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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라는 말이 있다.


도대체 여자 셋이 모인 거랑 접시가 깨지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옛말이 그렇다니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자. 내가 신경쓰는 건 그게 아니니.


지금 내게 중요한 건, 만약 여자 셋이 모였을때 주변에 접시가 없으면 뭐가 깨지냐는 것이다.


그 이유인즉슨...


''언제까지 거기서 느긋하게 토론할 거야, 아가씨들?! 혹시 거기서 셋이 작전 짤 동안 내가 목숨걸고 어그로 끌고 있다는 사실을 까먹었다는 섭섭한 소리를 하진 않겠지? 응? 내 시간감각이 이상한 게 아니라면 벌써 10분째 나 혼자서 구르고 있는 거 같은데 말이야!''


접시고 나발이고 간에 지금 당장 내 뚝빼기가 깨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기 때푼이다. 참고로 뚝빼기=머리다.


''하여튼, 레오나의 사탕발림에 홀라당 넘어간 내가 바보지, 내가 바보야. 조금 칭찬해졌다고 금방 기고만장 해져서는...으아, 깜짝이야! 야, 사각에서 날아오는 건 반칙이지! 하기사, 철충한테 뭘 바라겠냐마는.''


사방에서 날아오는 창과 방패에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지만, 다행히 궤도가 단순해서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방금처럼 사각에서 날아오는 경우는 좀 위험하긴 하지만, 그마저도 이제 슬슬 눈에 익기 시작한 참이다. 무협소설에 나오는 무림고수들이 이런 느낌일까?


''...마냥 기뻐할 수도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아무리 내가 무식하다고 해도, 이쯤되면 슬슬 의구심이 든단 말이야.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게 뭔지.''


겉으로 보기에는 간단해 보이지만, 적의 움직임을 읽어가며 싸울 수 있는 능력은 그리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치 1)다크소울에서 구르기 타이밍을 익히듯, 실력에 더불어 오랜 시간에 걸친 경험과 연습이 동반되어야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물론 개개인이 가진 재능에 따라 감을 잡는 시간에 차이가 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평범한 전투원이라면 못해도 1시간 정도는 걸리는 게 보편적일 것이다. 경험이 풍부한 대원이라면 30분 정도 걸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평범한 민간인이라면? 아마 3시간 정도? 아니면 더 걸릴까? 모르겠다. 애초에 그런 상황에서 3시간이나 버틸 수 있다는 것부터 민간인은 아니라는 소리니까. 그리고 내 고민은 여기서 비롯된다.


''자아성찰 하기에 썩 좋은 타이밍은 아니지만, 찜찜한 구석이 한둘이 아니란 말이지...혹시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평범한 민간인이 아니었던 건가?''


그리고 보니, 예전에 한 번 코코가 말했던 것 같기도 하다. 파일럿 출신 아니냐고 했던가? 그때는 그냥 웃어넘겼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충분히 있을법한 이야기다. 그 외에도 라비아타가 의문의 누군가와 하던 통신에서-


''어이쿠, 위험해라. 재수 없었으면 2)쉬쉬 케밥 꼴 날 뻔했네. 어이, 아저씨! 독백 씬에서는 터치 안하는 게 국룰인 거 몰라?!''


''철충한테 그런 걸 바라세요?''


별 생각없이 내뱉은 말에 반가운 목소리가 대답했다. 아니, 사실 굳이 따지면 반가운 사람이라기에는 좀 껄끄러운 사이지만, 지금은 나랑 같이 싸워줄 누군가가 왔다는 것 만으로도 반갑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뭐, 그냥 해본 소리지. 어서 와, 라비아타. 좋은 소식 가지고 왔어?''


''좋은 소식이랑 나쁜 소식이 있는데, 어떤걸 먼저 들으실래요?''


''아, 또 그 레퍼토리군. 이제 슬슬 질릴 때도 되지 않았어?''


그렇게 궁시렁대며 바닥에 떨어져있던 주먹만한 돌맹이를 주워서 있는 힘껏 던졌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날아간 돌맹이는 라비아타의 뒤에서 소리없이 날아오던 방패 한가운데에 꽂히고는 산산조각 났다.


''아무거나 먼저 해. 불청객들이 좀 있으니까 빨리만 끝내자고.''


라비아타는 가볍게 웃고는 플라즈마 제너레이터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발등으로 대검을 가볍게 차 올리고는 뒤쪽에서 자세를 가다듬던 방패를 향해 기세 좋게 내려찍었다. 소리만큼은 호쾌했지만, 흠집도 나지 않은 모습에 나와 라비아타 둘 다 작게 혀를 찼다.


''뭐, 기대도 안하긴 했다만, 이렇게까지 멀쩡하니 조금은 약이 오르네요. 자, 그럼 좋은 소식부터. 레오나 대장님이 저 방패를 뚫을 방법을 생각해내셨어요.''


''그건 좋네. 나쁜 소식은?''


''그 방법이 좀 까다로울 것 같아요.''


''그야, 뭐, 당연하겠지. 애초에 저런 거 상대로 단순한 파훼법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어. 그래서? 그 '까다로운' 파훼법이 뭔지 어디 한번 들어나볼까?''


''그 마음가짐은 마음에 드네요. 잘 들으세요, 한 번만 말씀해드릴 테니까. 레오나 대장님의 추측에 의하면...''


                                                                                               


''다중 장갑 구조요?''


''응. 말 그대로 장갑을 몇 겹씩 포개서 내구성을 늘리는 구조야. 기술 자체는 멸망 전부터 있었는데, 그리 널리 알려진 기술은 아니었어. 가성비도 별로였고, 무게도 많이 나가서 금방 사장된 기술이거든. 그렘린이 날 붙잡고 신난듯이 떠들어대지 않았다면 나도 몰랐겠지.''


''다중 장갑이라...확실히, 철충의 장갑이 여러 겹이라면 내구도는 확실하겠죠.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저 방패가 저렇게 단단해 질 수 있나요? 아무리 그래도 흠집 하나 정도는 날 법도 한데 말이에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래서 처음에는 에너지 필드라도 쓰고 있나 싶었지. 그것 말고는 저 내구도를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근데 네가 말한 그 타격감에서 뭔가 감이 잡히더라고.''


''타격감이라니, 그 '밀어내는 듯한 느낌'을 말하시는 건가요?''


''응.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단순히 장갑을 여러 겹 덧댔다고 그런 타격감이 생기진 않아. 장갑은 어디까지나 철판이니까, 겹친다고 탄력이 생기지 않지. 하지만 여러 겹의 장갑 사이사이에 무언가를 채워 넣었다면 말이 안되는 것도 아니야. 뭘 채워넣었는지에 따라 타격감이나 강도는 천차만별이니까.''


레오나 대장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가볍게 두드리셨다.


''탄성이 느껴졌다고 하니 아마 액체일 확률이 높겠지. 액체 금속이나 젤, 어쩌면 나노머신일수도 있어. 뭐가 됐건, 일단 파훼법은 똑같지만.''


''그런가요?''


''응. 다중 장갑 구조의 단점은 생각보다 단순하거든. 분산된 화력을 상대로는 잘 버티지만, 한 지점에 정확히 집중된 화력에는 쉽게 뚫려. 애초에 사장된 이유도 그래서였고. 즉, 한 곳만 집요하게 노리면 뚫린다는 거지.''


단순한 파훼법이긴 하다. 우리가 노려야 하는 상대가 실험실 더미가 아닌 하늘을 날아다니며 우리를 죽이려 드는 대문짝만한 방패라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지만.


''유일한 변수라면 장갑 사이에 채워 넣은 내용물인데...솔직히 액체 금속이나 젤이 들어있다면 별 문제 아니야.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나노머신이 채워져 있는 거라면 이야기가 좀 복잡해지지. 그 특성에 따라 작전에 세부적인 제한사항이 생기니까. 최악의 경우에는 내가 생각해낸 파훼법이 먹히지 않을 수도 있고.''


''...아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네.''


레오나 대장님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시던 마리 대장님이 입을 여셨다. 


''라비아타 통령의 공격을 버텨낼 수 있고, 그 상태로 전투를 지속할 수 있는 나노머신은 내가 아는 한 하나밖에 없네. 과거에 블랙리버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 중에 충격 흡수용 나노머신을 개발하는 게 있었는데, 연구자들이 실험한 내용에 의하면 어지간한 핵폭발도 견딜 수 있다고 하더군. 비용과 안정성에 문제가 있어 제식화되지는 못했지만.''


''블랙리버산 나노머신이라...가능성은 있네. 근데 그런 걸 철충들이 어떻게 손에 넣은 거지? 제식화는 못했다면서?''


''아마 어딘가에 보관해놓은 프로토타입을 입수한 거겠지. 멸망전쟁이 한창일 때도 계속 연구를 진행했다고 하니까. 하고 많은 프로토타입 중에서 그걸 손에 넣은 건 유감이긴 하지만,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군.''


''최악의 상황이 아니라니, 핵폭발도 견디는 나노머신이 적들의 손에 들어가서 우리 목숨을 노리고 있는데?''


'''미완성' 나노머신일세. 내가 방금 말하지 않았나. 완성도 면에서 문제가 있었다고. 나노머신의 내구도는 분명 강하다네.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충격에 한해서지. 나노머신이 충격을 흡수하고 분산하는 동안 다시 충격이 들어오면, 손상이 점점 누적되는 단점이 있었네. 단순히 말하자면, 핵폭탄 한 발은 거뜬히 버틸 수 있지만, 자동소총을 연발로 갈기면 조금씩 손상이 된다는 의미지. 저 방패가 공격을 계속 버티지 못하고 간간히 후방으로 빠지는 이유이기도 할 걸세. 나노머신의 손상을 최소화하려는 거겠지.''


마리 대장님의 설명이 끝나자, 한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레오나 대장님은 다시 팔짱을 끼고 생각에 빠지셨고, 마리 대장님은 지친다는 듯 한숨을 쉬며 수통을 주섬주섬 꺼내시고 계셨다. 나는...그냥 가만히 있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오간 대화의 70%는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정도는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잠깐 컷! 말하지 말아봐, 내가 맞추게!''


''...뭐, 그러세요.''


기왕이면 자신이 결론을 말하기를 원했던 것인지, 라비아타는 약간 김빠진 듯한 투로 대답했다. 그 모습에서 죄책감이 약간 느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머릿속에 떠오른 이 불길한 상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을 수는 없었다.


''혹시...혹시나 말인데, 짧은 시간 내에 한 지점만 죽어라 패라, 뭐 이런 건 아니겠지? 응? 에이, 그렇게 심각하게 토의해놓고 이렇게 김 빠지는 결론이 나올 턱이...''


''정확해요.''


''...''


왜 항상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걸까?


''야, 장난해?! 그렇게 시간을 오래 잡아먹고는 기껏 내놓은 해결책이 '그냥 패세요'라고? 무슨 궁극기 킨 3)알리스타 잡냐, 죽을 때까지 패게?''


''진정하세요, 진정. 일단 방법이라도 생각해낸 게 어디에요?''


라비아타의 말에 잠시 잃었던 평정을 되찾았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그래도 방법을 알아낸 게 어디야? 좀 많이 돌아가긴 했지만, 결국은 정답을 찾았으면 된거다. 그렇게 생각하자. 안 그러면 억울해 죽을 것 같으니.


''...맞는 말이니까 내가 참는다, 진짜. 그래서, 그 대단하신 작전은 언제 시작하는 건데?''


''곧 시작할 거예요. 레오나 대장님이 공중 부대에 지시를 내리는 게 끝나면, 마리 대장님이랑 함께 이쪽으로 오실 거고, 계속 움직이면서 히트 앤 런으로 하나하나 처리하는 거죠.''


''공중 부대는 왜? 그리고 히트 앤 런이라니, 그냥 늘 하던 것처럼 너랑 내가 탱 하면서 나머지 둘이 뒤에서 딜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아무리 그레고르 씨랑 제가 강하다고 해도, 그렇게 전면전으로 붙으면 화력이 밀려요. 아마 그랬다가는 순식간에 전선이 뚫리고 사이좋게 저세상으로 갈 걸요? 게다가 그레고르 씨는 이래 보여도 최후의 인간 중 하나잖아요. 그레고르 씨가 전선에 나섰다가 전사하면 본말전도죠. 그리고 공중 부대의 경우에는, 자신의 무장이 파괴되는 걸 감지한 연결체가 직접 우리 쪽으로 올 수도 있다는 마리 대장님의 의견이 있어서요. 공중 부대는 불청객이 난입하는 걸 막는 역할을 할 거예요. 공중 부대가 계속 귀찮게 굴면, 저쪽도 이쪽을 도우러 올 여유가 없어질테니까요.''


''본체가 다 쌩까고 다이렉트로 이쪽으로 오면?''


''그럼 일시적으로 후퇴했다가 다시 모여서 공격하는거죠. 어차피 공중 병력을 지휘하는 레오나 대장님이 여기 있는 이상, 연결체도 여기를 쉽게 떠나진 못할 테니까요.''


''...벌써부터 저 연결체가 뒷목 잡고 신음하는 모습이 눈에 훤하군. 쟤가 쇳덩이여서 망정이지, 사람이었으면 이미 고혈압으로 쓰러지고도 남았겠어.''


레오나만 처리할 심산으로 왔다가 졸지에 빼도박도 못하는 상황이 된 셈이다. 혹 떼려다 되려 혹 붙였다는 말은 이때 쓰라고 만든 거겠지. 딱하게 됐다, 하필이면 상대를 잘못 만나서.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뭐, 저희 알 바는 아니지만요.''


''너무 해맑게 말하는 거 아니야?!''


                                                                                               


패러디 목록


1) 프롬 소프트웨어의 게임 시리즈. 상대의 공격 타이밍에 맞춰 구르기로 회피하지 않으면 골로 가는 난이도로 유명하다.


2) 터키 대표 음식인 케밥의 한 종류. 꼬치에 고기와 야채를 꽂고 구워먹는 요리다.


3)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의 캐릭터인 알리스타는 궁극기를 쓰면 7초 동안 받는 피해가 최대 75%까지 줄어든다.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궁극기 킨 알리스타를 죽이려면 궁극기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할 정도로 효과가 좋은 궁극기.


이번에도 짧은 분량과 느릿느릿한 전개에 다시 사과드리며. 나쁜 소식 하나를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약 2달 간 글을 올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핸드폰 반입이 금지된 GP라는 인외마경에 투입되게 되어 9월까지는 인터넷에 접속할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싸지방에서 인터넷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제가 거기서 글을 올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인지라 사실상 2달 간 휴재라고 보셔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여러모로 무책임하게 글을 방치해놓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규정은 규정인지라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다시 휴재를 하는 점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달 동안 다시 의욕과 아이디어를 보충하고, 9월에 다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