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해가 서쪽에서 뜬다는 말이 있었다.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을 가리켜 빗대는 말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만한 일 또한 끝끝내 일어나는 법이다. 지금 유중혁이 겪고 있는 상황이 꼭 그랬다. 패왕, 그 유중혁이 지금 백화점에 있다는 말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유중혁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는 듯이 흐린 눈을 하고서 멍하니 서 있었다. 바로 옆에서 백화점의 판매원이 열띠게 설명을 하고 있고, 유중혁의 몸 위로 옷이 여러 벌 걸쳐지기를 반복함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희미해진 눈의 초점이 점차 사라져 갈 뿐이었다.
"...한수영."
"야, 조금만 참아. 집 가면 키스도 해줄게, 응?"
유중혁이 백화점의 의류 매장에서 멍하니 서 있어야 하는 이유는 순전히 한수영 때문이었다. 검은 옷 가득한 옷장을 보고서 네가 장례식장 직원이냐 라는 타박을 한 한수영이 유중혁을 밖으로 끌고 나섰고, 기왕 살 거면 좀 좋은 걸 사야겠지 않겠냐며 백화점으로 끌고 갔기에 그 패왕이 백화점에 있게 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야, 역시 옷이 날개네. 칙칙하던 분위기가 확 살아나고, 적어도 길영이한테 시커먼 놈 소리는 안 듣겠다. 안 그래?"
"난 시커먼 놈이라 불려도 상관없다. 그러니 제발 그만 집으로 가자."
유중혁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 찰나의 순간에도 그의 몸 위로는 여러 옷들이 걸쳐지기를 반복했다. 다른 매장들에서의, 그러나 옷 이외에는 지금과 다를 것 하나 없는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저 몇벌만 사도 족한데 왜 이리 많이 사는 건지. 유중혁은 그 까닭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너는 몰라도 나는 상관있다. 맨날 시커먼 놈 소리만 듣는 게 짜증 난다고."
"내가 듣는 건데 네가 왜 짜증을 내는 건가?"
"그럼 너는 내가 욕 먹고 있으면 어떻게 할 거냐?"
"네가 가만히 내버려 둘 리는 없다만, 굳이 가정한다면 베어버려야겠지 않나."
"그렇지, 그거랑 똑같은 거야."
"같을 리는 없겠다만, 정 그렇다면 같은 것으로 치지."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자, 알겠지?"
어떤 말이든 그 끝은 결국 참아야 한다는 것으로 이어지는 한수영의 말에 유중혁은 말없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앞의 캄캄한 시야처럼 벗어날 길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유중혁의 눈에 옷들은 색이 다르거나 그 모양새가 특이할 정도로 흉측스럽지만 않으면 다를 것 하나 없어 보였다. 물론 한수영과 유미아가 입었을 때나 그들의 옷을 살 때는 그 차이가 명확하게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저 끝없이 기다리는 것만이 유일한 길인 절망적인 상황에서 유중혁이 한숨을 쉬었다. 물론 한수영은 그 한숨을 익숙한 듯이 넘길 뿐이었다. 붓으로 조심스레 찍은 듯한 눈물점 위의 눈꼬리는 웃는 듯 휘어 올라가 있었다.
"흠... 이것도 나쁘진 않은 데, 이것도 괜찮고."
"...한수영, 제발.... 제발 집으로 돌아가자.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알았어, 이제 그만 가자. 저기요, 이것도 계산해주실래요?"
계산대에 선 한수영이 손에 든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지갑이 펼쳐지자 유중혁과 한수영이 함께 찍힌 사진이 보였다. 그 누가 봐도 친구로는 보이지 않던 사진을 본 판매원이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어머, 두 분 커플이세요? 남자 친구 옷 사주시려 오셨나 본데, 맞나요?"
"네, 하도 검은 옷만 입고 다녀서 옷 좀 사러 왔어요. 장례식장 직원도 아닌 데 옷장에는 장례식장 직원마냥 검은 옷만 가득하고, 자기가 뭔 저승사자라도 되는 지 원."
웃는 낯의 판매원이 카드를 받아들고 카드기에 긁었다. 핸드폰에서 알림이 울리고 결제가 완료되었다는 문자가 알림창에 떠 있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세요. 예쁜 사랑 하시고요."
매장에서 빠져나온 한수영이 유중혁의 곁으로 가자 유중혁은 자연스럽게 팔을 건넸다. 한수영은 유중혁이 건넨 팔을 잡아 팔짱을 끼었다. 팔짱을 낀 둘은 들어올 때보다 휠씬 가벼운 걸음으로 백화점의 출구를 향해 걸었다.
뒤에서 보는 모습은 누가봐도 어느 연인과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 고양이와 늑대 같은 커플링. 괜찮지 않나요? 장난치는 고양이&무뚝뚝해보여도 다 받아주는 늑대... 진짜 좋은 데..
+시나리오 이후, 김독자가 돌아온 이후의 시점입니다. 얘들은 어쩌다 보니 사귀게 되었다의 완벽한 예시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아스라파 써주는 거야. 근데 아스모가 공이면 좋겠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