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앙! 쾅! 콰광!!


아찔한 굉음이 천지 사이를 아득히 메웠다.


세 도깨비 왕과 유중혁.

그들의 싸움에서 설화들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비 오는 날의 물안개처럼 두서없이 흩어졌다.


한 세계선의 모든 설화라고 해도 부족할 정도의 설화들이 우수수 부서졌다.


[유중혁. 네놈이 정말 우리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도깨비 왕의 질문에 유중혁이 잠시 칼을 거두고 숨을 돌렸다.

몇번의 강화를 거듭한, 가히 제일 단단한 검이라고 해도 무방한 그의 흑천마도에는 작은 금이 그어져 있었다.


"닥치고 검을 들어라."

[설화, '이적에 맞서는 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씨발 어이가 없네. 이계의 신격의 왕들을 모두 데려온다면 몰라도···]

[유중혁 씨 당신이 아무리 회귀자라 해도, 설마 일개 화신이 도깨비 왕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유중혁에 눈에, 하늘이 유독 푸르렀다.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은 맑았다.

지금 당장 하늘이 찢어져 세상이 무너진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래, 1863회차의 도깨비 왕도 같은 소리를 했었지."

[이, 씨발새끼가!!!]


유중혁에 도발에 한 도깨비 왕이 허공을 박차고 유중혁에게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의 손톱은 유중혁의 머리 끝도 스치지 못했다.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그의 눈 앞에 멈춰섰다.

아니, 그 도깨비 왕이 유중혁의 흑천마도 앞에 멈춰섰다.


"뭐가 됐든, 너희는 오늘 이 곳에서 죽는다."


유중혁의 눈에서 아스라이 빛나는 멸망한 별의 모습이, 처연하게 외로운 격을 내뿜었다.




---



지평선의 저 너머에서 김독자 일행이 유중혁과 신화급 성좌들, 그리고 세 도깨비 왕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독자 씨, 설마 중혁씨가 지진···"


흙먼지에 미간을 찌푸린 유상아가 말끝을 흐렸다.

계속해서 들려오는 굉음, 그리고 저 멀리서 물씬 풍겨오는 설화 파편의 불쾌한 냄새들.


이 세계 중 어디선가 전 우주에서 가장 지독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싸움은 그들이 지켜보고 있던 싸움임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엘이 날아서 도깨비 왕에게 돌진했고, 그녀의 날갯죽지 하나가 찢어졌다.

흑염을 내뿜던 흑염룡의 입에서는 송곳니 하나가 부러졌고,

제천대성은 입에서 피를 토하며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런 처절한 광경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무 것도 없었다.



또 다른 지평선 너머에서 흑염이 불타올랐다.

아지랑이로 세상이 뒤집혀 질 정도의 뜨거운 흑염.

분명 흑염룡의 것이었지만, 흑염룡의 것과는 달랐다.


흡사 거짓으로 만들어낸, 그림자 같은 불꽃이었다.


"김독자!!!"


저 멀리서 한수영이 달려오고 있었다.

비록 흑염룡이 보낸 구조 요청을 받고 바로 달려왔음에도

대륙의 끝자락, 사방이 광활하게 펼쳐진 지평선이 있는 곳까지 달려오기에는 꽤 긴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콰앙! 쾅!!


김독자를 향해 달려가는 한수영 옆으로, 아찔한 굉음들이 잇따랐다. 그리고, 그녀의 뺨에 그녀의 것과 비슷한 흑염이 스쳤다.


"염룡아···?"


거대한 풍압을 만들어내던 우월한 두 날개는 찢겨져 있었고,

강철 만큼이나 단단했던 갑피는 산산조각이 나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웬만한 성인 남성 크기의 두 뿔 중 하나는 부러져 있었고, 나머지 하나에도 금이 가 있었다.


그것이 한수영의 눈에 들어온 흑염룡의 모습이었다.


항상 흑염룡을 괴롭히고, 갈구던 한수영이었지만, 그래도 성좌와 화신의 관계였던 그들이었다.

한수영이 성좌가 되어 그 관계가 끊어졌음에도, 여전히 둘의 이야기 속에는 애틋한 문장이 남아있었다.


한수영의 속에서 그녀의 흑염 만큼이나 뜨거운 무언가가 끓었다.

그녀가 흑염을 억제하려 감아 놓은 오른손의 붕대는 이미 타버려 흔적조차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성좌, '거짓 종막의 설계자'가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야 이 씨발새끼야!!!!"


한수영은 비명과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흑염룡, 그리고 그의 뿔을 붙잡고 있는 한 도깨비 왕을 향해 달려나갔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흑염룡을 마치 자기 집 개처럼 부리는 저 도깨비 놈을 흔적도 없이 불태워버리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도깨비 왕이 한수영의 기척을 눈치채기 직전,

한수영이 오른손에서 용 모양의 흑염을 퍼붓기 직전,

그녀가 [흑운칠성]을 통해 마지막으로 허공에 발을 딛기 직전,

누군가가 날아와 그녀를 붙잡았다.


"야 이, 씨발 안 놔? 너 누구야!!!"

"가지마!! 가면 네가 죽어. 좀 진정해!!"


하늘에 검은 깃털이 흩날렸다.


김독자는 급하게 한수영을 껴안아 다시 허공을 선회해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야 개새끼야!! 염룡이 다쳤잖아!! 이러다가 쟤 죽으면 어떡할거야!!!"

"진정해, 네가 상대할 놈들이 아니야. 네가 가면 네가 죽어!!!"


한수영이 붙잡힌 채로 계속해서 발버둥 치는 탓에, 김독자는 거의 추락하다시피 일행들 사이로 착륙했다.


"한수영...?"

"어머, 수영 씨 독자 씨 괜찮아요?!!"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채 콜록거리고 있는 김독자와 한수영에게 정희원과 유상아가 급히 달려나갔다.


정희원이 한수영을, 그리고 유상아가 넘어진 김독자를 일으켜 부축했다.

하지만 한수영은 곧바로 정희원의 손을 강하게 밀쳤다.


"놔! 시발!!"


꽤 강하게 밀쳤는지, 정희원의 손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정희원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빨개진 손을 붙잡으며 혼자 옷을 털고 있는 한수영을 바라보았다.


"허··· 나 참 어이가 없네."


하지만 한수영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분이 덜 풀린 듯,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풀어 헤쳤다.


"씨발 니들 등신이야? 쟤들이 뭔데 무서워서 이렇게 숨어있어 병신들아!!!"


한수영의 외침을 끝으로, 짧고도 긴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청명한 하늘은 구름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아름다움을 잃었고,

햇빛을 받지 못한 세상은 약한 냉기를 품었다.


바람이 흘러가는 소리도, 구름이 흘러가는 소리도, 시간이 흘러가는 소리도.


마치 세상이 멈추기라도 한 듯, 숨 쉬는 소리만이 들리는 정적이었다.

물론, 그 정적 속에서도 전투의 아찔한 굉음은 계속 이어졌다.


"···도깨비 왕." 


김독자가 나지막이 말했다. 동시에 한수영의 얼굴이 움찔거렸다.


멸망한 세계의 이야기를 쓴 작가이기 때문에,

그 세계의 모든 존재의 생애를 쓴 작가이기 때문에,


한수영은 지하철에서 제 4의 벽을 마주하고 느꼈던 그 공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지켜달라고 했던 부탁이, 모순이 되어 모두의 길을 막는다는 죄책감.

내가 만든 존재임에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그리고, 도저히 이것을 뚫을 방법이 없을 것 같다는 절망감.


한수영은 제 4의 벽을 내리치면서 생각했다.


'김독자라면 어떻게 했을까?'


김독자의 구원에 의존해온 한수영, 그리고 그들은,

김독자를 구원하러 가는 순간까지도

이 세계의 진짜 결말을 마주하러 가는 순간 까지도, 김독자에게 의존했다.


"뭐? 걔들이 왜...?"


작가의 손길을 떠난 이야기는 작가의 몫이 아니다.

작가의 손길을 떠난 이야기는,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한수영의 뇌리에 스친 문장이었다.


김독자를 구하기 위해, 우주의 너머에 있는 독자들에게 건네준 우리의 이야기.

그들이 꿈으로 지속될 김독자 컴퍼니의 이야기.


정녕, 너희들이 원하는 이야기가 이런 것이냐고.


한수영에 눈에 우리엘이 보였다.

그리고 제천대성도 보였다.


흑염룡을 보고 흥분한 탓에 알아채지 못했지만, 그들 역시 심각하게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수영은 또 하나를 보았다.

지독하게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한 사내를.


그의 검은 지옥을 스쳤고, 이야기를 베었다.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임에도, 마땅히 동료라고 부를 수 있는 사내.

나의 손으로 만들어진, 세상에서 제일 비극적인 사내.


세 신화급 성좌가 모두 쓰려졌음에도, 유중혁은 홀로 세 도깨비 왕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독자 씨, 중혁 씨 도우러 가야할 것 같은데요?"


김독자가 마른 침을 삼켰다.


유중혁은 강하지만, 그렇다고 신화급 성좌보다 강하지는 않다.

심지어 우리엘, 제천대성, 흑염룡과 같은 최상위급 성좌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중혁에게 도깨비 왕을 맡기고 황급히 일행들을 대피 시킨 이유.


그것은 그저 그가 유중혁이었기 때문이었다.


멸망하는 1865개의 세계를 살아온 그였기에,

그 1865개의 세계의 유일한 회귀자였던 그였기에,

그가 멸살법의 주인공이었기에,


더해, 그 전투가 유중혁의 죄책감을 덜을 수 있는 유일한 속죄에 길이였기에.


김독자는 유중혁에게 그 모든 것을 맡기고 몸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독자가 보기에도, 정희원이 보기에도, 이지혜가 보기에도, 그 자리에 있는 그 누가 보기에도,

도저히 유중혁은 이길 수 없었다.


이미 유중혁은 피칠갑을 하고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고,

도깨비 왕들은 킬킬대며 설화들로 그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김독자의 일행들이 도깨비 왕들에게로 뛰어들려는 순간,

갈라진 하늘 속으로 지옥이 드리웠다.



---



[아까처럼 입 좀 털어보시지? 어때, 싸워보니까 죽을 맛이냐?]


"닥쳐라···."


[1863회차의 도깨비 왕을 죽인 건 네가 아니야. 그 망할 모략가 놈이지. 우리를 이기려면 걔라도 데려오지 그래?]


유중혁은 허공에 검을 꽃고, 헐떡거리는 숨을 달랬다.


강해도 너무 강하다.

이계의 신격을 제외하고 모든 회귀를 다 합쳐서, 지금 눈 앞에 있는 저들이 제일 강했다.


도깨비의 정점, 모든 이야기의 왕.

거대 성운의 창조 설화를 보유하고 있으며, 신화급 성좌들과도 격을 달리하는 존재들.


만약 김독자가 없었다면, 도깨비 왕을 죽이고 세계의 진실에 마주할 수 있었을까?


유난히 하늘은 청명했고, 바람은 시원했다.

도깨비 왕들의 공격을 맞아 죽어가는 와중에도, 세상의 아름다움이 보였다.


몇 천 번의 회귀를 해서도 도저히 볼 수 없었던 그 아름다움이,

지금 이 순간에서야 만드러지게 세상에 피어나 있었다.


유중혁의 눈앞에는 푸른 시스템 창이 떠 있었다.


*


현재 당신의 격으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진행하시겠습니까?


Yes / No


*


도저히 내 힘으로는 혼자서 저들을 이길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동료들의 힘을 빌릴 수는 없다.


이 이상의 비극은, 오로지 나의 몫이어야 한다.


저 멀리 김독자의 얼굴이 보였다.

정희원도, 이지혜도, 이현성도,

언제 왔는지 모를 한수영도,

어느새 쓰러진 신화급 성좌들의 모습들도.


그래 김독자, 네놈이 이런 기분이었구나.


"한 가지만 묻겠다. 은밀한 모략가는 너희들을 이길 수 있나?"


[뭐··· 인정하긴 싫지만 처 발리겠죠.]

[야!!!]

[뭐요, 사실인데. 왕들만 모두 와도 이길 지 말 지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도깨비 왕들의 말이 끝나자, 어느새 유중혁 앞의 푸른색 시스템 창은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유중혁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정말 패왕이라는 칭호와는 어울리지 않게, 희미하지만 무엇보다도 밝게 웃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화신, '유중혁'이 1863회차의 힘을 빌려옵니다!]


[현재의 격으로 감당할 수 없는 설화입니다!]

[현재의 격으로 감당할 수 없는 설화입니다!]


[당신의 설화가 붕괴합니다!]



그가 검을 휘두르자, 하늘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용암 같은 지옥의 잿빛이 날았다.


천지에 아득한 혼돈의 격이 울려 퍼졌다.



[철혈의 패왕],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 [영원의 고독자], [별들의 공포]


그가 검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