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석푸석하고 떡이 지다 못해 덩어리가 진 머리카락을 감는다.
성좌였기에 유지가 되던 피부를 향긋한 샴푸로 닦아낸다.
성좌임에도 초췌해진 얼굴을 가리기 위해 화장을 한다.
밖에 안 나갔기에 옷장에 쳐 박아둔 보라색 후드티를 꺼내 입는다.
겨우 김독자 그 한 사람이 불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사자인 나조차도 놀라운 행동이었다.
나갈 준비를 다 마치고 그와의 짧았던 통화를 회상한다.
-여보세요?
그의 목소리였다. 4년 간 그 목소리만을 위해 글을 썼다.
1년간 그 목소리를 그리워했다. 그랬기에 목이 갈라져 있어도, 잠기다못해 소리를 못 내는 목임에도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김독자.”
1년만, 아니 어쩌면 5년 만인지도 모르는데도 그의 이름밖에 말할 수 없는 내가 한심할 따름이었다.
그가 내 목소리를 듣더니 잠시 침묵했다. 마치 내 이름이라도 기억해내는 것 같은 그 침묵의 의미를 그때는 알아챌 수 없었다.
-한수영, 오랜만이야.
어색한 것 같은 그 목소리가 귀에 울려퍼졌다.
-컴퍼니 앞 카페로 와, 할 얘기가 있어
결국 그 요구에 응해 이러고 있다. 신발장에 고히 모셔둔 운동화를 대충 신고 작년부터 잡은 적 없는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그러자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밝은 빛이 들어왔다. 일 년 만에 보는 그 빛은 눈을 너무 부시게 했다. 눈을 게심치레 뜨고 아파트를 뛰어 내려갔다. 짧게만 느껴지던 그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시간이 오늘따라 길게 느껴졌다.
5, 4, 3, 2, 1.
문에서 틈이 생기자마자 몸을 비집어 넣어 엘리베이터를 벗어났다. 오랜만에 뛰는 것이었기에 다리가 왠지 오늘따라 욱신거렸다. 그걸 의식하자 눈 앞에 꽤 그립기도 했고, 반가운 게 보였다.
[설화, '마왕을 그리워 한 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푸른 색 창, 스타스트림에서 보내오는 메세지가 눈 앞에 보였다. 하도 많은 설화 중 하나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걸 보고 이 설화가 뭐더라 하는 생각에 들었다.
확실한 건 빠르게 피로해진 다리가 멀쩡해지고 움직이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는 사실이었다.
오랜만에 도착한 카페는 여전했다. 공기 중에 떠 다니는 커피의 향은 1년이란 시간이 거짓이라도 된 듯 변함이 없었다. 온통 나무로 되어있는 가구들은 커피를 머금은 듯 어두운 빛깔을 냈지만 카페 전체를 비추는 빛은 여전히 밝았기에 분위기가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조성되어 있었다.
거치적 거릴 정도로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시야에서 치우며 주변을 둘러보자 보였다.
나를 폐인으로 만들 정도로 냉혈하게 변했던 얼굴을,
그럼에도 내가 죽지 못하도록 미련을 남기게 한 당장이라도 따뜻하게 웃을 것 같은 얼굴을,
내가 그토록 갖고 싶었고, 그토록 안아보고 싶었던 그가 저기 앉아있었다.
천천히 그의 앞으로 가자 그가 나를 알아보고 자리에서 일어서 손을 내밀었다. 사무적인, 차가운 손길이었다. 거기서 아직 그가 나를 기억하지 못했단 걸 깨달았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한 번 더, 자신이 나를 기억하지 못한단 걸 증명이라도 하듯 존댓말을 했다. 돌아가 버릴까 고민했지만 앉으라는 듯 정중하게 행동하는 그에게 거절 의사를 내비치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자리에 털썩 앉아 다리를 꼬자 그의 눈썹이 꿈틀댔다. 내가 아는 그라면 내게 보이지 않았을 표정이지만 더 이상 실망할 것도 없었다. 그가 버티기 힘들었는지 내게만 집중해서 격을 발산했다. 하지만 나도 그 못지 않은 성좌였기에 영향을 받을 리 없었다. 그 것을 증명하듯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작년엔 날 죽이려 했으면서 뭔 낯짝이야?"
격이 소용 없단 걸 알았는지 김독자가 내게 집중되었던 격을 거두었다. 역시 날 기억해낸 건 아닌 것 같다. 예상표절을 킬 것도 없이 나를 불러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냥 그들에게 떠밀려서, 내가 어떤 인간인지 궁금해서 정도 일 것이다.
그가 나를 지그시 보았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고도 할 수 있는 선한 눈빛이 나를 훑었다. 저 눈빛이 나를 위한 게 아니란 게 분했다. 김독자가 나를 눈으로 훑다가 멈칫하고는 말했다.
"한수영씨, 물어볼 게 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침묵이 깔렸다. 그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냥 전화 받지 말고 마저 죽을 걸 그랬다고 후회할 때 즈음, 작년에서 멈춰있던 나를 일으키는 한 마디가 그의 입에서 나왔다.
"당신은 도대체 누굽니까."
이 때 뭔 생각이었는지 이해하는 데 좀 오래걸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