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이러지 마시죠 기사님! 어찌 저와 같은 무지렁이에게 무릎을 꿇으시는 겁니까!"


백발의 푸른 눈동자, 마치 신의 외모를 본 땋은 듯한 조각상이 거짓된 모조품의 띠를 벗어나 생명을 얻는다면

이러한 형태를 하고 있지 않을까, 싶은 정도로 그는 고결한 외견과 그의 걸맞은 품행, 우아한 동작을 지닌 기사였다.


한낱 농노였던 나를 굳이 지목해서 부르면 될 것을, 직접 그 몸으로 나를 찾아오셨다.

이는 보통 농노의 아이와 기사 간의 관계에서 볼 수 없는 보기 드문 장면이다.


아니, 어쩌면 이는 보기 드문 수준을 넘어 이 보르도 제국에서는 평생 한 번 볼 기회조차 없을 그런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 그리고... 저는 황태자가 아닙니다, 어찌 그런 농담을 하시는 겁니까."



말도 안되는 일이다.

내가 황태자라고? 평생을 농노의 아이로 살아온 이 내가.


그래... 분명히 그런 망상을 한 과거가 내게는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은 부끄러운 과거. 이제는 지우고 싶은 또래 아이들끼리 모여 잠깐 이목을 끌만한 그런 하찮은 이야기.


누구나 어릴 땐 자신만의 좁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본다, 나 또한 그런 시절이 있었다.

보르도 제국의 황가, 그 위대한 핏줄을 지닌 황족들은 전부 흑발 흑안의 눈동자를 품고 태어난다.


나 또한 흑발 흑안을 지니고 있기에 한창때는 실은 내가 황제의 사생아가 아닐까 하는 망상을 품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점차 나이가 들며 검은 흑발은 때를 품은 금발로, 밤하늘을 품고 있던 검은 눈동자는 탁한 갈색빛으로 변질하였다.


그래, 나는 유감스럽게도 황족이 아니었다. 현실을 직시하고 나는 그제야 세상의 넓이를 깨닫고 겸손해졌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농담을 내게 건네다니

화가 치밀어오른다, 과거의 끊어내었던 망상을 그 부끄러운 치부를 누군가 강제로 내게 들이미는 듯이...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놀랍게도... 아무것도 없었다.


치밀어 오르던 분노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기세를 지웠고 붉게 물들 것 같았던 내 얼굴은 다시 원래 거뭇한 피부로 혈색을 되찾았다.

내가. 기사를 상대로 분노를 품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농노가 기사를 향해 도전한다?


죽고 싶어 안달이 난 '광인'이나 '고행자'들이나 하는 짓거리를, 

나는 천치가 아니다 감정의 구분과 조절 따위는 이미 졸업해, 


분노의 이성을 잃고, 무례를 저질러 신세를 망치는 일 따위

그러한 가능성은 한 일말의 한 뼘 조차 없다고 자부한다.


겁쟁이 카일, 언제부턴가 타인의 기분을 맞춰주고 몸을 굽히는 일만을 해온 내게 붙여진. 오명이다.



" 당신은 분명히 황태자 전하가 맞습니다, 유에르 폰 드라켄호프 3세의 사생아. '리안 폰 드라켄호프' 님이십니다. "


헛소리도 이 정도로 진지하게 건네받으면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

아둔하고 욕심이 그득한 이들은 어쩌면 이 농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며 애써 설레발을 치다가 꾀에 넘어가 인생을 망칠 수도 있을 터


하지만 그렇기에 의문이다, 이 기사는 나와 아무런 접점이 없는 게 분명하다.


그런 나에게 어쨰서 이러한 농담을 하오는 것인가? 이를 누군가 듣는다면 나뿐만 아니라 황가를 모욕한 죄로

기사 또한 참형의 처할 수가 있다, 기사가 아무리 높은 계급이지만 황권의 철퇴를 피해 갈 수는 없다.


나는 이 위험한 변절 기사를 떼어내기 위해,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자극하지 않기 위해 고개를 마주하지 않고 눈을 피하며 말을 이은다.


"주변의 눈과 귀가 있으며 이는 지고한 황제 폐하의 치세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언행이 될수도 있습니다,
  부디 저는 아무것도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으니 이만 돌아가주시길 간청하겠습니다. "


" 전하... 당신은 틀림없이 황태자 전하가 맞습니다.... 아무리 말씀해도 믿지 않으실 듯 하오니 잠시 무례를 용서하여 주시길..."

기사는 그리 말하고는, 나에게 작고 투명한 무언가를 내 얼굴을 향해 비추어보였다.


' 이건... 저번의 상인들이 그토록 판매하던 '거울'이라는 건가? 그때 보았던 물건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있군 '


잡상인이 보였던 흐릿하고 크기만 컸던 거울과는 달리, 이는 나 같은 무지렁이가 보아도 한 눈의 예술성을 판별할 수 있을 정도로

귀부인들의 작은 손의 꽉 들어올 만한 알맞은 크기, 깨끗하며 투명하게 모습을 반사하는 마치 보석과도 같은 공예품의 기질이 보였다.


그리고 '거울'은 나의 모습을 비춤과 동시에, 점차 거울 안쪽으로 보이는 나의 모습 '농노 카일'의 비루한 모습이 흐릿해져간다.

어릴 때 근처 아이들과 호수 근처로 놀러가면서, 그때 맑은 호수의 안쪽으로 비추어졌던 내 모습을 되찾아가는 듯한...


칠흑같은 흑발과, 탁한 심연을 응집해놓은 듯한 검은 귀공자의 모습을 내게 보이고 있었다.


" . . . ! 이게 대체?! "


" 이제.. 저의 말을 믿어주시겠습니까? 전하.. 당신께서는 틀림 없는.. "


그만둬,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겁니까.


내가... 정말로 황태자라는 농담을 진심으로 하는 겁니까?


인제 와서... 너무 늦었잖아...


.

.

.


" 마지막 황태자 전하이십니다 "


이종족들의 습격과, 황족들의 지속된 부패와 자기 안위만을 살피려는 변질된 정치 체계

한 때 인간을 이 대륙 최강의 패재라 일구어냈던 강대했던 제국은, 이제는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린채.

몰아치는 비 바람 앞의 작은 양초 불빛과도 같이,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그런 외줄타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황족들의 의문의 돌연사, 후계를 이을 후사가 아무도 남지 않게된 제국 역사의 전례 없는 최악의 상황

그리고, 그 상황속에서 정통성을 이은 '마지막 황태자', 바로 나라는 존재가 등장함으로써

이 제국의 운명을 더 나아가 대륙의 패권을 다시 한번 정하게 될 운명적인 만남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 Luces Se Viate Du Ad Baros " 


다시 한번 인간만을 위한 제국을


다시 한번 드 높은 천상을 향해 솟아오를 제국의 별이 되소서


위대한 황가의 무한한 영광이 함께하기를.




똥 마려워

화장실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