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의 무대 위, 스산하리만치 조용하고 텅 빈 오르카 호의 갑판에 설치된 그것 위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누, 누구냑! 정체를 밝혀라!”


잔뜩 날이 선 목소리. 일부러 한산하여 아무도 없을 것 같은 시간을 골라 나왔건만, 우렁차게 반겨주는 익숙한 외침에 당신은 실소를 짓고 말았다. 알면서도 저러는 것인지, 정말 모르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진심처럼 보였다.


잘 보이지는 않아도 이대로 침묵을 유지했다가는 저 펭귄을 닮은 그녀가 도대체 무슨 일이라도 벌일 게 뻔했다. 구호를 말해! 마치 마지막 경고라는 듯한 어조. 당신은 그녀와 당신만이 아는 비밀을 있는 힘껏 외쳤다.


“자, 잠깐! 거기까지! 꺄아아악! 그만해!”


아까만 해도 당당하던 태도는 어디로 간 걸까. 낯부끄러운 밤일, 그것도 다른 이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인간관계에 영향이 없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정사에 대하여 외치자 무대 위의 그녀는 비명까지 지르며 말을 끊었다.


“프로듀서라고 말하면 되잖아! 그걸 말해버리면 어떡해!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거의 울기 일보 직전의 표정이 되어버린 그녀. 딱히 놀리려던 것은 아니었건만. 이런 게 아니면 딱히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다고 했다간 더 방방 뛸 것이 뻔했기에 당신은 그저 허허 웃으며 무대 위로 번쩍 올라갔다. 


“... 여긴 어쩐 일이야, 프로듀서.”


입을 삐죽 내밀고, 눈을 게슴츠레 떴다. 쀼루퉁한 기분을 온 힘을 다해 티를 내려는 것처럼, 슬레이프니르는 안면 전체로 ‘실망이야, 프로듀서.’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 나는... 그냥. 옛날 생각나서. 사실 예전에도 그랬어. 마음이 착잡할 때, 텅 빈 무대 위에 혼자 서 있으면 어쩐지 진정되는 기분이라서.”


당신은 그녀를 따라 객석과 맞닿은 무대 끝에 걸터앉았다. 


“힘드냐고? 음, 안 힘들다면 거짓말이겠지. 죽을 만큼 힘들어. 낮에는 내내 노래 연습에, 몸매 관리 때문에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밤에는 못다 한 안무 연습도 해야 해. 그것뿐이게? 우리 애들 멘탈케어도 해줘야 하고, 가끔 정찰도 나가잖아.”


말과는 달리 힘든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껏 보았던 그 어떤 모습보다도 생생하고 활기찼다. 오르카에 온 뒤로, 처음으로 살아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의외로 민감한 그녀는 오르카에 온 뒤로 쉽게 적응하지 못했었다.


항상 푸른 창공을 일주하거나 새를 벗 삼아 음속을 향유했던 그녀였기에, 상대적으로 좁고 칙칙한 잠수함에서의 생활은 큰 스트레스로 다가온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혼자 숨어서 눈물을 훔치거나 하는 것을 아는 이는 오직 가장 가까운 스카이나이츠의 대원들이나 당신뿐이었다.


그만큼, 그녀는 남에게 의지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밝은 모습만을 보이고, 하늘을 지배하는 군인으로서 품위를 지켜야 한다. 이러한 일련의 압박감은 그녀가 남들에게 항상 찬란한 미소를 보여줄 것을 강요해왔다. 


당신은 그런 슬레이프니르에게 몇 안 되는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당돌한 모습만 보이던 그녀라도, 당신 앞에서는 그저 사랑에 빠진, 사랑받고 싶은 여린 소녀가 될 수 있었다. 당신의 곁에서만큼은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언제나 남몰래 숲속에 들어가 억눌렸던 감정을 토해내던 그녀는 이제 당신의 품에 안겨 운다. 아픈 감정에 공감해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우두머리에서 병사들의 목숨을 담보로 싸워온 그녀에게 무엇보다도 큰 선물이었다.


그러니 슬레이프니르가 이번 공연에 목을 매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이토록 고마운 당신에게 바치는 무대라니. 그녀에게 있어서 이보다 효과적인 고백은 없으리라. 물론 단지 그런 개인적인 이유만은 아니었다. 자기만족을 위해 다른 부대원들에게까지 희생을 강요할 만큼, 그녀는 이기적인 여자는 아니다.


“사령관, 그래도 내가 멈출 수 없는 이유가 뭔지 알아?”


당신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바보야. 하르페처럼 똑똑하지도 않고, 소대장처럼 이성적이지도 않고, 블하처럼 누군가를 잘 돌봐주지도 못하고, 린티처럼 낙천적이지도 않고, 그리폰처럼 침착하지도 않아. 녀석들이 없었으면 나는 십중팔구 활약하지 못했을 거야.”


그녀는 동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되새기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내가 없는 동안 지휘관도 없어서 다들 고생했잖아. 내가 이끌어줬어야 했는데. 그래서 이번에는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어. 그리고, 미약한 능력이나마 보답해주고 싶었어. 그런데 내가 할 줄 아는 건 이런 것밖에 없더라고.”


그래도. 그녀는 이렇게 덧붙이며 벌떡 일어섰다. 그러더니 주먹을 꽉 쥐고 하늘을 향해 쳐들며 말을 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치는 노래는 그 무엇보다 아름다워. 녀석들한테도 나만 아는 이 기쁨을 알려주고 싶었던 거지. 그러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 안 해! 이번에야말로 능력 있는 리더라는 걸 입증해 보일 거야.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사죄이자 보답이니까.”


그녀의 명연설에 당신은 크게 탄복하여 박수를 보냈다. 웃음기 어린 감탄에 으쓱해진 슬레이프니르는 씩 웃으며 한참이나 일전의 자세로 서 있었다. 박수가 멎을 때가 되어서야 그녀는 다시 당신 옆에 쓰러지듯 걸터앉았다.


“고마워, 사령관. 이 말은 꼭 하고 싶었어. 으이그, 바보야. 이럴 때는 그냥 알겠습니다, 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거야. 가끔 보면 사령관은 꼭 이상한 부분에서 쑥맥이라니까.”


갑자기 뭐가 고맙냐는 반문에, 그녀가 답답하다는 듯이 일갈했다. 그 일침에 당신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고, 그것을 풀이 죽은 것으로 이해한 슬레이프니르는 허둥대며 위로하기 시작했다.


“오, 왜 또 삐지고 그래! 미안해. 응? 앗...”


그녀는 자연스럽게 당신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손 잡았다... 이런 건 연인끼리 하는 거 아니야...?”


쑥맥이라더니, 자기가 쑥맥이라는 것은 몰랐나 보다. 슬레이프니르는 아까 저물었던 땅거미처럼 벌겋게 물들어서는 무어라 중얼거리다가 오히려 맞잡은 손을 더 꽉 쥐었다.


“사령관은... 나 좋아해?”


그녀가 시선을 먼 객석에 향한 채로 읊조렸다. 당신은 싱긋 웃으며 긍정했다.


“... 응! 나도 좋아해. 세상 모든 것을 바치더라도 상관없을 정도로. 정말정말 좋아해. 그러니까... 으으, 사령관이 날 좋아해줘서 기뻐.”


우물쭈물하던 시선이 이내 당신을 향했다. 길을 잃고 흔들리고 있지만, 그 끝은 오로지 당신의 눈을 향해 있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직감하기라도 한 것일까. 그녀는 만개한 채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재촉하듯이 슬쩍 내민 입술이 얄미워, 당신은 입술 대신 검지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뭐하는 거야, 사령...! 읍...”


그녀의 동공은 이내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한없이 팽창했던 그것은 당신의 입술과 맞닿는 순간 녹아 내려갔다. 그녀와 원래 한 몸인 것처럼 잘 어울리는 연분홍빛 립밤의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달콤하다. 


당신은 이미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 그녀는, 당신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더 애절하게 키스했다. 당신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맛보였다. 그녀의 끈적한 타액에서는 비릿하지만 연약한 단내가 풍겼다.


오가는 열기 속에서 당신은 그만 그녀에게 밀려 넘어지고 말았다. 일방적으로 덮쳐진 모양새가 되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늘만은 그녀의 바람대로 해주자. 당신은 그렇게 마음 먹었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것이 공연만은 아니야.”


당신과 그녀를 잇는 투명한 사랑의 실. 끊어진 그것은 각각 서로의 입술에 달라붙었다. 슬레이프니르는 아직 온기가 남은 그것을 혀로 훑으며 입맛을 다셨다.


“프로듀서와 아이돌의 금단의 사랑이 펼쳐지는 장소이기도 해.”


슬레이프니르는 어느새 나체가 되었다. 그녀는 그대로 몸을 숙여 당신과 겹친 후, 귓불을 부드럽게 깨물며 속삭였다.


“그리고 지금부터 우린, 그 선을 넘을 거야. 어때...?”


/


키스가 꼴리는 이유 = 내가 못하니까


린티

하르페

그리폰

블하


픽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