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독자는 어두운 방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퍽 익숙한 장소였다.
밀폐된 건물 특유의 퀘퀘하던 냄새.
살과 뼈로 이루어진 장작으로 타오르는 불꽃.
왕들이 한 자리에 모였던, 처음으로 한수영을 만났던 장소다.
"...우려는 거 아니니까. 대단한 솜씨더군요. 전투 패시브 스킬도 없이 충정로 그룹을 순식간에 쓸어버리다니...."
잊을 수가 없는 목소리가 들려온 탓에 그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얄밉게마저 보이는, 씨익 웃는 얼굴. 한수영의 아바타다. 김독자는 가만히 서서 그 말을 들었다. 그 목소리를 잊을 수 없던 것은 그때에 뇌리에 기억되어서 였을까, 아니면 훗날에 떠올리기를 그 조차 너였기 때문이었을까. 김독자는 어쩌면 둘 다 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을 잃은 자들 중에서는 한가락 하는 친구들이었는데 말이죠."
한수영의 아바타가 입에 미소를 걸고 있었다. 약간의 비소를 머금은 미소가 너무나도 익숙했다. 한수영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그런가, 그런 사소한 점마저 닮아 있었다.
정말로,
"...너구나."
"예?"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눈 앞의 아바타는 무슨 기억이었을까. 비교적 쓸모없는 기억들로 만들었다고 했었는 데, 그것은 중학생 때의 부끄러운 기억이었을까.
"뭐, 근데 좀 늦으셨습니다. 벌써 주요 왕들은 모두 던전 내부로 진입했거든요."
아니면 지우고 싶었던 속상한 기억이었을지도 모른다. 김독자는 가만히 듣는 척을 하면서 기억을 떠올렸다. 새콤하면서도 달았던 레몬사탕의 향을. 맞잡던 손의 감촉을. 장난스럽게 올라가던 눈꼬리를. 함께였던 너의 모든 것을. 함께 하지 않은 기억의 파편을 앞에 두고 함께 했던 기억을 회상했다. 한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기억이 앞에 있었고 한 사람만이 기억하는 기억은 속에 묻어 놓아야 했다.
나중에, 한수영이 살아남는다면, 모든 것이 끝난다면, 그때에 홀로 꺼내들어도 되었다.
"지금쯤이면 치고받고 싸우고 있을 거예요. 뭐, 승자는 거의 정해져 있는 상황이지만...여길 이 꼴로 만들고 지나간 마지막 왕이 엄청나게 무시무시 했으니까."
과거였던 기억을 앞에 두고서 과거이자 지워져버린 기억을 묻는다. 이제는 단 한 사람만이 알고 있어야 하는 기억을. 다 묻고나면 그때는 걸어야겠지. 곧 도착할 분기점으로.
-
김독자는 흙으로 만들어진 동굴을 바라보았다. 한수영의 아바타가 아닌 한수영을 만났던 장소다.
우리의 첫만남은 좋지 않은 편에 속했었다.
일곱 개의 보석을 쥔 채, 높은 곳에 올라 서 얄밉게 웃던 얼굴이 아직도 기억난다.
옆에서 들리는 말을 가만히 들으며 김독자는 계속 걸었다.
"....지 흥분되는 군요. 꼭 무협지 속에 들어온 기분인데요?"
"왜, 무협지에 보면 그런게 나오지 않습니까? 장보도 속에 그려진 신비의 비동."
"비동의 석실에는 전설의 보검이 잠들어 있으리니, 무림의 누구든 그 검을 얻는 자는 천하제일의 고수가 되리라!"
그렇게 말하며 웃는 얼굴이 그때의 웃음과 닮아있었다.
그 탓에 즐겁게 웃는 얼굴은 홀린 듯이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 웃음을 어찌 보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조차도 결국은 너였을 텐데. 김독자는 내색하지 않고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무협 소설에 나오는 흔한 클리셰군요."
"독자 씨도 무협 좀 읽으셨나 봅니다?"
"꽤 많이 읽었죠.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그 클리셰에는 흔히 이어지는 전개가 있습니다."
이 아바타도 결국은 한수영이라서 그런가, 장난스러운 표정이 꽤 닮아있었다.
그 표정을 보면 언제나 고양이처럼 웃던 한수영이 떠오른다. 그 얼굴이 때로는 아바타의 위에 덮여져 보일때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웃어주던 그 모습 마저도.
"알고 보니 '그 장보도가 가짜였다!'라는 전개죠."
"호오."
"가짜 장보도 때문에 비동에 모인 고수들은 함정에 빠지고, '흑막'은 조용히 뒤에서 실속을 챙긴다."
"...그러면 지금 이 상황도 그런 클리셰일 수 있겠군요? 상황이 좀 비슷해 보여서 말입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진짜 그런 거면 좀 실망할 것 같네요.
"예? 왜죠?"
"솔직히 장보도 보검 같은 클리셰는 너무 많이 쓰였잖아요. 조금씩만 다르지 다 비슷해보일 정도죠."
"...많이 쓰인 클리셰는 그만큼 검증되었다는 뜻이기도 하죠."
"검증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클리셰를 있는 그대로 썼다면, 작가로서는 자격 미달인 것 같은데요."
작가를 앞에 두고서, 작가로서의 자격미달이라 말한다. 생각해보니, 가장 잘하던 것은 거짓말이였을 지도 모른다.
"뭐...이건 소설이 아니니, 이 상황을 만든 작가가 있는 건 아니겠지만."
"……."
김독자는 말을 마쳤다. 옆의 한수영은 입을 다물고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김독자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단순히 허공만을 바라보던 전과는 조금 달랐다.
"만약에 작가가 있다면 어떻습니까?"
"독자씨가 이 상황을 만든 작가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글쎄요, 저는 이름 그대로 독자라 거기까진 생각 안 해봤는데요."
그가 생각하기에 그는 독자였다. 한수영이 쓰고 쓸 소설이 눈 앞에 있다면 기꺼이 읽을 독자였다.
그저 존재만을 알고 있는 작가와 독자의 관계처럼, 서로에게 도움은 되더라도 그것에 그칠 독자였다.
그러길 바랐고, 그래야만 했다. 접점이 하나도 없어야만, 서로의 곁에 없어야만 한수영이 살 수 있을 터였다.
그때의 피 묻은 얼굴이 어른거리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전 결국 독자씨도 똑같아질 거라 생각합니다."
"뻔한 클리셰를 쓰고, 독자들에게 뻔한 만족을 주는 일에 익숙해질 겁니다. 도박을 두기에는 연재 여부만으로도 큰 운이 필요하니까요."
"누가 뭐랍니까? 꼭 작가처럼 말씀하시네요."
옅게나마 감정이 실린 말이 이어졌지만, 그는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김독자는 그대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제 말은 클리셰가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적어도 표절 소리는 안 듣게 쓰라는 거죠."
"표...절이요?"
"네, 표절."
"글쎄요, 어차피 다들 비슷한 이야기에 디테일만 조금씩 다른 건데...그걸 표절이라 할 수 있을까요?"
"아뇨, 저라면 다르게 쓸 겁니다."
"....다르게 쓴다고요? 어떻게요?"
"예를 들면, 이렇게요."
한수영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다르게 쓰여야 할 이야기는 두 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