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 알아?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당신 부탁을 들어주려고, 내가 얼마나 지난한 세월을 견뎠는지."」


「"미리 말해두는데, 사과하지 마. 그 사과를 할 존재도, 받을 존재도 이제 이 세계에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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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랜 시간 동안 유중혁과 비유는 말이 없었다.

그것이 얼마나 긴 긴 세월이었는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방주의 창문으로 보이는 암흑 단층의 정경.

그 사이로 연료로 소모된 설화 파편의 자취가 흩날릴 뿐이었고,

때때로 찾아오는 이계의 신격에 맞서 함께 전투를 치를 뿐이었다.


세계선의 사이를 항해한다는 것은, 그만큼 고된 일 이었다.



[새로운 세계선의 좌표가 입력되었습니다!]

[자동 운항 모드로 변경됩니다!]


비유는 비좁은 방주의 계기판 앞에서, 이런저런 수치들을 관측하고 있었다.

다음 세계선 도착까지의 남은 거리, 주위에 포착되는 설화의 농도, 연료로 사용될 설화 파편의 잔량.


유중혁은 비유의 한 뼘 뒤에서, 한수영이 보내온 원고를 띄워 천천히 정독하고 있었다.

이미 수 십 번은 더 곱씹어본 문장들이었지만, 그는 계속해서 그 설화를 음미했다.


「비극적인 이야기에도 의미가 있을까.」


유중혁은 눈을 감았다.

너무 오랫동안 원고를 읽은 탓인지, 눈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스타스트림 시스템의 권외 지역.


그는 더 이상 '패왕'도, '회귀자'도, '별들의 공포'도 아니었다.


이제 그의 머리는 흰 새치가 검은 머리의 수를 넘어서고 있었고,

좁은 방주에 계속 쪼그리고 있던 탓에 온몸이 쥐가 나 뒤틀리고 있었다.



대충 시스템 점검을 마친 비유가, 조그마한 몸을 돌려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대장, 다음 세계선 도착까지 꽤 남았으니까 쪽잠이라도 자. 요즘 별로 못 잤잖아.]


유중혁은 상체를 비틀어 비좁은 공간 안에서 잠시 기지개를 폈다.

곧 전해오는 목소리에서는 아직도 피로에 찌든 음성이 들려왔다.


"괜찮다."


[괜찮기는 뭘 괜찮아. 대장도 이제 예전 같지 않다고. 이 임무는 모두 대장한테 달렸는데, 몸 간수 제대로 못해서 실패하면 책임질 거야?]


유중혁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말에 한번도 지지 않는 것까지.

그놈과 똑같지 않은 모습이 없었다.


그는 조종석에 등을 기댔다.

눈을 감으면, 콕피트의 창문 너머로 보였던 별들의 운하가 선명히 아려왔다.


유중혁이 몸을 돌려 조종석에 옆으로 누워 기댔다.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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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세계선 진입에 근접하였습니다!]

[자동 운항 모드를 정지합니다!]

[수동 항로 주행 장치를 활성화합니다!]


비유가 작은 팔을 뻗어 튀어나온 항로 운항 장치를 붙잡았다.


이제 다음 세계선 진입까지 하루가 채 남아 있었다.


그동안 유중혁은 많이 피곤했는지

꽤 오랜 시간 동안 몸을 움직이지도 않고 죽은 듯 잠만 자고 있었다.


사실 진짜 죽은 게 아닌지, 그의 숨을 확인한 것이 몇 번인지도 가물가물할 정도였다.


비유는 다시 한번 옆에서 곤히 잠든 유중혁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모습에서,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런 깊은 감정이 솟구치고 있었다.


그것은 비유에게 남아 있는 범람의 재왕, 신유승의 감정이었을지

아니면 아득한 시간 동안 함께 방주를 지킨 기억들에서 나온 전우애였을지.


유심히 유중혁의 모습을 바라보던 그때, 그의 설화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름조차 없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조그마한 설화 파편들.

어쩌면 그의 무의식에 잠들어 몇 겹의 세계를 부유했을 그것들이 일제히 방주의 안을 활공하고 있었다.


그것들이 무엇을 전하려고 하는지, 비유는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흐릿하게 보이는 다수의 상급 괴수종들.

멸망한 잿빛을 상정하는 설화들과, 그 가운데 선명하게 보이는 서울의 재앙.


「'범람의 재왕, 신유승.'」


[야수왕의 감수성]에 뒤덮여 설화를 쏟으며 죽어가는 그 비참한 모습.

비유에게는 마치 악몽과도 비슷한 끔찍한 몰골이었다.


비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 속을 스치듯 지나가는 무색의 기억들.

그녀에게는 그것을 떠올리는 일마저 고통이었다.


비유가 힘을 발휘해 그 이야기를 무력화 시키려고 할 때, 설화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각조각 가루가 난 설화들.

이번에 그들이 전하려는 것은, 한 이야기의 장면이 아니었다.


회귀자의 오랜 순례의 끝에, 그가 그의 존재만큼 이나 오래 묵혀두었던 한 마디.

하지만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는 한 마디.


「"미리 말해두는데, 사과하지 마. 그 사과를 할 존재도, 받을 존재도 이제 이 세계에는 없으니까."」


도깨비 왕의 설화를 넘어, 세계의 또 다른 재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다.」



회귀자와 재앙.

재앙과 회귀자.


어쩌면 이 세상 속 유일하게 온전히 서로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는 두 존재의 이야기는,

김독자에게 이 소설의 비극적인 테마를 알려주는 정도로 끝나버렸다.


그 허망한 암흑의 지평선 속에서 600년을, 그리고 또 400년을…….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시간을 회의감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지우며 살아왔지만,

정작 2회차에서 그를 처음 보았을 때는 반가운 감정이 먼저였다.


사실 1000년을 넘어서는 그 세월 동안 내가 그에게서 회의감을 느낀 것은, 어쩌면 동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무거운 운명의 사슬을 몸에 감고서, 나보다도 더 오랜 세월을 더 악독한 마음을 이고 살아왔구나.

나는 재앙이 되어서 비로소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41회차에서 동료들을 그리 무참히 대한 것도, 자신을 단순히 '병기'로써 취급한 것도,

그 모든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을 정도의 아픔이었다.


그랬기에 시나리오의 제약을 끊고, 그에게 미래의 정보를 건네주었다.

그가 이 회차에서 세계의 결말을 보기를 바랐다.


아름다운 그의 존재가 더 이상 이 세계에 희석되지 않기를,

그가 41회차에 도달하지 못해, 더 이상 그때의 내가 상처 받지 않기를.


그러나 그는 다시 한번, 새로운 세계에 멸망을 선구했다.


증오와 동정, 이해와 분노는 서로 뒤엉켜 있었다.


「그의 회귀는, 다른 존재의 가치를 획정했다.」


그래, 너는 고작 '회귀'라는 운명을 업고서 무수한 생명의 갈래들을 감히 갈무리 한 것이었구나.


그는 절대 2회차에서 세계의 종장을 마주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의 1864번의 회귀가 오직 그의 운명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너무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1864회차에서 [지옥염화]에 불타 소멸할 때,

도깨비로 다시 태어나 차츰 '신유승'으로서의 설화가 되살아나기 시작할 때,


나는 무념한 감정에 빠져있었다.


증오도, 동정도, 이해도, 분노도, 그 어떤 것도 없는 무심한 생각들,

'범람의 재왕'은 이제 더 이상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가정이 설화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비유는 그 설화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중혁의 설화를 넘어, 자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범람의 재왕이 말했다.


결국 이 세계에서, 어느 누구도 잘못한 사람은 없는 거라고.

우리 모두는 위대한 서사의 앞에서, 만들어진 비극 앞에 내던져 졌을 뿐이었다고.


그렇게 사과할 책임도 용서할 필요도 도저히 존재하지 않지만,

한 문장 만으로 어느 존재의 오랜 마음을 위로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 문장을 이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어느덧 방주는 안정 궤도에 접어들었다.

선체의 흔들림은 잦아들었고, 어느 위험요소도 존재하지 않았다.


비유는 운항 장치에서 손을 떨어뜨렸다.


회귀자와 재앙.

재앙과 회귀자.


짧은 한마디로 그 두 존재의 오랜 마음을 위로할 수 있다면, 나는 마땅히 그 문장을 이어줄 수 있는가.


[설화, '야수왕의 감수성'이 이야기를 끝마칩니다!]


비유의 모습에 다른 존재의 형상이 겹쳐 보였다.

그녀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한 것은 아니었다.


그 존재가 딱 한 방울의 눈물을 흘렸다.

그거면 족했다.


정말, 오랜 시간이었다.


[대장, 이제 그만 대장을 용서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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