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따뜻한 공기, 환한 빛과 다르게 음산하게 울리는 삐그덕 소리를 내며 계단을 타고 올라간 끝에 있는 것은 잠금장치가 여럿 걸려있는 철제 문이었다.

단순한 자물쇠부터 번호를 입력해야 하는 장치, 지문인식기와 홀로그램 인식기로 보이는 것 까지.

왜 그렇게 철저하게 해둔 것인지는 몰라도 궁금해하지 않기로 한 카카는 얌전히 서서 여성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을 밟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들은 카카는 몸을 약간 긴장시키며 아래를 바라보았다.

"......?"

하지만 카카는 자신이 계단을 오를 때와는 무언가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당장 눈치채지는 못 했지만 카카는 나중이 되어서야 자신이 올라올 때와 다르게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에 그걸 몰랐던 카카는 마음 속으로 의아해하며 여성을 바라보았다.

"......"

얼굴에서 묻어나오는 온기.

미세하게 올라가있는 입꼬리.

반나절의 반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동안 그녀에게서 느껴본 것이라고는 차가움 밖에 없었던 카카에게 그 온기와 미소는 낯선 것이었다.

'가족들이랑 있다가 와서 그런 걸까.'

그다지 긴 시간도 아니었는데도.

지금 자신을, 이방인을 만나러 온다는 걸 아는데도 그것들을 미처 털어내지 못 하고 왔다는 것이 카카에게는 신기하게 느껴졌다.

'나도, 카쿠스랑 있을 때 저런 느낌일까.'

알 수 없었다.

그걸 질문에 대답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지금 없었으니까.

"나와."

"......"

짧지만 빨려가는듯한 감상에 빠져있던 카카는 여성의 말에 옆으로 한 발자국 비켜났다.

계단을 마저 올라오며 온기와 미소를 완전히 지워버린 여성은 다시 날카롭고 차가운 상태가 되어 잠금장치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카카가 보아도 아무 상관도 없다는듯 그녀가 보는 앞에서 장치들을 모두 해제한 여성은 말은 하지 않고 들어오라며 고개를 까딱였다.

먼저 들어가는 여성을 뒤따라들어간 카카는 방 안이 1층과 다르게 조명이 옅다는 것을 금세 눈치챘다.

그리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지만 여기부터는 다른 공간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은 조명을 눈으로 확인하며 안으로 들어가자 꽤 큰 방이 하나 나왔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곳이 익숙한듯 안으로 들어간 여성은 작은 목재의자를 하나 꺼내 방 한 켠에 놓아주었다.

썩 편해 보이지는 않는 그 의자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붙인 카카는 방을 슥 둘러보았다.

각자 크기가 다른 각양각색의 모니터들.

방 안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전선들.

방의 다른 한 켠에 쭉 늘어져있는 컴퓨터들.

무얼 하는 곳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영상들의 빛에 작게 눈을 찌푸린 카카는 시선을 돌려 여성을 바라보았다.

"지금부터는 내가 이것저것 물어봐야 해서. 협박이 들어갈 수도 있는데 가족들 앞에서 할 순 없으니까 여기로 부른 거야."

"......"

"홀로그램 넘겨줄테니까 거기에 대답하면 돼. 그리고 말이 아니라 문자로 전한다고 거짓말인 거 못 구분하는 건 아니니까 알아두고."

경고를 전한 여성은 커다란 가죽재질의 의자에 앉더니 카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모를 빨간 눈과 가만히 마주보고 있자 마음속까지 읽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카카는 저도 모르게 그 시선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그랬다가는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아니었다면 실제로 그래버렸을 것 같았던 카카는 숨을 작게 내쉬며 대답할 준비를 했다.

그걸 기다렸던 것인지 곧바로 입을 연 여성은 다리를 꼬고 무릎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리며 말했다.

"기억이란 게 생겼을 때부터, 지금까지. 모두 다 얘기해."

"......"

"길어도 상관없어. 필요하면 휴식도 시켜줄거야."

카카는 방금 여성이 지시한 행동에 의문을 느꼈다.

왜 자신의 얘기 모두가 궁금한 것일까.

여성의 목적은 무엇일까.

거짓말은 정말 안 먹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지금 당장 알 방법이 업었던 카카는 여성이 앉아있는 의자 뒤의 테이블을 쳐다보았다.

"준비가 됐나보네. 자, 그럼 들어볼까?"

=*=

카카에게 동생이 생긴 것은 그녀가 고작 4살일 때였다.

꽤 넉넉한 집안과 그를 증명해주듯 큰 집.

큰 공간만큼이나 차가운 분위기와 어린아이가 느끼기에도 가깝지 않은 부모간 사이.

그런 집에서 자라난 카카는 3살이 되자마자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 혼자서 잠을 자야했다.

자신은 기억하지 못 하지만 당시의 카카는 말 그대로 숨이 넘어갈 정도로 울어 잠에도 제대로 들지 못 했었다.

하지만 부모 중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4살이 된 지금의 카카 역시 자신이 혼자 자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부모의 따스한 손길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나이었지만 카카는 제대로된 사랑을 받지도 못 한 채 매일을 살아갔다.

먹을 것과 입을 것, 잘 곳.

최소한의 것만 챙겨주는 형편없는 부모였지만 카카는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다.

이런 상황이 불만을 가져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도 몰랐으니까.

그렇게 빛이라고는 없이 어둠만이 가득한 나날들.

그런 나날들에 처음 빛이 새어들어온 날을 카카는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 했다.

4살 이 된 해의 어느 날이라는 것만 기억할 뿐.

"나 나갔다 올테니까 당신은 애 보고 있어요."

"후우... 그래. 나도 오늘 저녁에 약속 있으니까 다른 데로 세지 말고 곧바로 와."

"뭐라고요? 하 참... 내가 지금 놀러나가요?"

"그러는 나는, 놀러나가는 줄 알아?"

"당신이야 그 한심한 사람들이랑 같이 술 진창 마시고 놀 생각밖에 없으니까요. 하, 됐어요. 이제 와서 당신이 간다고 할 리도 없으니까. 내가 늦게 오든 빨리 오든 집에서 손가락이나 빨고있어요."

"뭐라고? 저 여편네가...!"

남자는 화가 났는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그 화를 행동으로 표현하지는 못 했다.

그걸 너무 잘 알고있다는듯 콧방귀를 낀 여자는 문을 쾅 닫고선 집을 나섰다.

거실에 있는 4살짜리 카카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하여튼 이 놈의 집구석, 내가 나가버리든지 해야지. 어휴!"

화가 식지를 않는지 문을 뻥 차버린 남자는 부엌으로 가더니 냉장고의 문을 열어 맥주캔을 꺼냈다.

치이익! 꿀꺽꿀꺽...!

경쾌한 소리가 들려오고 맥주를 마시는 소리가 들려오자 카카는 소파에 앉은 채 작게 몸을 움츠렸다.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지만 저 캔에 담긴 것을 먹고 나면 아빠가 흉포해진다는 것을 아는 카카는 소파에서 슬쩍 일어나 방으로 걸어갔다.

카카에게 관심이라고는 추호도 없는 남자였지만 카카가 움직이는 것은 곧바로 본 그는 식탁을 맥주캔으로 세게 내리쳤다.

어린아이에게 너무나 큰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카카는 겁에 질려 깜빡이는 눈으로 아빠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화났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 내려치고선 따로 할 말은 없었는지 콧김을 씩 내뱉은 그는 캔을 들고선 소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럴 때는 어서 눈 앞에서 사라지는 게 상책이라는 걸 아는 카카는 짧은 다리를 움직여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문이 살짝 열려있어 영차 하며 안으로 들어간 카카는 목재 바닥 위에 놓인 작은 매트리스에 천천히 몸을 뉘였다.

그 옆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져있는 작은 이불을 덮자 금세 잠이 몰려온 카카는 큰 눈을 깜빡여댔다.

깜빡, 깜빡, 깜빠아악...

오래 걸리지 않아 온 몸을 덮는 졸음에 눈이 감긴 카카는 새근새근 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었다.

거실에서 시끄러운 티비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정도 소음에는 이미 익숙했던 카카는 조금도 방해를 받지 않고 잠을 잘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달콤한 잠은 그다지 오래 가지 못 했다.

잠이 든 지 두 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바깥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카카는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자고 일어나 몽롱한 데다가 억지로 깨워져 머리가 살짝 아파왔던 카카는 금세 눈물이 고여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래봤자 이 집에서 좋아하는 사람도, 달래줄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아는 카카는 작은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매트리스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일까...'

쾅! 콰아아앙!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들려오는 무서운 소리에 카카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제서야 자신이 아침부터 점심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 했다는 것이 떠오른 카카는 배가 꼬르륵 거리는 걸 느끼며 배를 쥐었다.

"배, 고파..."

배가 아플 정도로 고픈 것이 느껴진 카카는 문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배가 고프다고 하면 짜증은 내겠지만 부모의 어느 쪽도 카카를 굶기지는 않았다.

딱딱한 빵과 잼, 우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던 카카는 더 이상 배고픔을 견딜 수 없어 문을 나가려 했다.

그러자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와 무서워졌지만 몸을 떨면서도 카카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꿀꺽..."

그렇게 문 밖으로 나간 카카의 눈에 보인 것은 벽을 마구 치고있는 아빠의 모습이었다.

주먹이 다치는 건 겁이 나는지 어디선가 꺼낸 솜을 잔뜩 붙인 채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모습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그저 우스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천둥이 치는 밤 홀로 방에 있는 것보다 그 모습이 더 무서웠던 카카는 숨도 쉬지 못 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꽈당!

"아얏...!"

뒷걸음질을 치며 다리의 힘이 풀린 것일까.

카카는 자신의 방 안에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다지 크게 나진 않았지만 그 소리를 들은건지 남자는 카카의 방문으로 세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 밖이 보이진 않았지만 쾅쾅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만으로 아빠의 행동을 예상할 수 있었던 카카는 떨리는 다리로 매트리스를 향해 걸어갔다.

"으, 읏..."

나무바닥에 부딪힌 엉덩이가 욱신거렸지만 서둘러서 작은 걸음을 옮긴 카카는 급하게 매트리스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콩닥콩닥...

당장이라도 아빠가 거친 모습으로 방에 들어오지는 않을까 싶었던 카카는 긴장되는 눈길로 문을 바라보았다.

콩닥, 콩닥...

자신의 귀에까지 전해지는 심장소리에 카카는 이러다가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했다.

그런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자 쾅쾅거리는 소리가 멀리에서 들려왔고, 카카는 작은 이불 밑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배는 고파왔지만 아빠의 무서운 모습을 가까이서 보는 것보다 배고픈 게 낫다고 생각한 카카는 티비소리와 비교도 안 되는 소음 속에서 애써 잠을 청했다.

그리고 그 날 여자가 돌아온 것은 저녁 8시가 한참 넘은 시간이었다.

"야! 너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가기는 어딜 갔다고 그래요?! 애 입양절차 밟는다고 하루종일 답답한 건물에 쳐박혀있다 왔는데!"

"뭐? 그럼 지금 내가 맡고있는 술냄새는 뭐야? 요즘은 공공기관에서 술도 마시라고 주나보지?"

"뭐, 뭐라고요? 고생했다고 칭찬 한마디 해주기는 커녕. 오자마자 하는 말이 그거예요?!"

"읏..."

엄마가 돌아오기 얼마 전부터 배고픔 때문에 눈을 뜨고 있었던 카카는 문틈 사이로 현관에서 싸우고 있는 둘을 바라보았다.

보고 싶지 않은 광경임에도 지나친 허기 때문에 자리를 떠나기가 쉽지 않았지만 점점 더 심해져가는 둘의 싸움에 카카는 다시 매트리스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 때.

엄마의 손을 잡고 있는 손 하나를 본 카카는 두 눈을 크게 깜빡였다.

자신의 것만큼이나 작은 손.

하지만 자신의 피부와는 전혀 다르게 까만 피부.

그 손에서 이어진 팔이 현관 밖에 있는 것을 본 카카는 호기심에 눈을 빛냈다.

"누구... 지?"

오늘 손님이 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던 카카는 그 작은 손의 주인이 누구일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둘의 싸움이 잠시 중단되고 여자가 집 안으로 들어오자 그 손의 주인도 곧 모습을 드러냈다.

"아..."

자신보다 조금 작은 키.

어깨까지 오는 짙은 보라색 머리.

검은 피부와 다르게 빨갛게 빛나는 두 눈.










좋은밤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