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만 해도 절로 즐거워지는 캐롤이 들려오는 동네의 사거리.

따분한 얼굴을 한 카카는 김이 서린 안경을 닦으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크리스마스가 무슨 대단한 날이라고 호들갑들을 떠는지. 저러다가 악마랑 계약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 하겠지."

딱히 자신이 악마가 아니더라도 거리의 인간들에게서 뿜어져나오는 욕망을 느낄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 그녀는 콧김을 작게 내뱉으며 걸음을 옮겼다.

단순히 산책이나 구경을 하러 나온 게 아닌, 어딘가 목적지가 있는 그 발걸음은 내딛어질 때마다 거리에 쌓인 하얀 눈에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그 작은 발자국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까지 걸은 카카가 도착한 곳은 밝은 조명과 화려한 장식들이 인상적인 작은 가게 앞이었다.

아까 전 자신이 냉소적으로 뱉은 말도 기억하지 못 하는지 안에 잔뜩 진열돼있는 선물들을 본 카카는 작게 입꼬리를 올렸다.

"카쿠스한테 주면 좋아할 것들이 많이 보이네. ...설마 얼마 전에 가져다준 밥그릇보다 반응이 안 좋지는 않겠지."

강아지와 고양이들을 너무나 아끼는 모습에 어이가 없어 얼마 전에 밥그릇을 사주었던 걸 떠올린 카카는 인상을 작게 썼다.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라는 의미에서 준 것이었는데 그런 건 전혀 느끼지 못 하고 해맑게 좋아하는 모습을 떠올리자 언짢으면서도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 카카는 어깨를 으쓱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뭐, 그 애도 안목이라는 게 있으니까. 좋은 걸 사다주면 최소한 반응은 해주겠지."

"어서 오... 어?"

"넌... 한심한 그 녀석?"

"윽. 보자마자 하는 말이 그거냐?"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봐둔 가장 마음에 들었던 가게.

그 안으로 들어간 카카는 의외의 상대에 약간 놀란 눈을 했다.

놀란 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는지, 눈을 크게 뜨며 먼지털이를 찬장 위에 올려둔 그 상대는 나름대로 반가운 척을 하며 말을 걸어왔다.

"여기는 무슨 일이야?"

"선물가게에 오는데 무슨 일이겠어? 선물 사러 온 거지."

"하, 하긴. 그건 그렇지. 선물이라면... 카쿠스한테?"

끄덕.

말을 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카카는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러던 도중 고개를 우뚝 멈춘 그녀는 묘하게 앞치마 차림이 잘 어울리는 상대, 악마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 때문에 카쿠스가 이상한 물이 들었잖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좀 알아듣게 말해봐."

"됐어. 그런데, 여기선 뭘 하고 있는거지?"

"내 말에 대답이라도 해주고 물어보든지... 보면 몰라? 아르바이트 하고있잖아. 애들이 말은 안 하는데 크리스마스라고 다들 기대하는 눈빛들이라서. 후우..."

"애들? 아, 차일드들. 그러고보면 너도 참 특이해."

어느 점에서 카카가 그렇게 말하는 건지 따로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던 악마는 헛기침을 큼큼 내뱉었다.

"어쨌든. 살 거 있으면 천천히 둘러봐."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그런데, 저기."

"...?"

방금까지 딱딱한 태도를 보이던 카카의 목소리가 갑자기 누그러진 것처럼 느껴진 악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눈치채고서도 말을 이을 수 밖에 없었던 카카는 괜스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질문을 던졌다.

"카쿠스가 좋아할만한 선물, 뭐 있을 것 같아?"

"걔?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자매인 너보다 내가 더 잘 알 것 같지는 않은데?"

"카쿠스는 내가 말하면 다 싫다고 하니까. 너도 봤잖아?"

"하긴. 그런 게 있긴 했지. 그런데 나한테 물어봐도 카쿠스가 좋아할만한 거라고 해도 잘 모르겠는데..."

까지 말한 악마는 팔짱을 낀 채 고민에 빠졌다.

자신은 모르겠으니 알아서 하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는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며 카카는 그의 입이 다시 열리기를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무언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악마는 고개를 번뜩 들었다.

그 모습에 기대감이 생긴 카카는 여태 눌러왔던 초조함을 더 참지 못하고 급하게 물었다.

"좋은 생각이라도 난 거야?"

"응. 카쿠스라면 분명히 좋아할 거야. 내가 장담할게."

"장담...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괜히 더 불안한데."

"으, 윽. 카, 카쿠스가 싫어하면 내가 책임질게! 그러면 됐지?"

"흠."

정말로 자신이 있는지 큰소리를 치는 걸 보며 카카는 짧은 고민에 빠졌다.

눈 앞에 있는 악마는 딱히 믿음직스럽지도 않았고 두터운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카쿠스가 이 악마를 꽤나 마음에 들어한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마음을 결정한 카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어서 골라줘봐."

"아. 여기서는 구하기 힘들어. 내가 장소랑 시간 알려줄테니까 그 시간에 거기로 가봐."

"뭐? 너 설마 나를 속이려는 건 아니겠지?"

"으, 윽... 내가 그럴 배짱이 있어 보여?"

"흠. 그건 또 그렇군."

납득하는 모습에 안심을 하면서도 복잡한 심경이었던 악마는 작은 쪽지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거기에 있는 걸 보고 작게 인상을 썼지만 별달리 말을 하지 않은 카카는 선물가게 안을 휙휙 둘러보더니 초콜렛 상자를 하나 집어 카운터에 올려두었다.

"계산."

"어? 어. 카쿠스가 초콜렛 좋아하나보네."

"좋아하지. 내가 옆에서 안 말리면 하루종일 먹고 있을 정도로."

카드로 순식간에 계산을 마친 카카는 지갑을 주머니에 다시 넣고선 그대로 등을 돌렸다.

"응? 야, 이거 갖고가야지!"

카운터에 초콜렛을 올려둔 채 가버리려 하는 그녀의 뒤에서 악마는 다급하게 카카를 불렀다.

그 목소리에 기꺼이 고개를 돌린 카카는 한 쪽 입꼬리만을 올려 피식 웃더니 턱으로 초콜렛을 가리켰다.

"그건 네 거야. 카쿠스한테는 더 건강한 간식을 줄 거거든."

"ㄴ, 내 거라고?"

"그래. 그럼 더 볼 일 없으니까 나간다."

목소리가 부드러워진 것도 한 순간.

다시 딱딱한 목소리로 돌아온 카카는 그대로 가게를 나가버렸다.

딸랑거리는 소리만이 작게 남은 가게 안.

생각지도 못 했던 선물을 받아버린 악마는 머리를 작게 긁으며 카카가 떠나간 자리를 스윽 바라보았다.

"...나중에 선물 괜히 줬다고 욕 먹는 건 아니겠지?"

=*=

"으아... 힘들어..."

크리스마스가 오기 이틀 전.

인간들과의 계약을 준비하라며 성화인 모나와 리자의 의견을 묵살해가면서까지 아르바이트를 나온 악마는 지친 모습을 한 채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차라리 계약을 하러 가는 게 덜 피곤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바빴던 아르바이트에 피로가 온 몸에 쌓인 그는 연신 한숨을 푹푹 쉬어대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에휴... 내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앞에서는 질색팔색했지만 자신을 졸라대는 차일드들 때문에 이번 크리스마스는 조금 특별하게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던 악마는 얼마 전부터 돈을 조금씩 모으기 시작했었다.

그것만으로는 파티를 준비하기에 모자라 구한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었던 악마는 갑자기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돈은 있다고 쳐도. 뭘 해야 애들이 좋아하지? ...모르겠다. 일단 집 가서 잠이나 자자."

아직, 이라는 표현을 써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크리스마스까지 이틀이 남아있는걸 떠올린 악마는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어두운 거리를 걸어갔다.

추운 바람 때문에 훌쩍거리는 소리가 절로 나와버리는 날씨.

이미 모두가 잠들어있을 집을 떠올린 악마는 괜히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이게 무슨 궁상이야."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이 웃기기도 하고 조금은 슬프기도 했던 악마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집으로 올라가는 언덕 앞 코너 가까이까지 온 악마는 멀리서 누군가가 가로등 아래 서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딘가 익숙한 것 같은 그 모습에 눈을 가늘 게 떠보았지만 그게 악마는 그게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그 때, 악마의 시선을 눈치챈 것일까.

그의 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악마에게 다가왔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곧 그게 자신이 아는 사람, 아니.

차일드라는 걸 알게 된 악마는 놀란듯 눈을 크게 뜨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자연을 떠오르게 하는 자수의 옷과 어깨에 닿을락말락하는 짧고 흰 머리.

추운 날씨인데도 가디건 하나만을 걸친 채 치맛바람으로 달려오는 그녀의 모습에 악마는 놀라면서도 반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판?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아, 악마. 잠이 안 와서 잠시 산책하고 있었어요. 악마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오는 길인가요?"

"응? 응. 그런데 이 시간에 웬 산책이야. 추운데 집에 있지."

"그, 그냥 나오고 싶었거든요. 안 그래도 이제 막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어요. 마침 이렇게 만났으니까... 같이 갈까요?"

"나야 좋지. 혹시 나 때문에 산책 할 거 다 못하고 가는 건 아니야?"

"아니예요, 악마. 추운데 어서 들어가요."

얇은 가디건을 여민 판은 조심스럽게 악마의 옆에 섰다.

마침 잘 만났다는 생각을 하며 판을 바라보고 있던 악마는 자신의 옆으로 살며시 다가오는 판의 귀가 새빨갛게 돼있는 것을 보고선 걱정스러운듯 입을 열었다.

"판. 귀가 다 빨개졌는데? 괜찮은 거야?"

"ㄴ, 네. 괜찮아요. 집에 가서 따뜻하게 있으면 그,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뭐가 괜찮다는 거야? 목소리까지 떨고 있는데. 자, 손 잡아. 얼른 가자."

자신도 귀까지 빨개진 데다가 연신 콧물을 흘리는 주제에 악마는 장갑을 낀 손으로 판의 손을 잡았다.

집의 불이 꺼지고나서부터 악마를 기다리던, 최대한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판은 자신을 이끄는 악마의 손에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따뜻해.'

하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달콤한 상황에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악마의 손을 꽉 마주잡고선 그와 함께 언덕을 올랐다. 








완성한다고는 안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