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선선해지기 시작한 초가을. 바람에 흩날리는 은빛 머리칼을 대충 쓸어넘기며 힐데는 습관처럼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찾았다.

하지만 힐데의 손에 집히는 것은 막대사탕 뿐.


담배는 몸에 해롭다며 히죽거리던 얄미운 제자 주시윤의 권유로

흡연 욕구가 생길때마다 사탕을 빨기로 했지만, 사흘이 지난 지금도 

담배갑 대신 사탕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뭐 상관 없나.

힐데는 픽 하고 웃은 뒤 사탕의 껍질을 벗겨 입에 넣었다. 

인공적인 딸기맛의 달콤함이 입 안을 가득 메웠다. 막대를 쥐는 

그립은 여전히 흡연자의 그것이었지만, 그렇게라도 기분을 내지 않으면 

영 흡연 욕구가 해소되지를 않았기에 그것만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감히 스승의 건강까지 참견을 하다니 망할 제자놈.

빈말로라도 잘해줬다 말할 수 없는, 모질게만 대했던 아이.

죽을 위기를 헤쳐나와서 가장 먼저 한다는 말이 감사합니다. 였던

녀석의 말을 무슨 낯으로 거절할 수 있을까.

힐데는 고난과 역경을 잘 이겨내준 제자의 모든 걸 깨달은 듯한

미소를 떠올리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스승님이 그런 표정도 지으실 줄 알았다니, 놀라운데요?"


여유로운 목소리 속 한껏 비아냥대는 어투. 힐데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녀의 시선끝엔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은 채 스승을 

바라보는 나유빈이 있었다. 


"무슨 일이냐, 나유빈. 피차 반갑지 않은 사이일텐데 모른 척하고

지나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은데."

"서운한데요. 저는 스승님을 만날 목적으로 여기 왔습니다. 미소는

기대도 안했지만, 설마 인사도 안해주실줄은 몰랐지만요."


나유빈이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왔고, 힐데는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등 뒤의 칼을 언제 뽑아야 할 지 계산했다.


"네가 내게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인사는 네 목숨이 끊어질 때의 

작별인사 뿐이라는 걸 알아두도록."

"하하하. 그래요. 그런 편이 스승님 답죠."


말을 마친 나유빈은 순식간에 힐데가 경계하던 간격을 무시하고

코앞까지 다가왔고, 힐데는 깜짝놀라 미처 칼을 뽑아들 생각도 

못하고 말았다. 공동전선을 필 때도 느꼈지만, 대체 이녀석 언제

이렇게 강해진거지?


"제자의 목숨을 걱정한다거나, 성장을 떠올리며 미소짓는 건

스승님과는 안 어울려요."


나유빈은 언제부터인가 늘 얼굴에 달고 살았던 웃음기대신 그늘을

드리우고 읊조렸다. 그의 시선은 눈 앞의 힐데를 향하고 있다기보다는 

그 너머의 것을 보고있는 듯 공허했다. 어째서일까, 힐데는

그런 나유빈의 눈을 보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다행히도 나유빈은 스승을 공격하기 위해 그녀의 간격을 침범한 것은 

아닌듯 했다. 만약 공격의 의도가 있었다면 벌써 몇번은 바닥을

뒹굴었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저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데

그친 것이 그것을 증명했다. 

힐데는 그녀의 옛 제자에게 사정거리를 허용한 것은 방심탓이라며 정신을 가다듬고는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며 등 뒤의 칼을 뽑아 들었다. 


순간, 나유빈의 공허한 눈동자에서 슬픈 기색이 어렸지만 힐데는

그것을 느낄 수 없었다. 그만큼 한솥밥을 먹던 구관리국 시절부터

껄끄러웠던 제자와의 적대는 산전수전 다겪은 힐데에게도 여유부릴 

만한 환경이 아니었다. 


"저는 대체, 뭐가 달랐던 거죠..?"


의미를 알 수 없는 물음을 뇌까리며 나유빈이 등 뒤에 붉은 빛의 

날개를 전개하며 전투태세를 취했다. 


"공무원이란건 좋더군요. 공무집행을 빌미로, 이 일대에 일반인 

통행을 금지시켰습니다, 스승님."


힐데는 그 때, 자신의 간격에 그를 들인 것이 자신의 방심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 찰나의

순간 나유빈이 그녀의 코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 아무런 방해 없이 스승님과 회포를 풀 수 있다는 말입니다."


힐데는 나유빈이 내지른 주먹을 가까스로 칼로 쳐냈다. 

이를 악물고 막아낸 것이었건만, 칼을 쥔 손이 저릴 정도의 파괴력이었다. 

힐데는 본능적으로 자신과 나유빈과의 격차를 실감했다. 하다못해

드래곤 버스터라도 있었더라면...!


잠시 딴생각을 한 댓가는 처참했다. 그렇잖아도 온 신경을 집중해서 

방어하기만도 벅찼던 터라 신경이 느슨해진틈에 나유빈의 공격이 힐데의 

배에 직격했고, 그녀의 작은 체구가 붕 뜨더니 땅바닥에여러번 굴러 

흙먼지를 뒤집어썼다. 


"커..헉...!"


고통스럽다, 호흡이 흐트러지고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녀는 한 쪽 무릎을 꿇고 천천히 다가오는 나유빈을 올려다보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었다.


"스승님, 정말 약해지셨군요.."


나유빈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여전히 고통에 찬 숨을 내쉬고 있는 

스승에게 말했다. 


"입.. 닥쳐..!"


나유빈은 다시금 세상을 잃은 듯한 슬픈 표정을 짓더니, 눈을 

감았고 힐데는 어쩌면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

그의 방심에 마지막 힘을 모아 손에 쥔 칼을 휘둘러 나유빈의 목을 노렸다. 


"..어째서.. 스승님.."


나유빈은 팔을 들어 올려 힐데의 칼을 막아냈고 그녀의 혼신의 일격은 살짝 생채기를 내는 데 그쳤다. 


"주시윤 군의 목숨은 소중하고, 저는 죽이고 싶은 대상입니까..?"

"닥쳐라, 나유빈."


나유빈은 방금 전보다 더욱 힘이 실린 공격을 가했고 힐데는 속수무책으로 얻어 맞아 날아갔다.


힐데의 흐릿해지는 시야에 하늘이 보이는가 싶더니, 곧 나유빈의 

얼굴이 그녀의 하늘을 다 가렸다.


"그.. 면상 치워주지 않겠냐..? 아침에 먹은 게 올라올 지경이군.."

"그 시절, 스승님은 여신같았습니다."


나유빈은 힐데의 비아냥은 아랑곳않고 자기 할말을 시작했다.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고 거리를 둔 채, 전장마다 앞장서서 등만을

보여준 채 활로를 뚫고 적을 해치우는 고고한 여신. 펜릴전대는

그러한 등만을 보며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언젠간 등을 맞대고

서로를 지키며 싸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설마 마지막까지 등만을

보여주실 줄은 몰랐죠. 저희를 버리고 도망치는 등을.."

"사내 녀석이 언제까지 묵은 원한을 갖고 사는 거냐."


힐데도 자신의 탈주는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 세계가 

멸망할 줄 알았으니까, 관리자의 갑작스런 변심탓에 이 세계가

유지된 것을 그녀가 어찌 알았겠는가?


"주시윤 군 구출작전때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그 일로 스승님을

원망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진심으로요. 스승님은 늘 저 너머를

바라보고 계셨죠. 저희의 스승이라는 자리로 만족하지 않고서, 대의를 

위해서 움직이는 분이란 것 쯤 스승바라기 수연이보다 제가 훨씬 잘 알고 있었을겁니다."


나유빈은 다시 칼을 찾는 힐데의 손을 지그시 짓밟았다.


"스승님. 당신은 늘 대의를 위해서 작은 희생쯤 서슴치 않으시는 분이었습니다. 저희를 버린 것도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주시윤 군 구출때는 스승님 답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변해버리신 겁니까..?"


힐데는 그제서야 나유빈이 어째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니라

그 너머를 응시하는 것 같은 시선을 보냈는지 알아차렸다. 그는

힐데가 아니라 자신이 우상화한 힐데를 바라보고 있던 것이었다.

그녀는 쓴 웃음을 지었다. 


"우습군. 가장 감정이 없다고 여겼던 네가, 가장 감정적이었구나."

"무슨 의미죠..?"

"요약해서 말하자면, 주시윤은 내게 '작은 희생쯤'이 아니라는거다. 

네가 만들어낸 이미지의 나에게 떼쓰지마라, 나유빈."


힐데의 손을 짓밟은 구두에 힘이 더해졌다. 바라던 대로 나유빈의

심기를 잘 건드린 모양이었다. 힐데는 이를 악물었다.


"그 시절 스승님은 강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죠? 이렇게

제자에게 져서 땅바닥을 기고 있지 않습니까?"

"청출어람은 스승의 기쁨이다, 물론 대상이 '옛 제자'인 네가 아니라 

주시윤이었다면 얼마나 기뻤을까 싶다만."

"말 끝마다 주시윤, 주시윤! 제가 대체 그 보다 못한게 뭡니까!"


힐데는 처음으로 감정을 폭발시킨 나유빈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 녀석도 그저 애정을 갈구하는 제자였을 뿐이었구나. 과거의

자신은 결코 신경쓰지 않았던 부분, 대체 어디서부터 틀어졌던 걸까. 

하지만 이미 너무 오래, 너무 멀리 엇나가버렸다. 그들의 관계는.


"저는.. 스승님이 약해지신 것이 주시윤 군에게 품은 뒤틀린 모성애와 같잖은 가족놀이 때문이라고 결론내렸습니다. 스승님도 아들을

낳아 키우고 싶을 나이는 이미 지나셨을테니까요."


나유빈은 힐데의 검은 스타킹을 찢어냈다. 


"뭐, 뭐하는 짓이지?"

"스승님에게 죄책감으로 낳은 가짜아들대신, 진짜 배아파서 낳은 진짜 

아들을 안겨드리려 합니다. 그 아들은 제가 못받은 사랑까지 받아줬으면 

좋겠네요."

"이, 이 미친새끼!"

"부디 임신중에는 욕설은 자제하고 태교에 힘써주시길 바랍니다. 스승님."


나유빈은 어처구니가 없어 굳어버린 힐데의 치마를 걷어올리고,

자신의 벨트 버클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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