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시간, 김독자와 한수영은 언덕 위에 돗자리를 펴고 나란히 누웠다. 산들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흩날리며, 풀잎 사이로 흐르는 바람 소리는 마치 잔잔한 바다의 물결처럼 들렸다.
둘의 손은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었고, 한수영의 배는 새로운 생명의 존재를 알려주는 듯 둥글게 불러 있었다.
미약한 태동을 느끼던 한수영은 잠시 배를 쓰다듬다가, 온 몸에 힘을 풀고 눈을 감았다. 고된 연재와 날이 갈수록 무거워져가는 몸 탓에 체력의 한계를 물씬 겪고 있는 요즘이다.
그런 한수영을 배려하고자 김독자는 오늘도 최소한의 스킨십으로 그녀를 대하였다. 당장 어제오늘만 해도, 뭐가 있었던가.
그것이 요즘 김독자가 매일같이 겪고있는 고민이었다.
모닝허그? 아냐, 그건 허그가 아니었어. 가슴보다 배가 더 나왔는데 어떻게 허그를 하겠어, 배치기겠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젓던 김독자를 한수영이 빤히 쳐다보았다. 저건 멸살법에서 유중혁이 회귀할 때나 짓던 표정이다. 그것도 뭐랄까, 이를테면 하늘을 향해 누군지도 모르는 지 배후성한테 '회귀시켜달라!' 거리며 찡찡댈 때 말이라든가.
김독자, 너 괜찮은 거 맞지?
은근히 그 연유를 짐작하고 있던 한수영도 예의상 김독자의 안위를 살폈다. 물론 별다른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난 괜찮아 수영아. 그보다 너는...'
이런식의 흐름으로 이어질 것이 불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김독자는 자기 자신에게는 한없이 혹독한 사람이므로.
그게 싫었던 한수영은 먼저 선수를 쳤다.
"하고싶냐?"
격렬했던 혀의 침범과 애액의 범람이 간신히 잦아든 후, 오랜만에 바람을 쐬자는 것이 한수영의 의견이었다.
“연재본은 다 썼어?”
김독자가 한수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처럼 따뜻하게 한수영을 향하고 있었다.
"아직. 좀 더 구상해야 할게 남았어."
아직 눈을 감고 있던 한수영이 대꾸했다. 고된 연재와 무거운 몸, 거기다 오랜만의 관계까지 더해진 후라 그런지 몹시 피곤했다.
괜히 나오자 그랬나, 졸려 죽겠네. 살갗을 간지럽히는 초저녁의 바람에 잠이 드려는 순간, 김독자가 그녀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잠을 깨웠다.
"졸려?"
"그래, 누구 때문에."
"미안해."
됐어, 미안하다는 말 금지. 한수영은 건조오징어처럼 축 늘어져 있는 김독자를 노려보았다.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낀 김독자가 황급히 손사레를 쳤다.
"사실 그다지 미안하진 않아. 아니, 미안하긴 한데...그냥 고맙..."
"됐어 멍청아."
한수영이 풉 하고 웃으며 김독자의 팔을 베고 누웠다. 몇 달 후면 애아빠 될 사람이 이렇게 줏대가 없어서 쓰나.
시나리오 하던 때엔 누가 뭐라든 자기 하고싶은 거 다 하더니.
한수영은 그런 김독자의 모습마저 좋아했다.
말없이 함께 누워 있다는 것 만으로도, 함께 생명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발화하는 사랑의 쾌감.
한수영은 자신에게 기대 누워있는 김독자를 보다가, 하늘로 눈을 돌렸다.
삶의 충족감이란 이런데서 오는가 싶었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까?"
그렇게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자니 심심해진 김독자가 입을 열었다.
별칭 '꼬물이'의 태동이 시작된 이후, 그들이 날마다 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뱃속 아기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단순한 김독자의 희망사항이었다면 한수영은 이 일을 '쓰잘데기 없는 짓'이라 치부하며 실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 이설화의 적극적인 권장 하에 이루어지는 루틴이었고, 이제 그들의 이야기는 독자와 작가가 할 수 있는 태교의 일종이 되었다.
무난한 선택지인 동화부터 시작해서 판타지, 산문 시, 그리고 한수영의 소설까지.
한수영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음, 오늘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이야기나 할까?”
“우리 이야기라… 그거 좋네.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음, 내가 김독자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수영은 웃음을 머금으며 물었다. 오늘은 왠지 옛날 이야기가 하고 싶은 날이다.
훗날, 그들의 아이가 첫 걸음마를 떼고, 말을 하고, 비로소 이야기를 읽을 수 있게 된다면.
그렇다면 이런 작은 말 한마디에 담긴 우주의 깊이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의 아이는 비로소 작가가 되어 자기만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할 것이고, 독자가 되어 문장 사이사이 의미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한수영과 김독자가 경험했던 길이었고, 적어도 이 미숙한 부모는 자신들의 이야기가 세상 어떤 명작보다도 훌륭한 양분이 될 거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그때가 좋겠어.”
김독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살짝 더 꼭 잡았다.
"저는 한수영이라고 합니다. 그룹에서는 차상경님의 보좌를 맡고 있고요."
김독자와의 첫 만남.
정확히는 이야기를 나눈 첫 만남이다.
"모두 이놈을 죽여! 뭣들 하는 거야!"
이때까지만 해도 내 앞길을 막는 방해꾼인 줄 알았지.
그 멸살법을 전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몹시 거슬렸거든.
"넌 미소녀가 아니야."
".....이거 내려놔!"
그렇게 우리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때 김독자가 나를 구해준건 꽤 의외였지.
어쩌면 이때부터 감정이 생긴 건지도 모르겠다.
아마 넌 몰랐을걸? '전지적 독자 시점'은 독자 입장에서 쓰여진 거라, 타인의 감정은 서술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으니까.
“참 이상한 놈이었지. 나를 찾아다니며 멸살법 이야기만 하고.”
한수영은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랬었나?”
김독자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한수영은 그런 김독자를 잠시 바라보더니, 그를 향해 몸을 확 돌렸다.
“이제 네 차례. 너는 언제부터야?”
살짝 당황한 김독자는 대답을 회피하려 했다.
“글쎄…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거짓말 치지 마. 생각해보니까 너 한번도 말해준 적 없다?”
한수영은 장난스레 김독자의 손을 흔들며 말했다.
김독자는 짐짓 서운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한수영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가끔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아주 오래전부터, 너를 사랑했어." 따위의 낭만적인 멘트로 한수영의 눈에 애열을 그윽이 서리게 만든 그였다. 하지만 매번 그런 식으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정말 말해도 돼?"
"응."
의아해 하는 한수영. 결심이 굳은 김독자가 입을 뗐다.
"몸매."
"뭐?"
"네 빈약한 체형이 좋았어."
그게 무슨 크로와상에 쌈장 찍어먹는 소리냐는 듯한 표정의 한수영을 뒤로하고, 김독자는 다시 한번 모험을 강행했다.
"이미 알겠지만 빈약한 체형 안 좋아한다는 거, 다 거짓말이야. 꼬물아, 내가 너희 엄마 처음 봤을 때 생긴 설화가 뭔지 아니?"
"....."
"설화 파편, 빳빳해진 흑염룡의 추억.."
"야."
정신을 차린 김독자의 눈에 보이는 것은 잔뜩 화가 난 듯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한수영이었다.
왜 그랬을까. 한수영을 골탕먹일 생각에 잠시 신났었던 거 같다.
아무리 그래도 선을 넘었다. 뱃속에 있는 아기를 두고, 진심으로 이야기를 해주고 있던 아내에게 그런 지저분한 망언을 하다니. 한수영에게 사과를 해야겠지.
얼굴을 감싼 한수영의 작은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김독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딴 설화가 어딨어."
아연실색. 새빨갛게 변한 한수영의 뺨. 그걸 보고 아름답다 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건 뭐람. 김독자는 헛웃음이 나왔다. 분명 웃지 말아야 할 상황인데.
"미안해.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었어."
김독자는 얼굴을 감싼 한수영의 손을 꽉 잡았다. 그 순간, 한수영의 입에서 높고 가냘픈 소리가 흘러나왔다.
크흐흡
설마. 터질 게 터진건가. 가뜩이나 최근 유상아가 어린애라 놀리는 바람에 내게 하소연하는 일이 잦아진 편이다. 내가 봤을 때, 유상아에 비할 바는 아니더라도 사실 한수영도 괜찮은 편이라고..
당장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한수영이 얼굴을 들었다. 하얀 얼굴에 보석처럼 박혀 있는 눈물점 주위는 물번진 흔적 없이 멀끔했다.
"흡, 야. 내가 너 살리려고 네 기억이란 기억은 다 찾아봤거든?"
"어..?"
"장난을 칠거면 상대를 봐 가면서 쳐야지, 인마."
아.
자신의 볼을 꼬집으며 웃고있는 한수영과 눈이 마주친 김독자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귀엽네. 내가 설마 진짜 울거라 생각한거야?"
당황, 안도감에 이어 김독자가 느낀 감정은 한수영을 향한 고마움이었다. 자신에 대한 모든 설화를 알고 있다는 그녀의 자신감. 자신만을 위한 소설을 쓰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그녀의 노력과 희생의 방증이었다.
"제대로 말해. 허리 꺾이고싶지 않으면."
"근데 그게 어느정도 사실이 가미된 건 맞아."
"개자식이...!"
김독자는 한수영의 주먹을 피하며 곰곰이 예전 일을 회상하였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는가.
로맨틱한 멘트와 장난으로 어물쩡 넘어가려 했던 것도, 실은 정말로 이 기묘한 감정의 발아점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니, 그게 별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우리의 만남은 시작과 끝이 없는 무한한 궤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인연의 시작을 정의할 수 없듯이 감정 역시 딱 잘라 말하기 힘든건 매한가지다.
한수영에게 말해주고 싶다.
지하철 속에서, 1863회차의 그녀에게 느꼈던 형형한 감정. 그리고 50년을 기다렸던 1864회차의 그녀에게 느꼈던 감정. 그리고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까지.
그리고 중요한 건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 자체라고.
*
"핑계대지 마 김독자.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난 뭐가 되냐?"
"아까 말했잖아, 네 몸매 보고 반했었다고."
수영아, 혹시 부끄러워서 그러는거야?
"됐어, 멍청아. 그리고 애한테 사과해. 무슨 아기 듣는데 흑염룡이 어쩌고..."
김독자의 멘트폭격에 얼굴이 붉어진 한수영이 자신의 배를 툭툭 쳤다.
생각해보니 이제 막 손바닥만한 크기의 아기한테 몹쓸 말을 한 것 같기도 했다.
김독자는 한수영의 배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서아야. 앞으론 주의하도록 할게."
그 말에 응답하는 듯 아기가 한수영의 배를 툭툭 쳤다.
명백한 생명의 신호였다.
"야...! 김독자, 들었어? 꼬물이가 대답했어!"
상기된 얼굴의 한수영이 김독자의 손을 꽉 잡았다.
김독자 또한 한수영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태동은 일반적으로 태아가 무의식 중에 하는 자연 신호로, 본인의 의지로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방금 있었던 태동은, 외부에 대한 반응이자 부모와의 분명한 정서적 교감이었다.
얼마 전 김독자와 한수영이 병원에 갔을 때 이설화에게 들은 내용이다.
"엄청 기쁘네...별 것도 아닌걸로.."
엄마가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한수영은 다짐했다. 우리는 너를 반드시 잘 키워낼 것이라고. 자신이 유년시절 받지 못했던 사랑은 모두 너에게 베풀기 위해 부재했던 것이라고.
둘은 잠시 동안 말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언덕 위의 세계는 두 사람만의 것이었다.
*
"근데 김독자, 아까 너 뭐라고 한거야?"
"응?"
"왜, 꼬물이한테 뭐라고 불렀잖아. 서아였나?"
"아."
김독자는 얕게 웃었다. 서아라...
"그냥. 갑자기 애 이름이 서아로 느껴졌어."
"그건 또 뭔소리래?"
"글 서(書), 아름다울 아(妸)."
"김서아?"
"응. 김서아."
"괜찮지 않아?"
"그런가...."
고개를 잠시 갸우뚱 하던 한수영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김독자의 입에 물렸다.
"상의없이 이름짓는게 어딨냐?"
"그렇다고 김꼬물이, 김레몬사탕. 이렇게 지을 순 없잖아."
"어? 김레몬 좋네. 레몬아, 김레몬."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던 한 쌍의 부부는 초여름 밤바람을 맞으며 스스르 눈이 감겼다.
먼저 잠든 것은 한수영이었다. 연재하느라, 아기 신경쓰느라, 그리고 어.. 허리 움직이느라 힘들 만 했지.
김독자는 그런 한수영을 바라보며, 입에 있는 레몬 사탕을 꽈드득 깨 부셨다.
시큼하고 떫은 맛이 나는 레몬은 끝맛이 달콤하다길래 씹고 또 씹었다.
혀뿌리에 녹아드는 단맛은 묵직하고 먹먹한 목넘김이었다.
마치, 그와 함께 숨쉬고 있는 두 삶의 진득한 향내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