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린건 왜란 당시가 아니라 2백여년이 지난 18세기가 대다수.


또한,왜병 즉 일본측 병력도 갑옷을 하나도 안 입고있음.


무기도 보면 명나라나 조선에서만 쓰인 당파나 장창,중국식 창,몽골창,월도가 일본측 무장으로 사용돼기도 하고. 역사적으로 맞는게 있다면 저곳에 일본의 공격이 있었다 수준임.



갑옷 그리기가 귀찮았던건가 싶기도 하고 그냥 아예 알지를 못한건가 싶기도 함. 무를 천시해서 그쪽 관련해서 아예 지식이 없었을수도 있다고 생각함.


아니면 돈 못받고 억지로 불려가다 그림그리게 명령받아서 대충 그렸을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당시 임진왜란 양 측은 갑옷을 충실히 입었음.



(조선의) 병사들은 단단한 가죽 갑옷을 착용하였고, 유럽인의 모자와 같은 철모를 쓰고 있었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강철로 되어 있었고 그 밖에는 무쇠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터키인의 활과 같은 작은 활을 매우 잘 다루고, 독을 바른 화살을 사용한다고 한다.



19일(무신) 맑음. 품방(品防)에 해자 파고 쇠사슬 구멍 뚫는 일로 아침에 군관을 정 해 보내고, 나도 일찍 아침을 먹은 뒤에 동문 위로 나가 품방 역사를 직접 독려했 다. 오후에 상격대(上隔臺)를 순시했다. 이날 분부군(奔赴軍) 7 백 명이 역사에 점고를 맞았다.

6일(병인) 맑음. 아침 먹은 뒤에 나가 앉아 무기를 검열해 보니 활, 갑옷, 투구, 전 통, 환도 등도 깨어지고 헐어서 볼꼴 없이 된 것이 많았으므로 색리(色吏)와 궁장 (弓匠), 감고(監考) 등을 처벌했다.

이순신 <난중일기 임진년 2월~3월 6일>


🌕備邊司啓曰: "戰用之具, 莫切於甲冑, 而武庫所儲, 其數不敷, 西北邊上留置之數, 亦甚零星。 當此調兵守禦之日, 許多軍士, 不可赤身赴戰。 頃間各道兵、水營及各官, 有月課措備之令, 想已准數措備, 今依別定差使員, 及今月晦日內, 沒數上送, 以備軍前之用, 爲當。" 傳曰: "依啓。"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쟁의 용구는 갑주(甲胄)보다 절실한 것이 없는데 무고(武庫)에 저장된 것이 그 수가 많지 않고 서북 변방에 남겨 놓은 것도 심히 적습니다. 군사를 조련하고 지키고 방어하는 때를 당하여 허다한 군사가 맨몸으로 싸움에 나갈 수 없습니다. 지난번에 각도 병영·수영 및 각 고을에 월과(月課)로 조치하여 갖추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이미 수효대로 맞추어 조치하여 갖추었을 것이니, 지금 별정 차사원(別定差使員)을 보내서 이달 그믐 안에 전부를 올려와서 군용에 대비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실록과 난중일기,일본 사료 다 당대,즉 왜란시기 혹은 왜란 직후의 기록인데. 모두 갑옷을 입었다고 적고있음.



저 그림 보고 조선군은 갑옷 안 입었다고 말하는게 많은게 현 상황인데.


그럼 왜 왜군은 갑옷을 안 그려놓음? 당시 일본군은 갑옷 입은게 정설인데.



즉 저런 그림만을 신봉하는건 당대의 기록과 역사적 사실을 다 무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