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함. 아마 짧음.


....

''죽겠다...''

한수영은 휴게실에 드러누워 중얼거렸다. 다른 교수들은 모두 강의하러 가고 없는 그녀만의 시간. 어제의 말실수(?)에 이불킥을 하느라 늦게 자고 아침부터 내리 이어진 강의에 피곤할 수밖에 없는 한수영이었다. 커피를 마시려고 손을 뻗는 그때, 커피잔 옆에 둔 휴대폰에 알림이 왔다.

[새로운 댓글이 1개 있습니다.]

'뭐지?'

탭해서 봤더니 시나리오 전에 쓰다가 이제야 마감했던 작품이었다. 한수영은 누가 댓글을 달았을까 궁금해서 댓글을 보았다.

-작가님, 이 작품은 '○○'이랑 너무 비슷한 것 같은데요. 일단 초반부 58화의 ㆍㆍㆍ

'....뭐지 이 익숙한 듯 다른 댓글은..?'

어딘가의 김모씨가 생각나는 댓글이라서 굳이 스크롤을 내려가며 내용을 읽던 한수영은 중반쯤부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제대로 읽지 않은 티가 나는 댓글이었고 그새 비추가 수십개 눌렸지만 추천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게 빡쳤다. 바로 창을 닫아버리려던 그때, 한수영의 눈에 새로 달린 대댓이 눈에 띠었다.

-제가 작가님은 아닙니다만, 일단 지적하신 부분들에 대해서 반박을 해보자면 58화의 그 내용은 '○○'의ㆍㆍㆍ

누가 봐도 바로 거를 정도의 장문에 쓸데없이 정중한 문체. 그리고 자신보다 이 소설을 잘 파악한 독자는 없을 거라는 자신감이 드러났고 그걸 증명하듯이 매우 상세한 설명까지. 한수영에겐 읽는 동안 자꾸만 김독자가 떠오르는 걸 멈출 수 없는 댓글이었다.

'내가 미쳤나? 왜 자꾸 그 비실비실하고 모자란 녀석이 떠오르지?'

한수영은 커피를 들이키고 냉수를 마신 다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아무래도 내가 정상적인 남자를 못 만나서 그런가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리가 없지. 한수영은 필체로 보아 남자가 분명하고 그녀가 바래왔던 독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문제의 대댓 작성자에게 메일을 보냈다.

'작가입니다만, 혹시 뵐 수 있을까요? 작성해주신 댓글을 보고 감동을 받아서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어서ㆍㆍ'

그렇게 메일을 보내고 3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 답장 메일이 왔다.

-물론 가야죠! 오늘도 가능합니다! 어디로 가면 되나요? 작가님을 만난다니, 좀 많이 두근두근하네요.

한수영은 바로 돌아온 답장에 '혹시 백수인가?'하는 의심을 했지만 그래도 일단 만나보자는 생각에 답장을 보냈다.

'그럼 이 지도에 표시된 곳에서 오늘 5시에 뵙죠.'

....

김독자는 댓글을 마무리하고 폰을 덮었다. 여전히 돌아가는 감시카메라를 바라보다가 빨래를 개기 위해서 일어서려는 순간 진동이 울렸다. 알림창을 열어서 봤더니 제목이 '작가입니다.'여서 김독자는 생각했다.

'뭐지. 신종 스팸인가?'

삭제하려고 들어갔더니 자신이 단 댓글에 대한 내용과 그에 이어진 만나자는 말에 김독자는 가슴이 웅장해졌다. 세상에, 나도 성덕(?)이 되는 거야..! 김독자는 답장을 썼다가 지웠다가 다시 써서 보냈다.

-(사진첨부) 그럼 이 지도에 표시된 곳에서 오늘 5시에 뵙죠.

뭔가 띠껍달가 하는 느낌에 갸웃 했지만 김독자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고선 빠르게 빨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전용스킬, 집안일 lv. 5가 발동됩니다!]

...스킬까지 쓰고서 정리를 마친 김독자는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을 맞아주고서 집을 나섰다. 마스크에 썬글라스, 그리고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노래를 흥얼거리며 약속한 카페에 도착했다.

'5시까지 10분 남았군.'

코트를 벗어 옆좌석에 두고서 김독자는 작가와 무슨 얘기를 할지, 어떤 걸 물어볼지를 상상했다. 옆에 펜과 종이를 꺼내고서.

....

나는 [A급 스포티지]를 타고서 약속장소로 향했다. 평소에는 일행들과 눈에 띠지 않게 놀러가려고 산 차였지만 이번 일은 남들 눈에 띠면 안 될 일의 범주에 속한다 판단하여 몰고 나왔다.

카페에 도착하니 역시 노린 대로 손님이 없었다. 단 한명, 얼굴을 전부 다 가려서 무슨 범죄자 룩을 하고 휴대폰에 들어갈 듯 보고있는 남자 손님이 있길래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저기요, 오늘 보기로 한 독자님 맞으신가요?''

그러자 그는 마스크를 매만지더니 머뭇거리다가 ''예, 제가 맞습니다. 작가님이신가요?''하고 말했다. 이상하게 낮춘 목소리 같아서 잠시 의아했지만, 그래도 일단은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별말없이 넘어갔다.

''네, 맞아요. 제 작품을 그렇게 꼼꼼하게 읽어주시고 제 의도도 잘 파악해주셔서 감사의 마음을 드리고자 이렇게 뵙고 싶었어요.''

나는 가식용으로 살풋이 웃었다. 이렇게 해서 바로 넘어온다면, 물론 그렇게 될 확률이 99.9% 겠지만, 거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눈 앞의 남자는 움찔하더니 태연하게 말했다.

''...저도 작가님을 만나뵙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늘 재밌는 내용으로 써주셔서 잘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한테 흥미가 생겼다. 저 멀리서 종업원도 힐끔거리고 있는데, 이렇게 태연하게 대하는 이 작자는 누구일까?하고.

''그렇군요~. 혹시 개선해야 하거나 바라는 점은 없나요?''

''딱히 없습니다만, 궁금한 게 몇가지 있습니다.''

''?''

''차기작은 어떤 내용인가요? 그리고...외전은 언제 쓰실 예정입니까?''

몇가지 질문에 답해주고 똑같이 몇가지 물어보다보니 주문했던 레몬 아이스티를 다 마셔버렸다. 눈앞의 남자가 괜찮아보여서 나는 결심하고서 싸인해주는 도중에 대놓고 물어보았다.

''그런데 말예요, 제가 당신 같은 독자를 기다려 왔거든요? 근데, 취미도 맞고 뭐...해서, 함 사...사귀어볼래?''

나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나왔다. 멀리 있던 종업원은 귀를 기울이고 있던건지 들고있던 컵을 떨어뜨리고도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뭘 보냐고 소리치고 싶은 걸 참고 있는 도중에, 상대가 말했다.

''...얼굴도 안 보셨는데 괜찮은 건가요? 얼굴 보시면 분명 실망하실텐데..?''

장난기가 미묘하게 들어있는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고 궁금해져서 그냥 모자와 마스크 선글라스를 노빠꾸로 벗겨버렸더니

''한수영, 너 그렇게도 웃을 줄 알았구나?''

환하게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는 김독자의 얼굴이 보였다. 아까의 종업원이 이젠 커피를 줄줄 쏟고 있는 게 시야 한켠에 보였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씨발.''

...처음으로 유중혁이 진심 부러워졌다.


....

''씨발.''

그 목소리를 듣고 나는 낄낄대며 자리에서 일어나 종업원에게 다가갔다.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며 '구원의 마왕이다...꿈인가? 미친건가?' 하면서 중얼거리고 있길래 커피 흘리고 있다고 말해주고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한수영은 내 모자랑 마스크, 선글라스를 들고서 수그린 자세로 얼어있었다. 그 앞에 다시 앉아서 다시 웃어줬더니 한수영이 정신을 차렸다. 조금 더 보고 싶었는데...응?

''야, 시발, 네가 왜 여깄어?? 거짓말이지??''

''한수영. 넌 내가 장난치는 걸로 보이나?''

''지랄맞은 유중혁 성대모산 집어치우고! 대답해, 김독자. 아니지? 이거 꿈이지?''

''아니, 맞는데. 사귀자면서? 좀 설렜다?''

''아아악! 야, 너 그거 애들한테 말하면 죽는다? 야, 거기서! 알겠냐고!!''

''어차피 넌 나 못 죽이잖아?''

''...씨발!!''

멀리서 소리치는 한수영한테서 날개 펴고 도망치면서 나는 활짝 웃었다. 한수영이 그 표정을 보고서 더 화내는 것 같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집으로 돌아와 다른 동료들한테 인사하고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는 순간, 집 앞에서 급브레이크 소리가 나더니 한수영이 뛰어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내 방문 앞에서 발걸음 소리가 멎더니, 조용한 말소리가 들렸다.

''말하면 널 한적한 곳에 감금해버릴거야....''

다시 장난기가 들어서 나는 일부러 이렇게 답했다.

-그거 참 기대되는 일이네. ㅋㅋㅋㅋㅋㅋ

그날 밤, 한수영이 이불킥을 하는 소리가 집에 울려퍼졌다.

+종업원A의 회고
''저는 봤어요. 흑염마황 한수영이 사귀자고 하는데 그 상대가 구원의 마왕이었다니까요? 그 뒤에 구마가 튀고 흑염마황이 소리치는데...귀랑 볼이 살짝 빨개져 있었어요!! ...거짓말이라고요? 거짓말 아니라니까 그러네!!''


 이후 종업원A가 몰래 뽑은 CCTV 영상이 조회수를 어마무시하게 올렸지만 종업원A의 모습은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흑염에 불탔다느니, 매장당했다느니 하는 소문이 도는데...진실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