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 네. " 


" 그럼 오늘부터 내꺼해. " 


" … 네? " 


주변에선 술렁이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러움이 절반, 질투가 절반 섞인 듯한 이들의 목소리는 솔직히 말하자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 싫은데요. "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던 이들의 목소리는 한 순간에 멈추었다. 

… 내가 잘못한 건가? 아니, 따지고 보면 굳이 사람도 많은 이 자리에서 저런 식으로 고백을 하는 선배가 나쁘다 생각하는데. 


" … 뭐? "


당황한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는지, 어이없다는 듯이 날 쳐다보며 기분 좋게 마시려던 술잔을 다시금 내려두었다. 

뭐가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썩은 표정으로 날 지그시 응시하던 그녀는 다시금 물었다. 


" 싫다고? " 


" 네. 저 선배하고 그닥 친한 것 같진 않은데… . " 


뜨겁게 달아올라 있던 분위기는 한 순간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이를 어떻게든 포장하려고 하던 것인지 평소 친하던 선배들이 급히 나를 일으켜 변명했다. 


" 애가 많이 취했나보다. 데리고 먼저 갈게. " 


" … 아니, 선배 잠시만요. " 


" 따라와. " 


무어라 말이라도 하려던 나를 막아서듯 남자 선배는 질질 끌듯이 가게 밖으로 나를 데리고 나왔고, 나는 그런 선배에게 한마딜 할 수 밖에 없었다. 


" 아니, 솔직히 선배도 아시잖아요. 저 선배 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저러는거. " 


" …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리 과에서는 제일 인기 많은 사람인데 그렇게 말하면 쟤 입장에서 뭐가 돼. " 


담뱃불을 붙이고 새하얀 입김을 가득 불던 선배는 한숨과 함께 말을 이어나갔다. 


" 그리고 뭐가 그리 싫어. 솔직히 이쁘지, 착하지. 돈도 많지. 이 자리도 쟤가 다 산다고 해서 모인 거잖아. " 


" 그게 뭐가 중요해요. 저랑 안 친한데. " 


답답하다는 듯이 나를 설득하려던 선배는, 확고한 내 대답에 질려버렸는지 허탈히 웃으며 담배를 태울 뿐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뭔가 껄끄러웠다. 국가장학금을 받으며 겨우 대학교를 다니던 내가, 그런 걱정도 없이 세상 물정 모르고 사는 이를 뭘 믿고 만나겠는가. 


애초에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살아온 그녀가, 무엇 하나 충족함 없이 살아온 나를 어찌 이해하리. 

누군가 이런 나를 본다면, 굴러 들어온 복도 제 발로 차버리는 머저리라 욕하겠지만, 오히려 나는 그 편이 더 불편했다. 


…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 본다면 뭔가 속내가 있을 것이 분명했으니. 언제 날 가지고 놀다 버릴지도 모르고. 


담뱃재를 툭툭 털어 재떨이통에 던지던 선배는 그래도 내게 마음을 써주는 것인지, 뒷처리는 자기가 하겠다며 집에 가라며 다시금 가게로 들어갔다. 

고맙다며 한 마딜 내뱉은 나는 네온사인이 가득한 거리를 홀로 걸어갔다. 


내일부터 대학 생활이 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뭐… 고백 한 번 거절했다고 그렇게까지 될까 싶기도 하겠지만, 아무래도 영향력이 큰 인물이다보니 무리도 아니겠지. 

모르겠다. 집에나 가자. 


편의점에서 숙취 해소제를 하나 사 들고, 동생과 단 둘이 있는 자그마한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알바하기도 바쁜데 무슨 연애일까… . 솔직히 관심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연애에 시간을 할애할 시간은 굳이 만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집으로 돌아온 나는, 동생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럼에도 거실에서 은은히 비추고 있는 스탠드의 조명은 아직 동생이 자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 안 자네 아직. " 


" 또 늦었네. 대학 생활도 일인가 봐? " 


" 그러게. 피곤하다 피곤해. " 


열심히 필기하던 노트와 책을 덮은 그녀는, 그제서야 맘이 놓인 것인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잘 자. 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거실 한 켠에 이불을 깔고 누운 나는 그제서야 핸드폰을 확인했다. 

수도 없이 쌓여있는 알림들. 과톡방은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건만, 개인톡으로 온 것이 수도 없이 쌓여있었다.


『 야, 너 어쩌려고 그래. 』 


『 너 좋아하는 애라도 있었어? 말하지 그럼. 』 


『 그 선배, 너 나가고 몇 분 뒤에 화나서 나가더라. 그러던 와중에 계산은 하고 나갔어. 뭐가 성에 안차서 그러냐? 』 


여러 이들에게 와 있던 카톡에 대충 답장을 마친 나는, 핸드폰을 무음 모드로 설정하고 잠에 들었다. 

이게, 그렇게 큰 일인가. 






*






" 야 야, 너 딱 타이밍 맞게 잘 왔다. 아까 그 선배 너 찾다 갔어. " 


" … 나를? " 


" 저 정도면 진짜 좋아하는 거 아니냐. 받아주지 왜? " 


" 너는 너랑 별로 친하지도 않은 선배랑 사귈 수 있어? " 


" … 이쁘고 돈 많은 여자가 고백하면 받는 게 정상 아닌가? " 


" …… . " 


뭐가 문제냐는 듯이 말하던 동기에게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기야 뭐… 사귀면서 서로를 알아갈 수도 있는 법이고, 본성이라는 것은 만나 봐야 아는 것이니까. 


어쩌면 좋을지 물어나볼까 싶던 찰나, 강의실 문이 열리고 웅성이는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아직 교수님이 들어온 것도 아닌데, 애초에 뒷문으로 들어오실 리도 없고. 대충 누군지는 짐작이 갔다. 


" 잠깐 얘기 좀 할까? " 


옆에 있던 내 동기는 저 멀리 시선을 회피한 채로 알아서 하라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 좀 도와주지.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로 걸음을 옮기던 선배를 따라 걸어갔다. 

한창 1교시가 시작할 시간이었기에 딱히 캠퍼스 주변을 서성이는 이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지나가는 몇몇 이들은 무슨 광경일까 싶어 한 번 쯤은 훑고 가는 것 같았다. 


역시 부담스럽다. 이 선배는 너무 이목을 끄는 스타일이다. 


" 왜 싫다고 했어? 솔직히 이런 말 하기는 싫지만, 나 좋다는 사람들 널리고 널렸는데. " 


" 그래서 싫은 거에요. 뭐가 아쉽다고 저를 만나요? "


" … 어? "


추궁하는 듯이 말을 내뱉던 선배는, 예상 못했다는 듯이 얼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선배. 솔직히 말할게요. 저 그렇게 잘 사는 집도 아니고, 연애 할 시간도, 의지도 없어요. 그리고 선배는 저한테 너무 아깝지 않을까요. " 


" …… . "


이쯤 하면 됐겠지 싶어 자리를 뜨려던 찰나였다. 

조곤거리듯 중얼거리던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뭐가 문제라는 건지 모르겠네… . " 


내 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순전히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던 것인지. 

그런 말을 내뱉은 선배에게 나는 말을 덧붙인 채 걸어갈 뿐이었다. 


" 좋아할 이유가 하나도 없잖아요. 지금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 


강의에 늦지는 않을까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 딱히 늦지는 않겠네. 


조금 여유로워진 걸음 사이로, 묘하게 내게 가까워지는 발소리는 차츰 커져가기 시작했다. 


" 잠깐만, 난 아직 얘기 안 끝났어. " 


일방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려는 선배와, 귀찮다는 듯이 뿌리치는 나. 

묘하게 팽팽해진 기류 사이로, 선배는 아리송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 도와줄 수 있어 내가. 앞으로 귀찮게 안 할 테니 아는 사람 정도로는 지낼 수 있는 거잖아. " 


" … 싫다면요? " 


" … 하, 그래. 강요는 안 할게. 네 입장도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서로 알아갈 시간 정도는 갖게 해달라는 거야. " 


나는 왜 이토록 선배가 내게 집착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뭐, 그래봐야 값싼 동정심이나 찰나의 즐거움 때문이겠지. 

그게 아니라면 자기만족. 나는 네 위에 있다. 그러니 널 도와주겠다… 뭐 이런 느낌. 


" 마음대로 해요. 저 강의 늦어서 이만 가볼게요. 나중에 뵈요. " 


또 한번 등을 돌렸지만, 다행히 이번엔 선배가 나를 막아서지 않았다. 


강의는 늦지 않았지만, 그닥 집중되지는 않았다. 

뭐가 그리 궁금한지 이것저것 캐묻는 동기에게 대충 설명한 나는, 시간을 어디서 떼울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3교시까지는 공강이었으니, 평소라면 어디 조용한 곳에서 혼자 앉아있겠지만… . 


습관적으로 확인한 핸드폰 스크린에 알림이 하나 와 있었다. 

평소 자주 보던 친구들은 전부 다 알림을 꺼두었으니 새로운 사람이겠지. 


확인해보니, 전화번호를 준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안 것인지 익숙한 이름 석 자가 찍혀있었다. 


『 어디야? 강의 끝났으면 잠깐 카페에서 볼까. 』 


참 행동력도 좋다 싶었다. 

읽고 씹기도 참 애매하고, 어차피 할 것도 없던 찰나에 괜찮지 않을까 싶어 나는 장소를 묻고,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이참에 확실하게 물어봐야겠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내게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인지. 

뭐, 보나마나 사탕발린 소리나 하겠지만 그게 어딘가.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고, 카페 안쪽 자리에 자리 잡고 앉아있던 선배에게 다가가 맞은편에 앉았다. 


" 왔네. 솔직히 온다고 할 줄 몰랐는데. " 


" 선배가 그랬잖아요. 알아갈 시간 정도는 필요하다고. " 


조금 나쁜 의도였지만, 한 가지 계획이 있었다. 

그냥 싸가지 없는 태도로 일관하면 선배도 질려서 떨어지지 않을까 하고. 

뭐… 동기들이나 다른 선배들이 알게 된다면 조금 불편한 상황이 되겠지만, 그건 그 후의 얘기니까. 


" 응, 고마워. "


" 그래서요? 하나만 물어볼게요. 제가 왜 좋은데요? " 


" 어, 어? …… 남들과 달라서? " 


" … 뭔데요 그게 도대체. " 


" 그야, 다른 애들은 어떻게든 나한테 붙어서 잘 보이려고 애쓰는데, 너는 그런게 없었거든. 뭐라도 받아먹으려  겉으로만 날 보고 고백하는 애들은 질렸으니까. " 


" 그러니까 지금 자기 자랑이나 하려고 부른 거에요? " 


음, 조금 쌨나. 

평소에 안하려던 말을 하려니 아무래도 안면 근육이 계속 일그러진다. 

하필 지금 눈이 마주친 탓에, 선배의 눈에는 지금 내가 찡그린 표정으로 악담이나 퍼붓고 있는 나쁜놈으로 보였겠지. 

그래도 이쯤 말하면 이제 끝나지 않을까 생각했건만, 내 기대와 달리 그녀의 눈은 아직도 내게 맞닿아 있었다. 


뚫어져라 빤히 응시하던 그 갈색 빛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추고 있었다. 

… 화났나? 


" 아니 난 그냥…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해. " 


한참 동안 맞닿아 있던 시선이 그제서야 틀어졌다. 

… 저런 반응을 보이면 오히려 내가 미안해 지는데. 

평소 선배를 바로 옆에서 본 적이 없었던 탓일지는 몰라도, 이런 성격일거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의외로 마음이 여릴지도 모르겠다. 


" 그러니까 선배. 선배는 자기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고 있잖아요. 그리고 저는 선배에게 그런 마음은 없구요. 그럼 제일 답은 나온 거 아니에요? " 


" 잠깐만, 잠깐. 말 했잖아. 난 내 겉만 보고 좋아해주는 사람한테는 관심이 없다고. " 


" … 제가 선배를 잘 알지도 못하는데 이렇게 떠드는 건 좋아하고요? " 


" 그러니까 알아가자는 거잖아. 솔직히 말해서 나 지금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 뭐가 뭔지 잘 모르겠거든. " 


아, 뭔지 알 것 같다. 

평생 누군가에 위에서 군림해 오던 이가, 대뜸 쓴소리를 듣기 시작하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는 거겠지. 

그건 아마 당황이 아닐까. 평생 겪어보지 못했던. 

그게 좋아한다는 감정이 될 리는 전혀 없을 것이고 말이다. 


" 솔직히 불편해요. 선배가 예쁘고 인기 많다는 것 정도는 저도 아니까 부담스럽기도 하고요. " 


" 아니, 나는… . " 


이렇게 보니 의외로 표현에 서툴지 않나 싶었다. 

이런 대우를 받아본 것이 처음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충격 때문인지 나로서는 알 방도가 없지만 말이다. 


" … 친해지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야, 어차피 다 그렇게 지내고 있고… . " 


" … 그래요 그럼. 이상한 소리만 해서 미안해요. " 


솔직히 겉만 보고 선배를 판단하지 않았다 하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그야 모든 걸 갖고 있는 사람을 무의식 속에서 질투하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이 짧은 대화로 보건대, 내가 생각했던 것 만큼 이기적인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과는 해야겠지. 이번엔 분명 내 잘못이니까. 


기쁘다는 듯이 반달을 그리며 웃던 선배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항상 그렇게 웃고 있던 선배인데. 이토록 자연스레 웃었던 적이 없었던 건지. 

그게 아니라면, 지금 거짓된 미소를 띄우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






" 안녕. 일찍 나왔네. " 


" … 지금 약속 20분 전인데요. " 


" 응, 그니까 일찍 나왔다고. " 


선배와 처음 대화다운 대화를 한 그 주의 주말. 

주말에 밥이라도 한 끼 하자던 말에 차마 거절하지 못한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 

… 그래도 늦지 않으려 나름 일찍 나왔는데, 도대체 선배는 얼마나 기다린 건지도 모르겠다. 


아이러니하게도 요 며칠 묘하게 가까워진 선배는 알아가면 알아 갈수록 좋은 사람이구나 싶었다. 

겉만 보고 사람을 판단한 내게 있어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지만, 어쩌겠나. 사실이 그런데. 


아침에 어쩌다 마주치면 커피라도 한 잔 사주며 나를 배웅하고, 학과 내에 잠시 돌았던 소문은 어떻게 된 것인지 한 순간에 사라져, 다시금 평화로운 대학 생활을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 선배가 손을 쓴 것이겠지. 그러한 일이 있고 나서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 하는 배려. 

그런 점만 두고 본다면, 분명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 근데 선배는, 남자친구 없어요? 이래도 되는 거에요? " 


" 내가 남자친구가 있었으면 너한테 그날 고백하지도 않았겠지. " 


그건 그런가. 하기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삐뚤어진 사람은 아니겠지. 

신기하다 싶었다. 돈만 있으면 뭐든 다 하고 다닐 것 같았는데. 

평생을 없이 살아온 내게 있어 판타지와 같은 존재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괜히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다. 

… 이번 달 생활비도 빠듯한데, 괜히 만나자고 했나. 


" 예약해 둔 곳 있어. 그쪽으로 가자. " 


… 예약까지? 의외로 계획이 있다 싶어 따라가려던 내 걸음은, 어느 순간 멈추고 말았다. 


" 타. 왜? " 


" 아… 네. " 


아무렇지도 않게 검은색 외제차에 몸을 싣던 선배를 멀뚱히 쳐다보다 조수석에 올라탔다. 

역시 아니라고 생각하려 해도, 습관적으로 베어 나오는 것들은 숨길 수가 없나보다. 


이 모든 것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움직이는 선배와, 이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나. 

아무리 생각해도 정 반대의 인생이다. 


" 맞다. 이번 시험 족보 구했어? 못 구했으면 줄까? " 


" 아, 어… 네. 주시면 저야 고맙죠. " 


" 히, 다행이네. " 


룸미러 너머로 보이는 해맑게 미소짓던 선배에게 딱히 무언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평소엔 자연스러운 모습이었기에 잊고 있었지만, 지금 내게 놓여진 상황은 잊고 왔던 모든 것을 상기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역시, 내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 아 그리고, 애들한테 들었는데 너 대학교에서 여자친구 만든 적 없었다던데, 이유라도 있어? " 


" 다 돈이잖아요. 그럴 시간도 없고요. " 


지금도 그렇다고 덧붙이려다 애써 말을 삼켰다. 

마치 누군가 들으라고 꺼낸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어쩌겠나. 이게 사실이고 현실인데. 

하지만 그럼에도 선배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 걱정하지 마. 오늘 부른 건 나니까. " 


" … 다음엔 제가 사죠 그럼. " 


" … 다음에도 보자는 거네? " 


싱긋 웃으며 조용히 목소리를 낮추던 선배에게 아차 싶던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묘하게, 묘하게 빠져드는 매력이란 것이 있었다. 


검은 흑발 사이로 보이는 이어링. 자연스레 올라가 있는 입꼬리. 모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또렷한 이목구비. 

더 이상 바라보았다간 빠져들 것만 같아서 고갤 돌려버렸다. 

위험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한없이 완벽한 사람인 것만 같아서. 그녀라는 늪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조금 길게 이어지던 침묵. 

그러한 침묵을 깨고 한 차례 울리던 핸드폰 벨소리. 

선배의 핸드폰은 아니었고, 주머니에서 울리던 핸드폰을 꺼내어 잠시 눈치를 살피던 내게 선배는 말했다. 


" 신경 안 써도 돼. 받아. 아니면 잠깐 세워줄까? 받고 올래? " 


" 괜찮아요. 동생이라. " 


배려가 몸에 묻어 있구나. 저런 사람을 곁에 두면 어떤 기분일까 싶기도 했지만, 지금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전화를 받은 나는, 조용히 말했다. 


" 응. 왜? "


" 오빠, 지금 어디야? "


" 잠깐 밥 먹으러 나왔는데, 왜? "


" 아… 그래? 혹시 여자야? " 


" 그냥… 같은 과 선배. 미안, 말이라도 해야 했는데 자고 있길래. " 


" 아냐, 괜찮아. 언제 쯤 들어와? " 


잠시 옆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던 선배의 눈치를 살폈다.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정면을 주시하던 선배. 


" 저녁 되기 전까지… 는 들어갈 것 같은데. " 


" 알았어. 이따 봐. " 


" 응. " 


이윽고 끊긴 전화. 

무언가 말하려는 것이 있다는 듯이 내 눈치를 살피던 선배가 보였기에, 나는 가만히 기다렸다. 


" 사이 좋은가 보네. 부럽다. " 


" 어릴 때부터 둘이 살았거든요. 좋든 싫던 잘 지내야죠. 선배도 동생 있어요? " 


" 응? 있지 여동생. 근데 그렇게 사이가 좋지는 않아. " 


" … 선배 성격이면 분명 친할 것 같은데. " 


" 그럴 것 같아?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 


배시시 웃던 눈과 달리, 조금 씁쓸해 보이던 입꼬리를 애써 모른 척했다. 

굳이 남의 가정사까지 깊게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한 것인지, 파킹 직원의 안내에 따라 주차를 마치고 들어선 곳은 흔히 보이는 고깃집이었다. 

솔직히 부담스러운 상황이 연출되지는 않을까 걱정했건만, 그런 나를 배려한 것인지는 몰라도 나로서는 충분히 고마웠다. 

어디 메뉴도 모르고 분위기도 적응하지 못할 레스토랑 보다는 훨씬 나을테니까.


" 여긴데… 괜찮아? 아니면 더 좋은 곳으로 가도 괜찮은데. " 


" 여기가 좋아요. 그건 제가 부담스럽거든요. " 


" 다행이네. " 


미소를 띄우며 걸어가던 선배를 따라 걸었다. 

들어가니 방을 안내해 주었고, 둘이서 있기에는 조금 넓지 않나 싶었지만 좁은 것 보단 나을테니 괜찮지 않을까. 


테이블은 이미 셋팅되어 있는 상태였고, 물컵에 물을 따르려던 순간, 나보다 빨리 물을 채워 넣던 선배에게 왠지 모를 패배감을 맛봐야만 했다. 


" 그러고 보니 선배, 인기 많아서 주말에도 바쁠 것 같은데. 괜찮아요? " 


" 응? 다 비워 놨지. 그리고 나가 봐야 재미도 없구. " 


궁금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던 터라 질문을 하려던 찰나에 문을 열고 들어온 종업원. 

왜 나한테 잘해주냐 물어보려던 질문은 그렇게 사라졌다.

고기 3인분. 술은 당연히 시키지 않았다. 


어떻게 선배를 대해야 할 지, 감도 잡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먼저 질문을 꺼낸 것은 선배 쪽이었다. 


" 주말엔 보통 뭐해? 시간 괜찮으면 자주 볼래? " 


" 아, 알바가 있어서요. 그건 조금 힘들 것 같아요. " 


" 그렇구나… 그럼 혹시 오늘도? " 


" 네. 잠깐 대타 부탁하고 왔어요. " 


" 괜히 미안하네. 그,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 "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두툼한 고기를 불판 위에 올리며, 말하라는 듯이 눈을 마주쳤다. 


" 도와줄까? 그, 음… 돈을 직접 준다고 하면 싫어할 게 뻔하니까, 일 하나 해볼래? 페이 쌘 걸로. " 


" 일이요? 무슨 일인데요? " 


" …… 으으으음, 곧 1학기 끝나잖아. 그동안 나하고 같이 다니기만 하면 되는 건데. " 


뭔가 숨기는 것이라도 있는 것인지 자세한 설명은 해주지 않는 듯한 모습에 눈을 찌푸렸다. 

… 뭐 어디 불법적인 일을 하는 건 아니겠다만, 같이 다니기만 해도 되는 일이 도대체 어디에 있다고. 


" 되게 이상한 일이네요. 무슨 내용인지 말 안 해주시면 못하죠. " 


" 하, 그게… 그러니까 사실 내가 지금 약혼 때문에 머리가 아픈 상황인데, 죽어도 싫거든. 그래서 내 남자친구 역할을 해줄 수는 없나 해서… . " 


" … 그런 거라면 좋아할 남자가 널리고 널렸을 것 같은데요. " 


" 전에도 말했지만, 다 내 돈이나 몸만 봤지 나라는 사람을 보지는 않잖아. " 


" 알바라면 그것도 똑같은 거잖아요. 겉으로만 좋아하는 척하면 전부인. "


" 그건… . " 


터무니없는 부탁이긴 했다. 

아무리 지금 같이 밥을 먹고, 데이트라면 데이트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지만 솔직히 연인 사이는 결코 아니다. 

제대로 알고 지낸 지는 이제 막 1주일이 되어 가려던 찰나에, 남자 친구 역할을 부탁한다면 조금 어려울 수밖에. 


… 좋은 사람이기는 해도, 내게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니까. 


" 그럼, 날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해줄래? " 


" …… . "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것인지 대뜸 그런 말을 꺼내던 선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뭐, 그렇게 까지 말한다면 솔직히 거절한 이유는 없었다. 

돈만 벌면 그만 이었으니까.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다면 더 바랄 것도 없고. 


" 그래요 뭐, 그런 조건이라면 한번 해보죠. " 


" 아, 진짜? 고마워! " 


… 약혼이 그리도 싫은 걸까.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다. 

말 없이 고기를 뒤집고, 다 익은 고기를 선배의 접시에 놓아준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괜찮은 걸까? 우선은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것으로 약혼을 미룬다고 한들, 집안에서 정하려는 것을 선배 본인이 막을 수는 있을까. 

그 잠깐, 짧은 방학 기간 동안 그것이 해결될 수 있기는 할까? 

아니 뭐, 여기까지 내가 고민할 필요는 없겠지. 온전히 여기부터는 선배의 역할이니까. 


… 맛있네. 어째 가격이 심상치 않더라니 이리도 맛이 다를 수 있구나.

몇 번 고기를 집어먹던 선배는 내 눈치를 살피더니, 어딘가 망설이고 있는 듯 보였다. 


" 왜요, 그렇게 바라보면 먹기 힘든데. " 


" 어? 아니 그, 음… 혹시나 해서 말인데. " 


물을 한 모금 마시던 나는 여전히 선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는 것인지. 


" 좋아해주는 건… 역시 무리일까? "


" …… . " 


예상치 못했던 말. 

여전히 내 눈치를 살피며 힐끗거리던 선배에게 난 도대체 무어라 말해야만 했을까? 


따지고 본다면 인간성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사람일 것이다. 

그럼에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애초에 서로에게 놓여진 집안 배경이겠지. 

아무리 지금 선배가 나를 배려하고 있다고 한들, 결국 시간이 지날 수록 서로의 가치관에 따라 뒤틀리게 될 것이 뻔했다. 

그런데 좋아하기는 무슨, 오히려 부러움에 가까운 무언가가 아닐까. 


" 선배. 밥 먹으면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지만, 솔직히 말할게요. 선배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전 가난해요. " 


솔직히 누군가에게 이런 얘기를 털어놓을 줄은 몰랐다. 

가난하다는 얘기를 시작으로, 나는 어릴 적 있었던 집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자세히. 

밥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해서 중학교 때부터 알바를 시작했었고, 지금까지 쭉 이어져 내 먹을 것을 줄여가며 동생을 돌보고 있다고. 

급식을 먹는 점심을 제외하고는 생활비를 내기에도 급급했으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런 내가 연애 할 틈이 어딨냐고. 지금 이런 상황도 솔직히 불편하다고. 


이쯤 말했으면, 알아줬으면 했다. 

이 사람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동정심을 느끼던 뭘 느끼던 괜찮으니 더 이상 정을 붙여주지 않아줬으면 했다. 


생각에 잠긴 듯이, 조용히 내 얘기를 듣던 선배는 얘기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 입술을 떼지 않았다. 


괜히 말한 건가 싶어 이 상황을 무마하려 쌈을 싸던 나는, 선배의 입 앞에 억지로 들이밀었다. 

그제서야 정신이 든 것인지 조금 놀란 눈빛으로 날 보던 선배. 


" 아- 해봐요. " 


" 어, 어? " 


…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억지로 쑤셔 넣은 감이 없잖아 있다. 

그럼에도 우물우물 거리며 날 바라보던 눈을 조용히 피해버렸다. 


" 선배가 어떤 생각을 하던 신경 안 쓰지만, 그거 하나 만큼은 알아줘요. 저는 선배하고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 


" 으음, 음… 근데 말이야. " 


입안에 남아있던 음식을 마저 넘기던 선배는 잠시 말을 끊고, 음료수로 입가를 적신 후 말을 이어나갔다. 


" 그런 것 때문에 날 좋아할 수 없다는 건 거짓말 아니야? " 


" … 네? " 


" 그야 그렇잖아. 사랑하는 것 자체에는 돈이 드는 것도, 힘들어지는 것도 아니잖아. 난 네가 나한테 기대줬으면 좋겠는데. " 


당황했다. 

선배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다. 

다른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처음 털어 놨기 때문인지, 처음으로 느낀 지금 이 감정에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만 같았다. 


" 아, 음 그… 멋대로인 얘기일지도 모르겠는데. 솔직히 말이야. 나 너 좋아해. 그래서 뭔가 더 해주고 싶고… 그. " 


" 네? " 


" 왠지 모르게 날 바라보는 눈빛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뭔가 갖고 싶어졌다고 해야하려나… . " 


" … 저는 물건이 아닌데요. 왜 저를 좋아하는 지도 모르겠고. " 


" 아, 그래. 지금 그런 점이 좋다는 거야.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느낌? 그리고 솔직히, 너 본인은 모르는 것 같은데 너 좋아하는 여자애들 엄청 많다? " 


도통 모르겠다 여자라는 생명체는. 

뭐든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누구보다 감성적이고. 

오히려 그래서였을까?

솔직하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 이성에게 끌리는 것은. 


" 너처럼 무뚝뚝한 사람에게 받는 사랑은 도대체 어떤 느낌일지, 왠지 언제 까지고 나만 바라봐줄 것만 같은 그런 느낌? " 


" 그건 좋아할 이유가 아닌 것 같은데요. " 


" 바보야. 여자들은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니야. 곁에 있고 싶은 사람을 좋아하는 거지. " 


" …… . "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토록 이기적인 감정을 갖고 있는 주제에, 뭐가 좋다고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해 주는지. 


" 그리고 하나 둘 맞춰가는 거야.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맞춰주지도 않거든. 어떻게 하면 사랑하는 이의 곁에 더 오래 있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그렇게 변해가는 거야. 서로가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 나도 지금 그렇고. " 


" 선배, 보기와는 달리 되게 감성적이네요. " 


" … 지금 용기 내서 말하는데 이러기야? " 


괜스레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오랜만이구나 싶었다. 이렇게 자연스레 웃어본 적이. 

솔직히 말하자면 귀여웠다.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선배의 진짜 모습을 보고 있기에 그런 걸까. 

그게 아니라면 단지 찰나의 거짓 일수도 있겠지만, 그저 지금 나는 빠져버리고 만 것이다. 


지금 내 눈앞에서 웃고 있는 여성에게. 


" 선배 후회할 텐데. 저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니에요? " 


" 내 눈엔 아니야. 너, 계속 그런 식으로 말한다고 해도 난 포기 안 하니까. " 


" … 이제 그럴 필요 없어요. " 


옅게, 그리고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무슨 의미인지는 조금 뒤에 알아차린 것인지, 선배도 밝게 웃고 있었다. 

… 예뻤다. 언젠가 봤던 것처럼 자연스레 미소 짓고 있었다. 

이게 정말 기쁠 때 보이는 표정이구나. 


" … 너, 진짜 사람 여럿 홀리고 다녔지? " 


" 놀랍게도 모태솔로 인데요. " 


" 거짓말. " 


" 그럼, 제가 지금 사실 여자친구가 있고 몇 번이고 연애 경험이 있다고 하면요? " 


" … 으, 그건 제발 거짓말이면 좋겠는데. " 


" 푸흐, 거짓말이에요. " 


" 너… . "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 

지금 느끼고 있는 이 즐겁다, 행복하다는 감정이 얼마나 갈 수 있을지.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더 붙잡고 싶었다. 

늘 억제하며 살았던 감정을 처음으로 해방했다는 이 감각에. 


… 신기했다. 나와 정 반대의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는 것이. 


그럼에도 그녀의 두 눈만 보면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이토록 예쁘게 웃고 있었으니까. 






*






" 시험, 잘 봤어? " 


" 네 덕분에요. 고마워요. " 


" … 으, 아무리 그래도 이건 적응이 안되네. " 


" … 또 뭐가요. " 


" 아니, 생각해봐. 날 매정하게 차버렸던 사람이, 심장이 있는지도 의심되던 차가운 사람이 이런 말을 하잖아. " 


" … 저도 사람인데요. 고마우면 고맙다고 하고,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해요. " 


" 윽, 그, 한번만 더 해주면 안될까? " 


" …… 싫어요. " 


" 아 왜애- 한번만 해줘. 좋아해? 응? 이왕이면 사랑한다고 해주면 안될까? " 


꽤 시간이 흐른 지금.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녀와 가까워져 있었다. 

하루 하루가 즐거웠고, 웃는 그녀의 모습만 봐도 걱정 따윈 금방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 그리고 선배. 자꾸 집에 이상한 거 안보내주셔도 괜찮아요. 동생이 매일 저한테 묻는단 말이에요. " 


" 이상한 거라니… 나름 내가 직접 한 반찬들인데. " 


" … 그거 말고도 더 있으니까 하는 소리 아니에요. " 


" 왜? 집에 반찬 넣으려면 냉장고도 필요하고, 한국인이면 김치 냉장고도 필요하고, 또 맛있게 먹으려면 에어프라이기도 필요하고. 여름엔 더우니까 에어컨도 필요하고… . " 


" 그러니까, 고맙긴 한데 집이 좁아서 이제 더는 안 들어간다고요… . " 


" 아, 어? 그런 거였어? 음… 그러면 어쩔 수 없지. " 


" 제발 그만 보내요. 이미 충분히 고마우니까. 선배한테 받기만 하니까 미안하잖아요. " 


" 미안할 게 뭐 있어? 다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그리고 그렇게 부탁을 할 거면 그렇게 말하면 안되지. " 


" … 누나. 그만 보내줘도 돼. " 


" 프흐, 아핫- 응, 응. 그렇게 까지 말하면 내가 참아야지. 응. " 


… 다소 피곤한 면도 있지만, 뭐 즐거우면 그걸로 된 게 아닐까… . 

그래 뭐, 이렇게 날 신경 써주는데. 좋아한다는데… . 

내가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겠지. 


" 곧 방학인데, 그때 했던 말 기억하고 있어? " 


" 응? 네 뭐, 기억 하고 있죠. " 


" 그래서 말인데, 혹시 내 쪽으로 와줄 수 있을까? " 


" 네? " 


조금 망설이는 듯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던 선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짐을 싸서 가는 것엔 솔직히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럼에도 망설임의 원인은 아무래도 집에 홀로 남아있어야 할 여동생이겠지. 


아무래도 동생을 혼자 두는 것 만큼은 피하고 싶은데… . 

아무리 다 컸다고는 하지만, 거의 평생을 함께 살아온 것이다. 

그런 상황을 부순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 출퇴근 식으로는 안될까요? 아무래도 동생이 있어서. " 


" 아니면 동생하고 같이 넘어와도 괜찮아. 집도 따로 구할 예정이고, 솔직히 말하자면 네 집을 하나 구해줘야겠다 생각했으니까. " 


" … 그건 참아줬으면 하는데요. 어쨌든 동생하고 얘기 좀 해볼게요. 불편하지는 않으시겠어요? " 


" 나야 뭐, 어차피 앞으로 자주 볼 사이일 텐데. " 


자주 볼 사이라. 

… 뭐, 일단은 동생에게 먼저 얘기해봐야겠다. 

혹여 이런 나를 누군가 본다면 시스콤으로 볼 수도 있겠다만, 이건 단순히 보호욕에 불과하다. 


그저 이런 내 상황을 이해해 준 선배가 고맙기만 했다. 






*






" 그게 무슨 소리야?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니… . " 


" 좀 설명하기 복잡한데. 방학 동안 알바를 하기로 했는데, 이걸 하려면 자리를 옮기는 편이 편해서. 그렇다고 널 두고 가기엔 조금 그렇잖아. " 


" … 무슨 알바인데? " 


" 솔직히 그건 잘 모르겠다. 그냥 애인인 척 해주면 되는 거? " 


일 순간, 동생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별 생각 없이 말을 꺼내던 나는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 그게 뭐가 어때서? 


" 요새 우리 집에 뭔가 이것 저것 들어왔잖아? 그거 가져다 준 사람이 부탁해서, 잠깐 도와주고 오는거야. " 


" 그러니까, 애인인 척을 해주고 온다? " 


" 응. 약혼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그런 느낌. "


" … 되게 터무니 없는 얘기네. " 


" 하여튼, 너만 괜찮다면 짐만 조금 옮기고 거기서 생활할까 해서. " 


" 나야 뭐… 그런 거라면 상관 없지. 애인인 척이면 뭐. " 


묘하게 한 부분에 집착하던 동생의 말을 애써 해석하려 하지 않았다. 

뭐가 됐건, 허락을 받았다는 사실이 내겐 더 중요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흘러, 기다리던 대학교 생활의 첫 방학이 시작되었다. 






*






" 아, 안녕하세요… . " 


" 어머, 안녕하세요. 듣던 대로 귀엽게 생겼네… . " 


" 네? " 


" 아니에요. 평소에 오빠가 동생 분 얘기를 엄청 많이 했거든요. 말 잘 듣고, 착하고 잘 따라준다고. " 


" … 네. " 


뭔가,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동생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잘을 몰랐지만, 이렇게 낯을 가릴 아이는 아닐텐데. 

묘하게 째려보는 것처럼 선배를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고. 

뭐… 어색해서 그렇겠지.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 … 근데, 너무 넓지 않아? 여기서 셋만 살기에는 좀 큰 것 같은데 . " 


" 응? 이쁘고 좋지 않아? 나름 신경 써서 정했는데. " 


부자의 삶이란 도대체 뭘까? 

벽면 한 쪽은 아예 유리로 도배되어 눈 앞의 풍경이 전부 투명히 비추고 있었으며, 그 아래엔 자그마한 풀장까지 있었다. 

심지어 근처엔 높은 건물도 없이, 자연 환경마저 남아있었으니… 이런 곳은 도대체 어떻게 찾은 건지. 


" 뭣하면 청소해주는 분들도 계시고, 동생 분 불편하지 않게 기사님도 따로 준비해 놨으니까 이동하는 것에도 딱히 불편한 건 없을 거야. " 


어느 순간부터 내 옆에 꼬옥 달라붙어 있는 여동생이 뭔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낯선 공간에서 느끼는 불안감? … 모르겠다 잘. 


" 너, 여기 괜찮겠어? 앞으로 못해도 한 달 정도는 여기서 지내야 하는데. " 


" 싫어. " 


" …… . " 


생각보다 단호했던 동생의 대답.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것은, 나 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 음… 다시 집으로 돌아갈래? " 


" 갈래. 집에 가자. 응? " 


" 집에서 혼자 있을 수 있겠어? " 


마치 어린 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동생에게 물었더니, 싸늘히 식어버린 표정으로 짧게 대답하기를. 


" … 혼자? 싫어. 같이 가. " 


" 야, 너도 이제 고3 이고 다 컸는데… . " 


" … 가자고. " 


처음이었다. 이토록 자기 주장을 강하게 앞세우는 것은. 

그렇기에 어쩔 줄 몰라하던 나를 제치고 동생에게 다가가던 그녀. 


" 괜찮아요. 걱정하지 않아도. 정 불편하시면 언제든 돌아가셔도 … . " 


" 당신, 페로몬 향수나 덕지덕지 뿌리고 지금 할 소리야? " 


" … 응? " 


독하다는 듯이 코 앞을 이리저리 손으로 휘휘 젓던 동생. 그리고 동생이 했던 말은 내게 의문을 가져다 주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는 말 없이 동생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도대체 무슨 얘기가 오가고 있는 거지?


" 야, 당신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실례지. " 


" 오빠, 말 했잖아. 애인인 척이라고. 근데 페로몬 향수를 뿌릴 이유가 있어? " 


" … 하. 그러니까, 사실 사귀는 거 맞아. 그렇게 설명해서 미안해. " 


" …… 사귄다고? " 


굳이 동생에게 내 연애사를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굳이 말하지 않았건만, 어째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나로써는 도통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왜 저리도 날카롭게 반응하는 것인지 전혀. 


" 왜 그래 너. 오늘따라 조금 이상해. " 


" … 당장 돌아가. " 


도저히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아 나는 그녀에게 미안하다며, 집에 돌려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조금 당황한 것인지 알았다며 기사님을 부르던 그녀는, 배웅을 나올 때까지도 조금 굳은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동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고 그제서야 신발장에서 내 옷깃을 꼬옥 잡고 말하길. 


" … 오빠. 나랑 같이 있어줄 거지… . " 


" 너 왜 그래 도대체. 평소에 이런 적 없었잖아. " 


" 제발, 그렇다고 해줘… . "


" …… . " 


모르겠다. 무엇이 정답이고, 어디서부터 이렇게 변해버린 것인지. 

딱히 어울리는 대답을 찾지 못해 나는 동생을 가볍게 안아줄 뿐이었다. 

무슨 이유로 동생이 이런 행동을 보이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때 늦은 의존증이라도 도져버린 걸까… . 


어찌저찌 동생을 달래고, 거실 한 켠에 앉아있던 나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녀에게서 와있던 메세지들. 


『 괜찮아? 동생이 많이 불안해 보이던데. 』 


「 응. 그냥 조금 놀랐나 봐. 평생 저런 적이 없던 애인데 뭐지. 」


『 그… 이런 상황에 할 얘기는 아닌데, 약혼식이 내일 모레라서… . 』 


「 괜찮아 내일 까지는 


핸드폰에 정신을 놓고 있을 때였다.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 


" 그 년이야? " 


" 잠, 뭐라고? " 


불쾌하다는 듯이 까칠하게 묻던 동생의 눈매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언제 와있던 것인지, 도대체 언제부터 내 뒤에 있던 것인지 내 핸드폰을 낚아챈 동생은 스크린을 급히 두드리기 시작했다. 

느낌이 좋지 않아 황급히 손을 뻗어 핸드폰을 빼앗으니, 적혀있던 짧은 단어. 


「 헤어지자 」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동생에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알던 동생은, 분명 이런 모습이 아닌데. 


「 미안, 동생이 쳤어. 오늘 애가 왜 이러지 」


『 뭐라고? 』 


뒤늦게 해명하듯 메세지를 보냈지만, 그와 동시에 날아와 버린 그녀의 메세지. 


『 아, 동생이 한거야? 그렇구나. 』 


「 내일까지는 잘 얘기해서 다시 돌아갈게. 걱정하지 마. 」 


『 응. 기다릴게. 』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다짜고짜 이게 무슨 짓이냐며 동생에게 뭐라고 한 마디라도 하려던 찰나.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난 굳어버리고 말았다. 


왜… 왜 저런 눈으로 날 보고 있는거지?


일말의 빛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탁해진 눈동자가 아무런 미동도 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오한이 느껴졌다. 사람의 눈동자가 이리도 어두울 수가 있단 말인가? 

이윽고, 천천히 중심이 무너지듯 고개가 옆으로 기울여가던 동생은, 차디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 어째서… 어째서 도망가려는 거야? 난 여기 있는데… 늘 여기서 오빠 곁에 있었는데… . " 


" 너… 지금 뭐라고… . " 


" 오빠. 오빠는 나랑 평생 함께 해주겠다고 했잖아. 지켜주겠다고 했잖아. 나 만큼은 행복하게 살게 해주겠다고 했잖아. 늘 곁에 있을 거라고… 버리지 않겠다고 했잖아. " 


" 내가 널 버린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인데… . " 


" 다 알아. 나 버리고 떠날 거잖아. 그 년한테 홀랑 넘어가서 나 따위는 잊고 둘이서 살 거잖아. 아니야? 틀려? 내가 잘못 생각한 거야? " 


도대체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금방이라도 내 목을 조여버릴 듯이 날 감싸온 동생의 팔은 얼음장과 같이 차갑게 느껴졌다. 


" 그런거 아니라니까. 내가 널 두고 어딜 가겠어. " 


" 그렇지? 그런거지? 난 여기 있으니까. 어디 안 갈 거지? " 


" … 응. 괜찮아. " 


그제서야 날 휘감아오던 팔이 느슨히 풀어졌다. 

어딘가 이상했던 동생의 모습도 차츰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아직 내 머릿속은 정리되지 않아 혼잡한 그대로였다. 


도통 이유를 알 수 없을 뿐더러, 왜 이런 행동을 보이는 것인지 아무리 떠올려 봐도 답이란 것은 결코 나오질 않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자신과 그녀를 두고, 무엇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처럼 강요하는 듯한 동생의 모습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으니까. 


" 오늘은 오빠랑 같이 잘래. " 


" …… . " 


딱히 동생을 말릴 수 없었다. 

그저, 내일 아침 동생이 학교를 간 사이에 모든 것을 해결해 버리자고 다짐했을 뿐이니까. 

분명 이렇게 될 상황이 아니었는데. 

어째서일까. 


어두운 밤 내내 제대로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아주 어릴 적 동생과 함께 잤던 이후로 단 한번도 같이 잔 적이 없었건만.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였나, 같이 자자며 고집을 부리던 적이 있었지만 한 달 동안 무시하니 그제서야 포기했던 적도 있었지. 

… 왠지, 지금 와서 다시 동생이 그런 고집을 부리면 절대 뿌리치지 못할 것만 같았다. 


몇 번이고 뒤척이며 잠을 청하려 해도 쉽사리 잠에 들 수 없었다. 

아무래도 머릿속을 가득 뒤덮고 있는 잡념 탓이겠지. 

그러던 찰나, 동생의 팔이 내 몸을 감싸오기 시작했다. 


단순한 잠꼬대 이겠거니, 무시하고 잠을 이어 가려던 나는 동생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 … 잠깐, 뭐 하는 거야. " 


그럼에도 들려오지 않던 대답. 

내 복부에 닿아있던 동생의 손이 점차 아래로 내려가, 어느덧 사타구니에 닿아있던 것이었다. 

나는 황급히 몸을 돌렸고, 그러자 어둠 속으로 마주할 수 있었던 짙은 색의 눈동자. 


분명히 눈이 마주치고 있음에도, 동생의 손은 다시금 자리를 잡아 내 사타구니로 돌아올 뿐이었다. 

황당함에 나는 곧장 몸을 일으켰고, 말 없이 나를 따라 몸을 일으키던 동생은 멀뚱히 날 바라보고만 있었다. 


" 너 미쳤어? 지금 뭐하는 건데? "


" … 왜 그래 오빠? 나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걸. "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것인지, 그리고 아직 이라는 건 또 무슨 소린지. 


더 이상 멀쩡히 동생을 볼 수 없을 것 같았기에, 침대에서 내려와 방 문을 거칠게 닫아 거실로 나왔다. 

괜스레 화가 나고 말았다. 한 평생 이런 적이 없었기에 이 모든 상황이 더더욱. 


몇 번이고 오빠, 오빠.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듣기조차 싫었다. 


하다 못해 이유라도 알려줬으면. 

아니, 아니다. 애초에 그럴 싸한 이유도 아니겠지. 


그저 망가진 것만 같았다.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동생이. 

내가 저렇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계속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결국 급히 옷을 갈아입은 나는 지갑과 핸드폰만 챙겨 집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런 내 귓구멍을 파고들듯 들려온 소리.





동생은, 울고 있었다. 






*






" … 괜찮아? " 


" 응? 응… 괜찮아. " 


아침 일찍 조금은 이른 시간.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별다른 것은 묻지도 않고, 곧장 어디냐는 말과 함께 내게 와주던 그녀. 


결국 새벽 내내 공원 벤치에서 시간을 보내었다. 

그토록 생각을 정리해 보려 해도 긴 시간동안 전혀 진전이 없었으니, 아무래도 그녀의 눈에 내가 상당히 피곤해 보였을 것이다. 


… 학교는 잘 갔겠지. 곧 여름방학인데.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이 사이를 고쳐 놔야 할 텐데. 


" 미안해… 역시 내가 조금 무리한 부탁을 했나? " 


" 아니야. 동생이… 아니다. " 


다시 떠올리려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런 나를 걱정스러운 듯이 바라봐주는 그녀에게 괜스레 미안했다. 


" 밤새 못 잤지? 일단 들어가서 좀 잘래? 지금 엄청 힘들어 보여. " 


" 미안, 그래도 될까? " 


" 응. 차에서 눈 좀 붙이고 있어. 도착하면 깨울게. " 


한 없이 나를 우선시 해준 그녀가 고맙기 그지없었다. 


… 분명, 그녀와 함께한다면 이 행복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







얼마나 자고 있었던 건지 기억조차 흐릴 무렵. 

시야 틈으로 보이던 조금 이질적인 천장을 보아 하니, 아마 어제의 그 펜션인 것 같았다.


아직 전부 해소되지 못한 듯 피로에 찌들어 있던 머리를 부여잡고, 천천히 방 문을 열고 나왔다. 


… 어디지 그래서. 


어제는 펜션 로비만 간략히 둘러봤을 뿐이니 실상 정확한 구조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어딘가에 있을 그녀를 찾으러 걸음을 옮기던 그때. 


무언가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에 나는 소리의 근원지를 따라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리고 정확하게. 

소리에 가까워 질수록 몇 번이고 반복되는 중얼거림은 점점 선명해져 갔다. 




" … 어떻게 해야 하지. 분명 내가 더 사랑할텐데… . 이제 와서 빼앗기기는 너무 싫은데… 나 어쩌지… . 난 이제 네가 없으면 살 수 없는데… 방해 받기 싫은데… 미움 받기도 싫어… 상처를 주기도 싫은데… 나, 나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어떻게… . " 




걸음이 멈추었다. 


어느 한 방 앞에 멈춰선 나는 다시금 깊은 생각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결코 찾을 수 없는 답을 갈구하듯이.


그럼에도 내 의지는 이미 이성과 달리, 멋대로 답을 정해버린 것 같았다. 

방문을 열어버린 내 손과, 당황한 듯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던 그녀. 


" … 뭘 그리 걱정해. 내가 지금 여기 있는데. " 


그토록 날 사랑하는 그녀를 내가 어찌 버릴 수 있을까. 

이렇게도 여린데. 그토록 노력했는데. 


배신하기 싫었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그런 내 품에 안겨오던 그녀의 체온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했다. 


나는 그저 옳은 선택을 했을 뿐이라고. 그렇게 마음먹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이게 오답이라면, 나는 끝도 없는 늪에 빠질 것 같았기에. 

그저 이게 정답이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이 이상 쓸모없는 고민따위는 없애버리고 싶어서.



서로의 사랑을 갈구하듯이 몸을 뒤섞었다. 

새빨갛게 묻어 나오던 그녀의 선혈.


내게 있어 첫사랑은 그녀였고, 


그녀에게 있어 첫사랑은 나였다. 


그녀가 달콤하게 내뱉던 교성은 내 잡념을 지워주었고

따스하게 날 감싸오던 그녀의 두 팔은 내 모든 걱정을 녹여주는 것만 같았다. 


그저 사랑 앞에선 그 모든 걱정이 눈 녹듯 사라지듯이.

 

사랑을 속삭이며, 영원히 함께해 달라는 그녀의 말에 나는 그렇다고 말해줄 뿐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기에.











*











" … 그러면, 오늘 다 모여서 얘기하는 거야? " 


" 응. 아 그리고… . " 


" 응? " 


" 으음, 히- 아니야. 이따 얘기해 줄게. 두 눈으로 직접 보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아. " 


그녀가 유난히 밝게 웃던 날이었다. 

약혼식… 이라, 솔직히 어떤 상황일지는 도통 상상이 가지 않았다. 


단순히 양 측의 사람들만 모여서 그럴싸한 예를 올리는 것이 전부일 거라고 생각했다. 

뭐, 그렇다고 해도 딱히 내가 해야 할 것은 없겠지. 그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했으니까. 


오늘 따라 코 끝을 감돌던 은은한 향기가 자극적이었다. 

… 향수? 



" 오늘 왠지 내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날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 


" 응? " 


해맑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아오는 그녀의 손을 말 없이 맞잡았다.


… 그리도 기쁠까. 

차마 행복해 하는 그녀의 심정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기에, 조용히 손 너머로 느껴지는 따스한 체온을 즐기고 있었다. 


" 도착했습니다. " 


한 시라도 빨리 가까운 미래를 맞이하고 싶었던 건지, 조금 긴장한 나와는 달리 그녀는 뒷좌석에서 내려 내 손을 잡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그녀를 쫓아가듯 걷던 걸음.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나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 결혼식장? 




보통 약혼식을 이런 곳에서 하나…?


그런 내 궁금증과 달리, 빠르게 내 손을 잡고 끌고 가던 그녀 탓에 나는 질문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조금은 빙 돌아 도착한 어느 방. 


그리고 펼쳐진 수많은 신랑 예복들. 


의문은 의심이 되고, 그것은 곧 확신이 되기를. 



" … 이게, 뭐야? " 


" 거짓말해서 미안해. 오늘 우리 결혼할 거야. "


" … 처음부터 거짓말 한 거야? " 


" 으응, 그건 아니야. 약혼식을 결혼식으로 바꿨을 뿐이니까. 그 편이 더 빠르고 좋잖아? 그리고… 드디어. " 


조금 거칠어진 숨을 몇 번이고 내쉬던 그녀는, 그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는 듯한 표정을 그리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곧장 나를 끌어안으며 갈구하는 듯한 입맞춤을 건네던 그녀. 


어디서부터 핀잔을 걸어야 했을까. 아니, 지금은 그저 이 상황을 따라가기도 바빴다.

예상치 못한 상황은 지금의 나를 패닉상태에 빠져들게 만든 것이다.


그런 나와는 달리, 예복을 하나 하나 둘러보던 그녀는 이것 저것 내 몸에 가져다 댈 뿐이었다. 


" 이것도 괜찮고, 아… 이것도 좋은데. " 


… 받아 들여야할까?

아무래도 이건 조금 무리이지 않나. 이성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토록 행복해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결국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녀가 내게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걸로 전부인 것을. 


확신에 차지 않았던 심정을 애써 덧씌웠다. 

그저 이 순간을 즐기려 노력할 뿐이었다. 

이미 엎어진 물을 다시 담기엔 무리일 것 같았기에.



웨딩 드레스를 입은 채 해맑게 미소 짓던 그녀에게 빠져든 것만 같았다. 


조금은 당황스럽지만… 사랑하니까. 


그녀도 나를 사랑하니까 이런 것 뿐이라고.



고작 몇 분뒤에 일어날 일도 모른 채. 











평생 듣지 못할 것만 같았던 웨딩 마치가 울렸다. 


아직도 이것이 제대로 된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긴장해서 였을까? 눈 앞이 하얘져 그녀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를 바라보며 웃어주던 그녀를 보니 이게 현실이기를 바랬을지도 모르겠다. 


주례는 없었다. 그저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다 약속의 입맞춤을 할 뿐.


이게 현실이겠지. 그야 이렇게 따스히 그녀를 느낄 수 있으니까. 

사랑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정면을 바라보았다.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던 하객들. 저마다의 축복을 건네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내 시야는 어느 한 켠에서 얼어붙듯 멈추고 말았다. 


얼어붙은 시야 정 가운데에는, 고개를 수그린 채 싸늘한 눈빛으로 날 올려보고 있는





여동생이 있었다. 




그리고 내게 속삭이듯 들려온 목소리.




" … 아, 봤구나. 내가 초대했어. " 




" …… 너, 도대체 왜… . " 




" 그야, 넌 내 것이라는 걸 알려줘야 했으니까. " 





지독히도 따스했던 현실은 금세 차갑게 변해간다. 






" 이제 너와 나를 떼어 놓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게 누가 됐던. " 






설령 원치 않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