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멋들어진 문라건을 쓴 대집성이 들어왔다.


"아, 대 공이구려, 무슨 일이시오?"


현 삼한의 최고 권력자 최우(이)는 감히 어떤 놈이 허락도 없이 들어오는지 괘씸하여 잠시 문 쪽을 바라보며 찡그렸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서 대집성에게 말하였다. 어여삐 여기는 후처의 아비였으니, 곧 자신의 장인이었다. 이 정도쯤은 눈 감고 넘어갈 수 있었다.


"예, 최공, 실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이리 무례를 무릅쓰고 공을 뵙고자 하였습니다."


물론, 최우가 두 번째 장인을 조금 더 살가이 대한다 한들 그 위세가 어디 가지는 않는지라, 대집성은 과할 정도로 예의를 차리며 마치 사위에게 임금을 대하듯이 허리를 조아렸다. 


"술이라도 한잔 드시며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무슨 일이길래 공께서 나를 이리 급하게 찾으려 하는 건지 궁금하구려."


최우는 그리 말하고는, 하인을 시켜 도금된 술잔 2개와 술병을 가지고 오게 했다. 


이윽고 금잔을 들고 오자, 대집성은 잠시 사위와 술 몇 잔을 주고받았다.


금잔과 금술병이 해동천자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하나, 그렇다 한들 신료가 마음껏 쓰기에는 너무 격이 지나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작금의 금상(고종)은 그의 아비(강종)조차 최우의 아비 최충헌에게 옹립된 임금이었으니, 사촌(희종)의 전철을 밟을 것이 아니라면야 감히 영공의 행보에 제동을 가할 수 있을리 없었다.


잠시 그렇게 생각한 대집성이었으나, 이내 그것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곧 그가 영공을 찾아온 목적을 떠올렸다.


자신에게 모욕을 준 자주부사 최춘명을 죽이는 것. 그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였다.


"최공, 오늘 소인이 공을 찾아뵌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나라를 구할 계책을 공과 논하기 위함입니다."


"허허, 공이 삼군을 이끌고 다시 몽고와 싸우러 가겠다는 말을 하시는 거요? 내 공이 안북성에서 패퇴하였을 때 장인을 잃을까 전전긍긍하였는데, 공은 참으로 사위가 밤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재주가 있으시구려."


대집성은 안북성에 집결한 삼군을 적에 도발에 넘어가 평지에서 싸우게 해 궤멸시켰고, 그 탓에 원문대왕(현종) 대의 통쾌한 승리를 재현하여 스스로의 입지를 높이고자 했던 최우의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최우는 대집성에게 그따위 소리를 하려고 왔냐는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그런 것을 논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어찌 소인이 공을 근심케 하오리까? 그것이야말로 불충이요 불의입니다."


대집성은 당황해하며 황급히 부인했다. 마지막의 불온한 언사는 덤이었다. 


"그러하면 무엇 때문에 나를 찾아오신 게요? 국사가 다망하니 실 없는 농담을 주고받고자 찾아왔다고는 말하지 마시오."


실없는 소리를 지껄이면 죽여버리겠다. 최우의 그 타오르는 눈동자는 그리 말했다. 눈치가 없기로는 삼한 땅에서 제일이라는 대집성이라도 그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예, 제가 공을 찾은 것은, 최춘명의 처리를 논하기 위함입니다."


대집성이 잠시 작게 심호흡하며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최우는 잠시 그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식히며 대집성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설명해 보라는 신호로 받아들인 대집성은 곧이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최춘명이 항복을 거부한 의기는 칭찬할 만하나, 몽고의 원수가 크게 노하여 돌아갔으니 후일 큰 재앙으로 돌아올 것이 분명합니다. 


그를 죽여 몽골에 보여야 재앙이 물러갈 것인데도 지금 임금과 재상들이 모두 머뭇거리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으니, 청컨대 소인은 공 혼자서라도 그를 죽여 후환을 처단하시길 바라는 바입니다." 


대집성은 그리 말하고는, 슬쩍 눈을 돌려 최우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최우는 스스로 술을 따라 마시더니, 곧 입꼬리를 살짝 비틀며 대집성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대집성은 대놓고 불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최우의 말에, 대집성의 표정은 펴졌다.


"그렇게 하십시다."


대집성은 그제야 최우가 자신의 편을 들어준 줄 생각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속을 알수 없는 눈빛이 마음에 너무 걸리기도 했지만, 이내 그는 그것을 잊어버리고 눈엣가시 최춘명을 죽일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