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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객기와 용기의 차이



그는 함장실에서 단잠을 자고 일어나서 아주 상쾌한 기분으로 오르카를 산책하고 있었다.

오르카 구석엔 몇몇 흡연자들을 위해 마련한 흡연실이 있었는데, 외진 곳이었지만 환기만큼은 24시간 돌아가고 있는 방이었다.


"흠, 오랜만에 한대 필까."


그는 자켓 왼쪽에 있는 담배를 만지작거렸다. 동면에서 깨어난 직후 사령관에게 부탁해서 받았으나 본인의 성기능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곤 전혀 피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두려울게 무엇이 있는가. 해결 방법을 찾았으니까.


"아..."


그는 문을 열자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고 있는 더치걸을 보았다.

사령관이 있을 때와 달리 예쁜 드레스가 아닌 얼룩덜룩한 작업복을 입은 더치걸은 초점 없는 눈으로 사령관을 올려다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더치걸. 벌써 복귀해서 담배를 태우고 있나? 분명 작업 보낸걸로 기억하는데."


더치걸의 작은 입에서 뿜어져나온 연기가 환풍구를 통해 스며든다. 더치걸은 임무를 받기 전 라비아타에게 한동안 사령관이 아닌 인간을 주인으로 모셔야하는데, 폭력적이니 그의 말을 잘 들으라고..


아니야, 더치걸은 마음 속으로 부인했다.


멸망 전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주인은 단 한 사람 뿐이다. 그 어떤 인간도, 바이오로이드도 자신의 주인이 되어 명령할 수 없다.

더치걸은 사령관에 대한 자부심과, 감사함과, 연정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번도 드러낸 적 없었다. 자신의 초라함이 부끄러워서 감히 사령관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내뱉은 적이 없었다.

그런 사령관을, 나의 주인을 감히 누가 대신할까.

더치걸은 그의 명령을 전해들었음에도 전혀 따를 생각 없이 마음만 복잡해져 담배만 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명령... 내게 명령을 내릴 사람은 당신이 아니야..."


더치걸은 광산에서 일하며 맞을 때보다, 자매들이 사라질 때보다 더 큰 분노를 느꼈다.


그럼에도, 자신의 드릴을 그에게 들이밀지 못하는 태생적 한계를 원망했다.


한편 더치걸의 반항을 예상하지 못한 그는 벙찐채 더치걸을 내려다보았다.


"너...무슨.. 더치걸 같은 양산형 바이오로이드가 주인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었나..?"


주인..

잊고 있었지만, 인류의 모습이란 이런 것이다. 더치걸은 냉소를 지었다.


"우리의 주인은 당신이 아니.."


더치걸은 안타깝게도 말을 마치지 못했다.

몸통만한 발에 걷어차여 저 멀리 날아갔다. 더치걸이 쓰고 있던 안전모는 바닥에서 통-통 소리를 내며 굴렀고, 쿵하고 떨어진 더치걸은 좋지 못한 곳을 차여 숨쉬는 것조차 버거워 꺽꺽 댔다.


"아나.. 어이가 없어가지고. 당황해서 반응도 제대로 못했네."


그의 군화소리가 아득히 들려오자 더치걸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벅, 저벅소리가 들리다가 가까워졌을때 쯤 더치걸의 주홍빛 머리를 움켜 쥐고 들어올렸다.

머리카락이 뜯기는 고통을 느끼며 더치걸은 어헉 하고 작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이거 진짜 신기하네. 어떻게 명령을 거부한거지? 이딴 바이오로이드가 주인의 명령을 거부할 수도 있었나?"


"난.. 그런 기능 없어.. 그냥 당신은 내 주인이 아닐뿐이야.."


"그래. 이래서 기계던 바이오로이드던 패야한다니까."


그는 손바닥을 더치걸의 얼굴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쩍- 하는 살벌한 소리가 흡연실의 환풍기 소리를 뚫고 흡연실에 연신 울려퍼졌다.

더치걸은 목 끝까지 차오른 비명소리를 이 악물고 참았다. 더치걸의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고, 양 뺨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그럼에도 그의 손은 멈추지 않았고, 더치걸 역시 비명소리 한번 내지르지 않았다. 


"하. 어이가 없네. 야, 안아파?"


"...."


더치걸은 간신히 두 눈을 떠 그의 얼굴을 보았다.

태닝한듯, 구릿빛 피부와 타오르는 듯한 노란빛 머리카락.. 그리고 눈.

항상 미소 짓는 상냥한 사령관의 눈과 달리, 욕망이 가득찬 날카로운 눈이다. 사령관을 제외하고, 더치걸이 만난 모든 인간의 눈은 같았다.


"아픈건.. 싫지만.. 아니야.. 나는 당신이 더 싫어.. 그래, 당신은.. 누구의 주인도 될 수 없어. 오르카도, 우리도 주인은 단 한명뿐이야."


간신히 띄엄띄엄 내뱉은 더치의 말에 그는 충격 받았다.

멸망 전부터 한낱 바이오로이드에게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이런 참신한 경험을 고작 더치걸 모델한테 듣다니, 차마 믿을 수 없었다.


"씨발 웃기지도 않네, 이젠."


그는 주변에 굴러다니던 더치걸의 안전모를 잡고 더치걸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몇번의 휘두름에 더치걸의 몸은 힘을 잃고 널부러졌고 쿵- 쿵하는 소리가 울릴 때마다 힘을 잃은 사지가 움찔, 움찔 떨리기만 한다.


"에이 씨, 더럽게 피를 튀겨.. 뒤졌나? 뭐야 아직 살아있네 ."


그는 얼굴에 튄 더치걸의 피를 소매로 대충 닦고는 더치걸의 주머니를 뒤적거려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생긴거랑 다르게 튼튼하네. 그래도 일하고 피는 담배가 최고네.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며 깊게 숨을 마시고, 연기를 뿜었다.

피 흘리며 쓰러져있는 작은 더치걸과 군화로 머리를 툭 툭 친다. 이것 때문에 기분이 나빠졌지만 잠수함에서 굳어있던 몸을 풀고 오랜만에 담배를 피니 금방 기분이 좋아진다.


"야 이 좆만한 년아. 일어나면 일하러 가. 알아들었어?"


그는 짧아진 담배를 쓰러져있는 더치걸한테 비벼 꺼버리곤 흡연실을 나갔다.



#22. 사랑은 주는 만큼 받는 법이죠.



"로크, 잠시만."


사령관은 패널 화면이 깜빡거리자 닥터에게 온 연락임을 직감했다.

무슨 일일까, 괜찮은걸까 걱정을 하며 패널을 키자 영상 하나가 전송되고 100%가 채워진 직후 재생되었다.


“사령관 각하. 이렇게 인사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영상 속 칸과 마리가 절도있게 경례를 한다.


“쌍방통신이 가능하다 들었으나 저희에게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촬영해둔 영상을 보내겠습니다. 본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닥터가 새로 찾은 인간에 대해 조사을 하였고 로크에게 현 상황을 전해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현재 오르카 소속 모든 대원이 그 자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마리가 분한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칸이 마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사령관, 발키리를 보았나? 그럼에도 그대라면 위협을 받은 상황에서도 우리를 걱정하고 있겠지.”


칸이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잠깐 흔들렸던 눈빛이 무언가 굳게 다짐을 한 듯 또렷하게 빛났다. 


“그러나 우리를 믿고 안전하게 숨어있어라. 우리는 그대를 위해 우리 발로 지옥으로 들어가겠다. 그러나 아직 어떤 것도 끝나지 않으니 포기하지 마라. 그대가 우리를 구원해주었듯, 반드시 우리가 방법을 찾아 그대를 구하러 가겠다.”


칸의 엄한 얼굴에 미소가 띄워진다. 마리 역시 뒤에서 안심하라는 듯 빙긋 웃었다.


“각하, ‘그’는 요안나가 맡은 임무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닥터와 스카디의 도움을 받아 모든 기록을 삭제했죠. 그러니 그곳이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반드시 오르카를 되찾아 다시 각하를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각하를 오르카에서 내보낸 벌은, 추후에 받도록 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우리도 백전불패인 그대 곁에서 배운 것들이 있으니, 반드시 승리해보이겠다.”


마리와 칸은 다시 거리를 벌린 뒤 절도있게 경례하곤 영상이 툭하고 꺼진다.



#23.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 내색은 안했지만, 생각보다 상황이 안좋나보네.”


사령관은 공적인 자리에서 마리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추악함까지.

그러나 로크는 다른 이유로 안광을 빛냈다. 기다란 손가락으로 머리파츠의 하단부분.. 그러니까 턱을 만지는 듯한 행동을 했다.


[오르카에 있는 바이오로이드들은 정말이지 흥미롭군요.]


“무슨 소리야?”


[멸망 전 개체부터, 복원된 개체까지.. 본래 입력된 성격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것을 학습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경험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만, 마땅한 계기가 없이는 발현되기 힘들지요. 때문에 저는 본성을 이겨낼만한 계기가 무엇인지 고민해보았습니다.]


로크는 안광을 빛냈다.

붉은 빛은 위협적이기도 하면서, 어떻게 보면 따뜻한 빛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지금 로크가 상냥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아시겠습니까? 고귀하신 사령관 각하. 각하를 만난 후에 그녀들은 많은 것들을 ‘학습’하고 ‘변화’ 하였습니다. 각하께서 대원들에게 무엇을 학습 시켰을까요?]


“학습..?”


[예를 들어 불굴의 마리 개체는 군인입니다. 군인 바이오로이드들은 대체로 개인적인 판단보다 명령권자의 명령을 따르는게 우선입니다. 다른 바이오로이드들 역시 명령을 우선시 하지만 불굴의 마리 개체는 그 성향이 좀 더 극단적이지요. 가령, 상급자의 명령만 있다면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부하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모습처럼 말이죠. 때문에 현재 시스템상 그녀의 명령권자가 '그'임에도 명령을 어기고 사령관 각하를 구하겠다 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결과입니다.]


“마리와 칸은 멸망 전 개체야. 그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닐까?”


[하하하, 흥미로운 가설입니다만 바이오로이드들의 성향은 인간의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선천적으로 입력된 것들은 후천적으로 바뀌기 어렵습니다. 뭐, 취미나 취향따위는 다소 쉽게 바뀌기도 합니다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겉모습은 인간과 닮았지만 근본적으론 기계에 가깝습니다. 제거하지 않는 이상 사라지지 않지요.]


사령관은 로크의 말을 경청했다.

자신과 그의 차이는 무엇인가. 바이오로이드에게 변화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두 지휘관 개체뿐만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대원들이 각하를 만나고 학습하고, 변화했습니다. 그녀들이 각하께 가지는 감정은.. AGS인 제가 판단하긴 어렵습니다만, 적어도 입력된 본성을 이겨낼 정도로 강렬하고, 소중한 것이겠죠. 그리고 그녀들의 마음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각하께서 선택하실 일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들을 다시 구원하시겠습니까, 이 곳에서 그들의 부탁대로 기다리시겠습니까.]


“…나는 구원같은 거창한거 할 능력은 없어. 하지만.. 오르카 대원들은 내 가족이야. 바이오로이드니 인간이니 AGS니 상관 없어. 가족은 구해야지.”


땅에 내리며 로크에게 말하자 왠지 로크의 안광이 번뜩였다. 왜인지 그것이 듣고 싶은 대답을 들었다는 듯 만족하는 모습인 것만 같았다.


“멋진 말일세, 주군.”


발키리를 맡았던 요안나가 멀리서 자줏빛 머리칼을 흩날리며 다가온다.

당당한 발걸음마다 허리춤에 걸려있는 검이 덜그덕거리며 소리를 낸다.


“우리는 주군의 검이니, 결코 지지 않을걸세.”


사령관은 요안나 특유의 허브향이 기분좋게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어느새 모였는지, 요안나 뒤엔 대원들이 오와열을 맞춰 다시 집합해있었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지친 표정이 아닌 사뭇 진지하고, 용맹한 눈빛이 반짝였다.


“작전을 말해줘, 로크.”


[저는 명목상 ‘전 사령관’을 살해하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복귀하는 일 역시 어렵지 않지요. 요안나와 각하께서는 저를 타고 오르카호로 잠입하여 숨어 지내다가 오르카가 근처 섬에 정박하거든 그를 제압하십시오.]


“어려울걸세. 아무리 그래도 그의 옆엔 그 컴패니언이 경호를 맡고 있을텐데.. 나 역시 스스로의 실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블랙리리스양에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네."


[불필요한 걱정입니다. 컴패니언은 휴가를 받아 호라이즌의 배에 타고있으니까요. 각하께서 잠입하거든, 닥터에게 연락하여 인근 섬으로 유도하라고 일러두겠습니다. 그리고 각하께선 오르카호가 정박하자마자 해주셔야할 일이 있습니다.]


아, 불길한 예감이 든다. 제안을 할 때부터 장난스럽게 깜빡이던 로크의 안광이 떠오른다.


이어지는 짧은 설명은 놀라운 것들이었다. 어찌나 파격적이고, 놀라운지 로크의 제안을 들은 사령관과 요안나가 크게 당황하자 로크는 말을 이었다.


[…멸망 전 인류는 이런 작전을 보고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라고 했었지요. 그와 대원들의 정신을 빼놓기 위해선 이 방법만한 것이 없습니다.]


사령관은 고민했다. 너무 위험하다. 어쩌면, 자신의 손으로 대원들을 중상.. 아니, 중상이 아니라 죽일 수도 있는 계획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좋은 방안이 있을까?

사령관은 한숨을 내쉬었다. 명령체계를 사용한다면, 어떻게든 모두 안다치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하는 수밖에 없지.”


[현명한 판단입니다. 그럼, 해가 뜨거든 바로 출발할테니 준비해두시길..]


"요안나, 자세한 계획을 짤게. 대원들은.. 미안하지만 다시 쉬라고 해줘."


"알겠네. 우리는 주군을 믿고 있겠네."


요안나가 성호를 긋는 것을 본 사령관은 빙긋 미소 지으며 여기에 있는 대원들을 포함해서, 오르카호에 있는 대원들 모두 원죄로부터 지켜보이겠다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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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학대할까 고민했으나, 역시 오르카 불행의 아이콘은 더치걸이죠.

저는 사실 더치걸을 아낍니다. 예쁜 스킨을 입혀 도료생산소에 집어넣고 매일 쓰다듬어주거든요.

네? 그건 쉬는게 아니라구요? 도구가 일을 해야지 그게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