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편 안 읽어도 이해는 다 가지만, 


전편 안 읽어보면 후반부 개연성에 의문을 가지게 될 수 있음 귀찮음 걍 본문만 읽어도 무방함


1. 리리스의 악몽 https://arca.live/b/lastorigin/9753634


2. 리제의 악몽 https://arca.live/b/lastorigin/9781860


3. 에밀리의 악몽 1 - https://arca.live/b/lastorigin/10612586


4. 에밀리의 악몽 2 - https://arca.live/b/lastorigin/11391835


5. 소완의 악몽 - https://arca.live/b/lastorigin/11401468



1.


차가운 눈송이가 뺨에 내려앉는 것이 느껴진다.

반사적으로 눈을 뜨자 시릴 정도로 넓게 펼쳐진 백색의 평원이 눈에 들어온다.

익숙하면서도 낮선 풍경, 그것은 그녀가 멸망 전의 전장에서 늘상 보아오던 종류의 것이였다.

하지만 그것은 100여년도 더 된 과거의 망령, 

그렇기에 당황한 발키리가 엄폐물 너머로 몸을 일으킨 것은 결코 그녀의 탓이 아니었다.


[탕!]


외마디 비명 같은 총소리와 함께 강렬한 충격이 찾아온 것은 순간이었다.

둔기로 머리를 후려갈기는 듯한 통증에 그녀는 힘없이 눈밭 위로 쓰러졌다. 

윙윙 거리는 이명 사이로 동료들의 절규가 드문드문 섞여 들려왔지만 그녀는 그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흘러나오는 피가 새하얀 눈밭을 붉게 물들이기도 전에, 총알의 뒤를 따라온 유탄이 그녀의 동료들을 강타했다.










2



의식을 되찾은 그녀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눈알을 후벼파는 듯한 저릿한 통증이었다.

자연스럽게 아까의 악몽이 떠오르며 발키리의 몸이 경직된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려 가장 격심한 통증이 느껴지는 왼쪽 눈을 손으로 더듬었다. 

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시야 탓에 주변 상황을 파악하는것 조차 어려웠다. 

결코 회복하기 쉽지 않은 상처임이 틀림없었다.

아니, 회복되더라도 다시 전장으로 나갈 수는 없겠지.

개조된 눈으로 보아왔던 세상과 다른 불분명함과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절망적인 미래에 그녀는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일어..나야..”


여긴 어디고...왜 난 이곳에 있는거지?  

진부한 질문이지만 지금 당장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그 질문 하나 뿐이었다. 

자신은 분명 오르카호에서 잠들었었다. 하지만 여기는 오르카호라고 하기에는 조금...많이...이상한 곳인데,


발키리는 비틀거리며 금방이라도 무너질듯 낡은 침대를 짚고 일어섰다.

포격의 충격에서 회복되지 못한 다리가 어린 짐승의 그것처럼 후들거렸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침대만큼이나 낡은 문이었다. 

 자연스럽게 그 문을 열어젖힌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죄책감으로 얼어붙었다.

문을 열자마자 절규에 가까운 비명소리가 그녀의 귀를 시끄럽게 때렸기 때문이다.


"흐아아아아!! 아파!!아파!!!"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지금 비명을 지르고 있는 알비스는 방금 전 꿈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유탄을 맞았던 자매들 중 하나였다.  같은 이름을 가진 바이오로이드들의 생김새는 모두 같았으나, 

오랜 세월 전장에서 등을 맞댄 동료의 얼굴 정도는 충분히 기억할 수 있었다. 

그것이 비록 100년도 더 된 과거의 일이라도 말이다.


폭발에 휩쓸려 녹아내린 방패와 융합되어버린 알비스의 팔은 괴이한 각도로 비틀려 있었다.

고통으로 움찔거리는 그녀의 몸이 침상에 쓸릴 때마다 억누르지 못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언니..나..아파..”


뒤늦게 발키리를 발견한 알비스가 고통을 호소하며 무기력하게 꿈틀거렸다.

고통으로 흘러내리는 침과 피로 인해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웅얼거리며 발키리를 부르는 것, 

그것이 양팔을 쓰지 못하게 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구조요청이었다.


“아..아냐..이건..”


현실일리 없어, 혼란스러워진 발키리는 고개를 돌려 알비스에게서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녀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절망에 찬 울음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반대쪽 병상과 통하는 곳의 문을 열어젖혔다.


“....”


그리고 발키리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렸다.

그곳에는 얼굴이 절반쯤 날아가 버린 님프가 가만히 누워 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이였으면 즉사했을 정도로 극심한 상처였지만 강인한 바이오로이드의 육체는 쉬이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는지 

그녀의 가슴이 느리게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 보인다.


기절하기 이전, 마지막을 들었던 비명소리가 님프의 것이였다는 것을 떠올린 발키리는 불안과 공포로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그녀에게 기어갔다. 

발키리의 기척을 느낀 님프의 눈이 뜨이며 초첨없는 시선이 발키리에게 맞춰졌다.


“..ㅇ.왜…”


짧은 한마디였지만,그 완성되지 않은 말에 담긴 원망과 의문을 알아 차린 그녀의 표정이 죄책감으로 일그러졌다. 

‘갑자기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지 못했다’ 라는 궁색하면서도 정당한 변명은 발키리의 강직한 성격 탓에 통하지 않았다.

님프가 심하게 다치고 알비스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모두 그녀의 책임이었고, 변하지 않는 잔인한 현실이었다. 

그것을 완전히 깨달은 발키리의 부서진 눈에서 붉은 피가 눈물과 섞여 흘러내렸다.


“아~ 씨발 존나 시끄럽네! 안 닥치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닫혀있던 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와 동시에 들리는 낯선 인간 남성의 목소리에 흠칫 놀란 발키리의 고개가 휙 돌았다. 


‘분명 인간은 100년도 전에 모두..아니 하나를 제외한 모두가 죽었을 텐데..?’


갑작스럽게 등장한 인간은 그녀가 생각하는 것을 기다려 줄 만큼 친절하지 않았다. 

피와 눈물로 얼룩진 수복실을 바라보던 남자는 퉤, 하고 알비스의 팔 위에 침을 뱉으며 투덜거렸다.


“하...다 뒈져가는 것들 좀 써먹으려고 끌고 와서 개고생만 하네…”


뒷머리를 긁적이며 투덜거리던 남자는 익숙한 솜씨로 망치를 꺼내들었다. 

멸망 전의 세계라면, 인간이 쓸모없어진 바이오로이드를 처리하는 방법은 단 하나,

무구보단 도살에 더 어울리는 모습을 한 망치를 본 알비스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아니에요! 아프지 않아요! 알비스는 더 싸울 수 있어요! 알비스는..”


으직하는 짧은 소리와 함께 비명이 멈췄다. 

사람보다 더 튼튼한 바이오로이드의 몸뚱이도 도살용 망치 앞에서는 무력했던 모양이다. 

으깨진 머리에서 들어올린 망치로부터 뭉근하게 변한 살점과 뇌가 묻어나왔다. 

본인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바이오로이드의 가치는 0에 수렴한다, 따라서 그녀들이 맞는 결말은 늘 같았다.


“에이씨, 다 튀었네.”


남자는 기분 나쁘다는 듯 손에 묻은 뇌수며 살점같은 것들을 아직 움찔거리는 알비스의 옷에 문질러 닦았다. 바이오로이드를 인격체가 아닌 완벽한 도구로서 다루는 그 모습에 발키리는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100여년 전의 끔찍한 세계라는 것을 완벽하게 자각해 버렸다.


“봤지? 니들도 시끄럽게 하면 다 뒈지는거야.”


남자는 에이, 재수가 없으려니까. 하고 투덜거리며 왔던 문을 쾅 닫고 다시 나가 버렸다. 


왜 진작 깨닫지 못했던 것일까, 

주위를 둘러본 발키리는 수복실에서 그 흔한 소독약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했다.


이곳은 수복실이 아닌, 도살장이었다.





3



‘그것’은 어둠속에서 숨죽여 웃었다.


자신의 계획은 완벽했다.


언제나 주인만을 생각하던 충직한 경호원은 끝을 알 수 없는 무기력 속에 빠뜨렸다.


인간만을 생각하던 스토커는 어떨까? 그녀는 불안감과 질투로 가득 차 더욱 그 인간에게 집착하게 되겠지.


성숙하지 못한 작은 아이는 영원히 죄책감 속에 빠져 살 것이고.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은 요리사는 절망할 것이다.


발할라의 강인한 전사는? 절망으로 가득 차 악몽 속을 헤매게 될 것이다.


영원히 말이다.





4




언제나 가장 먼저 일어나 자신의 무장을 점검하는 것을 일상처럼 여기던 발키리였다. 

그렇기에 그녀의 늦잠은 퍽 의심스럽고, 꽤나 눈에 띄는 종류의 것이었다.

제일 먼저 그것을 알아챈 것은 당연하게도 그녀의 상사인 레오나였다. 

레오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사령관의 동침표를 확인해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침표를 확인한 그녀의 얼굴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흥, 한심하게 늦잠이라니.


하지만 정오가 지나고, 훈련시간이 한참 지나서도 발키리가 일어나지 않자 그 싸늘함은 창백함으로 변했다.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모든 대원들은 부수듯 문을 열고 발키리의 침대의 이불을 젖혔다.

혈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새하얀 얼굴, 미동도 없는 몸짓, 발키리는 마치 죽은 것 처럼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미세하게 오르락 내리락하는 가슴팍과 가느다란 숨소리만이 간신히 그녀가 살아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발키리 언니….아픈..거야? 아니면…”


단 한번도, 심지어 죽을 정도의 부상에서 회복한 그 다음날에도 훈련시간에는 늦었던 적이 없었던 발키리였다. 

레오나의 다음으로 이변을 알아차렸던 알비스가 불안한 목소리로 울먹거렸다. 

‘아냐, 괜찮을거야.’ 님프는 그런 알비스를 달래며 부드럽게 껴안아 주었다. 

베라 역시 안심시키듯 알비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일단은 단순히 잠든 것일수 있으니까, 확인해 보자고.”


그리고 십오분 뒤, 잠든 그녀의 몸을 흔들고, 

소리를 질러도 발키리가 깨어나지 않는 것을 확인한 레오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닥터와 다프네를 찾았다. 

하지만 발키리는 다프네의 나노로봇으로도, 수복제로도, 닥터의 특제 약물로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5





배가 고프다. 목이 마르다. 

2주 정도 굶는 것으로 죽지 않는 자신의 튼튼한 몸뚱이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벽에 길게 말라붙은 알비스의 살점이 너무나 달콤해 보인다. 

뭐? 발키리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한 생각을 미친듯이 지워나갔다. 

하지만 한번 시작된 망상은 걷잡을 수 없이 크게 번져 발키리의 입에서 침이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스스로에게 짙은 혐오를 느낀 발키리가 자신의 뺨을 후려갈기기 위해 손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힘없이 가라앉았다. 

완전히 풀린 다리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스르르 주저앉은 발키리의 머릿속에서 지난 한달간의 일이 천천히 흘러갔다.


‘혼자 뒈지지 말고, 아, 자해도 금지니까 꼼수부리지 말아라?’


그것은 보기 싫다는 이유로 님프마저 으깨버린 인간의 입에서 나온 최초의 명령이었다.

그리고 발키리는 처음으로 바이오로이드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저주했다.


인간의 욕망에 의해 아름다운 얼굴로 태어난 그녀는 인간들의 좋은 놀잇감이었다.

쉴틈 없이 이어지는 능욕은 당연하다는 듯 행해졌다. 

제대로 된 식사는 꿈도 꿀수 없었고 그녀는 가끔 그들이 먹다 남긴 음식물 찌꺼기만을 받아 먹어야 했다. 

아마 그뿐이면, 발키리는 사령관을 생각하며 버틸수 있었을 것이다. 

어떤 능욕과 핍박에도 덤덤한 표정을 짓는 발키리를 보며 시간이 지날수록 남자들의 행위는 에스컬레이트되기 시작했다.


밤이 되면, 그녀의 새하얀 등은 남자들의 도화지가 되었다. 

그녀의 무덤한 태도에 질려버린 남자들은 날붙이를 이용해 그녀의 흰 살결 위로 붉은 색의 그림을 그리며 일그러지는 발키리의 표정을 감상했다. 

발키리는 그것을 모두 참아 내었다.


그들이 죽인 동료의 몸이 썩어 냄새를 풍기기 시작하자, 

그들은 님프와 알비스의 몸뚱이를 그녀가 직접 옮기게 하고, 시신을 갈아 더스트를 추출하게 했다.

낄낄거리는 웃음이 쏟아지는 가운데, 그녀는 구토하는 것 조차 허락 받지 못했다.

이것 역시...참아낼 수 있었다.


하루는 발키리를 바깥으로 끌어낸 이들은 그녀로 하여금 전 동료들을 이들을 죽이게 했다.

발키리는 ‘언니, 제발 살려주세요!’ 따위의 말을 들으며 팔다리가 날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전우들의 머리에 총을 쏘아야 했다. 

잔인하도록 꼼꼼한 인간들의 명령에 따라 그날 그녀는 다섯의 샌드걸의 머리에 카누잉까지 해야 했다.


갖은 학대로 인간에 대한 그녀의 증오는 빈틈없이 쌓여갔지만 그녀는 군인으로서 태어난 바이오로이드 였기에 그 부당한 명령에 저항하는 시늉조차 할 수 없었다.


혹시나 시끄럽다는 이유로 죽이지는 않을까 하고 미친듯이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면, 

짜증스러운 표정의 인간들이 들어와 입에 재갈을 물린다. 


스스로를 해하려는 모든 행동은 그 망할 ‘명령’으로 인해 원천봉쇄되었다.


마음이 꺾여 아무런 행동을 하고 있지 않으면, 그녀의 동료들이 산 채로 해체기에 던져졌다.

동료들을 고통없이 발할라로 인도할 수 있도록, 발키리는 인간들의 인형이 되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게 한달, 몸도 마음도 모두 망가져 버린 발키리가 떠오르는 해를 원망하며 하루를 준비하던 어느날 아침,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무언가 쏟아져 내렸다.


“..?”


발키리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쇳덩이가 비처럼 내리며 하늘이 뒤집어졌다. 

한없이 저주스러운 인간들은 포격 앞에서 모두 한줌 핏덩이가 되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려던 그녀는 수복실의 문이 잔해로 막힌것을 깨달았다. 

오랜 학대로 약해진 그녀의 몸뚱이로는 묵직한 잔해들을 전부 치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뒤로 2주가 지났다.


“아…”


회상을 마친 발키리는 시야가 점점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팔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몸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 음식도 없이 2주면 오래 버틴 거겠지. 마지막을 직감한 발키리가 꺼질 듯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는.. 발할라로 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동료를 죽게하고, 그 손으로 동료들을 욕되게 했다. 

명예롭지 못한 전사인 자신이 발할라로 갈 자격 따윈 없겠지. 


“...죄..송..합…”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탈수로 말라버린 눈물샘에서는 그 흔한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툭, 모든 힘을 소진한 발키리의 팔이 완전히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6



또 다시 의식을 차린 발키리가 가장 먼저 느낀것은 공포였다.


내가 아직 살아있다고?


두려움에 미처 눈을 뜨지 못한 발키리는 손을 올려 얼굴을 더듬었다. 

몸에 힘은 조금 없었지만 아까까지 느껴졌던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에 

발키리는 손을 들어 목, 가슴, 어깨를 천천히 흝었다.

팔에 무언가 꽂힌 것을 느낀 그녀는 발작적으로 그것을 잡아 뽑았다. 

따끔하는 통증과 함께 수복제 특유의 비린 향이 훅 풍긴다.


“여긴..”


그제야 그녀는 이곳이 오르카 호의 수복실 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을 뜨자 머리맡에 곱게 놓인 자신의 애총이 눈에 들어오고, 

그 다음으로 미쳐 맡지 못했던 알코올의 향과 다프네가 가꾸는 정원의 꽃향기가 그녀의 코를 간질였기 때문이다.


“...꿈이었군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발키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얼굴을 팔에 묻는다.

모든 것을 깨달았어도 불안감만은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남아서 심장이 불규칙하게 박동한다.



“너무할 정도로 생생한 악몽입니다…”


꿈을 꾸기 전까지 사령관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정은 행복감과 따뜻함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반사적으로 떠올린 사령관의 얼굴 위로 두려움과 원망이 덧그려지는 것을 자각한 발키리가 쓰게 속삭였다. 

그녀답지 않은 물기 젖은 목소리가 애처롭게 느껴진다.

꿈속에서 쌓인 인간들에 대한 증오는 꿈에서 깨어난 지금도 사그라들지 않고, 당연하다는듯 지속되어 사령관을 향한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흑..”


자신의 날선 증오를 자각한 발키리의 몸이 잘게 떨렸다. 

이대로라면 자기도 모르게 사령관을 해칠 수 있겠지, 

설령 해치지 못하더라도 이전과 같은 눈으로 그를 마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강직한 군인이었기에 판단 또한 빨랐다. 

발키리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일어서 무장을 챙겼다. 다행히도 수복실은 한밤중처럼 고요하고 어두웠다.


넓고 넓은 오르카호,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의 주인인 그의 군대에서 나 하나쯤은 빠져도 괜찮겠지, 

이미 자신은 마음이 망가져 버렸고, 망가져버린 바이오로이드는 사령관에게 폐만 끼칠 뿐, 절대 도움이 될 수 없었다. 

물론 누가 들어도 말도 안되는 생각이었지만 발키리는 무언가 홀린듯 자신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소박한 편인 그녀의 짐은 그다지 많지 않아, 금세 짐을 꾸린 그녀는 조용히 수복실의 문을 열고 나갔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지 않았지만 애초에 바이오로이드에게 무작정 달려드는 철충은 없을 뿐더러, 

간혹 그런 미친 철충이 있다 해도 그녀의 실력이라면 철충 두엇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겠지, 

정신나갔다는 말을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어이없는 생각이었지만, 이것이 지금 그녀가 생각하는 최선이었다. 


하지만 세걸음도 걷지 못하고 의외의 인물과 마주한 발키리의 표정이 굳었다.


“....각하..?”


“아, 발키리!” 


어딘가 졸려보였던 사령관은 발키리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눈을 번쩍 뜨고,

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사령관님이 왜 여기에? '


그녀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하나 둘, 어두운 복도의 빛이 명멸하며 그리운 얼굴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와! 발키리 언니다! 언니! ”


“흥...이제 일어난 거야?”


“일어나셨네요, 발키리님.”


“아…”


어째서 다치지도 않았는데 시야가 흐려지는 것일까, 


레오나 대장, 알비스, 베라, 님프, 샌드걸, 안드바리….

복도에 늘어선 텐트 안에서 하나 둘 나타나는 자매들의 얼굴을 보자 순식간에 안정감이 찾아온다. 

자신이 하려던 행동을 돌이킨 발키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꿈은 꿈일 뿐인데, 내가 무슨 바보같은 생각을 했던 거람.


“오르카호로 돌아온 것을 환영해, 발키리.”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사령관의 얼굴을 마주 보며, 발키리는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

생각보다 길어져서 걍 급하게 끊은 감이 있음.

악몽 뇌절은 한두편 안으로 끝날것 같아.
그리고 글 다 써가는 와중에 발할라 애들 중 멸망 전 개체 없다는 설정 알아서...그래서 고증 오류가 있어 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