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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편

ㅡㅡㅡㅡㅡ


아무래도 나는 미쳐버린 것 같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

.

.


그렇게 직원들과의 데이트가 몇번의 로테이션을 돌았다. 그에따라 계절도 단풍이 물드는 가을이 되었다. 


"음....다행이네요."

"그렇습니까?"

"네. 이거 봐요."


설화의 진료실에서 독자는 자신 앞에 띄워진 화면을 바라봤다. 그곳엔 무수히 많은 표와 글자와 숫자 따위가 있었다.


"여길 보시면 체질량 지수가 있는데....."


설화가 마우스로 하나하나 가리켜가며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지 설명을 해주었다.


그래서 한마디로 종합하자면......


"축하해요, 독자씨. 드디어 사람구실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어요."

"......"


이쑤시개 같던 독자의 몸은 운동과 회복을 거듭해 정상인의 범주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기쁘죠? 막 성취감 같은 게 느껴지죠?"

"......지금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육체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감정에도 변화가 있었다.


이제는 하루에 2~3번씩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시기는 무작위 였지만, 처음에 비하면 크나큰 발전이었다.


처음 독자가 감정을 살짝 되찾은 그날은 한수영에게 케이크빵을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아, 설화씨. 몇가지 검사를 조금 더 받고 싶습니다."

"......무슨 검사요?"


설화는 독자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 육체는 정상인데......설화는 혹시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독자의 말을 침착하게 경청했다.


"제 설화 상태를 점검하고 싶습니다."

"저는 중혁씨 건데요."

"......"


설화는 자신의 농담에 쿡쿡대며 웃다가 짧게 사과하고 이유를 물었다.


"저랑 상아씨의 설화가 무언가...부적합 한 것 같습니다. 잘 맞지 않는다고 할까요?"

"설화가 부적합하다고요? 그럴리가......없을텐데..."


설화 부적합이라니...그런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설화는 조금 더 자세히,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말해달라고 했다.


"상아씨와 같이 있거나 상아씨를 마주 볼 때나...상아씨가 근처에 있으면 가슴 쪽에서 무언가 부조화함이 느껴져요."

"......정확히 어떤 부조화가?"

"심장이 쿵쿵댑니다. 제 육체는 철저히 설화로 통제되어 감기도 이제 걸리지 않잖아요."


설화는 눈치가 빨랐다.

의사라는 직업에 적응하다보니 눈치가 빨라졌고 시나리오를 겪으면서 눈치는 거의 신화급 성좌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랬으니 망정이지, 결국 설화가 먼저 눈치 없는 중혁에게 다가가 고백을 하고 연인 사이가 될 수준이었으니.


그러니 지금 저 설화 부적합인지 뭔지 하는 말을 하고 있는 독자를 보고 확신했다.


그는 상아에게 연애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독자씨. 제가 진지하게 물어볼게요. 짐작이 가는 게 있거든요."

"정말인가요?"


독자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듣고는......


"네. 독자씨, 혹시......상아씨 좋아하세요? 아니, 상아씨에게 호감 또는 연애감정을 품고 있다거나?"

"......"


뇌에 잠시 오류가 찾아왔다.


.

.

.


독자씨. 그러고보니 처음 감정을 되찾으셨던 그날 상아씨와 외출하셨더군요.

그 뒤로 상아씨를 만나는 날을 기준으로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독자씨는 다른 사람들보다 상아씨를 만날 때마다 감정의 변화가 훨씬 더 컸다는 거죠.


무엇보다 지금 독자씨가 느끼고 있는 그 말도 안돼는 '설화 부적합'이란 말은...제가 중혁씨에게 호감, 아니 연애감정을 느꼈을 때와 비슷하네요.


상아씨는 친구라고요?

독자씨. 남녀 사이에 친구라는 말은 없어요.

못 믿겠다고요? 독자씨 눈 앞에 증거가 있어요.


......물론 독자씨만 상아씨에게 호감을 갖고 있으면 그건 어쩔 수 없죠. 그러니까 어필을 해야죠.


상아씨가 싫어하면 어쩌냐고요?

과연 그럴까나요......네? 잘못 들으신 거겠죠.


아무튼, 아직 확신이 서지 않으시면 다음 상아씨의 차례에 물어봐요. 이상형이라던가...그런거요.


이제 가세요.

왠지 재밌을 거 같으니까, 이번 연애 상담비는 공짜로 해드리죠.


연애 상담 아니라고요? 

흥, 어디 한번 두고봐요.


터벅터벅


독자는 집으로 돌아가며 설화의 말을 곱씹고 곱씹었다. 호감? 연애감정?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그것도 누구한테? 자신의 동료이자 친구인 상아씨한테.


'남녀 사이에 친구라는 말은 없다......'


설화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정말일까?


따지고보면 그녀에게서 직접 친구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저 가장 믿을 수 있는 그녀였기에, 든든히 뒷일을 맡길 수 있었던......잠깐.


'내가 언제부터 상아씨를 그렇게 의지한거지?'

'그리고 상아씨는 도대체 나의 뭘 믿고?'


독자의 머릿속이 번뇌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애시당초 내가 상아씨에게 호감을 품은 게 맞나? 맞다고 해도...그래. 상아씨 같은 사람이 뭐가 좋다고 나한테 그러겠어. 말도 안되는 소리지.'


정신을 차리고보니 익숙한 현관문 앞이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간 후, 거실에 나와있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다가 말했다.


"상아씨는?"

"상아 언니 오늘 좀 늦는데. 회식 있다던데?"


순간, 방금 자신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찾는다는 건 상아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독자는 지혜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조금 빠른 발로 걸어가 자신의 방문을 닫고 침대에 앉아 생각했다.


"진짜인건가......"


생각할수록 머리는 복잡해져갔다.

자신을 놀리며 음흉한 미소를 짓던 설화가 미웠다.


독자는 얼른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샤워를 끝마치자 저녁 먹으러 오라는 유승의 목소리가 들렸다. 독자는 어슬렁어슬렁 나와 식탁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혀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아직 싱겁고 밍밍했다.


'상아씨랑 먹을때는 맛있었는데......'


또다.

이쯤되니 슬슬 자신의 머릿속에 '만물 유상아'설이 만들어지고 있는 중인 것만 같았다.


독자는 밍밍한 요리들을 입 안으로 후다닥 집어넣곤 자신의 방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후다닥이라 해봤자, 남들이 걷는 것보다 조금 더 빠른 경보 수준이었지만...평소에 그를 보던 동료들의 눈에는 충분히 어색함을 느낄 정도였다.


그가 사라지자 지혜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저씨 뭔 일 있나?"

"또 뭐 사고친 거 아냐?"

"화장실이 급했을 수도 있죠."


그들은 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다만...수영의 눈은 날카로워져 있었다.


.

.

.


"으...머리야..."


너무 많이 마셔버렸다.

요즘들어 주위에 기분좋은 일들만 있었기에 상아는 맘 편히 회식자리에 참석했다가 그만 과음을 해버리고 말았다.


평소답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말리던 정부 직원 사람들의 말을 들을 걸 그랬다.


'나중에 설화씨한테 숙취해소 설화팩이라도 부탁해봐야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시간이...1시 23분. 많이 늦었네. 빨리 돌아가서 쉬자.'


마음이 너무 급했던 것일까. 그만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은 설화의 격 때문에 고작 길바닥에 넘어졌다고 해서 상처는 나지 않을 테지만...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니까 팔을 뻗어 손에 닿는 것을 잡았다.


"아......"

"괜찮으십니까?"


정신을 차려보니 무표정한 얼굴의 독자가 그녀를 받치고 있었다. 거의 반쯤 기대어버린 포즈에 독자도 당황하고 상아는 더욱 당황했다.


"미, 미안해요! 어?"


깜짝 놀라 그를 살짝 밀었다가 오히려 뒤로 넘어지려 했기에 상아는 식겁했다.

독자는 그걸 보고 빨리 반응해 상아가 넘어지지 않도록 잡아주었다.


"...고마워요, 독자씨. 제가 지금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아닙니다. 제가 허락도 없이 만져서 기분 나쁘셨죠? 죄송합니다."

"...네? 아, 아니에요!"


'진짜 아닌데......그냥...놀라서 그런건데...'


상아는 자신의 행동에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깨달았다. 밤 늦게까지 귀가하지 않는 자신을 데리러 와주고 넘어지지 않도록 잡아준 사람인데...오히려 독자에게 죄책감만 심어준 것 같아 빠르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그, 그게 아니라아......"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계세요. 제가 차를 몰고 오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것도."


독자는 상아에게 숙취 해소제를 건네주었다.

그것은 현재 세계적인 주류 사업을 하고 있는 '디오니소스'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구토감과 어지럼증을 확실하게 줄여주고 수면을 유도하는. 디오니소스가 만든 술보다 이 숙취 해소제가 더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상아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스륵.


"아직 겨울은 아니지만 가을밤은 많이 춥습니다. 잠시라도 이걸 걸치고 계세요."


상아는 그제서야 조금 차가운 바람을 느꼈다.


독자는 어느새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상아에게 둘러주고 있었다. 상아는 멍 하니 그를 바라봤다.


"...상아씨?"

"아, 네! ......고마워요...진짜로..."


상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추위 따위는 설화를 운용해서 막을 수 있었지만....상아는 독자의 외투를 꽉 잡아 손에 쥐었다.


'나 어떡해......'


상아는 독자를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숙인 채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방금전엔 그냥...놀라서 그랬어요. 절대 불쾌하다거나 독자씨가 싫다는 게 아니에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독자씨?...아."


그는 이미 근처에 세워두었던 자동차를 향해 가고 있었다. 


상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부끄러움에 목이 타 독자에게서 받은 숙취 해소제를 들이켰다. 그러자 필름이 조금 연결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곧 자신의 앞으로 자동차가 오고 독자가 걸어나와 보조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따뜻해......'


차 안은 히터가 켜져 있어서 따뜻했다. 필시 자신을 위해서 그랬을 것이 분명했다.


상아는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게 죄책감 때문인지 아니면 고마움 때문인지는 몰랐지만, 상아는 자신의 빨라진 심장소리를 인지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담요에 안전벨트에 꽁꽁 싸매진 채로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운전석을 슬쩍 쳐다보자 독자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피곤했는지 아니면 따뜻해서 그런지 졸음이 솔솔 몰려왔다. 상아는 몽롱한 정신 속에서 생각했다.


'독자씨 진짜 잘생겼다.'


그렇게 상아의 눈이 서서히 감기고, 곧 곧은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독자는 그런 상아를 힐끗하고 조금 속도를 줄여 부드럽게 운전했다.


느린 운전속도에 신호등의 빨간불, 정지신호에 걸려 차가 멈췄다. 독자는 잠에 빠진 상아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예쁘다."


중얼거리는 독자의 얼굴엔 작은 미소가 피어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못할 것만 같은 말.


"내가 나쁜 맘이라도 품었으면 어떡할 생각이었어요, 상아씨?"


그는 저녁을 먹은 후, 계속해서 생각했다.

자신이 상아를 좋아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그는 예전에 보았던 여러가지 드라마, 작품 등을 떠올렸다. 연애 경험이 없으니 매체로 라도 연애를 배우려고 했다. 그래서 종합한 결론은......


짝사랑.

독자는 상아에게 호감, 연애감정을 품었고, 상아를 짝사랑 하는 중이었다.


안다. 지금에서 그렇게 된다면 관계는 더 없이 어색해지겠지. 


'그래도......'


그럼에도. 

일방적인 감정이라고 해도.

이 감정을 느끼고 있는 순간 만큼은, 적어도 지금 만큼은...


쇳덩어리로 만들어진 차디찬 지하철이 아닌, 바로 이곳. 그녀의 옆자리.


독자는 비로소 진심으로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돌고 돌아 이곳까지.

2만년동안 악착같이 버텼던, 잘게잘게 부서져 형체도 알아볼 수 없도록 조각났던, 삶이.


자신의 삶은 이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독자는 이 감정에 미쳐버렸다. 미쳐버릴 만큼 좋았다. 

자신의 뇌, 아니 심장에 지랄이 나버린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좋았다.


"좋아한다"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지금은 그거면 되었다.


그렇게 그는 신호가 바뀔 때까지 상아의 얼굴을 보았고, 일부러 천천히 운전하며 자신의 사심을 가득 채웠다.


"상아씨. 도착했어요."

"......"

"상아씨?"


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많이 피곤했나보다......'


"실례할게요, 상아씨."


독자는 상아의 오금에 오른팔을 넣고 등허리는 왼팔로 받치며 조심히 안아들었다.


돌아온 체근민 덕분에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키카드로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가자 누군가가 있었다.


"왔냐?"

"안 잤어?"

"잠이 안 오더라."

"늦게 자면 키 안큰다."

"시발놈이?!"


수영이었다. 수영은 거실에 앉아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아마 대학에서 강의할 내용이겠지.


"난 상아씨 방에 좀 눕히고 올게."


독자는 방에 들어가려다 멈칫했다.


"한수영, 너도 도와."

"내가 왜?"


수영이 눈을 끔뻑거리자 독자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상아씨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내가 할 수 있겠냐? 신발이랑 양말은 가능해도..."

"쯧......밑에 달려는 있냐?"

"뭔 개소리야."

"하여간 눈치없는 새끼."


수영은 혀를 차며 상아의 방을 향해 앞장섰다.

독자는 상아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히도 신발과 양말을 벗기고 밖으로 나왔다.


신발은 신발장에, 양말은 세탁기에.

할 일을 마친 독자는 자신의 방의 침대에 누웠다.


'한수영이 알아서 하겠지.....'


그도 어느새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한편......


***


"야, 유상아. 자냐?"


'계속 자는 척 하자...자는 척.'


상아는 수영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자는 척을 시도했다. 사실 상아는 깨어있었다.


자신이 대체 왜 자는 척을 하고 있는지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비이성적이었다.


"아씨...내일 수업할 ppt만들어야 하는데..."


수영은 주섬주섬 상아의 옷을 파자마로 갈아입혔다.

상아는 축 늘어진 연기를 하며 심호흡 했다.


"......너 김독자 좋아하냐?"

"!!"

"풉, 어디서 자는 척이야. 불여시 같은 년."


아차......


수영의 말에 그만 무의식적으로 반응해버렸다.

상아는 결국 몸을 일으켜 수영과 마주봤다.

수영은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김독자 품에 안겨서 오니까 좋디?"

"......"

"어쭈? 묵비권이라..."

"네, 노코멘트 할게요. 전 잘테니 이만 나가주세요."

"얼씨구? 아예 그냥 축객령까지?"


수영은 건들건들거리며 레몬사탕을 무슨 담배처럼 까딱였다.


"둘이 한번 자~알 해봐. 응, 그리고 그거 할거면 밖에서 해. 괜히 사람들 어색하게 하지 말고."

"그, 그거라뇨!"


상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크크크...다 알면서. 모르는 척 하기는. 그럼 이만 굿 나잇."


수영이 나간 방.

상아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날 상아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자 결국 한숨도 잠을 자지 못했고, 휴가를 신청할 수 밖에 없었다.




다음에 계속

ㅡㅡㅡㅡㅡ

자자자 슬슬 시동 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