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러시아 식민지였던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에서 러시이가 자행한 만행들임.


1월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던 리투아니아 총독인 미하일 무라비요프는 ‘빌뉴스의 교수형 집행인’이라 불리며 악명을 떨쳤다. 

무라비요프가 총독에 임 명된 후 뱉은 첫 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무슨 일을 하든지 처음이 제일 힘든 법 이다. ... 빌뉴스에 도착하는 즉시 내가 제일 먼저 할 일은 가톨릭 신부들을 총살 하는 것이다.” 

1월 봉기 당시 무라비요프 총독이 맡은 진압 지역이 리투아니아 였다. 

무라비요프가 내세운 모토는 다음과 같다. “리투아니아는 러시아이고, 따 라서 리투아니아인은 곧 러시아인이다.” 

그 결과 리투아니아인들이 라틴 문자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며 러시아 동화 정책이 시작됐다. 

무라비요프가 생각하길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원래 러시아 일부였는데 “간악한” 폴란드인들이 술수를 써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이 맺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봉기를 진압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잘못되어온 것을 바로 잡는, 즉 리투아니아에 동방 정교를 도입 하며 리투아니아 민족을 러시아 민족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무라 비요프는 체포된 봉기군을 교수형에 처하고 의심 가는 사람들은 감옥에 수감 하 며, 봉기에 참여한 귀족들의 저택을 파괴하고 봉기를 지지한 마을의 주민들을 시베리아로 보냈다. 6백여 명의 지주들에게는 토지를 팔도록 강요됐다. 

소귀족 들을 강제 이주하는 과정에서, 가족들이 분산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와중에 부모와 강제로 떨어지는 폴란드 어린이들은 러시아 양육 기관으로 보내졌다. 무 라비요프는 다음과 말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든 폴란드인은 죄를 지었 으며, 감옥에 가두는 것이 이들에게 최상의 처사이다. 러시아에 쓸모 있는 폴란 드인은 교수형 된 폴란드인뿐이다.”(Mienicki 1937: 78; Murawiow 1990: 45). 

원의 판결 없이 감옥에 수감 하는 데에는 밀고만으로도 충분했다.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오는 경우마저 원래 살던 지역에 다시 거주할 수 없었다. 

무라비요프 는 자신의 권한이 미치는 모든 지역에서 폴란드어 사용을 금지했다. 

이 명령은 학교와 관공서 등 모든 공공 지역을 망라하는 것이었다. 

폴란드인들은 모든 공직에서 배제됐으며, 귀족들에게는 토지를 팔도록 강요되는 동시에 새로 구매하 는 것을 금지했다. “리투아니아는 곧 러시아”라는 원칙에 따라 주인이 없는 토지에는 러시아인들을 정주시켰다. 이런 경우 새로 정착하는 러시아인은 특혜를 받아 37년에 걸쳐 무이자로 대출받을 수 있었다. 당연하게 폴란드어로 발행되는 모든 출판물은 금지됐다. 개인적으로 폴란드어 도서를 소장하는 경우마저 처벌의 대상이 됐다.



한때 러시아는 폴란드를 통해서 유럽 문명을 흡수했음. 그리고 같은 유럽 문화권 국가임. 그런데도 저정도로 무참한 탄압을 자행했음.


만약 조센이 러시아 식민지가 되었다면 연해주에 살다가 시베리아로 던져져서 굴파고 살아야했던 까레이스키처럼 


무자비하게 시베리아로 던져져 버렸을 거임.


그런데도 러시아 못잃어 노래를 불렀던 고종과 민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