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라도 수탈론 관심 있다면 미리 보면 괜찮은 내용들


산림수탈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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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수탈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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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권력을 기반으로 민족이분구조에 따라 '토지조사사업'에 의해서
전국 '농토'의 40%가 사기와 폭력으로 토지가 약탈(수탈)당했다는 소위 토지수탈론은

전형적인, '교과서'에 의해서 fact 자체가 왜곡되고 주입되어 생긴 집단의식.
저런 식의 이야기가 언제 나왔고 어떻게 자리잡게 되었나를 알면 좀 황당할지도







토지조사사업에 관한 최초의 학술적인 연구는
1933년 마르크즈주의 경제학자였던 박문규의 논문으로

조선의 토지제도는 국유제로, 양반은 소유권을 농민은 경작권을 인정받았다(즉 토지사유개념이 덜 정립되었다)
.... 식민사학의 잔재는 토지수탈론에 있습니다 -0-;

소유권이 신고되며, 수조권자로서 세력 있는 양반은 소유권을 인정받고
농민들은 경작권을 상실하여 무권리의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실 20년대 소작쟁의 결과물로 무권리는 아님. 오히려 지주권이 30년대 이후 하락-통제)
이런 '계급적 분화'가 농촌사회 근대적 분화의 기점이라 평가하며

박문규는 일제가 국유지로 수탈한 토지는 전체의 '1/40'정도였고,
조선의 궁원과 관청의 토지로 그렇게 차지해도 좋은 것이었다고 기술

즉. 이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연구물에 '수탈'은 그닥 논의의 중심이 아니었으며
토지 사유제가 창출되고, 타자에 의한 강제적 제도 이식과 영구병합을 위한 사업이었다는 것으로
... 오늘날 토지의 40% 수탈당했다!!!!!! 뭐 이런 소리는 없었음







몇몇 관련 서적에서 예로 나오는, 과격하게 일제를 비난한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에서조차
산림, 천택, 철도, 광장, 어장, 소공업 원료 등을 빼앗아갔다고 했지 토지-농지이야기는 없음
오늘늘 수탈의 대명사로 토지를 뽑는 것과 비교하면
이 조사사업을 직접 경험한 세대들에게 오늘날 집단의식과 유사한 면은 별로 안 보인다고 함







토지와 수탈이 연결되는 것은 해방 이후 보이기 시작.

정규교과의 경우, 최초로 토지조사사업이 역사교과서에 실린 1956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이병도가 집필한 교과서로 위의 1930년대 박영규의 논문을 거의 인용한 것으로 보이며

기술은 위와 유사하고 다만, 소유권이 애매한 부락의 공유지도 신고가 이루어지지 않아 국유지로 되었다
국유지로 된 토지는 동척이나 일본인 농장의 토지로 집중되었다는 부분이 추가되며 바뀐 부분이 등장

박문규가, 공유지가 힘있는 사람들의 것이 되었다고 했지 국유지가 되었다고 하지 않는 것과 차이가 있고
하여간 저 새로 나타난 담론은 90년대 이후 연구물에 의해서 부정당한 편. 국유지는 후에 조선인들에게 불하됨
물론 동척 자산으로 정부에 의해 출자된 땅이 있기는 함








오늘날 토지수탈론의 성립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람은 '남로당출신'으로 일본 동경대로 유학간 이재무
(온 가족이 미국유학, 미군 근무. 미국에서 변호사 하면서 반미하던 강모시기 생각나네)

그는 과거 토지의 수탈이 제대로 기록 안 된 이유는 일제의 탄압 때문이고
토지사유 개념이 덜 발전하고(이게 국까인가 국빠인가) 무지했던 농민들은 신고를 제대로 못하였고
이 땅들은 총독부가 국유지로 수탈하거나, 악독한 지주와 권세가들이 대리 신고해서 차지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일지도?
토지조사사업에 신고된 토지 비율이 높은 것은 대리 신고(가짜 신고)가 만연했다는 것으로 수탈의 증거이다
이 무궁화꽃이피면서 이닥일이가 쓴 듯한 이야기는 놀랍게도, 별 증거도 없이 재구성 했음에도 꽤나 광범위하게 퍼짐








동경대에서 나온 이 연구물은 마치 조총련계열 이진희가 광개토대왕비 조작설 쳐서 붐 불었던 것 처럼
1962년 검인정 교과서 시절, 이미 역사교육연구회에서 집필한  교과서에 토지조사사업=수탈로 실리기 시작


조선은 토지사유 개념이 미비하였고
일제는 토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일정한 기간을 주고 신고하지 않으면 몽땅 나라 땅이라고 법령을 발표하여
농민들은 모르는 사이 땅을 빼았겼고 동양척식회사로 편입되면서 한국농민들은 소작인이 되었다
1914년 이미 한국인은 총 경작면적의 절반 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로 일제가 토지를 수탈했다.


식민지 시기 일본인이 가진 경지는 전체의 10% 정도였고
그나마 1920년 이후 하구나 연안에 분포한 저습미간지 매집-개척이 상당부분이라는 점을 보면 교꽈show라는 말이 어울리지








교과서는 아니지만, 67년 민영규-전형우가 일제의 토지 수탈은 40%였다고 절반에서 살짝 깍으며
'우리 민족의 땅을 일제에게 왜 신고하느냐'는 저항정신 때문에 신고를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내용을 추가

40% 수탈 운운의 기원은 여기






그래도 73년까지 교과서에서 당시 다수를 차지하던 교과서에서는(이병도)
50년대 중반과 다르게, 토지조사사업은 수탈이 목적이고 민족저항으로 신고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기술하였지만

여전히 신고가 조작되었다던가, 40%가 수탈당했다는 것은 들어가 있지 않았음
공유지와 국유지가 토지 수탈의 대상이었다고 하고 있지도 않았고.





또 누군가 주워들은 이병도 조선사편수관 운운하려나?
2년 하고 나와서 무급촉탁 2년하고 때려치고 16년 동안 가산 팔아서 진단학회 만들고 공적인 직함도 없이 전업연구자(반백수)했다만
그런 놈들이 일제시대 군수했던 반일환빠말은 참 잘 믿어요







이것이 확 바뀌며 대중에게 퍼진 계기는 74년 국정교과서로 전환되면서

사업은 수탈을 위해서 만들어졌고, 기한부 신고제는 농민들의 농지를 빼앗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사업의 결과 전국 토지 40%가 총독부 소유가 되었다가 동척이나 일본인에게 헐값으로 불하되었고
사업의 결과 양반들은 대지주가, 농민들은 소작인이 되어 기한부 계약으로 고통받다가 결과적으로 화전민이 되거나 만주로 이주했다

로 정리되면서 큰틀의 변화 없이 유지






82년 유명한 ㅅㅇㅎ의 토지수탈론이 등장, 토지의 수탈을 강조하며
일제가 토지관련 분쟁에 있어서 농민들을 강제력으로 제압하며
한 손에는 피스톨 한 손에는 측량기를 들고 수탈했다고 기술

그러면 이제 소설가들이 주워 듣고 소설을 쓰기 시작하고
소설하고 역사랑 구분 못하고 소설가들이 무슨 실제 사례를 옮기는 줄 알고 있는 대중은
감동받아서 반항하는 농민들 나무에 묶고 총으로 쏴죽이는 장면이 실제인 줄 알고 기념관을 만들지
큰소리 치지만 막상 근거는 뭐냐고 하면 '동아대백과사전' 들먹이는 수준인 것은 모르고







실제 측량에 있어서 헌병과 경찰이 대동된 사례는 있음. 1910년 이후 토지조사사업이 아니라
1908년, 본래 공토였다 내장원으로 옮겨져서 황실 사유물이 되었던 땅을 탁지부에서 국유지 조사로 실지조사하는 과정에서
농민들이 이 곳은 민유지라며 집단 항의하고 시위하며 조사를 거부, 중단되었다가 재개되면서

'광무개혁'하신다고 '이 땅은 다 왕토니까 내꺼야' 하면서
결세만 내던 땅을 소유권까지 궁방-관청이 가지는 유토로 국유지로 강제편입시키며 내장원-황실 재산 불렸지
'승총을 입은' 해당 주민들은 계속 반발하였고, 국유지 조사한다고 오니까 반발한 케이스.
.... 정말 수탈한 놈은 누구일까?
그리고 사유지 개념이 발전 안 했으면 저런 것이 가능할까?


다시 말하지만 저건 국유지조사 , 실제 토지조사사업 과정에서 국유지를 재조사.
최초의 근대적인 측량이 도입된 사업에 피스톨을 대동한 경찰이 강제로 했다 식의 주장이 맞을까?





일제가 행정편의적인 면으로 - 혹은 행정력 한계 -
역둔토 조사에서 궁방이나 둔에 납부한 실적이 있거냐 양안에 빠져 있거나 납세 실적이 불분명하면 일단 국유지로 편입하고
조사결과에 대한 이의 신청을 접수하는 식으로 해서 불만을 크게 만들기는 했고








80년대 중반 이후 이야기는 짤방에 나와있음 -0-;
창원 지역에서도 대량의 1차 자료가 나와서 연구가 진행되었고
신고주의는 음모였다, 대량의 국유지가 창출되었다, 피스톨과 측량기 등등
해방 이후 나와서 30년 넘게 지속된 토지수탈론은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지 않고 교과서에는 아직도 좀 바뀌어서 실림

그래도 일제의 식민성과 약탈성을 강조하는 쪽이라면, 진보성향 한국사연구회 쪽의 근래 연구물은
결국 30년대 토지조사사업을 실제 목격한 세대였던 박문규의 기록과 유사한 쪽으로 가더라고

식민성이 한 축이더라도 근대성 자체도 인정해야 한다고 보이고
적어도 50년대 중반부터 잔혹한 억압의 대명사로 인식된 토지수탈론과 관련된 드립은 사상누각이고
저급한 연구법의 결과물임. 아니, 소설. 연구물도 과하지



어떻게 우리 조상님들이 당한 고통 운운하면서
조상들을 바보로 만들고, 일제시대 살던 사람도 안 한 이야기 창작하지 말고.
그런 분노가 필요한 부분은, 역사 교과서에 사실이 아닌 이야기가 실려있다는 것 자체에 분노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