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와 필통, 교과서와 참고서는 사물함에 박아넣자. 집은 공부하는 곳이 아니니까. 국어 수행평가는 끝냈고, 또 뭐가 있었지? 모르겠다. 내일하자. 내일이라고 해봤자 1시간 남았지만. 왜 학년이 올라갈수록 윗층을 쓰는거야? 귀찮게...

 

 “하아...”

 

 한숨이 아직 충분히 데워지지 않은 봄의 밤공기에 섞여 하얗게 피어올라 투명하게 사라진다. 아직도 보름달이 중천에 뜨기 직전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 학교가 있느냐 하면 있다. 생기부에 한줄이라도 더 써준다는 별것도 아닌 미끼를 물고 ‘자율’당하는 학생들로 늦은 밤까지 교실은 꽉 찬다. 나 또한 그들처럼 ‘스스로’ 야자에 참여하는 학생들중 하나로, 야자 내내 괴한이 습격해오지 않을까?, 갑자기 문을 발칵열고 예쁜 여자애가 고백하면 어쩌지? 하는 비상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계획을 짜는데 바쁜 것이다.

 서늘한 밤공기 냄새를 느끼며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많이 보면 뒷모습만 봐도, 많이 들으면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수 있는 법이라는데 정말인 것 같아 신기하다.

 

 “야, 박시하, 같이 가냐?”

 “아니.”

 “뭐 때문에?!?!”

 “아, 좀 달라 붙지마!”

 

 솔직히 이 녀석은 살짝 거북하다. 마치 인기도 많으면서 굳이 내게 달라붙어 오는 게 선생님이 반왕따 친구에게 관심 좀 가져달라고 당부받은 유쾌한 성격의 반장 같은 느낌이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지만 이 녀석에 대한 근본적인 느낌을 말하자면 ‘왠지 싫다.’ 그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PC방에서 게임 한판만 하고 갈래? ....이랑, .....랑 또 몇 명은 간다는데.”

 “아니.”

 “그냐? 그럼 가지말자.”

 “응.”

 

 단순 암기라면 자신있다...하지만 사람 이름을 외우는 것은 생후 36개월 아기와 경쟁해도 뒤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서툴다. 이 녀석이 말한 그 두 사람의 이름과 얼굴이 매칭이 안되는데다 심지어... 이 녀석의 이름도 아직 모른다. 이전 학년에선 1년이 전부 지나가도 이름을 모르는 아이가 1~2명은 있을 정도다. 아이들의 입에서 오르내린 걸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성....형....정.....다음 인...민...신이었던가...아마 이 조합 중 하나였던 걸로 기억한다. 어찌되었건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서 받는 호의는 그닥 달갑지도 않을뿐더러 곤란하기만 하다는 그런 소리다.

 

 “넌 왜 매일 혼자 밥먹냐? 나랑 먹자.”

 “그래.”

 “오케이 그럼 애들이랑 같이 먹는거다잉?”

 

 언제부터 ‘나’란 명사가 복수명사가 된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넘어가자. 어차피 내일쯤 되면 까먹을테고 기억한다해도 며칠 지나면 결국 질려서 떨어져 나가겠지.

 

 “아, 근데 춥지 않냐? 이제 곧 4월인데도 춥네!”

 “그러네.”

 “그러고보니 너 쉬는 시간때 읽는 소설 뭐냐? 그게 라이트 노벨인가 뭔가 하는거냐!?”

 “으...?응...”

 

 아아 모르는건가 인싸계인? 이건 라이트 노벨이라고 하는 거다. 남들 앞에서 그딴식으로 말하면 내가 수치를 겪게 되는 물건이지. 정말이지 무례하기 짝이없다... 히키코모리의 섬세하고 연약한 마음을 그렇게 짓이기지 말라고.

 

 “좋네? 나중에 나도 빌려줘! 무슨 내용이냐?”

 

 보통 내용을 묻고 마음에 들면 빌려 가는 게 순서 아닌가? 그리고 그 내용을 말하라고? 이 하교하는 학생들로 넘쳐나는 길거리에서?....라는 걱정은 초짜 오타쿠들이나 하는 생각이다. 어차피 진지하게 읽을 생각도, 빌릴 생각도 없을 것이다. 그냥 대충 일반인들이 듣기 혐오스러운 내용만 살짝 각색해서 농담조로 말하면 곤란한 듯이 살짝 웃으면서 이 화제를 다신 입에 올리지 않을 것이다.

 

 “응, 남자 주인공이 등교하는데 하늘에서 바니걸이 떨어지는...얽!!!!!!!!!!!!!!!!!!!!!!!!!”

 

 -쾅!!!!!!!!!!!!!!!!!!!!!!!!!!!-

 

 “야!!!!야!!!괜찮아?!?!”

 ‘넌...이게...괜찮아...보이냐...?’

 “무슨 일이야?”

 ‘내가...묻고 싶다...’

 “꺄악!!!사람이 떨어졌어”

 ‘떨어진...사람만...사람이냐?’

 “구급차!!!!구급차 불러!!!!”

 ‘아..씨발...아파....’

 


 정신을 차려보니 딱히 낯설지는 않은 평범한 병원 천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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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