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단결! 대위, 유진영은 금일 부로 전역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사람 인생이란 게 원래 자기 생각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 법이다.

 

“그래, 3중대장 그동안 고생 많았어. 내가 이번 진급은 꼭 챙겨주려고 했었는데, …미안하게 됐네.”

 

그리고 그 원흉인 대대장이, 지금도 능구렁이 같은 웃음을 흘리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이자, 뺨을 후려치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어긋나버린 내 인생 계획이 다시 짜 맞춰지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이 역겨운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만이 앞섰다.

 

“아닙니다! 그동안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그래, 버스 시간 늦기 전에 얼른 가보고.”

 

그건 대대장도 마찬가지였는지, 자기 할 말 다 끝났으니 이제 볼일 없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빨리 대대장실을 나설 것을 종용했다.

 

하여간 황 중령 저 인간은 꼭 장군까지 해먹을 놈이다.

 

갈라치기에 꼬리 자르기, 말 바꾸기까지, 성공하기 위해 장교가 갖춰야 할 3대 덕목을 그대로 옮겨놓은 거나 다름없는 인간.

 

저런 놈을 믿고 진급 한 번 해보겠다고 간 쓸개 다 빼주려던 내가 등신이었지.

 

사람 심리가 참 간사한 게, 서 있는 자리가 바뀌면 그렇게 정겹게도 느껴지던 공간도 한순간에 뭐 같은 곳으로 바뀐다는 것이었다.

 

괜히 미련만 더 생길까 봐 위병소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하자, 먼발치에서 나를 맞이해줄 준비를 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선두에 서서 눈물을 글썽이며 박수를 치는 김원재 중사. 

 

나와 전입 날짜가 같았었지.

 

그 옆에서 씁쓸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는 박준서 병장.

 

얘하곤 워낙 사적인 얘기를 많이 해서 서로 별꼴을 다 봤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아크릴 상자에 담긴 금칠 된 베레모를 건네는 김상웅 상사.

 

빽 없는 중대장 만나서 참 고생 많이 했지. 

 

마지막 경례 구호를 붙이는 부중대장 겸 1소대장 이동혁 중위.

 

이 친구는 분명, 내가 못다 한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다.

 

“단! 결!”

 

그 어느 때보다도 우렁차 보이는 중대원들의 목소리.

 

내게 보내는 그 마지막 경례에,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려는 시큰한 감정들을 애써 억누르며 화답했다.

 

“단결.”

 

잘 있어라, 열쇠부대 번개대대야. 

 

잘 가라, 내 인생의 꽃다웠던 120개월아.

 

---

 

대대 주둔지가 있던 연천읍 통현리를 떠나, 동서울 터미널로 향하는 버스 안.

 

덜컹이는 버스 창가에 기대어 눈을 감으니, 성인이 되고서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남들 다 가길래 성적 맞춰 따라갔던 대학은 지잡대였고, 차라리 용돈이나 벌려고 전문하사까지 했던 군 생활 24개월이 더 알찼었다. 

 

2년짜리 전문학사에 있으나 마나 한 자격증 쪼가리 몇 개, 유통기한 지난 어학성적이 대학에서 얻은 전부였으니까.

 

그렇게 중소기업에서 노예로 부려지느니 명예라도 챙기자는 심정으로 눈을 돌린 곳이 직업군인이었다.

 

병과를 굳이 기갑으로 선택한 이유는 군 생활을 하던 곳이 전차부대였고, 어차피 군 생활 다시 하는 거 제대로 배워서 가자는 마음으로 3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서의 꿈을 키워나갔었다.

 

그랬었는데….

 

‘이번 역은 잠실, 잠실역입니다.’

 

정처 없이 버스를 갈아타고 지하철에 몸을 실은 지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길래 분위기에 휩쓸려 같이 내린 나는 큰 고민 없이 잠실대교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가족에겐 전역원 제출하는 날부터 군복 벗는 대로 민간경비업체 취업해서 해외파견 근무 나간다고 얘기해 뒀으니 당분간은 날 찾진 않을 테지.

 

이제 내 나이 서른다섯. 많다면 많고 아직 젊다면 젊다고 할 수 있는 나이.

 

그러나 지금 내게 딸린 스펙으론 어디 가서 밥 벌어먹기가 마땅치 않은 것이 현실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라에 청춘의 전부를 가져다 바친 결과가 이렇게 헌신짝 버리듯 버려지는 것일 줄은, 마지막 진급이 떨어질 때 까지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내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

 

어차피 망한 인생, 더 추한 꼴 보기 전에 그만 끝내자.

 

“거기선 떨어져 봐야 안 죽어요.”

 

그렇게 한참을 감상에 젖어 있기도 잠시,

 

“여긴 둔치 근처라 떨어지면 병신밖에 안 돼요. 죽을 거면 저기 가서 뛰어내리세요.” 

 

하는 말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니, 쥐색 양복 차림의 외국 여성이 다리의 정 중앙을 가리키며 그리 말하고 있었다.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그따위로 도발 당하면 아무리 성격 좋은 사람이라도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진 않는다.

 

“남이야 죽든 병신 되든 뭔 상관인데.” 

“당연히 상관있죠.” 

 

그러나 내가 무슨 태도를 보이든 간에, 그 여인은 차분하게 자기 할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당신이 죽어버리면 우리 회사에 스카웃을 못 하잖아요?”

“뭐?”

“제가 대충, 이런 사람이거든요.”

 

내가 얼빠진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명함 한 장을 내밀며 말했다. 

 

‘Kingdom of Rienen Military Advisor’

 

리에넨 왕국 군사고문단이라. 

 

국기에 국장, 소개문까지 그럴싸한 게 다단계나 몰래카메라 같지는 않아 보였다.

 

“지금 우리나라, 리에넨은 국책사업으로 군의 현대화와 확장에 힘을 쓰는 중입니다.”

“아, 예….”

“그래서 대위님과 같은 분들을 모시기 위해 이렇게 발로 뛰고 있고요.”

 

유창한 한국말로 설명을 이어나가는 여인의 태도도 그렇다. 

 

물론 자국의 군 선진화를 위해 민간군사기업이나 타국의 장교를 군사고문으로 삼는 것 자체는 흔한 일이다.

 

문제는 보통 그런 건 기업의 영업팀이나 외교채널을 통하는 것이 보편적이었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의심이었다. 

 

“그 말을 지금, 믿으라는 겁니까?”

“뭘 하든 죽는 것보단 낫겠죠.”

 

그런데 여기서 가불기가 들어올 줄이야.

 

“아무튼, 생각 있으시면 서류에 지장 찍으시고, 내일까지 쪽지에 적힌 장소로 오세요.”


그 말과 함께 반강제로 서류를 떠넘긴 여인은 내가 미처 질문을 할 겨를도 없이 자리를 떴다. 

 

그리고 다음 날. 

 

서류상의 채용 조건이 나쁜 것도 아니었고, 내가 일하게 될 나라가 여행금지 국가도 아니었기에, 큰 고민 없이 쪽지에 적힌 장소를 따라 인천의 어느 허름한 항구에 도착했다. 

 

외국이라길래 비행기를 탈 줄 알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짐을 좀 더 쌀 걸 그랬나.

 

무뚝뚝한 항구 관리자의 안내에 따라 낡은 소형 페리에 몸을 싣고 눈을 감으니, 얼마 안 가 출항을 알리는 뱃고동이 울렸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다시 뱃고동이 울려 잠에서 깼을 때,

 

“아니, 대체, 여긴….”

 

내가 도달한 곳은 태양이 두 개 뜬 다른 세상이었다. 



 

1.


이세계. 표준 국어사전에는 등록조차 안 된 오타쿠 용어.

 

셀 수도 없는 서브컬처 매체들에서 전가의 보도와도 같이 쓰여진 설정이었지만, 지금 내가 목도한 상황을 표현하기엔 더없이 어울리는 단어였다.

 

처음에는 워낙 경우가 없어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다른 세계를 오고 가는 것이 단순한 해외여행도 아니고, 최소 1년은 두고 봐야 한다는 현지 관계자의 말에 나는 꼼짝없이 이곳의 생활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태양이 두 개 떠 있고, 동물 귀 달린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하며 옛날 기록영화에서나 보던 클래식 카와 마차들이 돌아다니는 세상.

 

처음엔 이게 꿈인가 싶다가도, 현지 적응 교육 담당관의 길쭉한 귀와 그 뒤를 따르는 정령들의 모습은 마치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무언의 압박으로 다가왔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게 사실이었구나.’

 

물론 조건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그날 내가 서류상으로 제안받은 건 두 가지.

 

먼저 나의 군 경력 일체 인정 및 현지 적응 교육 이수 후 주어지는 대위 계급, 그리고 1년 내 소령 진급 및 육군대학 입학 기회였다.

 

그때의 내 처지를 생각하면 그런 조건을 거부할 이유도 없었고, 설령 일하게 될 곳이 이런 다른 세상이라 해도 당장 먹고살 길이 해결됐으니 충분히 감내할 만했다.

 

“37번 교육생, 앞으로 나오세요.”

 

그리고 오늘은 현지 적응 교육 수료일.

 

나를 비롯한 외지인들이 이 나라, 리에넨에서 일하기 위한 기초적인 교육을 마치고, 각자 일자리에 맞는 직책을 받아 해산하는 날이었다.

 

“대위 임관,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인자한 얼굴로 나의 어깨에 리에넨 육군에서 대위 계급을 나타내는 수평으로 늘어선 검정색 직사각형 문양을 달아주는 담당관이 한층 더 자애로워 보였다.

 

그리고 내 손에 쥐어지는 쪽지 한 장.

 

[9시까지 임페리얼 호텔 카페테라스 5번 테이블로 가볼 것.]

 

임페리얼 호텔은 리에넨의 수도 아우구스타 유일의 5성급 호텔이었고, 이는 곧 비공식 석상 중에서도 꽤 높은 사람이 행차하실 자리라는 걸 의미했다.

 

과연 어떤 사람이 이런 누추한 나를 만나기 위해 귀한 행차를 하는 건지 알 길이 없었지만, 이렇게 쪽지만 덜렁 받고 나니까 괜히 긴장부터 됐다.

 

담당관과 작별 인사를 하고, 자리를 옮겨 정해진 시간보다 10분 먼저 호텔에 다다르자, 어디서 많이 봐왔던 광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금칠이 된 회전문부터 대리석으로 깔린 로비, 은은한 실내조명과 제복 차림으로 근무 중인 종업원들까지.

 

‘이런 건 또 한국에서 봤던 고급 호텔들하고 별 다를 게 없네.’

 

“여, 이쪽이야.”

 

그렇게 중간층의 카페테라스에서 서성이기를 잠시, 구석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니 왠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을 한 사람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고급 장교용 코트를 두르고 있던 그 사람의 계급은 육군 소장.

 

진짜로 날 만나기 위해 나온 사람이 맞나 싶어 쪽지와 테이블의 번호를 번갈아 봐도 지금 상황이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대위! 유진영.”

“유진? 이름 귀엽네. 일단 자리에 앉아.”

 

거수경례를 붙이며 관등성명을 대니, 여인은 레몬티 두 잔이 놓인 테이블을 가리키곤 자리에 앉았다.

 

단정하게 정리된 옅은 레몬색의 머리칼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눈동자, 그리고 훤칠한 체구.

 

‘분명 어디서 봤던 얼굴인데.’

 

“반갑다. 난 17보병사단 사단장 워스파이트 소장이야.”

 

레나 에마리오 워스파이트. 가슴께에 오버로크된 명찰에는 분명 그리 적혀 있었다. 

 

나보다 몇 살은 어려 보이는데도 이미 소장 계급을 단 건 어떻게 넘어가더라도, 성이 워스파이트라는 건…….

 

“혹시 군사고문단장님과─”

“내 동생인데, 걔 요즘은 잘 지내니?”

“예, 뭐, 나쁘진 않아 보였습니다.”

“혼자 타지 생활하는 애라 걱정했었는데, 다행이네.”

 

나를 이 기상천외한 나라로 불러들인 쥐색 양복 차림의 여인과 같은 집안이라는 말이 됐다.

 

대체 이 나라는 구조가 어떻게 되어 먹었길래 이렇게 젊어 보이는 인간들이 왕실 군사고문단장을 하고 사단장을 하는 걸까.

 

“그래서 어떻게, 그쪽은 고향 떠나 지낼만했어?”

 

그런 의문을 갖는 것도 잠시, 스스럼없이 질문을 던진 사단장은 앞에 놓인 레몬티를 홀짝이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타향살이 자주 해서 금방 적응했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나도 군 생활 하는 동안 어디 한 지역에만 오래 머문 적은 없었기에, 달리 지내기 어렵고 자시고 할 일은 없었던 게 사실이었다.

 

사단장이 원했던 대답이 이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끔 그런 애들이 있어. 향수병 걸려서 관두는 애들이.”

“저는 여기에 뼈를 묻을 각오로 왔습니다.”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니 고맙네.”

 

나름 듣기 좋으라고 했던 말이었지만, 의외로 사단장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뭐, 내가 한 말의 진실 여부를 떠나서, 좋든 싫든 간에 내겐 여기가 마지노선이었으니, 내 평가를 올리기 위해서는 앞으로의 행동에 달린 거겠지. 

 

“어디 보자, 군 경력이…, 12년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품에서 종이 한 장을 달랑 꺼낸 사단장은 그 말과 함께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고, 거기에 거짓은 없었기에 나도 달리 꿇릴 건 없었다.

 

12년. 병과 전문하사 복무기간 2년에, 장교 생활 10년을 합친 그 숫자는, 대학교 2년과 3사 생도 2년을 제외하면 내 젊음의 전부를 바친 기간이었다.

 

그렇게 조국에 충성을 다했던 결과물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렸다.

 

“기갑 장교라고 했지?”

“예? 예, 맞습니다. 기갑병과.”

“너 지금 딴생각 하냐?”

“아닙니다!”

 

잠시 감상에 젖을 틈도 없이 예리하게 내 태도를 지적한 사단장은 의외로 별 감정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기야 사단장 입장에선 나 같은 놈 상대하는 게 한두 번도 아닐 테고, 아쉬우면 내가 먼저 노력해서 가치를 입증하면 되는 문제였다.

 

“됐고, 우리 사단 전차대대에 중대장 자리가 하나 비는데, 올 생각 있어?”

“맡겨만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바로 지금과 같이 말이다.

 

사단장은 나의 그런 대답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띤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모자랐나 싶다가도, 담당관이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여기로 보낼리는 없었기에 일단은 확신을 갖고 운명에 맡겨보도록 했다.

 

“가자.”

“잘 못 들었습니다?”

“대대 주둔지까지 걸어갈 거야?”

 

이건 일단 합격이네.

 

---

 

사단장과의 면담 아닌 면담이 끝나고, 앞으로 복무하게 될 전차대대의 주둔지로 향하는 길은 빈말로라도 순탄하다고는 하지 못할 자리였다.

 

개인적으론 그냥 기차나 마차를 타고 홀로 느긋한 여행길에 올라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대대 주둔지까지 데려다 주겠다니.

 

 사단장의 호의를 무시할 수도 없거니와, 주둔지에 도착해 장군 차량에서 내릴 경우 얻어갈 몇몇 이점들은 나를 사단장과의 드라이브로 이끌었다.

 

물론 그런 좋은 부분만 가져갈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사단 작전지역인 리에넨 동부 토르니아 주 오렌지 카운티까진 장장 여섯 시간에 이르는 긴 여정이 이어졌다.

 

“전차부대의 선결과제가 뭐라고 생각하지?”

“적 기갑전력 격멸 및 보병지원입니다.”

“아군 대전차전력이 있음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 부분에 대해선…”

 

그리고 나는 그동안 잠시도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지는 사단장의 질문 공세와 전술 토의에 만족할 만한 답변을 준비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야 했다.

 

…결과적으로 자대에서 어떻게 중대장 생활을 이어나갈지에 대한 계획은 사실상 백지와도 같은 상태에서 시작하게 됐다.

 

“영 대위, 듣고 있나?”

“예, 대대장님.”

 

그렇게 도착한 171전차대대는 대대장부터가 사단장을 능가하는 전형적인 야전 군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피부와 이마에서 왼쪽 뺨으로 이어지는 긴 흉터, 목소리는 중후했으며 시원하게 밀어버린 스킨헤드에 군복 위로도 드러나는 탄탄한 근육과 다부진 체격.

 

171전차대대의 대대장, 파웰 중령이 주고 있는 위압감은 마치 한 마리의 야수, 그 자체였다.

 

그나저나 영 대위라니, 호텔에서 사단장이 불렀던 것도 그렇고 '유 진영'이던 내 이름이 이곳에선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유진 영'이 되어버렸으니, 참 묘한 기분이었다.

 

“이름과 다르게 별로 young해 보이진 않는구만.”

“아, 예….”

“핫하하! 농담일세.”

 

도대체 어디서 웃음 포인트를 잡으란 건지 알 수 없는 농담에, 나는 멋쩍게 웃으며 대대장을 비위를 맞추는 것부터가 고되게 느껴졌다.

 

생긴 거는 철판도 뜯어먹을 것 같은 야성적인 군인 상인데, 저런 재미도 감동도 없는 개드립을 칠 줄이야, 역시 사람은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면 안 되는구나.

 

“그보다도, 자네가 맡게 될 3중대는 지난달에 새 전차를 수령해서 신경 쓸 일이 많을 거야.”

“근시일 내에 차질없이 전력화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기대하고 있겠네.”

 

그다음은 뭐, 서로 인사치레나 다름없는 말을 주고받고, 이제 적당히 거수경례 올린 후에 중대 행정반으로 내려가면 되겠거니 했다.

 

그 꼴을 보기 전까지는.

 

“어이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나 먼저 퇴근할 테니까 3중대장도 적당히 있다 퇴근해.”

“예, 알겠습니다.”

 

다급하게 대대장실을 나서는 대대장을 뒤로하고,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니 현재 시각은 오후 4시.

 

내가 교육받은 내용이 맞는다면 리에넨 육군의 표준일과 종료시간은 오후 5시 30분이었는데, 지금 이게 뭔 상황인가 싶었다. 

 

워낙 어이가 없어 시선을 맞춘 당번병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꼴 한두 번 보는 게 아니라는 반응. 

 

아직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남아있나 싶어 가방을 뒤져 규정집을 살펴봐도, 평시에 지휘관이 일과시간 이전에 퇴근해도 되는 사유는 없었다.

 

“근데 또 시설은 좋네.”

 

찝찝한 기분으로 주인 없는 대대장실을 나와 주둔지 내부 전경을 살펴보니, 시설들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훌륭했다.

 

리에넨은 기본적으로, 문화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내가 살던 세계의 1세기 전 모습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도 대대 인원 전체를 수용하는 3층짜리 통합형 막사와 제법 깔끔한 외관의 독신자 숙소, 지붕까지 달린 전차호는 내가 한국에서 군 생활할 때 지냈던 곳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부대, 차렷!”

“됐어, 그냥 일들 봐.”

 

참고로 내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앞으로 중대장 직무를 수행하게 될 3중대 행정반.

 

막사 2층 좌측 구석에 자리한 행정반에 들어서자마자 들려오는 제식 구호를 만류하고 내부를 한번 쓱 둘러보자, 다들 행정작업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아마 대대장 말대로 신규 장비 전력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거겠지.

 

상석에서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중위 하나에 소위가 둘, 행보관으로 보이는 상사가 하나, 중사 계급의 통신 반장 하나, 잡무를 보는 일병에서 상병 사이의 병사가 넷. 

 

중대급 업무를 처리하는 데에 부족함은 없어 보였지만, 문제는 그 업무에 사용하는 장비가 두벌식 타이프라이터와 깃펜이라는 것이었다.

 

이거 오늘 임관 첫날부터 야근 각이네.

 

“야, 부중대장아.”

“중위! 조지 퍼시우스 웰링턴! 부르셨습니까!”

 

나의 부름에, 상석에 앉아있던 곱상한 인상을 주는 금발 벽안의 남자애가 몸을 일으키며 어디서 나오는지도 모를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이는 열일곱, 여덟쯤 됐을까. 이름을 보면 평범한 집안 출신 같지는 않았고, 계급이 중위라는 건 임관 이후 적어도 1년 이상을 복무했다는 얘기가 됐다.

 

물론 리에넨 왕국 육군사관학교의 시스템이 어떤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귀족 자제라는 이유 하나로 이제 겨우 초등교육만 마친 애를 4년간 군사교육 시키고 장교로 써먹는 건, 실무자로서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였다.

 

“목소리 좀 낮추고, 작업 얼마나 됐어?”

“이제 절반 정도 했습니다.”

 

아무튼, 부중대장의 호구조사를 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발등에 떨어진 불똥을 치우는 게 급선무.

 

타이프라이터가 한국에서 행정작업 할 때 곧잘 썼던 두벌식 자판에 아라비아 숫자와 영어가 나열된 물건인 걸 생각하면 별로 어려울 건 없었다.

 

“나도 일거리 좀 줘봐.”

“네‥, 네?”

“속기 정도는 할 줄 아니까 일거리 좀 달라고.”

“알겠습니다, 중대장님.”

 

당황하는 와중에도 깃펜으로 정리한 초안과 작성양식을 같이 넘긴 걸 보면, 겉모습과는 다르게 기본적인 일머리는 있는 듯했다.

 

타이프라이터 상단에 누런 용지를 끼우고, 첫줄 중앙에 개요, 한 줄 띄우고 소속 부대, 또 한 줄 띄우고 작성날짜.

 

부족한 부분이나 알아듣기 어려운 건 전입 올 때 가져온 핸드북 타입의 대륙 공용어 사전을 뒤져가며 해결했고, 기본적으로 영문 350타를 칠 줄 아는 보편적인 능력이 의외로 여기서 빛을 발했다.

 

“중대장님, 빠르시네요.”

“나 있던 데에선 이게 평균이야.”

 

순식간에 초안 네 장 분량을 타이핑한 나를 바라보며, 웰링턴 중위는 넋이 나간 듯한 목소리로 그리 읊조렸다.

 

그리고 나의 그런 모습이 어지간히도 의외였는지, 행정반 안의 다른 간부들도 놀란 눈치로 이쪽을 기웃거렸다.

 

신경 쓰지 말고 자기 할 일이나 하라는 의도로 했던 말에도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좀 어이가 없었지만, 그거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겠지.

 

“중대장 직인 나 주고, 타이핑도 혼자 할 테니까 부중대장은 소대장들 끼고 초안 작성해.”

“예, 중대장님.”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은 그런 시선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행보관님은 제가 바로 타이핑 올릴 수 있게 검수작업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난 임관 첫날부터 야근하고 싶지 않았고, 무얼 해도 지금 잡힌 업무체계보단 나을 거라는 판단하에 짬 순으로 끊어 작업을 배정했다.

 

“그리고 병사들, 괜히 남아서 커피 타고 잡일 할 거면 그냥 내무실 복귀해라.”

“예! 감사합니다!”

 

그 과정에서 업무에 참여하지 않고 괜히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병사들을 돌려보낸 건 덤.

 

내가 12년 짬을 똥꼬로 처먹은 것도 아니었고, 어딜 가나 이 바닥은 항상 머리가 빠릿빠릿하지 못하면 매일이 무지성 야근 확정이었다.

 

“우리 퇴근 시간 전까지 일 끝내면, 오늘 중대장이 맥주 쏜다.”

 

그래서 내놓은 타개책이 이거였다.

 

내가 전입오기 전부터 쭉 행정작업 하느라 지쳤을 중대 간부들에게 적당히 발라 줄 윤활유.

 

마침 교육 수당으로 받은 돈도 넉넉하겠다, 이럴 때엔 빠른 부대 장악을 위해서라도 현금술로 간부들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었다.

 

“자, 중대장님 말씀 들었으면 빨리빨리 좀 합시다!”

“““알겠습니다!”””

 

현금술 성능 좋네.

 

---

 

하지만 내가 그날 맥주를 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불필요한 과정의 생략과 최적화된 업무 분담, 적절한 업무의욕 고취는 FM 필사 및 번역 최적화라는 막대한 업무량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고,

 

거짓말과도 같이 날 포함한 중대 간부 전원은 8시에 퇴근을 하게 됐다. 




2.


 

“““신임 중대장님을 위하여!”””


좁은 선술집 안에서 황금빛 맥주잔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현재 시각 오후 8시 30분.


원래라면 내가 이날 맥주를 마실 일은 없었어야 했다.


작업이 끝난 시간은 일과 종료시간 기준 2시간 30분을 초과한 명백한 야근이었고, 중대 간부들로부터 괜히 입바른 소리 했다고 비아냥거림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랬어야 했는데…….


“중대장님, 맥주가 입에 안 맞으십니까?”

“아니. 원래 내가 사려고 했는데, 미안해서 그래.”


지금 날 포함한 우리 3중대의 간부들은 대대 주둔지 근처 선술집에서 단체로 머리통만 한 맥주잔을 들고 있었다.


맥주라, 이세계의 선술집이라길래 좀 더 다른 것을 기대했었건만, 이곳에서 주력으로 취급하는 물건들은 라거 아니면 하우스 버번, 그나마 좀 특이했던 것이 벌꿀주 정도였다.


첨언 하자면 나 대신 지갑을 연 사람은 1소대장 겸 부중대장을 맡고 있던 웰링턴 중위.


아까 슬쩍 봤을 때, 웰링턴 중위의 지갑은 상당히 두꺼운 상태였고, 그걸 처음 봤을 땐 좀 비싼 술을 시켜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물론 전입 첫날부터 부하에게 얻어먹는 주제에 그런 양심 터진 짓까지 하는 건 내가 생각해도 아니었기에, 얌전히 녀석이 추천해주는 토르니아 주 특제 하면 발효 흑맥주를 골랐었지만.


“너무 신경 쓰지 마십쇼. 1소댐 부자라 돈 많슴다.”

“맞습니다. 그리고 오늘 중대장님 덕에 어제보다 두 시간 일찍 나온 겁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각자 한마디씩 거드는 2, 3소대장의 모습이 그나마 내게 작은 위안이 됐다.


처음 전입왔을 때 작업을 주도하던 것도 그렇고 지역 내 유력 가문 중 하나인 웰링턴 변경백의 자제인 점까지 생각하면, 확실히 웰링턴 중위는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다.


“것보다 중댐, 바깥에선 뭐하셨슴까?”

“진급 잘린 군인이었지. 그전에는 대학에서 회계 배웠었고.”


그렇게 가릴 것 없이 옛날 일을 밝히자, 질문을 했던 2소대장 앤슨 소위는 3소대장인 클라크 소위와 묘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클라크 소위의 품에서 나오는 녹색 지폐 다섯 장.


“너네 뭐하냐?”

“아, 내기 중이었슴다.”

“무슨 내기.”

“중댐 전입오기 전 직업으로요.”

“그래서, 2소대장이 군인으로 걸고, 3소대장이 딴 거로 걸었다?”

“예, 그렇슴다.”


그 말과 함께 장난치기 좋아하는 소년과도 같이 티 없는 웃음을 보여주는 앤슨 소위를 두고, 나는 차마 핀잔을 줄 수가 없었다.


옆에서 한숨 쉬는 클라크 소위의 반응을 보면 이런 게 한두 번 있는 일 같지도 않아 보였다.


“그럼 나도 좀 물어보자. …굳이 기갑 병과를 지원한 이유가 있나?”

“…….”

“의무 쪽은 병과장 TO가 대령까지거든요.”


의외로 호탕하게 답할 것 같았던 앤슨 소위가 침묵한 것과는 다르게, 클라크 소위는 담담하게 자기 뜻을 밝혔다. 


거기서 굳이 진급 상한선을 언급한 건, 자신의 군사적 커리어를 최소 장군까지로 잡아뒀다는 의미겠지.


그리고 내가 굳이 이런 질문을 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둘 다 웰링턴 중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작은 체구의 여자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방공이나 군수 쪽이 나을 텐데, 야전에서 안 힘들었어?” 

“그런 거 따질 거면 군인 할 생각 버려야죠.”

“클라크 말이 맞슴다. 그리고 기갑, 멋지지 않슴까.”


기본적으로 기갑병과는 직무를 수행하는 데에 있어 평균 이상의 체력과 끈기를 요구한다.


그건 장교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고, 수십 톤짜리 굴러다니는 쇳덩어리를 유지보수하는 동시에 휘하 병사들까지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보통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그런 대답을 듣고 나니, 덤덤한 표정을 한 클라크 소위와 지금도 멋쩍게 웃고 있는 앤슨 소위의 존재가 조금은 든든하게 느껴졌다.


“중대장님 손목은 좀 괜찮으십니까?”

“아, 행보관님. 검수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전 괜찮습니다.”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걸걸한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어느새 두 번째 잔을 들고 있는 행정보급관, 챈들러 상사가 서 있었다.


그 목소리만큼이나 터프한 외관을 자랑하는 챈들러 상사는 짙게 화상자국이 남은 오른쪽 뺨을 긁적거리며 내 손목을 바라봤다.


이정도 작업이야 이골이 날 정도로 해봤으니 별거 없었지만, 그래도 남이 걱정해 주는 게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중대 간부들 표정이 밝아서 다행이네요.”

“다들 중대장님에게 기대하는 바가 큽니다.”

“아무렴요. 제가 잘해야죠.”


챈들러 상사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상당히 직설적인 편이었다.

 

물론 그게 틀린 말도 아니었고, 나도 이런 분위기를 유지해 가며 중대장 생활을 이어가고 싶었기에 별 대꾸는 하지 않았다.


오랜 친구와도 같이 서로 으르렁대는 2, 3소대장, 통신 반장인 밀러 중사와 함께 술잔을 나누며 미소 짓는 1소대장 겸 부중대장, 짬에서 나오는 신뢰를 두른 행보관까지.


앞으로 1년간, 중대를 잘 가꾸어 나가 새로 배치되는 장비들의 전력화를 선도하여 육군 전체에 선순환을 줄 수 있도록 하자.


그러기 위해선…,


‘내가 정신 차리고 잘해야겠지.’


---

이튿날 숙취에 머리를 싸매고 중대 행정반으로 출근했을 땐, 중대 간부들은 이미 출근해 행정작업에 몰두 중인 상태였다.


지금도 열심히 초안을 작성 중인 웰링턴 중위의 옆에 놓인 종이의 잉크가 이미 다 마른 걸 보면, 작업을 꽤 이른 시간부터 시작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부중대장아, 일하러 나갈 거면 나도 좀 깨워주지 그랬냐.”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휘관급 장교의 일과시간을 하급자가 정할 순 없었습니다!”


아니 이건 또 뭔 소리야. 


“목소리 좀 낮추고. …그럼 대대장님 조기퇴근 하시는 것도 그런 거야?”

“예, 그렇습니다.”


각 잡힌 자세로 나를 바라보며 말하는 웰링턴 중위의 태도를 봤을 때, 일단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리에넨 육군에서 지휘관급 장교로 취급되는 계급은 보통 중대장 직무를 수행하는 대위부터.


군사지도에 쓰이는 단대호도 그랬지만, 리에넨 육군은 군 체계가 놀랄 정도로 한국군의 원전인 미군과 상당히 닮아있었다.


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육군성 정책부서도 아닌 야전의 말단 부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언제부터 그랬는데.” 

“육군의 오랜 관례입니다.”


순간, 웰링턴 중위의 대답을 듣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사회상이나 문명 수준이 낙후되었다곤 해도, 설마 이정도일 줄이야. 


물론 내가 복무했던 곳의 근무 여건이 좋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거 비슷한 걸 여기서도 볼 생각 따윈 없었다.


“그럼 이제 나 있는 동안은 그런 이상한 관습 같은 거 하지 마.”

“잘 못 들었습니다?”

“일할 거면 같이 하고 출퇴근도 같이해야지, 괜히 짬 순으로 눈치 줘서 누구 먼저 업무 준비하고 그런 거, 하지 말라고.”


중대장 석에 놓인 책상을 내려치며 그리 선언하자, 장교, 부사관, 병사 나눌 거 없이, 행정반 내부 인원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날아와 꽂혔다.


마치 방금 자기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 


‘내가 뭐 이상한 말이라도 했나?’


혼자 속으로 되물어 봐도 납득이 갈만한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중대장님께서 아직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우리 군은 우리만의 룰이 있습니다.”


역시 가장 먼저 반박을 하려고 나선 건 간부들 가운데 가장 짬이 높던 행보관이었다. 


하지만 나라고 이제 와서 물러날 생각 따윈 없었다.


그들 입장에서야 나는 리에넨 출신도 아닌 외지인에 낙하산 인사였겠지만, 적어도 내가 있는 동안 그런 조직에 해가 되는 낡은 관습이 통용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행보관님이 어제 그러셨죠, 다들 저한테 기대하는 바가 크다고.”

“그건 이런 의미로 했던 말이─”

“딱 1주일만 제 지시대로 따라와 주세요. 그때도 지금 같으면 행보관님 말 듣겠습니다.”


내가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자 그제야 행보관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고, 그걸 기점으로 행정반 인원들은 조용히 나의 지시를 기다렸다.


“자, 어제하고 똑같은 포지션으로 갑시다.”


이에 호응하여 손뼉을 두어 번 치며 지시를 내리자, 다들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이 자리를 바꿔 작업을 재개했다. 


어제와 같이 소대장들은 부중대장과 함께 깃펜으로 초안을 짜고, 행보관은 검수를, 통신 반장은 나와 함께 속기를 맡았다.


굳이 어제와 다른 점을 하나 꼽으라면 병사들에게도 작업을 맡길 수 있다는 것 정도.


“병사 중에 속기할 줄 아는 사람, 거수.”

“상병! 헨리 웨이드! 2급 속기사 자격증 있습니다!”


대체로 소대장들과 비슷한 연령대의 행정병 중, 유난히 키가 크고 금테 안경을 쓴 병사 하나가 손을 들었다. 


리에넨 육군병 입대 자원의 수준을 생각하면, 뭐라도 자격증 하나 들고 있다는 게 대단할 따름이었다.


“그래? 그럼 너 앞으로 일 끝날 때까지 딴 거 하지 말고 여기서 같이 작업해.” 

“예, 알겠습니다!” 


이렇게 확보된 속기사가 셋. 


애가 자격증이 없는 것도 아닌데, 어제는 대체 왜 행정병이라고 뽑은 병사들이 잡일이나 하고 있었는지 이해가 안 갔었다.


이것도 뭐 리에넨 육군만의 관습이니 룰이니 했던 거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지만.


“중대장님, 어제 작성하시던 부분 포함해서 작성해야 할 보고서 양식입니다.”


대충 교통정리를 끝내고 자리에 앉자, 오른쪽에서 초안을 작성하던 웰링턴 중위가 펜글씨로 빼곡하게 적힌 종이 뭉치를 건넸다.


“그래, 거기 내려놓고, 계속 일 봐.”

“알겠습니다.”


손목을 한 번 풀어주고 대륙 공용어 사전 핸드북을 펼쳐둔 뒤, 타이프라이터를 두드리기 시작하니, 어느새 행정반에는 종이 넘어가는 소리와 활자 찍히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렇게 중대 간부 전원이 매달린 신규 장비 전력화를 위한 행정작업의 내용은 의외로 간단했다.


먼저 궤도차량 국가보험 가입 및 신규 장비 등록을 위한 문서 작성과 기등록된 장비들의 행정정보 폐기 요청.


이를 위해서는 군수공장 측에서 넘겨준 차대번호와 로트번호 대조 후 재산처리, 같이 딸려온 주요 부수 기재들도 누락 된 게 없는지 같이 확인해야 했다. 


여기까진 문제없이 진행됐기에 지금 우리가 현장에서 실셈하지 않고 행정반에서 책상물림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통신 반장님, 차량용 롱 안테나 수량 좀 다시 확인해 주실 수 있나요?”

“예, 부중대장님. 예비 포함 서른두 개로 변동사항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실셈을 도맡아 한 것이 통신 반장인 밀러 중사를 포함한 행정병 넷이었다는 걸, 작업을 진행하면서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아무튼 실셈 다음에 이루어지는 작업이 바로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행정작업.


상급 부대에 올려야 할 공문서를 만들 때 타이프라이터를 사용했었는데, 여기서 오탈자가 생겨 페이지 전체를 버리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속기할 내용을 미리 초안으로 뜨고 검수까지 2중으로 하는 것이었다. 


다들 이런 작업이 처음인 데다 관례니 룰이니 하는 이상한 시스템에 매몰된 상태에서 중대장까지 공석이었으니, 매일이 무지성 야근이었어도 이상할 게 없었겠지.


‘♬♪𝅘𝅥𝅯♫’


그렇게 조용히 작업에 몰두해 있기가 수 시간, 창밖에서 오전 일과 종료를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중대장님, 식사 시간입니다.”

“어, 애들 데리고 교대로 밥 먹으러 갔다 와.”

“중댐은 식사 안하심까?”

“하던 거 끝내고 먹으려고.”


다른 간부와 병사들을 먼저 병영식당으로 내려보내고 기지개를 쭉 켜니, 머리가 차가워지며 남은 업무에 할애해야 할 시간에 대한 고뇌가 머릿속을 가득 메워갔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행정작업 자체는 내가 오기 전에도 진행됐을 텐데, 이제 겨우 전차 3대 분량의 작업만을 처리했을 뿐이었다. 


‘1주일 안으로…, 끝낼 수 있을까.’


아침에는 자존심에 떠밀려 호언장담하긴 했었지만, 솔직히 확신이 서는 것도 아니었다.


이러다가 내가 정한 기한 내에 작업을 못 끝낸다면, 남은 중대장 임기 내내 행정관과 부중대장에게 끌려다니겠지.


하여간에 어딜 가든 입이 문제다.


아무튼 그렇게 혼자 고민해봐야 답도 안 나올 문제에 머리를 싸매는 것도 잠시,


“어, 외지인이다.” 


행정반 구석 탕비실에서 커피잔을 든 채 그리 말하는 병사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병사들과 비슷한 나이대의 외관에 좀처럼 익숙하지 않은 진녹색 전투복, 특징이 있다면 머리 색이 이곳에서 보기 드문 검은색이라는 점 정도일까.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의 이목을 끌었던 것은 따로 있었으니…….


“너도 외지인이냐?”


이 병사, 동양인이었다.


 


3.


지금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어디 출신이에요? 한국? 중국?”

 

손에 들었던 커피잔까지 내려놓고 벽에 기대어 선 채 말을 거는 그 아이의 얼굴은 마치, 해외 나와서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난 것 같은 반가움에 젖어 있었다.

 

“타치바나 상급상병, 장교한테 그렇게 대하라고 배웠나?”

“그냥 두세요, 행보관님.”

 

그 병사에게 핀잔을 주려는 중대 행정보급관, 챈들러 상사를 제지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타치바나 상급상병이라 불린 해당 병사는 거리낄 것 없다는 태도로 나를 대하고 있었다.

 

뭐, 나 같아도 이런 상황이면 계급 이전에 반가움이 먼저 올라왔겠지. 

문화나 주변 환경 이전에 리에넨 국민의 절대다수는 우리 세계의 서양인과 같은 외모와 피지컬을 지니고 있었고, 그건 엘프나 수인 같은 아인종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정도 상식이 통용되는, 같은 세계 출신의 동양인을 만났다면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난 한국 출신인데, 그쪽은?”

“저는 일본, 치바현 이치카와시에서 왔어요.”

 

싱긋 웃으며 그리 답한 녀석은 자연스럽게 중대장 석 옆의 자리에 앉아 자기 할 말을 이어나갔다.

 

치바현이라, 학교에서 배우기론 도쿄 옆에 붙은 위성도시 정도의 이미지였는데, 수도권에서 잘 살던 애가 무슨 일로 이런 곳까지 흘러들어온 걸까.

 

“이야~, 새로 오신 중대장님이 보통내기는 아니라고 들었는데, 설마 같은 문화권 외지인일 줄은 몰랐네요.”

“나도 병사 중에 외지인이 있을 줄은 몰랐지.”

 

그 부분이야 나중에 행보관이나 소대장 통해서 알면 되는 거였고, 지금은 눈앞의 이 아이가 나의 중대원인 이상, 일단 녀석에 대해 천천히 알아가는 것이 먼저였다.

 

우선 겉모습과 행동거지만 보면 한국 있을 때 흔하게 봤을 법한 여고생들과 크게 다를 것 없었지만, 입고 있는 옷과 장구류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여기서나 한국에서나 군대 있는 동안 여군 자체는 숱하게 봐왔어도, 리에넨 사람도 아닌 아이가 이렇게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여기엔 어쩌다 오셨어요? 대충 얼굴 보니까 제 삼촌뻘은 되시는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늙어 보여?”

“네.”

“그렇게 바로 대답하면 아저씨도 좀 상처받는데.”

 

아니, 방금 한 말 취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괜히 의기소침해서 작게 대답하는 나의 반응에 녀석은 보란 듯이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하여간에 저 나이대 아이들, 특히 여자애들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나야 뭐, 먹고 살길 찾아서 왔지. 너는?”

“저도 비슷해요. 집 나간 여고생 받아주는 곳은 드물잖아요.”

“그것도 그렇네.”

 

스스럼없이 서로의 사연을 밝힌 것과는 달리, 나와 녀석의 사이에 아주 잠시간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먹고 살길 찾아 가출해서 이세계까지 흘러들어온 여고생이라.

 

보기 드문 걸 넘어 생전 처음 보는 경우였으나, 타인 입장에서 괜히 초면에 이해하는 척 다가갔다간 역효과만 날 것 같아, 나는 그 이상 캐묻지 않기로 했다.

 

“아무튼, 하시는 거 보면 군 생활 처음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그래, 나도 잘 부탁한다.”

 

그걸 끝으로 발걸음을 돌린 녀석은 행정반을 나가려는 도중, 갑작스레 고개를 돌려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 참, 그 커피, 중대장님 드세요.”

 

그 말과 함께 녀석의 시선이 가리킨 것은 중대장 석 책상 구석에 놓인 자기 계급과 이름이 주기 된 새하얀 머그잔. 

 

딱 봐도 개인용 컵이었다.

 

고맙다는 의미로 머그잔을 집어 들며 짧게 고개를 숙이자, 녀석은 그제야 손을 흔들며 행정반을 빠져나갔다.

 

그 머그잔을 양손으로 감싸고 향을 음미하며 한 모금 넘기니, 자주 마시던 믹스커피와는 다른 향취를 느낄 수 있었다.

 

‘커피는 맛있게 잘 타네.’

 

그런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동안, 마치 한차례 폭풍우가 지나간 것과도 같은 적막감이 행정반을 맴돌았다.

 

실제로 지금 행정반에 남은 인원은 오전 중에 올라온 초안의 마지막 한 장을 검수 중인 챈들러 상사와 속기 작업이 덜 끝난 웨이드 상병뿐.

 

무언가 사적인 얘기를 나누려면 기회는 바로 지금이었다.

 

“어떤 친구예요?”

 

나의 물음에 챈들러 상사는 마침 잘 물어봤다는 듯 시원스레 입을 열었다.

 

“타치바나 상급상병 말입니까? 골칫덩이죠.”

“보직은요?”

“중대장 전차 포수입니다. 다른 애로 바꿔드릴까요?”

“아뇨, 오히려 잘됐네요. …가르치는 맛이 있겠어요”

 

중대장 전차 포수라, 실전에선 내 옆에서 바로 명령을 수행할 보직임을 생각하면 녀석도 나도 서로에 대해 좀 더 알아갈 필요가 있었다.

 

그 녀석 외에도 추가적으로 중대장 전차에 타게 될 아이들은 조종수, 탄약수, 무전수.

 

야전에선 중대장도 병사들과 함께 최일선에서 전투를 수행해야 했는데, 같은 전차를 타는 승무원들과의 관계라면 더 말해 봐야 입만 아픈 문제였다.

 

“조심하세요, 중대장님. 걔, 보통내기 아닙니다.”

“뭐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자기 딴에는 나름 충고한다는 말에 별 감흥 없다는 투로 대답하자, 주위를 둘러보던 챈들러 상사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다른 게 아니고 그 애 생활지도 기록부를 보면 아시겠지만, 위아래 안 가리고 폭행 사건 터뜨렸다가 전출만 3번 당했습니다.”

“그거참 강단 있는 친구네요.”

“보직도 두 번이나 바뀌었는데, 괜찮겠습니까?”

“그런 병사들도 같이 끌고 가는 게 지휘관이 해야 할 일이겠죠.” 

 

그런 조언을 적당히 흘려넘기는 나의 태도에 챈들러 상사는 노골적으로 한숨을 내쉬었으나, 그 정도 흠결은 중대장으로서 감내할 만한 수준이었다.

 

오히려 문제점을 알았으니 해당 병사를 대하는 것에 있어 대략적인 가이드라인이 제시된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행보관님 먼저 식사 다녀오세요.”

 

마침 식사를 끝내고 돌아오는 부중대장 일행 덕에 그 이상 무안한 대화가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중대장님은 안 가십니까?”

“하던 거 끝내고 가려고요.”

 

생각해 보면 오늘 점심 메뉴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도 않았고, 어제 달린 숙취가 남아 배가 고픈 것도 아니었다.

 

그냥 이대로 쭉 일이나 하면서 오늘치 작업량을 일과시간 내로 끝낼 수 있기를 빌어야겠다.

 

---

 

다행히도 오늘 분량의 작업이 끝난 시간은 오후 5시였다.

 

중간에 밀러 중사가 행간 설정 잘 못 해서 서류 몇 장을 날려 먹은 걸 생각하면 더 일찍 끝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획기적인 속도로 일을 끝냈다는 게 부중대장인 웰링턴 중위의 의견이었다.

 

그 다음은 뭐, 간부 병사할 것 없이 다 같이 행정반을 정리하고 퇴근, 오늘도 마시러 나간다는 2, 3소대장을 배웅하고 곧바로 연병장 아래 전차호로 향했다.

 

우리 행정업무의 주인공인 이번에 새로 전력화되는 전차를 직접 살펴보기 위해서였는데, 다행히도 중대장 전차가 주차된 전차호에는 나 이외엔 아무도 없었다.

 

다른 사람 시선 신경 안 쓰고 천천히 둘러보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여유롭게 궤도부터 차체를 거쳐 포탑, 주포를 훑어봤을 때 먼저 든 생각은 하나였다.

 

‘아니, 셔먼이잖아 이거.’

 

셔먼. 정확한 제식명은 Medium tank M4, 그러니까 모델 4 중형전차.

 

내가 살던 세상의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주력으로 운용했고, 한국전쟁 때는 국군의 주 전력으로 활약한 전차였다. 

 

물론 자잘한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높은 전고에 중구경의 경야포, 완만한 경사장갑을 갖춘 지난 세기의 명전차를, 이런 다른 세상의 군대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어디서 봤다는 눈치네요?”

“아잇, 씨발 깜짝이야.”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리니, 전차장 해치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 타치바나 상급상병이 눈에 들어왔다.

 

일과시간 끝난 지가 언제인데 이 시간까지 전차에 붙어있는 걸 보면, 확실히 행보관 말대로 평범한 병사 같지는 않았다.

 

주특기 훈련 중이었는지, 오른쪽 눈가에 묻은 조준경의 고무 파우더는 덤이고.

 

“일과도 끝났는데, 여기서 뭐 하냐.”

“주특기 훈련 중이었죠.”

“지금까지?”

“포수는 전차장 임무까지 숙지해야 하잖아요. 거기에 공통임무인 APU하고 습식탄약고 관리까지 하려면 일과시간 가지곤 모자라요.”

 

애써 무덤덤한 척 대화를 이어나가자 녀석은 그렇게 자기 속내를 털어놨고, 그 모습이 기특하면서도 설마 내무 부조리라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다른 애들은 어디 가고.”

“조종수야 지난주에 A 라이선스 땄고, 무전수하고 탄약수도 상병 짬이니까 자기 일은 알아서 할 줄 알겠죠.”

 

담배라도 있었으면 한 대 태웠을 태도로 얘기하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문득 병사 시절 주특기 잘 못 하는 후임을 어떻게 챙겨야 할지 고뇌하던 게 떠올랐다.

 

결국엔 대대 주임원사 묵인 아래 취침 시간하고 주말 개인 정비 시간까지 끌고 와서 교육시키는 것으로 끝났지만.

 

“그러는 중대장님은 무슨 일로 오셨어요?”

“이게 대충 무슨 물건인지 한번 보고 싶었거든.”

“셔먼 닮았죠?”

 

그런 의표를 찌르는 듯한 대답에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었지만, 의기양양한 얼굴로 이유를 밝히는 녀석을 두고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밀리터리 오타쿠라서요.”

“아버지 취미가 특이하시네.”

“근데 세부적으로 보면 좀 달라요.”

“예를 들면?”

“서스펜션은 토션바에 엔진도 형식 가릴 것 없이 8기통 가솔린으로 통일됐어요.”

 

확실히 그 말대로 이 전차의 궤도는 HVSS나 VVSS보다 용적을 덜 차지하면서도 넓은 접지압까지 가져간 걸 보면, 설계가 마냥 셔먼과 닮았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이거, 병사치곤 너무 자세히 알고 있는 거 아닌가.’

 

나야 뭐 타이핑 하는 동안 무지성으로 그 내용을 넘긴 게 아니었기에, 이 전차의 특징이나 운용 전술을 아주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녀석은 행정작업에 손을 댄 것도 아니었는데, 하루 이틀 알아본 것 같지는 않은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자세하게 알고 있네.”

“상황 터지면 믿을 거라곤 전우하고 이 친구뿐인데, 잘 알고 있어야죠.”

 

말 안에 뼈가 있는 말투였지만, 중대장 입장에선 녀석의 그런 태도가 기특하기만 했다.

 

이런 모범 병사를 앞뒤 안 가리고 흠결이 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배척하는 건, 지휘관으로서 지향해야 할 태도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외지인 신분에 나 같은 특전을 누리지도 못하고 일개 병사로 복무하면서도, 자기 일에 충실한 그 태도는 칭찬받아야 할 부분이었다.

 

“다른 중대원들도 너같이 생각하면 참 좋을 텐데.”

“그거 칭찬입니까?”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냐.”

 

나의 그런 농담 아닌 농담에 녀석은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리에넨 사람도 아니고, 징병제는커녕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 못 했을 아이가 이런데 와서 군 생활을 강요받는 걸 보면, 나도 썩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새삼 이 나라의 국방체계와 사회상이 후진적이라는 것을 체감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음으로 떠오른 생각은 하나. 

 

비록 그 계기는 싸구려 연민과 자기만족의 발로겠지만,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런 것뿐이었다.

 

“타치바나.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중대장님! 큰일입니다!”

 

막 얘기를 꺼내려는 순간, 멀리서 나의 말허리를 자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다급한 목소리에 언성마저 높았으나, 분명 그 목소리의 주인은 부중대장인 웰링턴 중위.

 

또 뭔 일이 터졌길래 저렇게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헐떡이며 달려오는 건지, 괜히 불안한 생각이 앞섰다.

 

“중대장님, 숙소에서, 2소대장하고, 3소대장이,”

“어, 일단 숨 좀 돌리고 말해.”

 

대대 독신자 숙소에서 전차호까지, 족히 400미터는 되는 거리를 전력 질주한 웰링턴 중위는 잠시 숨을 고르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지금 술에 취해서 난동을 피우고 있습니다.”

 

이런 씨부랄.

 

 

 

4.


소대장들이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고 있다는 소식에 달려간 현장은 그야말로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야 이 개새끼야! 뭐가 어쨌다고?!”

“제가 잘못─”

“남작가의 서자 따위가! 자기 분수를 알게 해 드리죠!”

“……커흑!”

 

목 아래까지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취한 앤슨 소위와 클라크 소위가 그런 이해하기 어려운 욕설과 함께, 자기들보다 족히 두 배는 큰 덩치의 남군 중사 하나를 두들겨 패고 있었다. 

 

바닥에 엎어진 상태에서 군홧발로 차이고 밟히던 그 남군 중사의 상태는 빈말로라도 괜찮다고는 할 수 없는 수준.

 

이마에 길게 생채기가 나고 피멍이 든 얼굴에선 코피가 터져 흘러내리고 있었고, 걸레짝이 되어버린 전투복은 군데군데 찢어져 시퍼런 멍 자국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저거 저러다 진짜 사람 하나 잡겠네.’

 

그 꼴을 보니, 최소 한 달은 병원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할 견적이 나왔다.

 

“너네 지금 뭐 하냐.”

 

그런 난장판의 한가운데 돌을 던지듯 내뱉은 나의 한마디에, 2, 3소대장은 물론 싸움 구경 나왔단 대대 내의 다른 간부들의 시선이 날 향해 꽂혔다.

 

“각 중대별 최초 발견자 한 명씩 남고, 나머진 전부 들어가.”

 

물론 그런 시선 따위 신경 쓸 정도로 상황이 여의치 않았고, 사태 수습 도와줄 것도 아닌 인간들이 웅성거리니 괜히 신경만 더 쓰였다.

 

정작 지금 내가 신경 써야 할 사람은 따로 있었는데 말이다.

 

“둘 다 옆으로 비켜 서 있어.”

 

지금도 술 냄새를 풍기며 무어라 변명하려는 2, 3소대장을 밀치고 들어가자, 얻어맞고 있던 당사자의 상태는 훨씬 심각해 보였다.

 

시퍼렇게 군홧발 모양으로 찍힌 피멍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고, 탁구공만 하게 부어오른 왼쪽 눈과 터진 입술에는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괜찮습니까? 관등성명 댈 수 있어요?”

“주‥, 중사, 패트릭 하워드.”

 

쿨럭거리며 피거품 섞인 침방울을 뱉어내던 하워드 중사는 나의 부축을 받아 바로 설 수 있었는데, 다리를 저는 것을 보니 X선 촬영을 할 필요가 있었다.

 

“소속 중대와 직책을 말해주세요. 지금 바로 구급차를 부르겠습니다.” 

“2중대, 3소대, 부소대장입니다.”

“부중대장, 가서 대대 구급차 대기시키고 당직사령한테 보고해.”

“예, 중대장님.”

 

그다음은 뭐, 5분 뒤에 독신자 숙소 후문에 도착한 구급차에 하워드 중사를 태워 보냈고, 당직사령인 대대 군수 장교에게 한 시간 넘게 욕을 먹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하워드 중사의 상태가 우려했던 것만큼 심각하지 않았다는 것과 곧 전역을 앞둔 군수 장교가 융통성을 발휘해 헌병대 소집 대신 내가 직접 끝을 본다는 조건으로 사건을 무마해 줬다는 것.

 

문제는 앤슨 소위와 클라크 소위의 출신배경이었다.

 

리에넨 굴지의 대기업인 임페리얼 모터스 상무이사의 딸과 파르스 백작 가의 외조카를, 중대장이라곤 하나, 한낱 외지인 출신인 내가 벌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둘 다 업무에서나 사석에서나 붙임성 좋게 굴어주긴 했어도, 수틀리면 외지 출신 낙하산 대위 하나 짬 시키는 건 일도 아니겠지.

 

그래서 내가 내린 판단은 이것.

 

“웰링턴 중위, 2중대장 숙소가 어디지?”

“독신자 숙소 2층 왼쪽 맨 끝방입니다.”

“우린 지금 여기 있는 애들 싹 다 데리고 2중대장 숙소로 간다.”

“알겠습니다.”

 

징계 결정권자와 증인의 수를 늘리고, 겸사겸사 이번 일의 피해자 중 하나가 될 2중대장에게 사죄하는 것으로 후폭풍을 최대한 차단하는 것이었다.

 

나의 그런 판단이 썩 나쁜 방향은 아니었는지, 부중대장도 별 반대 없이 나의 뜻을 따라 주었다.

 

“너넨 대답 안 하냐?”

“알겠슴다.”

“알겠습니다.”

 

그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앤슨 소위와 클라크 소위는 바짝 긴장한 상태로 멀뚱히 서 있기만 했었고, 내 군 생활 중 최악의 상황 탑3에 해당했던 유사사례를 끄집어내니, 절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때는 네가 책임질 거 아니면 대충 덮으라는 대대장의 닦달에 나 혼자 독박 쓰고 끝내 진급 심사에서 탈락했었지만, 여기서까지 같은 작태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제발 정신 차리고 잘 좀 따라와라, 이것들아.’

 

“실례합니다, 3중대장입니다. 2중대장 자리에 있습니까.”

“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노크와 함께 그리 용무를 밝히니, 안쪽에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한 젊은 여성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2중대장 출신이 어떻게 되지?”

“예, 던포드 백작 가의 장녀이자, 왕립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고, 저보다 3기수 선배이십니다.”

“거물이네.”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생도 시절 별명이 날개 없는 천사였거든요.”

 

별 기대 없이 한 질문이었지만, 꽤 자세하게 일러준 웰링턴 중위의 브리핑에 나는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녀석의 말대로 2중대장이 천사 소리 듣던 호인이라 쳐도, 자기 부하를 저렇게 묵사발을 내버렸다는 건, 자기 가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행위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그럴 경우, 나와 소대장들에게 남은 마지막 선택지는 아마 무릎 꿇고 손바닥 싹싹 비비면서 선처를 구하는 거겠지. 

 

“…무슨 일로 오셨나요?”

“우선─ 푸흡?!”

 

그렇게 한없이 부정적인 전망만을 머릿속으로 그려내고 있던 와중 들려오는 소심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난 조건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막 샤워를 끝낸 참인지, 물기가 남아있는 흑색 단발과 착 달라붙는 잠옷까지는 어떻게 넘길 수 있었지만, 단추를 제대로 채우지 않아 노골적으로 드러난 살결들은 다른 의미로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가뜩이나 키도 나와 비슷해서 원하지 않아도 여러모로 민감하기 그지없는 포인트가 훤히 들여다보이고 있었는데,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넘기면 좋을지 대책이 서질 않았다.

 

“중대장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일단 이쪽으로 오지 말고, 애들 데리고 거기 서 있어, 부중대장.”

 

순간 나의 이변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건지, 날 향해 다가오는 웰링턴 중위를 만류하며 다시 2중대장에게 고개를 돌려 봐도 상황은 마찬가지.

 

이 인간, 지금 자기가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전혀 눈치 못 채고 있다. 

 

“저, 2중대장님, 나오시기 전에 그, 단추를 좀, 채워주시겠습니까?”

“어머, 내 정신 좀 봐.”

 

한동안 만면에 물음표를 띄워놓고 있었던 2중대장은 나의 그런 지적에 별로 놀란 기색도 없이 느긋하게 옷깃을 여미며 단추를 채워나갔다.

 

그 태평하기 그지없는 모습에, 리에넨 유수의 귀족 집안 자제라길래 잔뜩 쫄아붙어있던 내가 다 민망해질 정도였다.

 

“네, 이제 말씀하세요.”

“우선 늦은 시간에 이렇게 찾아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아뇨, 저도 딱히 바쁜 건 아니라서요.”

“그럼, 잠시 실례해도 괜찮겠습니까?”

“바깥에 기다리고 있는 분들도 그렇고, 같이 들어오세요.”

 

흔쾌히 숙소에 발을 들이는 것을 허락한 2중대장에게 작게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대신하고, 이만 들어와도 된다는 의미로 부중대장에게 손짓하자, 날 포함해서 총합 여덟 명의 인파가 2중대장의 숙소로 들이닥쳤다.

 

2중대장의 방이 나와 같이 독신자 숙소 내에서도 그나마 평수가 큰 참모장교용 숙소라서 다행이지, 일반 간부용 숙소였으면 진작에 만원 전철 꼴을 면하지 못했겠지.

 

“다름이 아니고, 저희 중대 간부와 2중대 간부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 찾았습니다.”

“그렇군요.”

 

좋은 소식은 아니었을 나의 말에, 못해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내놓을 거라 우려했었지만, 2중대장은 겉으로 보기엔 별 심경의 변화 없이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건 표면적으로만 보이는 모습이지, 감정을 읽을 수조차 없는 저 검은색의 깊은 눈동자는 알만한 사람에겐 필요 이상의 위압감을 주고도 남을 정도였다.

 

“…일단 사건의 경위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중대장.”

“예, 중대장님.” 

 

그 꺼림칙한 시선을 뒤로 하고 부중대장을 시켜 사건의 전반적인 경위와 증언을 보고할 때도, 2중대장은 느긋하기 그지없는 태도만을 보여주며 나를 포함한 숙소 내의 간부들을 쭉 훑어보는 게 다였다. 

 

딱 한 번, 하워드 중사가 나와 두 소대장을 싸잡아 입에 담기에도 뭐한 모욕적인 발언을 했다고 진술하는 부분에서 눈썹을 한 번 꿈틀거렸을 뿐,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정작 그때, 속에서 끓어오르는 짜증을 참지 못하고 헛기침을 했던 내가 더 부끄러울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3중대장님은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죠?”

“그게, 저 혼자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는 건 적절치 못한 처사라 생각되어 이렇게 2중대장님을 찾아뵙게 된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신 이유는요?”

“부끄럽지만, 전 아직 리에넨의 사회상이나 군법에 해박하지 않습니다. 섣불리 결정을 내렸다간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흠…….”

 

뭐 하나 가릴 것 없이 있는 그대로 내 심경을 털어놓자, 2중대장은 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부임한 지 이틀밖에 안 된 신임 중대장이 갑자기 찾아오더니, 자기 중대와 그쪽 중대 간부들 사이에서 험한 말과 주먹이 오갔고 그중에 한 명은 병원까지 실려 갔다고, 그러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도와달라고 하면 머리가 아플 만도 했다.

 

더군다나 먼저 시비를 건 것도 그쪽, 두들겨 맞아서 병원에 실려 간 것도 그쪽 간부인 만큼, 책임소재 이전에 속된 말로 쪽팔리는 상황으로 다가올 공산이 컸다.

 

“먼저, 제 부하에게 그런 모욕적인 언사를 당하신 건, 저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던 끝에, 2중대장은 별안간 감았던 눈을 슬며시 치켜뜨며 입을 열었다.

 

“하워드 중사는 평소에도 워낙 말을 함부로 해서 주의를 줄 만큼 줬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말끝을 흐리는 것과는 달리, 2중대장은 여전히 그 느긋하고 태연하기 그지없는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었고, 그런 가운데 미세한 감정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난 눈치가 없지 않았다.

 

좋든 싫든 밥벌이로 군 생활을 하다 보면 알고 싶지 않아도 대충은 상대하고 있는 사람의 심리가 어떤지는 알 수 있게 된다. 

 

하물며 그 상대가 같은 군복 입은 장교라면?

 

구태여 더 이상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관건은 당사자들의 처벌 수위입니다.”

“그냥 쌍방과실 처리하면 안 되나요?”

“2중대장님, 지금 이거 대충 넘기면 나중에 더 피곤해지는 거 아시잖습니까.”

“글쎄요, 그렇게 대놓고 장교들을 욕했으면 저도 어떻게 무마해 줄 대책이 안 서거든요.”

 

현재 2중대장이 보이고 있는 태도는 빈말로라도 성실하다고는 할 수 없었고, 앞뒤 문맥만 따져보면 이전에 몇 번 문제가 됐던 간부이니만큼 굳이 나서서 비호 하지 않겠다는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아니, 어쩌면 앤슨 소위와 클라크 소위의 출신배경이 자신과 같은 왕립 육군사관학교인 부분을 감안해서 후배들의 편의를 봐주려는 가능성도 있겠지.

 

문제는 어느 쪽이든 내가 생각해 봤을 때 그리 좋은 소리는 듣기 힘들 작태였다는 것.

 

아무리 미천한 출신의 하사관이라 할지라도 상황 터지면 믿고 등을 맡겨야 할 전우일 텐데, 이렇게 계급과 학연에 매몰된 결정을 내리는 건 징계 수위 이전에 사기 관리 차원에서도 좋을 게 없을 일이었다.

 

“그럼 최소한 제가 정할 징계 수위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증명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그 정도야 뭐, 어렵지 않죠.”

 

반쯤 불만 섞인 목소리로 그리 말해도 2중대장은 흔쾌히 탁자에 놓인 깃펜으로 편지지에 사인까지 곁들여서 증명서를 작성해 주었고, 상황이 거기까지 가니 나도 더 이상 감정을 소모하는 것이 무의미하게만 느껴졌다.

 

처음의 그 느긋한 태도가 가식으로 보일 정도로 2중대장의 언행은 직설적이었고, 또 가차 없었다. 

 

대대장인 파웰 중령도 그렇고, 리에넨의 육군 장교들이 보여주는 면면은 내가 처음 군 생활을 시작했을 때 보아왔던 한국군 장교들과 비교해도 수준 이하였다. 

 

이게 그 자랑스런 리에넨의 신분제와 엘리트 계층들의 장교임관 독점의 결과물이라면 구태여 더 생각할 필요도 없겠지만.

 

“밤늦은 시간에 실례 많았습니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부하 단속 잘못해서 폐를 끼쳤네요.”

 

상투적이기 그지없는 그 짧은 대화를 끝으로 자리를 정리하기로 한 나는 먼저 데리고 온 각 중대 간부들부터 내려보내고, 짧은 목례를 붙인 뒤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아, 2중대장님?”

“또 뭔가요.”

“제가 이런 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하워드 중사도 우리 전우이자, …리에넨의 국민입니다.”

 

나를 마지막으로 전원이 중대장 숙소를 나서기 전, 사심 가득 담긴 그 한마디와 함께 조심스레 현관문을 닫았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상당히 건방진 인상을 줄 법한 말이었지만, 아직은 리에넨의 신분제보단 한국에서 배운 자유민주주의적 가치가 뚜렷했기에 할 수 있었던 말이었다.

 

뭐, 지금까지 문고리가 돌아가긴커녕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걸 보면, 2중대장은 내가 한 말이 그다지 와닿지 않았거나 헛소리로 치부한 거겠지.

 

“앤슨 소위와 클라크 소위만 남고, 나머진 전부 들어가도 좋다.”

 

1층 중앙현관으로 내려와 부중대장을 포함한 목격자들을 돌려보내고 당사자들만을 남기니, 녀석들도 양심의 가책을 받긴 한 건지 식은땀을 흘리며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게, 위에선 2중대장이 굳이 징계 처리하지 말라는 논조로 말을 했었지만, 내가 증명서까지 받아 가며 징계 의사를 내비쳤으니 그런 반응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후….”

 

참아왔던 긴 한숨을 내뱉으며 다시금 녀석들의 면면을 뜯어봐도 그건 마찬가지.

 

‘그러게 왜, 시키지도 않은 주취 폭행을 해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놨냐.’

 

자기들이 욕먹어서 시비가 붙었다는 것까진 어떻게 넘어간다 쳐도, 내 욕이 나왔다고 주먹을 휘둘렀다는 건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걸 과잉 충성으로 봐야 할지, 엇나간 충성심으로 봐야 할지도 애매했고, 술을 마셨다곤 해도 자기들 출신 성분과 계급에 취해 집단 린치를 가한 일은 어느 쪽으로 봐도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었다.

 

“너넨 앞으로 사흘간 일과 끝나면 완전군장으로 두 시간씩 연병장 뺑뺑이 돈다.”

““……””

 

더 뜸 들일 것도 없이 밝힌 나의 징계 내용에, 녀석들은 이렇다 하게 두드러진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군장 뺑뺑이는 겉으로 보기엔 좀 가혹해 보여도, 단순한 얼차려로 분류돼서 근신이나 감봉같이 징계 이력이 남아 근무 평가 때 불이익을 주진 않는다.

 

게다가 이번 주는 아직 신형 전차 전력화와 관련해서 처리해야 할 행정작업이 한참 남아있었고, 한술 더 떠서 다음 주에는 중대 전술훈련 평가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근신으로 장교 둘이 빠지면, 중대장 부임 이틀도 안 돼서 부대 운영에 빨간불이 들어오게 된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지금, 내 말에 대한 반응을 보이는 것 이전에 대답까지 안 했다는 거지만.

 

“대답 안 하냐.”

“알겠슴다!”

“알겠습니다!”

 

그 대답과 함께 이제야 좀 상황 파악이 된 건지, 녀석들의 얼굴에 약간이나마 화색이 돌았다. 

 

애초에 별 달아보겠다고 여군 진급에 유리한 전투지원 병과들 다 내팽개치고 기갑에 야전 근무까지 마다하지 않은 녀석들이니, 이게 뭘 의미하는지는 녀석들 본인이 더 잘 알겠지.

 

“그리고, 중대 회식하고 대대 회식 때 말고는 음주 통제 들어갈 거다.”

“예…, 예?!”

“음주 통제 말씀이십니까?!”

“싫으면 또 술 마시고 영창 갔다 오던가.”

 

물론 그 과정에서 아무런 반박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나의 마지막 일갈에 이렇다 할 반론 없이 입을 다문 걸 보면 어떻게 이번 일은 나름대로 마무리가 된 것 같았다.

 

그렇게 녀석들까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고, 나도 중대장 숙소로 들어가 거실의 소파에 몸을 기대니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중대장 생활 힘든 건 여기나 저기나 똑같구나.’

 

처음 계급장 받고 부대 오는 동안의 일까지 갈 것도 없고, 당장 오늘 저녁에 있었던 일만 생각해도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믿겠거니 했던 소대장들이 저지른 주취 폭행에 타 중대 피해자 발생, 당직사령에게 있는 욕 없는 욕 다 들어먹은 끝에 신분제를 신봉하던 2중대장까지.

 

…뭐, 그렇다고 해서 오늘 하루가 마냥 아무런 보람 없이 힘들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여기선 최소한 이전에 중대장을 할 때와 같이, 얼굴도 모르는 누구들 편의 봐주자고 독박 쓰는 짓을 반복하진 않았으니까.

 

그걸로 된 거였다.




5.



 

부대 운영에 있어 가장 기본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건 두 가지다.


상호 간의 굳건한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안정성과 그걸 발판삼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추진력.


그건 비단 군대에 제한되지 않고 대다수의 사회조직들 또한 해당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관건은 그 조직의 사령탑이 될 사람이 얼마나 빨리 제구실을 하느냐였다. 


“중대장님, 이게 마지막입니다.”

“네, 고생 많으셨습니다, 행보관님.”


가령 우리 중대 주요 간부 전원이 달라붙어 있던 신형 전차 전력화 관련 행정작업만 놓고 봐도 그랬다.


부임 직후 새롭게 적용했던 나의 업무지시가 처음부터 잘 나갔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한번 틀을 갖추고 자리를 잡게 되자, 그다음부턴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방금 막 작업 종료의 신호탄을 올린 중대 행정보급관, 챈들러 상사의 마지막 검수문.


당초 일주일을 기한으로 잡았던 행정작업은 중대장 부임 엿새째 오전을 기점으로 완전히 끝이 났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계급 가릴 것 없이 중대원들끼리 협동했던 경험은 앞으로의 부대 운영에 있어 중대원들의 결속을 다져줄 자양분이 되어주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부임 이틀째에 내가 천명했던 조건을 초과 달성했으니, 부대 운영에 있어 나의 입지와 발언권도 지켜진 셈이었다.


“마음 같아선 중대 단합이라도 하고 싶은데, 바로 다음 주가 훈련이네요.”

“뭐 어쩌겠습니까. 사단장님이 새 전차 잘 굴러가는지 보고 싶다는데, 그걸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인상에 맞지 않게 손바닥만 한 크기의 커피잔을 홀짝이던 챈들러 상사는 행정반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전차호를 눈짓하며 입을 뗐다.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닌 게, 행정작업이 끝나는 대로 이어진 과제부터가 중대 전술훈련 평가였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단장이 직접 참관에 나서는 평가 말이다.


뭐, 이번에 우리가 수령한 전차부터가 수도근위군단을 제외하면 야전부대 중 가장 먼저 전력화가 이루어지는 물건이었으니, 사단장 입장에선 신경이 쓰일 만도 하겠지.


“그런 의미에서 행보관님, 이번 훈련 비품 관련해서 논의를 좀 하고 싶은데, 오후에 시간 괜찮으십니까?”

“전차호 배수로 작업 현황 파악하는 대로 시간 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내 요청을 흔쾌히 수락해준 챈들러 상사는 그길로 탁자 위에 두고 있던 담뱃갑을 들고 행정반을 빠져나갔다. 


작업도 웬만큼 끝났겠다, 그런 느슨한 모습을 보인 건 비단 행보관뿐만이 아니었다.


웰링턴 중위는 막 머그잔을 집어 들고 있었고, 밀러 중사는 기지개를 켜는 것에 한창이었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기뻐한 사람은 역시 앤슨 소위와 클라크 소위. 


어제부로 주취 폭행 사건 때 부여했던 얼차려인 군장 뺑뺑이를 완전히 끝낸 둘의 얼굴은 한없이 밝아 보이기만 했다.


‘내 진짜 일은 지금부터 시작이겠지만.’


마지막 남은 페이지를 처리하고 내가 시작한 건, 2박 3일 동안 진행될 훈련을 어떻게 구성할지에 대한 계획을 짜는 것이었다. 


일찍이 파웰 중령은 사단장이 직접 훈련을 참관하는 걸 핑계로 전차 TOT사격 같은 개소리를 훈련 계획에 추가하라고 닦달했었다.


그 이유가 참 가관이었는데, 전차의 주포부터가 야포를 개수한 물건이니 간접사격능력을 배양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


우리가 무슨 포병도 아니고, 아직 기본적인 주특기 교육도 안 끝난 마당에 윗사람 눈에 들 궁리만 하는 것이 역겹기 그지없었다.


아니, 후방에서 자주포 끌다 진급 TO 없어서 역종 변경하고 이쪽으로 기어들어 온 걸 생각하면 그렇게 시야가 어두울 만도 한가.


“중대장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어, 그냥, 어떻게 하면 의미 있는 훈련을 할 수 있을까 고민 중이었지.”


그런 복잡한 생각에 잠겼던 것도 잠시, 염려스럽다는 얼굴을 한 웰링턴 중위의 물음에 무심코 내 속사정을 그대로 털어놓았다.


어쩌면 감출 것 없이 말한 게 오히려 나을 수도 있었다.


부중대장도 중위 계급을 장식으로 단 게 아니라면, 리에넨 육군 기갑부대의 훈련에 대한 지식이 나보단 많을 테니 말이다.


“그럼 우선 사단 작계부터 보시는 걸 권고드립니다.”

“그건 부임 첫날에 파악해 뒀어.”

“그렇다면 다음은 지휘관 재량에 달린 문제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임무 중 어느 것을 우선으로 두느냐에 따라 훈련 내용이 달라집니다.”


다행히도 웰링턴 중위가 말한 중대 전술훈련과 관련된 사항들은 우려했던 것만큼 어려울 건 없는 문제였다.


우리 대대가 속한 17사단의 작계는 상위부대인 북부 방면군의 예비전력으로서 소방수 기능을 하는 것이 기본.


그중에서도 우리 대대는 사단 수송대대의 지원을 받는 보병연대와 전투단을 구성하여 사단의 주 전력으로 분류됐었다.


그 부분이 신형 전차 전력화와 함께 이번에 새로 바뀐 작계의 내용이었고, 그것이 의미하는 건 단순했다.


바로 전차대대가 보병지원과 대전차전 능력을 모두 갖춰야 한다는 것.


얼핏 보기엔 별거 아닌 것 같아도, 그건 이전까지의 리에넨 육군 기갑전 교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내용이었다.


낙후된 교리는 리에넨의 국가적 공업역량 부족과 맞물려, 지금까지 전차 체계를 보병지원용 경전차와 대전차전을 전담하는 구축전차로 이원화시켜 왔었다.


그 시스템이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는 지금 상황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부중대장이 봤을 땐 이번에 전력화되는 신형 전차에 요구되는 역할이 뭐라고 생각하나?”

“…보병지원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봅니다.”

“그게 끝이야?”

“예, 그렇습니다.”


시간에 쫓기듯 대답을 마친 웰링턴 중위는 자신의 답변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못내 아쉬운 듯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내가 뭐 큰 걸 바란 것도 아니고, 그냥 야전경험 있는 리에넨 육군 기갑 장교의 기본적인 소양을 알기 위해 물어본 건데 말이다.


그 바람대로 웰링턴 중위의 답변을 통해 미루어 보건데, 리에넨의 장교들은 그들의 그런 낡은 교리를 큰 이견 없이 수용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내 손이 닿는 곳에 있는 녀석들만큼은 보다 능동적인 태도를 견지하게 해줄 필요가 있겠지.


“그럼 좀 다르게 물어봐서, 부중대장이 봤을 땐 우리 군의 기갑전 교리가 어떤 것 같나?”

“우방국의 선진적인 군사교리를 따라 각자의 전문성을 갖춘 부대를 양성하기 위한─”

“난 지금 야전교범 내용이 아니라 부중대장의 생각을 묻고 있는 거야.”

“…유연하지 못하다고 봅니다.”


마지못해 입을 연 것 같은 태도를 보이는 웰링턴 중위는 자신이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것 마냥 안절부절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업무와 관련해선 그렇게나 능동적인 자세로 임했었는데, 정작 그런 자세가 절실히 필요한 곳에선 그렇지 못한다, 라.


개인적으로 리에넨 왕립 육군사관학교의 교육체계에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떤 면이 그렇다고 생각하지?”

“상황이 항상 군사교리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을 텐데, 그 역할을 필요 이상으로 세분화 하면 득보단 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자세를 감안해도 웰링턴 중위는 꽤 모범적인 답변을 해주었다.


그 말대로 언뜻 보기엔 목적과 장비의 이원화라는 건 일견 합리적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술했듯이 야전에선 항상 자기네들이 상정했던 시나리오대로 상황이 흘러갈 거란 보장은 없는 법 아닌가.


그런 가운데 기존 장비보다 몇 체급은 더 크고 강력한 무장을 갖춘 전차를 전력화 중이라는 건, 군사교리 이전에 국가적인 면에서 대내외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컸다.


아니면 그냥 우방국이 중공업 인프라 키워주고 군사원조 해준다니까 별생각 없이 찍어내는 것일 수도 있고.


“이제 다시 물어보지. 부중대장이 봤을 때 M30전차에 요구되는 역할이 뭐라고 생각하나.”

“전천후 전투 능력을 갖춘 기갑전력입니다.”

“그래, 그 부분을 감안해서 이번 훈련에 써먹을 시나리오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조금 전과는 달리, 자신 있는 목소리로 그리 대답한 웰링턴 중위는 한결 개운해졌다는 얼굴을 한 채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도 이곳에 넘어오고 나서 처음 맞이하는 훈련인 만큼 잠깐의 시간도 허투로 흘릴 생각은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나뿐만이 아니라 병사와 간부들의 협력을 구할 필요가 있겠지.


굳이 행정업무가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부중대장을 앞에 세워 놓고 그런 교육 아닌 교육을 한 것도, 훈련을 좀 더 알차게 진행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지휘관 혼자 이리저리 뛰어다녀봤자 아래에서 호응을 이끌어 내지 못하면 그거만큼 의미 없는 짓거리도 없을 테니까.


“나 잠깐 바깥 좀 둘러보고 온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행정반 입구 근처에 붙은 게시판 앞에서 남은 주간 일정을 살피던 클라크 소위는 그 말과 함께 나를 배웅해 줬다.


녀석에게 손을 한번 흔들어준 뒤, 행정반을 빠져나오자 복도의 창가 너머로 익숙한 실루엣의 물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M30 중형전차. 


이전에도 그렇게 느꼈지만, 우리세계의 셔먼 전차를 닮은 그 전차는 멀리서도 그 위용을 뽐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애초에 장비 제식명부터가 개발국인 노라드 합중국의 전차 명명법에 따라 자신의 전투 중량을 톤 단위로 명시하고 있는 물건이었다.


아직 장비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은 타 중대의 M16 경전차들과 비교해 보면 단순히 무게만 놓고 봐도 두 배 가까운 차이가 났으니, 더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였다. 


거기에 붙어 있는 애들이 주특기 훈련 대신 배수로나 까고 있다는 게 좀 깨긴 했지만.


“무슨 일 있나? 타치바나 상급상병.”


큰 고민 없이 향한 중대장 전차의 전차호에선 나와 같은 머리와 피부색을 가진 병사가 포탑에 들러붙어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아, 중대장님 오셨습니까.”

“다른 애들 어디 가고 혼자 일하고 있어?”

“배수로 다 까는 대로 그냥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내게 거수경례를 붙이며 현재 상황을 설명한 타치바나 상급상병은 별거 아니라는 듯 다시 고개를 숙여 작업을 재개했다.


“그래도 하다못해 탄약수라도 끼고 해야지.”

“괜찮습니다. 혼자 작업하는 게 편해서요.”


녀석은 괜찮다는 의미로 왼손에 들린 렌치를 흔들었지만, 평시에 탄약수가 숙지해야 할 임무의 내용을 생각하면 중대장 입장에선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이 친구가 우수한 병사인 것과는 별개로, 전차 승무원은 다섯이 한 팀이 되어 움직인다.


개인의 기량만으로 어떻게 커버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뭐, 나머지 승무원들도 인사기록을 봤을 땐 서류상으론 별문제 없어 보였지만.


“그건 그렇다 치고, 지금은 뭐가 문제야?”

“주포 안정기 자이로가 자꾸 헛돌아서 말입니다.”

“터렛모터하고 연동된 거 맞지?”

“예, 그렇습니다.”

“잠깐 비켜봐.”


녀석을 옆으로 밀어내고 포수석에 앉자, 커버가 벗겨진 주포 안정기 기어박스 너머로 문제의 그 자이로스코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포 안정기라는 물건이 각 나라나 시대마다 형식은 다르지만, 기본적인 원리는 대부분 비슷했다.


그러니 그 작동방식만 이해하면 문제 진단과 정비는 그리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고.


기본적으로 이런 기계식 자이로는 전기나 압축공기로 회전축을 돌림과 동시에 주위의 짐벌 링이 충격을 감지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회전축과 연동된 터렛모터가 주포의 위치를 보정 값만큼 조정하여 안정시키는 게 기본 원리였다.


문제는 지금 그 회전축의 움직임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가까이 눈을 대어 확인해 보니, 확실히 짐벌 링이 요동칠 때마다 제자리에서 스핀을 유지해야 할 회전축이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이거, 언제부터 이랬어?”

“모르겠습니다. 어제까지는 별문제 없었는데, 갑자기 이럽니다.”

“터렛모터 끄기 전에 자이로 잠금상태 확인은 했었고?”

“중대장님, 그건 이등병도 안 하는 실수입니다.”


정색하는 녀석을 뒤로하고 다시 고개를 숙여 확인해 봐도, 회전축은 여전히 디스크의 모양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움직임이 엉망이었다.


자이로와 터렛모터를 연결하는 피니언의 맞물림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자이로 펌프도 정상 작동 중.


그렇다면 남은 건 FM에서도 명시되지 않은 문제가 있거나 조립 불량이라는 말이 됐다.


“이거 회전축 구동을 펌프로만 하나?”

“아마 아닐 겁니다. 우선 적으로 전기를…….”

“가서 절연테이프하고 니퍼 갖고 와.”

“알겠습니다.” 


물론 그러면 안 되겠지만, 공장에서 마감이나 품질관리를 소홀히 했으면 배선 쪽에서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하물며 리에넨은 아직 중공업 이전에 경공업조차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다.


당연히 QC나 6시그마 같은 시스템을 구축했을 리도 없었으니, 자잘한 부품에 문제가 생겨도 이상할 건 없었다.


타치바나 상급상병으로부터 절연테이프와 니퍼를 건네받자마자 내가 한 일은 자이로를 잠그고 포탑의 전원을 내리는 것이었다.


“합선 났었네.”


점멸등이 나가는 걸 확인하고, 기어박스 옆으로 난 전선의 피복을 뒤집어 까자, 유난히 부풀어 오르고 검게 탄 부분이 눈에 띄었다.


큰 고민 없이 그 부분을 잘라내고 피복 안쪽의 구리 선을 엮어 절연테이프로 감아 내니, 그럭저럭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끝낸 셈이었다.


“중대장님 좀 하시네요?”

“내 짬 먹고 이것도 못 하면 군복 벗어야지.”


감탄하는 녀석의 반응을 흘려넘기며 다시 스위치를 켜자, 이전과는 달리 회전축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손잡이를 당겨 포탑을 움직여 봐도, 조준경 너머의 풍경이 요동치지 않는 걸 보면 보정 값도 제대로 들어가고 있다는 말이 됐다.


‘일단 이렇게 한고비 넘겼네.’


솔직히 여기서 못 고치고 사단 정비대대를 찾았으면, 훈련 준비 이전에 쪽팔려서 병사들 볼 낯이 없었겠지.


“오, 중대장님 이제 잘 움직입니다!”

“나중에 시간 나면 펌프 쪽 배관 청소 한번 해주고. 난 들어가 본다.”


내 뒤를 따라 자이로와 주포 안정기의 상태를 확인한 녀석은 그렇게 감탄하며 나의 뒤통수를 향해 경례를 붙였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었던 것과는 별개로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 오후 3시.


점심 식사 후, 전차호 배수로 작업 시찰을 끝낸 챈들러 상사가 돌아오는 대로 시작된 논의는 순탄하게 진행되는 것만 같았다.


“그럼, 이번 훈련은 실탄을 사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기로 하죠.”

“알겠습니다.”


야전용 전투식량과 병사들 기호품에 탄약, 유류품까지. 


의외로 꼬일 것 같은 데에서 일이 잘 풀려 주니, 오히려 은근한 불안감마저 올라올 정도였다.


“근데 중대장님, 저희 훈련 비품하고 중대 운영비 말입니다만.”


그런데 항상 그런 엿 같은 예상은 피해 가는 법이 없다고, 조심스레 운을 뗀 챈들러 상사의 얼굴엔 어느새 짙은 어둠이 깔려있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나도 반쯤 체념한 상태로 그리 말하니, 챈들러 상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곤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없습니다. 전부 바닥이에요.”


과연. 행보관 얼굴이 어두울 만도 했다. 


훈련이 코앞인데 중대 운영비도 훈련 비품도 없다니, 확실히 문제될 만한 상황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행보관님.”


하지만 방금 전까지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걱정했던 것만큼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이 정도 일은 이미 여기에 오기 전에도 몇 번 겪었던 겪었던 일이었으니까.


“저한테 다 계획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냥 그때처럼 해결하면 될 일이었다.




6.




사실 중대 운영비나 훈련 비품이 없는 것보다 더 문제가 되는건 촉박한 훈련 일정이었다.


당장 중대 전술훈련 평가가 시작되는 건 다음 주 화요일.


그게 그냥 훈련도 아니고 무려 사단장이 직접 참관에 나서는 훈련인 걸 생각하면, 빈말로라도 시간이 넉넉하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중대 운영비가, 분기 지급이었죠?”

“예, 중대장님. 원래라면 저번 주에 들어왔어야 했는데, 제가 부주의했습니다.”

“행보관님 잘못 아닙니다. …이번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일단 훈련 준비는 이거로 좀 부탁드립니다.”


내가 건넨 종이봉투를 열어본 챈들러 상사는 대답 대신 미안한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300 리에넨 파운드.


1 리에넨 파운드 지폐 300장이 담긴 그 종이봉투에는 왕국 육군 대위 한 달 치 급여에 해당하는 금액을 담아뒀었다.


그건 결코 적은 돈도 아니었거니와 나라고 금전욕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우선 급한 불부터 끄고 봐야지 뭐 어쩌겠나.


“그리고 이번 일은 저희하고 부중대장 선에서 끝내도록 합시다. 더 얘기 나와봐야 좋을 거 없어요.”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챈들러 상사는 내게 거수경례를 붙이며 중대장실을 빠져나갔다.


“에휴 씨발….”


솔직한 심정으론 머리가 아팠다.


생각해 보면 중대 운영비 문제도 이렇게까지 복잡해질 일이 아니었는데. 


한국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중대 운영비라는 게 원래 이거저거 다 합해도 나오는 돈은 한 달에 30만 원 남짓.


이쪽으로 넘어오기 전의 대략적인 국제 금값과 리에넨의 물가 차이를 감안해도 30 리에넨 파운드가 안 되는 푼돈이었다.


문제는 지금 그게 분기 단위로 쌓이고, 훈련 때 병사들에게 나눠줄 털장갑 한 켤레도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네, 2중대 행정반입니다.]

“어, 나 3중대장인데, 2중대장 연결해줘.”

[지금 바로 연결해드리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2중대장에게 연락을 넣는 것이었다.


중대 운영비가 지급되지 않은 게 우리 중대만이 아니라면 중대장들끼리 연대를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게 아니면 그냥 나 혼자 들이받으면 되는 문제였고. 


[2중대장입니다.]

“아, 2중대장님.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아뇨, 이 시간엔 업무도 별로 없어서 괜찮습니다.]


두어 번 신호음이 이어지고 들려오는 2중대장의 목소리가 워낙 느긋하다 보니, 화제거리는 자연스레 내가 제시하게 됐다.


“다른 게 아니고, 이번 분기 중대 단합은 어떻게 하실 계획이시죠?”


그리고 돈 문제를 대놓고 물어볼 정도로 나는 눈치 없는 놈이 아니었다.


까놓고 말해서 리에넨 사람도 아닌 나를 두고 뒤에서 타 중대 간부들끼리 무슨 얘기가 오고 갈지는 아무도 모를 일 아닌가.


[그거야 당연히 중대 운영비에서 빼야죠. 부족하면 중대 간부들 선에서 각출하고요.]

“아, 그리고 지금 저희가 중대 물자 창고 정리 중인데, 참고자료로 쓰게 보급 품목 리스트 좀 받아 갈 수 있을까요?”

[네, 뭐. 어려울 건 없죠. 근데,]


중요했던 부분에 대해선 별 의심 없이 흔쾌히 답을 받아냈지만, 끝에 와서 의문문이 붙은 걸 보면 아직 긴장을 풀기엔 일렀다.


웰링턴 중위의 말대로 2중대장이 날개 없는 천사인지 아닌지는 제쳐두더라도, 지금 당장의 문제는 이쪽의 의도를 숨겨두는 것.


말 한마디 잘못하면 처음부터 빌드업을 다시 짜야 했다.


[보통 그런 일은 행보관이 하지 않나요?]

“행보관은 행보관대로 바빠서요. 일 배울 겸 제가 직접 뛰고 있습니다.”

[대단하시네요. 나이도 있으신데.]

“나이 먹었다고 짬 대우해주는 것도 아닌데, 알아서 잘해야죠.”

[중대원들이 의지가 되겠네요.]

“그렇게 생각해주면 다행이고요.”


그리고 다행히도, 나의 그런 걱정은 기우였는지 2중대장은 평범한 질문과 감상만을 이어갔다.


‘그것보다, 내가 나이 운운하는 소리 들을 정도로 늙어 보였나?’


괜히 그 말이 신경 쓰여 무심코 중대장실 책상 구석에 놓인 손바닥만 한 거울을 들여다보니, 추레한 몰골을 한 성인 남성의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매일같이 수염 깎고 머리를 정리한들, 10년 넘게 야전에서 뙤약볕 쏘여가며 구르던 서른다섯 먹은 중늙은이가 어디 가는 건 아니었으니까.


가뜩이나 리에넨 사람들은 곱상한 외모에 잘 늙지 않는 경향이 강했는데, 그런 가운데 있는 내 액면가가 어떨지는 안 봐도 뻔했다.


거기에 아예 생애주기 자체가 다른 엘프나 수인족 같은 아인종들까지 나오면 얘기는 더 복잡해지겠지.


[3중대장님?]

“네, 듣고 있습니다.”

[용무는 더 없으신가요?]

“일단 급한 건 그 정도입니다.”


그런 자조 섞인 잡념을 털어내고 2중대장과의 통화에 다시 집중하니, 얘기는 슬슬 끝을 향해가고 있었다.


[필요한 거 생기시면 언제든 연락 주시고요.]

“네, 오늘은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2중대장이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를 들은 뒤에야 전화를 끊은 나는 행동에 앞서 우선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본부중대를 포함해서 대대 내 4개 중대 중, 중대 운영비가 들어오지 않은 중대는 아마 우리 중대뿐일 것이다.


던포드 백작 가의 영애인 2중대장을 필두로 본부중대장과 1중대장은 모두 육군사관학교 출신에 집안은 리에넨 상류사회에서 한 자리씩 해 먹고 있는 인간들이었다.


그러니 그런 긁어서 부스럼 날 것 같은 대상들 제하고, 적당히 털어먹어도 문제 없을 놈으로 가닥을 잡다 보면 귀결되는 결과는 하나.


바로 중대장부터가 외지 출신에 이렇다 할 빽 하나 없는 나의 3중대만 남는다.


‘이걸 어떻게 들이받을까.’


하지만 누군진 몰라도 그놈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주취 폭행 사건 때도 그랬지만 내가 빽 하나 없는 외지인이라는 건, 뒤집어 말하면 리에넨 주류사회 눈치 봐 가며 설설 기어 줄 필요도 없다는 걸 의미했다.


내 앞길이야 어차피 리에넨 출신 장교들 평가 점수 깔창이나 하다 계약서에 적힌 시기에 맞춰 진급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 상대에게 먼저 시비를 걸었다는 건, 그쪽도 그만한 반발과 손해를 감수할 각오를 하고 움직였다는 거겠지.


“행정병아, 2중대 행정반 가서 서류 하나 받아오자.”

“예, 알겠습니다.”


중대장실을 나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띈 병사에게 그리 지시하니, 마침 자리에 앉아있던 웨이드 상병이 내 뒤를 따랐다.


그 외에 행정반에 남은 간부와 병사들은 조금 전 내가 챈들러 상사에게 건넨 자금을 바탕으로 어떻게 훈련을 대비할지를 논하느라 바빠 보였다.


다만 이전과 같이 나와 눈을 마주친 클라크 소위가 이쪽을 향해 두어 번 손을 흔들어 주는 것이 반가울 뿐이었다.


“중대장님도 2중대에 볼 일 있으십니까?”

“아니, 난 대대본부 가보려고.”

“그럼 서류 수령한 다음에는 뭐 하면 되겠습니까.”

“행보관 갖다줘.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알겠습니다.”


짧은 질의였지만, 핵심은 전부 담긴 얘기였다.


가뜩이나 남은 시간도 촉박한데, 가이드 라인도 없이 훈련을 준비하면 아무리 베테랑인 챈들러 상사라 해도 힘에 부칠 것이 자명했다.


중대 보급 품목 리스트를 확보한 건 그런 챈들러 상사를 위한 조치였고, 내가 직접 처리할 일은 좀 더 근본적인 것이었다.


“중대장님, 무슨 좋은 일 있으십니까?”

“지금 있는 건 아니고, …조만간 생길 예정이야.”

“그렇습니까.”


내 말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웨이드 상병은 옅게 미소 지은 채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럼 전 여기서 실례하겠습니다.”

“그래, 수고해라.”

“네, 중대장님도 수고하십시오.”


웨이드 상병과 헤어지고 중앙계단을 통해 1층의 대대본부로 내려가자, 왼편 복도 끝의 인사과 사무실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실례 좀 하겠습니다.”


노크와 함께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니, 인사과 사무실에 앉아 작업 중이던 간부, 병사할 거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거수경례를 붙였다.


대위 하나에 중사 하나, 일병 계급의 병사가 둘.


과급 참모부 일을 보기엔 충분하다고 할 수 없는 인원이었지만, 사무실이 워낙 좁다 보니 내가 들어간 것만으로도 안이 꽉 찬 것 같은 감상을 줬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3중대장님.”


경례를 받아주며 자연스럽게 책상에 걸터앉자, 대대 인사과장인 밀번 대위가 그리 물어왔다.


올해 초에 대위로 진급한 밀번 대위는 노력 하나로 그 자리까지 올라간 인물, 쉽게 말해서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다.


“인사과장도 알겠지만, 이번 분기 우리 중대 운영비가 안들어와서요.”

“그래서, 확인차 직접 오신겁니까?”


그런 밀번 대위의 말에는 마치 '고작 그런 일로'라는 무언의 압박이 더해진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이런 일은 아무리 높아봐야 행보관 선에서 해결할 만한 일이었는데, 중대장이, 그것도 리에넨 사람도 아닌 나이든 대위가 직접 찾아 올 것이라고는 아마 예상하지 못했겠지.


“아뇨, 온 김에 직접 확인하고 싶은게 좀 있어서요.”

“무얼 말입니까?”

“3중대 앞으로 배정된 최근 3개월 분의 예산 처리내역을 확인하려고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나의 요구를 칼같이 거절한 밀번 대위는 이쪽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로 자기업무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꼴에 대대 참모라고 재고 있는 그 모습에 욕지거리가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올라왔지만, 지금은 내가 부탁하고 있는 입장이었기에 좀 더 유화적인 방법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2중대장한테 다 듣고 왔습니다. 일 커지기 전에 협조하시는 게 좋을텐데요?”

“그렇게 나와 봤자 좋으실 거 하나 없습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판단할 일이고, 뭘 그리 비협조적으로 굽니까? 부대 운영비 삥땅쳐서 대대장 술이라도 사줬어요?”

“지금 말 다했습니까?!”

“아니, 아니면 아닌거지, 뭘 그렇게 소리를 질러요. 사람 무안하게.”


한 번 떠보듯 던져본 나의 그 말에 밀번 대위는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의미심장했던 건 순간적이었지만 중사 계급의 인사계장이 거기에 동조하기는 커녕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려보인 거였고, 거기서 난 한가지 확신이 들었다.


밀번 대위는 학벌도 출신도 별 볼일 없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인물이 리에넨에서 계속 성공해 나가기 위해 필요한 건 단 하나.


바로 돈이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억측의 영역이었으나, 몇 가지 정황 증거들로 미루어 보아 아주 가능성이 없는 얘기도 아니었다.


그걸 확증으로 만들어 이 놈을 나가리 시키는게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이었고.


“아무튼 뭐,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대충 인사치레를 건네고 인사과 사무실을 나가려고 하니, 밀번 대위는 한 대라도 칠 기세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물론 이제 와서 그런 걸 신경 쓸 생각도 없었고, 또 그럴 필요도 없었으며, 지금도 그저 앉은 채로 눈알만 부라리고 있는 걸 보면 어차피 이 인간에겐 그럴 배짱 따윈 없는 게 확실했다. 


“인사계원아, 둘째 줄 행간 설정 잘못됐다.”

“…감사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감사할 것 까진 없-”

“중대장이 참모부 일엔 뭐하러 간섭합니까!”


사무실을 나가던 도중, 입구 근처 자리에서 타이프라이터를 두드리던 인사계원의 서류를 보고 가벼운 지적을 하자, 밀번 대위는 건수 하나 잘 잡았다는 듯 내 말을 끊어먹으며 다시금 소리를 질러왔다.


이에 영혼 없는 손사레를 치고 바로 사무실을 빠져나오니, 그 안에서는 밀번 대위가 마치 화풀이라도 하듯 방금 내게 서류 작업을 지적당한 인사계원을 향해 온갖 욕설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저렇게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아랫사람을 다루면 지금 당장이야 어떨지 몰라도 나중에 어떻게 업보가 돌아올 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뭐, 지금 같은 경우는 그게 내가 바랬던 결과이긴 했지만 말이다.


밀번 대위 저 인간도 이번 기회를 통해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를 알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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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저녁. 영내 인원들 저녁 식사도 끝나고, 한창 막사 내부가 떠들썩할 시간대.


나는 혼란을 틈 타 적당히 인적이 드문 옥상 빨래 건조장 구석에서 사병용 활동복 차림으로 모포를 너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 내게 이목이 집중되는 일은 없었지만, 상황이 상황인만큼 가급적 빨리 일을 끝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여기에 오래 있어봐야 좋을 건 없는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본부중대 저녁식사 차례는 끝났을 텐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3중대장님.”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을 걸어온 인사계원, 찰스 도노반 상병은 내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목소리 낮춰. 직책도 생략하고.”

“예? 그렇지만 장교에겐-”

“체면치레 할 필요 없으니까, 그냥 편하게 얘기해.”


물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고, 상황을 이해한 도노반 상병도 나의 지시대로 목소리를 낮추었다. 


지금부터 나누게 될 대화의 내용을 생각하면 크게 얘기해서 좋을 건 없을 테니까.


“어차피, 우리 이제 같은 편이잖아.”


적어도 누군가에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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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트 해보니까 4.2만자 밖에 안되네


보니까 이거 작년 말에 장편 써보겠다고 프롤로그 하나 올려놓고 광고도 했었던 거임ㅋㅋ


암튼 재밌게 봐주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