그래도요. 혼자 고생 다하고 있잖아요."





하루 종일 미안하다는 말만 듣는 것 같다.

마지막 짐을 옮기고 나서 나는 현관문을 닫았다. 짐이라고 해봤자 작은 박스 몇 개가 전부였다.





"사과하지 마세요. 반 정도는 그냥 제 욕심이니까요."

"... ..."

"그러고 보니 저희 집 와보고 싶으셨다고 했던 거 기억나요?"

"네. 얼떨결에 집들이가 아닌 눌러 앉게 됐지만..."

"눌러 앉다니요. 같이 사는 거죠. 이제 우리집이라고 부르셔야겠네요. 하하-"






울상 짓는 그녀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고, 가져온 짐을 풀어서 정리했다. 돕고 싶은 지 휠체어 바퀴를 굴려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앞으로 넘어지면 위험해요~"

"조심할테니 조금만 도울 수 있게 해줘요. 그리고 아파서 안 걷는 거에요! 못 걷는 게 아니고!"

"네~네~ 쉬고계세요~"






허리를 굽혀서 기어이 상자에서 짐을 꺼내는 걸 돕는다. 나오는 건 보통 입던 옷들이 대부분 이었다. 의외의 물건이 손에 집혀서 나오자 카린 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음, 연애소설 책이네요?"

"아! 그, 그거 이리 주세요!!"

"하하하하- 언제 이런 건 사 놓고 보신 거에요~"

"아...! 빨리 줘요!"

"에이~"





기어이 내 손에 있던 소설 책을 뺏어서 다른 곳으로 가져다 놓을려는지 열심히 휠체어 바퀴를 굴린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바퀴를 굴리는 게 귀엽다.





"어디다 숨기게요~"

"몰라요!"

"정말이지. 안 놀릴테니까 이리 주세요. 책꽂이에 꽂아드릴게요."

"..."

"카린 양?"





가만히 무언갈 보고 있길래 다가갔더니 아주 어릴 때 찍어둔 가족사진을 보고 있었다. 어릴 적에 찍은 얼마 남지 않은 사진을 액자에 넣어둔 것이었다.





"이때의 시윤 씨는 귀여웠네요-"

"그럼 지금은 어때요?"

"능구렁이? 아앗!"

"책 저기 낮은데다 꽂아 놓을테니까 보고 싶을 때 보세요~"





내가 책을 뺏어가는 바람에 잠깐 당황하더니 다시 시선을 액자로 돌렸다. 구경하게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마저 짐을 정리하러 갔다. 정말 필요한 거만 가져오니 정리도 금방이었다. 상자 제일 마지막에는 제일 작은 상자 몇 개가 또 있었다. 그 중 하나를 열어보니 예전에 보았던 그 이터니움 분말이었다.





"카린 양."

"네?"

"이건 어디에 뒀으면 좋겠어요?"





상자 뚜껑을 다시 닫고, 손으로 들어서 보여주니 나에게 손을 뻗는다. 건네주니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내 가족사진 옆에 두어도 되냐고 물어왔다.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조심스럽게 옆에 두고, 휠체어를 살짝 뒤로 빼더니 거수경례를 한다. 카린 양 다운 행동이라 생각하고, 다른 상자를 열었더니 웬 초콜릿이 눈에 보였다.





"이건 뭐에요? 초콜릿?"

"아, 그거. 사장님이 약이래요."

"이게요? 약? 카페 스트레가...? 하나 밖에 안 먹었네요 아직?"

"처음 다리가 너무 아플 때 한번 먹었어요. 많이 아플 때 드시라고 해서요."





휠체어 바퀴를 굴려서 나에게로 다가온다. 근데 아무리 봐도 약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스트레가...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저도 처음엔 긴가민가 했는데 효과가 있긴 있더라고요."

"하긴, 침식체로 초콜릿도 만드는 세상에 초콜릿이 약이 될 수도 있겠죠."

"하하하- 그게 뭐에요~ 거짓말~"

"진짠데요? 전 거짓말 안 해요."





초콜릿에 대한 진실과 거짓은 중요하지 않았다. 해맑게 웃는 게 더 중요하지.

빈 상자를 접어서 정리하는데, 오늘은 힘들었으니 저녁은 그냥 사먹자는 카린 양의 의견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초여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쌀쌀해서 무릎 담요를 덮어주었다.





"이쪽 세계 여름은 원래 이런가요?"

"아마 여러번 겹친 침식재난이 겹쳐서 이상기후가 생긴 것 같네요. 이러다가도 하루아침에 폭염이 오기도 해요."

"하긴... 생각해보니 제가 살던 세상도 시간이 흐를수록 춥고 눈이 많이 내리더라고요. 심지어 하얀 눈도 아니라서 엄청 짜증났죠."

"하하하.. 그래도 처음 봤을 땐 좋아했던 것 같은데요?"

"그건 하얀 눈이라서요- 그리고 이젠 눈이 좋아요."

"제대로 된 함박눈을 다시 볼려면 겨울까지 또 힘내야죠~"

"네!"







겨울까지 과연 있을 수 있을까 걱정이 들었다. 그래도 저렇게 제일 힘들 사람이 웃고 있는데, 내가 늘어질 시간은 없었다.

... ...















*








[...]


[Recordings : 너희가 우리의 정체를 어떻게 알았는진 모르겠어. 그거 때문에라도 우리는 그 쪽을 섣불리 신뢰 할 수도 없고 말이야.]


[Recordings : 우리도 우리 알아서 처신하기 바빠. 게다가 우리 정체 대외적으로 알려지면 진짜 곤란하거든? 외부로 발설하면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Recordings : 미안하지만 거절할게.]





여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녹음기를 들고 있다. 남자는 팔짱을 낀 채로 음성을 듣고 있다.






"그 이후로 연락을 받지 않습니다. 상당히 경계심이 높더군요."

"음... 더 이상의 여지도 없는 것 같나?"

"아무리 높은 액수를 제시해도 믿지 않아요. 그 뒤로 연락도 계속 거절 당하니 여기선 방법이 없습니다."

"대상의 위치는?"

"알아냈습니다. 하지만..."

"그럼 내가 직접 가도록 하지."

"... ..."





남자가 받은 위치 정보를 화면에 띄운다. 그라운드 원의 시가지가 확대 된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군. 조용히 접촉해야하니 다른 사람들은 물론, 특히 펜릴 소대장에겐 완전한 비밀로 하게."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