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이랑 내용 크게 이어지는 부분은 없음. 해당 단편만 읽어도 되지만 같은 시리즈라 링크 올림.

굳이 볼거면 발키리 편만 봐도 됨


1. 리리스의 악몽 https://arca.live/b/lastorigin/9753634

2. 리제의 악몽 https://arca.live/b/lastorigin/9781860

3. 에밀리의 악몽 1 - https://arca.live/b/lastorigin/10612586

4. 에밀리의 악몽 2 - https://arca.live/b/lastorigin/11391835

5. 소완의 악몽 - https://arca.live/b/lastorigin/11401468

6. 발키리의 악몽 - https://arca.live/b/lastorigin/16904142



"여긴..?"


LRL은 눈을 깜빡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신이 누워있던 낡은 침대보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빈 참치캔 한통, 

씁쓸하리만치 익숙한 풍경에 그녀는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에이미..? 어디있어..?"


어린아이다운 목소리로 울먹여 보아도 늘 들려오던 "후후,여기 있답니다 공주님." 이라는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더럭 겁에 질린 LRL은 급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사령관..그리폰...어디있는거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그리운 이름을 부르며 방 안을 돌아다니던 그녀는 벽에 걸린 낡은 근무일지를 보고 무언가를 깨달은 듯 멈춰섰다.


"꿈...이었구나.."


[등대근무 8781일째, 지나가는 배 없음] 이라고 쓰인 빛바랜 근무일지는 순식간에 그녀를 따스한 꿈에서 차가운 현실로 끌어올렸다.


"그래도 이번엔 얼굴은 봤으니까…"


LRL은 뭔가 채념한듯, 헤헤 웃으며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냈다. 

얼굴도 못 본 이전의 꿈에 비하면 이번의 꿈은 선물이라고 느껴질 수 있을 정도로 행복한 꿈이니까, 

그래, 이거면 된거야,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침식사를 위해 준비해둔 참치캔을 열었다.


"야! 참치캔은 하루에 3개만 먹으라고 했지!"


"어?"


어디선가 들려오는 앙칼진 목소리에 LRL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서둘렀던 탓에 캔의 모서리에 긁힌 손에서 핏방울이 방울방울 흘러나왔지만, 

지금 LRL에게 상처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폰…?"


너무나도 그리운 꿈속 친구의 이름을 불러본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나...이상해지는걸까…"


허탈감에 풀썩 주저앉은 LRL은 그렇게 웅얼거렸다. 

이상하다...분명 들렸는데…? 

퉁명스럽지만 어딘가 자신을 위해주는 듯한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생생해서 어린 소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투명한 눈물방울이 안대를 적시고 LRL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래, 이건 손가락의 상처가 아파서 우는거야..그러니까..


"짐은 사이클롭스 프린세스니까 이런 시련쯤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아...."


LRL은 너무나도 자주 봐서 이제 전부 외워버린 소설의 대사를 웅얼거리며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다. 

이제 곧 등대지기로서 신호를 보내야 할 시간, 더 이상 주저앉아 울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공물을..섭취할 시간이다..!"


그녀는 씩씩하게 일어나 참치를 입 안에 밀어넣었다. 밥을 먹으면 나아질거야, 하지만 오늘따라 참치가 맛없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맛없네.."


평소라면 정말 맛있었을 참치캔은 오늘따라 맛이 없었다. 다같이 둘러앉아 누군가와 같이 참치캔을 먹는 기억, 

참치캔을 빼앗으려는 친구들을 피해 도망다니며 참치캔을 먹는, 

절대 존재할 수 없는 기묘한 기억들이 자꾸만 떠오르며 LRL의 마음을 쿡쿡 찔렀다.


꾸역꾸역 참치캔을 모두 삼킨 LRL은 그녀의 무기-드래곤 슬레이어- 와 유일한 친구인 곰인형을 들고 발코니로 향했다. 

오늘은 기묘한 날이니까 어쩌면 평소와 다른 일이 생기지 않을까? 새로운 배가 보인다거나..손님이 찾아온다거나..


이런 저런 상상으로 들뜬 LRL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터벅터벅하는 발걸음은 어느세 탁탁탁으로 변하고, 

등대의 끝에 도착한 LRL은 힘차게 문을 열어 젖혔다.


"아…"


하지만 보이는 것은 까무룩한 어둠과 끝을 알수 없는 검푸른 물결 뿐, 오늘도 작은 조각배 하나 나타나지 않는다.

LRL은 잠시나마 가졌던 희망을 꺼트리며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오늘도.. 없구나.."


꿈은 꿈일 뿐, 현실이 될수 없다.

그녀는 오른쪽 눈동자를 가리고 있던 안대를 풀고 먼 바다에 빛줄기를 쏘아냈다.


때로는 길게, 때로는 짧게…. 제발, 누군가가 나를 구해주세요. 여기는 외로워요. 여기는 추워요.


여느때보다 간절함을 담아 신호를 보낸 LRL은 잠시 멈춰서서 까마득하게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어두워…"


등대지기 바이오로이드인 탓에 그녀의 생체시계의 밤낮은 바뀌어 있었다.

이것 때문에 꿈속 - 오르카호에서 이상한 것도 참 많이 보았었지.

한밤중에 비밀의 방에서 들리는 정체모를 괴성, 사령관과 레슬링을 하는 에이미 언니…

어둠을 틈타 식량 창고에서 몰래 참치캔들을 훔쳤던 기억..

LRL은 쿡쿡 웃으며 너무나도 생생한 꿈속의 기억을 뒤적였다.


다시 한번 그때로 돌아갈 수 있으면...뭐든 할 수 있을텐데.


"추워..."


잠시 가상의 추억을 떠올리던 LRL의 낡은 옷 사이로 찬 바람이 불어왔다. 

바이오로이드의 옷은 그 주인의 몸 만큼이나 튼튼하게 만들어지기 마련이지만,

그녀의 옷은 너무 오랜 세월의 풍파를 맞은 탓에 몹시도 낡고 닳아있어 차가운 바람을 전혀 막아주지 못했다.


LRL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옷깃을 여미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따듯한 방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책을 읽으면 기분이 조금 나아질 것이라고 믿으며.








2




오르카호의 수복실은 그 장소의 특성상 그리 밝은 곳은 아니였지만

오늘 수복실의 분위기는 그 어느때보다도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 우울한 기운은 침대에 죽은듯이 누워있는 좌우좌와, 그녀를 둘러싼 이들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좌우좌는..일어날 수 있는거야?"


사령관은 우울한 목소리로 물으며 가만히 누워있는 좌우좌의 손끝을 매만졌다. 

그런 그와 모니터를 번갈아 바라보던 닥터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젠장!!"


쾅 소리와 함께 침대가 가볍게 흔들렸다.

3일, 3일이라는 긴 시간동안 좌우좌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와 같은 현상을 겪었던 발키리의 말대로라면 지금 좌우좌는 끔찍한 악몽 속을 해매고 있겠지, 

그녀의 트라우마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령관의 마음 역시 꿈속의 좌우좌와 같은 우울함으로 물들었다.


"..저...오빠..?"


닥터는 고개를 숙인채 눈물 흘리는 사령관에게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수십개의 박사학위를 가진 그녀였지만, 우는 남자를 달래는 것을 배운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 손길은 매우 어색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령관은 그 어색한 손길에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찾을 수 있었다.


"응?"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가만히 사령관의 등을 토닥여주던 닥터의 타블렛이 빠르게 점멸했다.


"히잉..누구..어?"


메시지의 주인공은 탈론페더, 그녀가 보낸 영상을 확인한 닥터의 눈빛이 과학자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일어나,오빠! 잠꾸러기 공주님을 깨울 방법을 찾아낸 같아."


"응…어?"


순식간에 활기를 찾은 닥터가 타블렛을 흔들었다.

탈론페더가 보낸 영상에는 검은 철충의 형태를 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좌우좌의 방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이 찍혀 있었다.





3





"....그렇게 모두모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이야기 끝."


LRL은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기묘한 꿈을 꾼지 2주일째, 그토록 생생했던 꿈의 기억도 점점 희미해져간다.

너무나 생생한 기억에 잠시 그게 현실이 아닐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그래, 역시 그건 꿈이였던 거야."


그녀는 그렇게 마침표를 찍기로 했다. 결국 꿈은 꿈이고 이야기는 이야기일뿐, 

바이오로이드인 그녀에게 남은것은 등대를 지켜야 할 지독한 의무뿐이다.

포옥하고 작게 한숨을 내쉰 LRL은 저녁으로 먹을 참치캔을 가지러 지하 창고로 향했다.


"으…"


몇번을 들어와도 지하 창고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일단 지하에 있어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데다가 바람도 통하지 않아 무지무지 축축하고 습하다. 

금방이라도 유령이 튀어나올 듯한 으스스한 비주얼이란… LRL은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것을 느꼈다.


"힝...기분나빠!"


LRL은 몸서리치며 참치캔 몇개를 잡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오늘은 이걸 먹으면서 드래곤 슬레이어즈! 복수의 서막 3권을...


[똑똑]


"으힉?"


귀신인거야?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를 들은 LRL의 몸이 긴장으로 굳었다.


"익...사악한 유령!! 감히 이 진조에게 도전하는 것이냐!"


LRL은 늘 가지고 다니는 소방도끼를 꼬옥 움켜쥐고 어두운 창고 안을 노려보았다. 


[똑똑똑똑]


"좌우좌!! 안에 있는거니?"


"어..?"


하지만 소리는 창고 안이 아닌, 그보다 조금 위,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등대의 정문에서 들려왔다.

위로 올라가야 해, 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LRL의 몸은 등대의 문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제발..제발…!!"


그녀는 이런 류의 꿈을 몇번 꾼 적이 있었으나...이번에는 절대 꿈이 아니였다. 

놀라 떨어트린 도끼에 찧은 발등이 미친듯이 화끈거렸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어느때보다도 생생한 현실이었다.

천천히 열리는 문을 본 LRL은 기쁨에 가득 찬 목소리로 힘껏 소리쳤다. 


"잘도 찾아왔구나 인간!...짐은….유구의 세월을 기다렸도다..!!"


문틈 사이로 비쳐오는 햇살이 그런 그녀의 얼굴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https://arca.live/b/lastorigin/19288250


이후로 이거랑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