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편 - https://arca.live/b/monmusu/20931686

다음편 - https://arca.live/b/monmusu/27292803


-


"주인님, 다리를 좀..."

"응."

"이번에는 허리를..."

"어."


쇼그가 바닥을 닦으며 내게 부탁하자 나는 그것에 따라 체조 선수처럼 다리와 허리를 들어올렸다.

몸의 다른 부위는 한 치도 움직이지 않고 다리와 허리만 움직이는 모습은 좀 보기 흉했고 내 모습을 보던 모라는 무언가 불편한 듯 허리에 손을 얹었다.


"주인님, 그거 알고 계신가요? 저번에 장을 봐 달라는 부탁을 들어 주신 이후로 집에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계십니다."

"어."

"그리고 저희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그렇게 단답형으로 대충 대답하셨구요."

"엉."

"그리고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대신 게 벌써 한 달 째입니다 주인님."

"벌써 그렇게 됐어? 그럼 밖에 나가서 뭣 좀 사먹게 오천원만 줘봐."


대충대충 대답하던 나는 벌떡 일어나며 손을 내밀었고 모라는 못 참겠다는 듯 내 곁에 풀썩 쓰러지듯 앉았다.

한달 전, 장을 보러갔던 나는 돌아왔을 때 내 보물이였던 잡지들이 폐지가 된 것에 통탄한 나머지 몇날 며칠을 식음을 전폐한 채 실의에 빠졌고 그 결과 모라에게 좀 화가 나 버렸다.

나만의 사소한 복수를 계획한 결과는 아주 성공적이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놀고 먹기만 하자 점점 줄어가는 생활비를 보던 모라는 점점 초조해졌고, 결국 이렇게 내 곁에 무릎꿇고 앉아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탁탁 두드리는 신세가 되었다.


"이대로는 못 삽니다! 저도 사람이라구요 사람! 이번에는 주인님을 믿었다구요!"

"미안하지만 네가 내 보물 컬렉션을 없애버리기 전까지는 나도 널 믿었어."

"하지만 그건... 주인님이 그런 외설스러운 잡지를 보게 둘 수는..."

"네가 말하는 그 외설스러운 잡지가 내 삶의 원동력 중 하나였다고."


배달을 마치고 집에서 여유롭게 잡지를 훑어보는 게 몇 안 되는 삶의 낙이였건만, 모라 때문에 삶의 낙 중 하나가 사라져 버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미 몇 년 전에 다 보다 못해 외우기까지 했던 잡지지만 언제나 있던 것이 없어졌다는 상실감은 생각보다 컸다.

모라도 그 부분은 자신이 잘못한 걸 아는지 더 이상 뭐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꼼지락거리기만 할 뿐이였다.


"... 그런 잡지 따위 필요없이, 말씀만 하시면..."

"아저씨, 저희 왔어요!"

"어. 왔구나. 배고프지? 나는 이미 먹었으니까 모라한테 밥 해달라 그래라."


모라는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모라의 말을 제대로 듣기도 전에 현관문이 벌컥 열렸고 꼬맹이들이 집으로 돌아오자 나는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살짝 이상했다. 언제나 웃던 남자애의 표정이 살짝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기 전에 살짝 몸을 일으켜 세운 나는 애들 쪽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표정이 왜 그래? 혼났어?"

"오늘 아저씨들의 이야기를 슬쩍 들었는데...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요. 다들 심각해 보이셔서..."

"너는 그런 거 상관하지 않아도 돼. 어린애가 어른 말 엿듣는 거 아니야, 이 녀석아."

"아, 그리고 지부장님이 부르셨어요. 바로 불러오라고 하셨으니 지금 가셔야 할 것 같아요."


한숨을 내쉬며 완전히 몸을 일으킨 나는 옷장으로 다가가서 새 코트를 꺼냈다.

확실히 한 달 동안의 휴가는 꽤 길었고, 나도 얼마 되자 않아 일이 들어올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다.

오랜만의 출근이라 생각하니 몸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고 장비를 챙긴 나는 현관 밖으로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일 나갔다 올 테니까 집 잘 지키고 있어."

"부디 안녕히 다녀오시길..."

"오빠. 출근하려고?"


문을 열고 나가려던 순간 내 뒤에서 체셔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문고리를 잡았던 손을 놓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나처럼 나를 배웅하려는 듯 체셔가 내 뒤에 서 있었고 나는 이 게으른 고양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평소 같았으면 갸르랑거리며 내 손에 머리를 비볐을 텐데, 내 예상과는 다르게 체셔는 그저 내 손길을 무심하게 받아들일 뿐이였다.


"왜 그래, 올 때 츄르나 참치 더 사올까? 아니면 또 모라가 많이 먹는다고 잔소리라도 했어?"

"하하... 오빠, 내가 만약 큰 잘못을 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 거야?"

"내가 숨겨둔 비상금 건드린 거 아니면 됐어. 움직이는 것도 귀찮아하는 우리 뚱냥이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다고."


대충 몇번 더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문을 열자 체셔는 이상하게도 처음 보는 표정을 지었다.

슬프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발길을 쉽게 떼지 못했지만 어쩔 수 없이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길을 나섰다.


-


"무슨 일이에요? 일 들어와서 불렀죠?"

"아니, 너에게 들어온 일은 아니고. 나한테 들어온 일이야."

"뭐야. 아저씨한테 들어온 일이면 전 필요없잖아요. 쉬고 있는 사람을 왜 부르신 거에요?"

"나 혼자서는 어려운 일이야. 적어도 한 명 정도는 동행할 사람이 필요했다.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나는 애써 웃었지만 목으로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저씨가 이렇게 내 앞에서 무게를 잡는 일은 흔치 않았고, 대개 중요하거나 위험한 일이 뒤따랐으니까.

하지만 딱히 두렵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저씨와 함께라면 두려울 것이 없기도 했고,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나름대로 자부심이 드는 문장이기도 했으니까.


"뭐, 그럼 같이 가죠. 이번 고객은 누군데요? 또 저번처럼 돈 많은 부자놈들 비자금인가?"

"국군."

"... 네?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다시 한 번만."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분명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것 같았지만, 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내 귀를 부정했다.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정부, 그리고 수하 정부기관은 전부 해체되었고 조직원들은 해산했다.

그리고 그것은 군대도 예외는 아니였다. 아니, 오히려 가장 먼저 박살난 국가기관이 군대였다.

당장 코앞의 위협에도 위쪽으로 보고의 보고의 보고의 보고를 올리고 그 보고가 차례대로 승인되어야 대응할 수 있었던 비효율적이기 그지없는 집단이 한국 군대였으니, 이렇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게다가 마물들의 습격과 공세에도 부대 내 정치를 멈추지 않은 군대는 금세 와해되어 버렸고 몇몇 머리 좋은 야전 지휘관들이 탈영을 감행해 용병으로써 돈을 짭짤하게 벌어들이고 있다는 소식은 이미 일파만파 퍼져 있었다.

당장 강남의 부자 나으리들이 떵떵거리는 지하 벙커를 지키는 집단은 다름아닌 용병화된 군대였으니, 군대의 수준은 땅에 떨어져 있을 텐데. 무슨 국군이 우리에게 의뢰를 맡긴단 말인가.


"나도 몇 번이고 의심했지만... 상부에서는 어째서인지 그 정체불명의 세력이 국군이라고 확신했어. 어쨌든, 그 쪽에서 우리를 불렀다."

"국군이라는 놈들이 왜 저희를 불러요? 진짜 국군이라면 그깟 물자 하나 못 옮겨서 배달부 손까지 빌릴리가 없을 텐데."

"동맹 제의라더군."


정신을 반쯤 놓아버린 나는 무의식적으로 입을 쩍 벌린 채 선 채로 굳어버렸다.

내가 마시려고 열었던 수통은 힘이 빠져버려 바닥을 향한 내 손 안에서 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고 나는 신발을 적시는 물의 느낌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동맹... 동맹이요? 그 콧대 높은 놈들이? 그 빌어먹을 놈들 자존심은 서울에서도 알아주는 수준인데 어째서..."

"너 때문에. 신 강원랜드를 뒤집어 엎고, 금고를 털어 달아난 배달부가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너를 꼭 보고 싶다고 했어."

"아..."


나는 탁 소리가 나도록 이마를 쳤다. 그 깽판을 벌여놓고, 이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건 내가 생각해도 가능성 없는 이야기이긴 했다.

그때 도망치면서 일을 좀 크게 벌리긴 했으니 강원랜드 쪽에서 내가 벌인 깽판을 숨긴다고 해도 한가닥 하는 집단들의 귀에는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또 내가 일을 벌여서 아저씨가 고생한다고 생각하니 쉽사리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게... 죄송해요. 제가 또 일을 터트려서..."

"아니, 너 때문은 아니야. 너를 보고 싶다는 빌미로 우리를 불렀지만 얼마 전부터 놈들이 우리를 쫓고 있었다는 정보가 있었다. 너를 부른 건 그저 명분일 뿐이겠지."


내가 입술을 깨물며 사과하자 아저씨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타일렀다.

인자한 얼굴로 나를 안심시키는 아저씨를 보자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 같았고 내가 다시 살짝 웃으며 고개를 들어올리자 아저씨는 갑작스럽게 인상을 썼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명분일 뿐이라도 기회만 노리고 있던 녀석들에게 좋은 상황을 만들어 준 건 사실이니까. 앞으로 행동거지를 좀 더 조심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항상 이런 식이였다. 아저씨는 내가 실수를 할 때면 이렇게 방심시키고 꾸중을 주셨었다.

요즘 실수한 일이 많지 않아서 방심했지만, 이렇게 당할 줄은 몰랐는데.

아저씨는 내 표정을 슬쩍 확인하시고는 무기고 문을 크게 열었고 탄약을 챙기기 시작했다.

꽤나 길고 위험한 여정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나도 뭔가를 챙겨야 할 것 같았고 가방의 지퍼를 연 나는 가방 안에 탄약을 채워넣기 시작했다.


"얼마나 가져갈까요? 이틀분? 아니면 좀 더?"

"가져갈 수 있는 만큼. 그쪽 선반에 있는 체스트 리그도 입어. 한 발이라도 더 챙겨야 해."

"전쟁이라도 벌일 기세네요. 이렇게 많이 필요할까요?"

"실제로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어. 당장 이번 만남에서 놈들이 무슨 말을 할지,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야."


이렇게 진지한 모습의 아저씨는 처음 봤기에 긴장한 나머지 바짝 마른 목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지금까지 수없이 그랬지만, 이번에는 진짜로 죽을 수 있다는 긴장감이 느껴지자 나는 은근슬쩍 무기고 한켠으로 다가갔다.

.357 구경의 굵직하고 매끈한 총신이 돋보이는 리볼버를 눈치를 보던 끝에 집어든 나는 다급히 가방 안으로 총을 던져넣었다.


"크흠, 다 챙겼어요. 갈까요?"

"그거 비싸다. 총알도 얼마 없는 총이니까 아껴 써. 네 일당에서 깔 테니까 그렇게 알고."

"네..."


평소 탐내던 물건이였기에 일당 좀 까이는 건 아쉽지 않았다.

탄약과 식량으로 묵직해진 가방이 어깨를 짓누르자 나는 다리에 힘을 더 쌔게 주며 천근같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어디로 갈까요? 접선 장소는 어디쯤이죠?"

"서울이다. 서울 외곽의 폐병원이 접선지야."

"... 저 안 갈래요. 서울에 가고 싶다는 말은 했었지만, 이건 아니잖아요! 여기서부터 서울까지 거리가 얼만데..."

"잔소리 말고 출발할 준비나 마쳐. 중간까지는 차로 가겠지만, 그래도 꽤 오래 걸어야 할 거야."


우리가 경기도 지부이긴 하지만 서울까지는 아무리 열심히 걸어도 꼬박 일주일이다.

중간에 마물이나 강도 같은 것들을 만나지 않는다면 조금 더 일찍 도착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식량과 식수가 모자라 말라죽기 직전 상태에야 도착할 것이다.

만약 차를 타고 간다는 말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여기 바닥에 드러누워서 떼를 썼겠지.

절반 정도만 탈 수 있다는 것도 조금 아쉽긴 했지만, 연료값이 금값인 요즘 상황에서는 차를 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차를 마지막으로 타 본 것도 오랜만이네요. 제가 운전할까요?"

"으이구, 이 모자란 녀석아. 우리가 차를 타고 가면 기름도 없는 차를 어디에 차를 대 놓으려고? 운전기사는 진작에 따로 구해놨어."

"철만이, 준비는 다 끝냈나? 기름은 넣어뒀으니까 이제 출발하기만 하면 되는데."

"황씨 아저씨!"


문을 열고 들어온 황씨 아저씨가 언제나처럼 씩 웃으며 남산만한 배를 두드리자 나는 반가움에 미소를 지었다.

황씨 아저씨의 손에 들린 차 키로 보아 아저씨가 말한 운전기사가 누군지는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그래. 방금 막 끝난 참이다. 언제나 수고해 줘서 고맙군. 보수는 돌아오는 길에 바로 지급하지."

"또 외근이냐고 마누라한테 바가지 긁히고 오는 길이라 우울하구만! 돈은 됐고, 나중에 술이나 한잔 사라고."


황씨 아저씨가 험비에 올라타며 차의 몸체를 두어 번 두드리자 나는 뒷좌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

시동이 걸린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는 긴장감이 감도는 것을 추스리며 수통의 물을 마셨고 바짝 마른 입술을 축였다.


-


"아저씨, 언제까지..."

"쉿. 아직 있어."


아저씨의 경고에 등골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낀 나는 다급히 입을 다물었고 숨을 쉬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내가 숨어있는 부숴진 상가 건물 밖에서 무언가 바닥을 쓸며 지나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충혈된 눈으로 작은 거울을 꺼내들었다.

창문 밖이 보이도록 각도를 맞춰 거울을 비추자 길이가 수 미터는 되어 보이는 라미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우리를 찾고 있었고, 나는 다시 거울을 내리며 숨소리가 새어나오는 방독면의 숨구멍을 틀어막았다.


"흐음... 잘못 들었나... 소리가 났는데..."

"이만큼이나 뒤져봤는데 안 나왔으면 여기에는 없나 봐. 다른 곳으로 가보자."

"쳇, 오랜만에 만난 인간이였는데... 아쉽게 됐네."


라미아들은 몇 번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사라졌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눈 주위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방독면을 벗어 겨우 눈물을 닦아내며 일어선 나는 온 몸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이 개새끼들... 일부러 이런 곳으로 불러낸 거 아니에요? 지금까지 본 마물과 약탈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평생 살면서 봤던 것보다 여기서 보는 게 더 많아요."

"서울의 치안이 이 정도로 심해졌었나... 외곽인데도 심각하긴 하구나. 요즘 서울 세력들의 권력 다툼이 심해지고 국소 조직들이 난립한다고 하니, 치안의 악화는 당연하겠지."


서울에 온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마물도, 부족한 보급품도 아닌 사람이였다.

마물은 죽이기도 어렵고 탄 소모를 생각하면 무조건 숨어야만 했지만. 마음 먹고 숨는다고 하면 절대로 들키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아무리 감각이 좋아봤자 마물은 마물. 백전노장인 아저씨의 경험이 있다면 숨는 건 일도 아니였으니까.

문제는 강도나 약탈자들이였다. 그런 부류들은 타협도, 도망도, 숨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저 죽여야 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죽인 사람보다 내가 여기에 온 단 하루동안 죽인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이 나를 더더욱 힘들게 했다. 

이제는 총으로 사람 머리통을 갈기고 뇌수가 터져나가는 모습을 봐도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였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조금만 더 가자."

"하... 이 정도로 배달부를 그만두고 싶은 건 처음이에요."

"뭘 이거 가지고 그래? 너 저번에 인육 공장인가 하는 곳도 다녀왔다면서."

"어휴, 거기는... 말도 마세요. 그래서 다 죽이고 나왔잖아요."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나와 아저씨의 눈은 쉴새없이 주변을 살폈다.

서울에 온 이후로 단 한번 외에는 긴장을 푼 적이 없었고, 이 긴장감이 습관이 될 것만 같았다.

작은 한숨을 내쉬자 유일하게 긴장을 풀었던 순간에 총을 맞았던 옆구리가 욱신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주위를 살피던 내 눈에 한 병원이 눈에 들어왔고, 나는 아저씨의 어깨를 살짝 잡으며 곁눈질로 병원을 가리켰다.


"그래, 저기다. 저기가 접선장소인 것 같구나."

"딱 봐도 허름하고... 불길해 보이네요. 분위기로는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데."

"이놈아.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더냐? 있다고 해도 나는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


폐병원의 유리문은 이미 산산히 부숴져 있었고 병원 안으로 들어가자 유리를 밟는 소리가 아무도 없는 병원 안에 울려퍼졌다.

이미 여기에서 여러 번 싸움이 있었는지 바닥에는 말라붙은 혈흔자국이 남아있었고, 곳곳에는 탄피가 굴러다녔다.

뭐라도 쓸만한 게 남아있을까 하는 생각에 이곳저곳을 뒤져봤지만 이미 한참 전에 털렸는지 죄다 텅 비어 있었다.

기대를 깨는 허탕에 혀를 차던 내 입을 갑작스레 아저씨가 틀어막자 나는 신경을 곤두세우며 주위를 바라보았다.

아저씨는 입으로 말하는 대신 손 동작으로 대신 상황을 전달했다. 뒤, 추적자, 은신, 기습.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인 뒤 소리 없이 빈 병실 하나로 숨어들었다.


"뭐야... 어디로 사라졌지? 깊숙히 들어간 것 같은데요. 병장님, 어떡함까?"

"들키지 않을 정도로 거리 유지하면서 들어가자. 그리고 너 내가 요 붙이지 말라고 했지."

"아, 죄송함다. 이게 입에 붙어서... 조심하겠슴다."


미리 설치해 놓은 거울로 병실 밖을 보자 군복을 입은 여성 두 명이 조심스럽게 병원 입구 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어리숙해 보이는 군인을 한번 째려본 완장을 찬 군인은 총을 겨누며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피더니 아저씨가 숨은 쪽으로 다가갔다.

내 쪽으로도 얼빵해 보이는 녀석이 다가오자 나는 손에 든 권총을 홀스터에 집어넣으며 칼을 꺼냈다.

아저씨가 숨어있는 침대의 커튼을 열어제낀 군인은 한숨을 내쉬며 안심했지만 침대 아래에 숨어있었던 아저씨는 방심한 녀석을 기습했고 순식간에 녀석을 제압했다.

작은 몸싸움 소리가 들리자 내가 숨은 병실에서 두리번거리던 녀석은 겁을 먹은 듯 떨더니 내게 등을 보였고 나는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녀석의 손에서 총을 빼앗으며 목에 칼을 가져갔다.


"히이이익! 살려주십쇼! 항복! 항복하겠슴다!"

"하아... 모자른 새끼, 걱정 마. 얘들 절대로 우리 못 죽여."

"정말 그럴 것 같나. 괜한 허세 부리지 마라. 더 추하게 죽기 싫으면."


아저씨는 분대장 완장을 찬 군인의 팔을 케이블 타이로 묶었고 산탄총을 녀석의 머리에 가져다 댔다.

그 모습을 본 어리버리한 군인은 덜덜 떨며 어쩔 줄 몰라했고 나는 닥치라는 의미로 녀석의 목을 조르고 있는 팔에 힘을 줬다.

내가 뭔가 묶을만한 걸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어디선가 날카로운 총성이 들렸고 수 명의 여군들이 우리를 둘러쌌다.


"좋은 말로 할 때 이거 풀지그래. 서로서로 좋게 가자고."

"너희들, 언제부터 우리를 미행했지? 이럴거면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이 처음부터 만났으면 됐을 텐데."

"그쪽이 서울에 들어오자마자 지켜보고 있었지. 너희들이 서울 구석에서 뒤져버리면 만날 가치도 없다는 뜻이니까."


우리가 천천히 물러서자 다른 군인들은 묶인 군인을 풀어주었고 아저씨가 눈길을 주자 나도 목을 조른 팔을 풀었다.

군인들은 잘 무장되어 있었고 훈련 수준도 높아 보였다. 우리를 견제하면서도 마물이 오지는 않을까 입구 쪽을 힐끔거리는 모습을 보자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려 했다.

이런 녀석들과 싸우면서 총을 안 맞는다는 건 과한 욕심이였으니까. 서울에서 총알 자국이 더 남는 건 사양이였다.


"뭐, 일단 가도록 할까. 그 전에 기밀 유지 때문에 협조해줘야겠어. 야, 안대 씌워."

"우리가 순순히 협조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싫으면 안 가도 돼. 가서 돈에 미친 너희 대가리한테 군인들이 무서워서 그냥 왔다고 말하던가, 순순히 따라오던가. 골라."


아저씨는 이를 갈며 녀석들을 노려봤지만 군인들과는 합의의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작은 한숨을 내쉰 아저씨는 내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칼을 다시 집어넣으며 군인들에게 몸을 맡겼다.

녀석들은 나와 아저씨의 눈에 검은 천을 두 겹이나 씌우더니 우리를 어딘가로 데려갔고, 나는 안대가 씌워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정체모를 국방색 트럭 뒤편에 올라탔다.

트럭은 한참을 덜컹거리며 어디론가 향했고 지루한 나머지 졸음이 올 때 쯤에 누군가 나를 툭툭 건드리는 게 느껴졌다.


"저기, 초콜릿 먹을 건데. 드시겠슴까?"

"아... 괜찮습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 하나 드십쇼. 많아서 괜찮슴다."


어이가 없어진 내가 입을 살짝 벌리자 작은 초코볼이 입 속으로 들어왔고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초콜릿을 씹었다.

고소한 아몬드 향과 달콤한 초콜릿 맛이 입을 가득 채우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고 내 입에 미소가 걸리자 내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떻슴까, 괜찮지 않슴까?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검다."

"야, 뭐가 그렇게 남는다고 이 녀석한테까지 그걸 줘? 너는 물자가 남아 도냐?"

"일뱀한테도 하나 드렸지 않슴까. 그리고 원래 이런 건 같이 먹어야 맛있슴다. 거기 아저씨도 드릴까요?"

"어휴... 내 밑으로 어쩌다 이런 개폐급이 들어와서... 내가 봤을 때 너는 마물이랑도 겸상할 새끼다. 그리고 내가 요 쓰지 말랬잖아! 병장님 앞에서도 쓴 건 아니지?"

"칭찬 감삼다! 일병님한테 칭찬 듣는 건 오랜만인것 같슴다! 그리고 아까 실수로 요 써버려서 혼났슴다!"


직접 보지 않고 듣기만 했는데도 한숨이 절로 나오는 대화에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내가 방금 자기 목을 조른 사람인데 철없이 입에 초콜릿이나 넣어주는 한편, 철만이 아저씨한테도 권하는 모습이라니.

절대로 아래에 두고 싶지 않은 부류의 사람인 것 같았고, 동시에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이였다.

아무런 허물 없이 다가오려고 하는 녀석들은 내가 그어놓은 경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침범하고는 하니까.

입 안에 감돌던 초콜릿의 맛이 사라지고도 한참을 달린 트럭은 결국 멈췄고 군인들은 트럭에서 내린 내 눈에서 천을 치웠다.


"산에... 터널? 여기는 어디지?"

"여기 말임까? 서울의 인왕산이라는 곳임다! 여기 지하에 비밀기지도 있고, 터널 중간에서 모래주머니 쌓고 버티면 누가 와도 막을 수 있슴다!"

"그렇게 다 알려줄 거면 왜 안대를 씌워서 데려온 거지?"

"저희가 온 길을 제외한 다른 길에는 전부 지뢰같은 부비트랩이 가득 심어져 있슴다. 안전한 길 숨기려고 하는 짓이지 말임다."


얼핏 봐도 보안이 철저해 보이는 터널 입구로 완장을 찬 군인이 앞장섰고 다른 군인과 우리는 그 뒤를 따랐다.

터널 안에서의 수비전을 대비하고 있었는지 터널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엄폐물이 가득히 쌓여 있었다.

조금 더 걷자 터널 끝자락이 보이는 것 같았고 터널 끝에서 경계하던 초병들이 우리를 보자 그들은 이쪽으로 총을 겨눴지만 얼굴을 봤는지 다시 총구를 내렸다.


"아, 데려오셨습니까. 수고하셨습니다."

"어. 연대장님은 어디 계시냐?"

"지금 지통실에 계실 겁니다. 지통실 새로 지어진 이후로 쭉 바빠 보이셨습니다."


산을 통째로 뚫어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 기지에는 좌우로 막사 건물이 나열되어 있었고 중심에는 얼핏 봐도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큼지막한 건물이 있었다.

완장을 찬 군인은 우리를 잠시 대기하게 하더니 지통실이라고 부르던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어리숙한 군인을 제외한 다른 군인들은 죄다 '막내야, 맡긴다.' 라는 말만을 남기고는 흩어졌다.

다른 사람들이 쉴 동안 우리를 맡게 된 게 불만스러웠는지 어벙이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지만 이내 체념한 듯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간 군인이 나올 때까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고 보통 군대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무기를 정비하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는 군인들의 성비는 남자 반, 여자 반 정도였다.


"여기는 여군이 꽤 많은데. 무슨 이유라도 있나?"

"여군들 말임까? 이상하게 마물들이 남자만 보면 발작해대는데, 여자는 봐도 대부분 반응이 시원찮슴다. 그래서 물자 보급이나 탐사, 조사같은 마물들과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는 작업은 여군이 하고. 치안 담당과 체포, 사람이랑 싸우는 건 남군이 하고 있슴다."

"여자에게는 더 적게 반응한다... 처음 듣는 정보지만, 설득력은 있네."

"앗! 이거 기밀인데... 이거 제가 말해줬다고 말씀하지 말아주십쇼, 부탁임다!"

"야. 너희는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뭘 그래 정답게 얘기를 나누고 있어? 거기 배달부들, 따라와."


완장을 찬 군인의 안내를 받아 지휘통제실에 들어가자 서류 뭉치를 든 병사들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을 지나쳐 계단을 올라간 군인은 지통실의 가장 위층, 끝자락 방으로 우리를 안내했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며 우리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집무실로 보이는 방 한켠에는 온갖 화려한 훈장과 상장으로 치장된 장식장이 있었고 창문 대신 완전히 유리로 된 한쪽 벽면으로는 지통실 밖 모든 풍경이 내려다보였다.

누군가 앉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의자는 뒤로 돌아 있었고 그 의자 옆에는 훤칠하고 잘생긴 군인 한 명이 서 있었다.


"중령님, 배달부들이 왔습니다."

"그런가. 고맙네, 신 상사. 자... 먼 길을 돌아 이곳에 온 것을 환영하네! 일단 앉게나, 할 이야기가 꽤 있어 보이니까."


뒤로 돌아있던 의자가 제자리를 되찾자 의자에 앉아있던 왜소한 체격의 남자가 우리를 향해 싱긋 웃으며 양 팔을 벌렸다.

탁자 옆에 놓인 의자에 대충 앉은 나와 아저씨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중령이라 불린 남자를 바라보았다.

군대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중령이라고 하면 상당히 높은 계급일 텐데, 눈 앞의 남자는 너무 젊었다.

중령은 나와 비슷할 정도로 어려 보였지만 오히려 나이가 더 많아 보이는 상사라 불린 군인이 중령에게 깍듯이 예의를 차렸다.


"듣기로 국군은 현재 해산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이 모습을 보니 그렇지는 않아 보이는군요."

"아, 아직도 그런 프로파간다를 믿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 유감이로구만. 자네가 알고있는 '국군' 이라는 종자들은 강남에서 부자들 벙커나 지키는 개새끼들이겠지. 우리는 그런 놈들과는 완전히 다르다네!"


아저씨가 넌지시 대화의 운을 띄우자 처음에는 웃던 중령은 갑작스레 화를 내며 일어서더니 책상을 내리쳤다.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흥분한 것 처럼 보이던 중령은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다시 웃음을 되찾았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우리의 목적과 존재 이유는 혐오스러운 마물들과 폭도들을 척살하고 쓰러진 나라의 기틀을 바로세우는 것 뿐. 돈에 미쳐 꼬리를 흔드는 그런 놈들과는 연관짓지 말아 주게나."

"그렇군요. 그렇다면 저희는 어째서 부르셨습니까. 배달 의뢰라면 본사를 통하면 될 텐데요."

"방금 말했다시피 현재 우리 군의 첫 번째 목적은 서울에서 마물들을 몰아내고, 질서를 되찾는 일이라네. 하지만 압도적인 우리의 화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을 만큼 마물들과 폭도들이 들끓으니... 외부 세력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겠나?"

"도움... 도움 말씀이십니까."


점점 입가가 하늘을 향해 치솟으며 싱글벙글 웃는 중령과는 다르게 아저씨의 얼굴은 점점 굳어가기만 했다.

무언가를 예측하신 듯한 아저씨의 꾹 쥐여진 손은 부들거리며 떨리고 있었고 나 또한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잠시 우리의 반응을 웃으며 지켜보던 중령은 탁자에 손을 올려놓으며 깍지를 끼더니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배달부들과 국군이 동맹을 맺는 건 어떻겠나?"


-


"오늘도 아주 늘어지는구만. 술 더 없어?"

"니가 다 마셨잖어. 좀 그만 쳐 마셔, 이 양반아. 또 마누라한테 바가지 긁히려고?"

"이런 날이 얼마나 있다고. 쉴 때 충분이 쉬어야지."


황씨는 킬킬 웃으며 맥주캔을 완전히 비웠고 빈 캔을 쓰레기통을 향해 던졌다.

그 모습을 보던 이씨는 혀를 차더니 냉장고를 열어 소주를 꺼냈고 다른 배달부들과 둘러앉아 소주병을 까기 시작했다.

지부장의 갑작스러운 부재로 배달부들에게는 단체 휴가가 생긴 꼴이였고 평소 술 좋아하는 아저씨가 대부분인 그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부어라 마셔라를 외쳐대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던 그들의 긴장을 불러 일으킨 것은 거칠게 열린 문과 가쁜 숨을 들이쉬는 경비병이였다.


"허억... 허억... 배달부 선생님들... 지금..."

"어이구, 젊은 양반이 뭐가 이리 급해서 오셨나. 그쪽도 한 잔 하시겠나?"

"지금 그럴 때가 아닙니다! 마물들이...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다구요!"


기분좋게 취기가 오른 배달부들의 풀린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고 소주잔이 바닥에 떨어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배달부들은 그 소리가 미처 사라지기 전에 무장을 끝냈고, 물을 한 컵씩 들이키며 정신을 차렸다.


"거리는?"

"네? 아, 그게... 어림잡아 두세 시간이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김씨, 크레모아 꺼내와. 배씨, 못 싸우는 사람들 피신시키고. 입구에서 못 막으면 다 뒈진다는 생각으로 막자고."

"싸우시게요? 술까지 마시셨는데, 지금이라도 도망치는 편이..."


경비병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목소리로 만류했지만 배달부들은 씩 웃으며 그를 지나쳤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경비병의 어깨를 이씨가 붙잡았고 이씨는 경비병을 향해 인자하게 웃어주었다.


"이 사람아. 남들이 볼 때는 고저 배 나오고 술 좋아하는 아저씨들로 뵈어도, 죄다 누구헌티는 애비고 누구헌티는 남편이야. 부끄럽게 도망쳐서야 쓰것어? 사람들 대피나 신경쓰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