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언제까지 처자고 있을 거야!"


시끄러운 목소리에 불쾌한 마음으로 눈을 뜨니 뭔가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다.


"아, 일어났네. 또 죽은 줄 알았어요 진짜."


생긋 웃는 입술. 정희원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상아 씨는 내가 잠시 쉬라고 했어요. 우리도 어제

못 잤거든요."


유상아는 벽에 기대어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근데 현성 씨 허벅지는 편해요?"


아까까지 내머리가 있던 곳에서 이현성이 잠꼬대를 하고있었다.


"오늘 메뉴는.....미역국에......."


뭔가 배개 높이가 안 맞는다 싶더니 이현성 허벅지였나.

군용 베갯잇 냄새가 나는군.


"독자 형.......죽지 마...."


묵직한 느낌에 배 쪽을 내려다보니 이길영이 고양이처럼

웅크린 채 기대어 자고 있었다. 슬며시 고개를 들어 몸을 일으키는 순간, 비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허, 드디어 일어나시는 군, 그럼 이거나 받으라고."


비형이 허공에서 패널을 조작하자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성좌,'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트라우마를 안타까워합니다.]

[성좌,'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과거를 흥미로워합니다.]

[성좌들이 당신에게 3800코인을 후원했습니다.]


메시지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당신은 충무로에서 '그린존'없이 세번째 시나리오를 클리어 하였습니다.]

[당신은 두번째로 '끝나지 않는 새벽'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업적 보상으로 1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보유 코인:21498c]


무려 4800코인, 하룻밤에 4800코인을 벌었는데

코인을 잃었다. 

게다가 이걸로 극장던전에서 얻을 수 있는 보상마저 

제한되겠지....

옆에서 하품을 하던 정희원이 물었다.


"오늘도 이런 식일까요?"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습니다."


물론 멸살법에는 삼일차의 히든 스페이스 정도는

나와 있다. 문제는 유중혁이 이번에도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왜 그렇게 바쁘신지 이제야 알겠네."

"네?"

"희원 씨, 검 내구도 다됬죠?"


내 말에 정희원이 한숨을 쉬며 이가 나간 c급 도검을

꺼내들었다. 아마 이현성의 방패도 간당간당 하겠지.

나는 조심스레 이길영을 눕혀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구도가 다해 까맣게 바랜 슈트에서는 더 이상 부드러운 촉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땅부자를 끌어내러 가죠."

"......진심이에요?"


정희원이 걱정스런 말투로 말했다. 이해가 안 가는건아니다. 

그녀의 거의 망가진 검이 정말 못 쓰게 될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이 작전은 다른 이들이 휘말릴 가능성이 크니까.

그럼에도 나는 오늘 이 작전을 실행시킬 것이다.


"현성 씨 잘 챙겨주세요."







30분 뒤,

나는 말없이 방패를 닦던 이현성에게 작전에 대해 알렸다.


"너무 부담 가지실 필요 없으십니다."

"......그렇습니까?"

"네, 현성 씨는 계시는 것 만으로 안심이 되는 사람입니다. 분명 잘해내실 수 있어요."


이현성이 미묘하게 웃었다. 응원이 잘 먹혀서 다행이군.

지금은 그저 그가 정말 위안을 얻었기를 바랄뿐이다.


[인물, '이현성'이 책임감을 느낍니다.]

[인물, '이현성'이 당신을 크게 신뢰합니다.]


"이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현성 씨는 정의로운 사람이니까요."

".....네, 꼭 그렇게 되야겠네요."


[인물, '이현성'이 마음속 깊은 고민을 마주합니다.]


나는 이현성을 뒤로하고 다른 일행들을 향했다.

아까부터 다들 모퉁이에 숨어있는게 정말이 신경쓰인다.


"다들 뭐하시는 겁니까?"

"딱히요? 독자 씨야말로 뭐하세요?"

"말씀 드렸다시피 이번 작전에는 현성 씨의 역할이 

중요하니까요, 부담감을 덜어드리려는 것뿐이에요."


내 말에 유상아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그러네요, 저도 현성 씨가 빨리 기운을 차리셨음

좋겠어요!"

순진하고 사람좋은 유상아와는 달리 나머지 둘은 살짝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이런 건가요?"

"뭐 비슷합니다. 그리고 길영아, 부탁한건?"

"네, 형."


이길영의 작은 머리 위에서 바퀴벌레 한 쌍이 더듬이를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 누나는 1층에 있어요, 다른 한명은 2층 돌아다니고

 있고요."

"고맙다."


나는 홀로 계단을 향했다.

다행이 김나영은 나를 눈치채지 못했다.

대신 나를 반긴 것은 건물주 연합원이었다.


"하하, 이게 누구셔, 불법 세입자 아니신가?"

"......."

"그런 일을 버리고도 잘도 위로 올라오셨네. 어제 일 진짜야? 유중혁이가 도와준 모양이지?"


무시하고 계속해서 걸어가자 겁먹었다 생각했는지 연합원들은 계속해서 이죽거렸다.


"따가리로 사는 거 안 힘들어?"

"연합 들어올래? 필두 씨가 생각해본다는데."


층을 올라가면서 남아있는 것들을 센다.

단 한 개도 놓쳐서는 안된다.


"물론 여자들도 모두 데리고 온다는 조건하에 말이야."


3층보다는 2층에 남은 게 많다, 그럼 정희원도....


"어이, 지금 우리 무시하는 거야?"

"듣고 있어. 생각해볼께."


내 말에 연합원들이 서로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래, 지금 실컷 웃어두어라.

멀어지는 놈들을 뒤로 하고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려는데, 등뒤에서 나타난 칼날이 어느새 목에 닿아있었다.

기척이 거의 안 느껴졌는데.... 초반에 이 정도의 

기동력을 자랑하는 스킬은 하나뿐이다.


[귀신 걸음걸이].


"좀 실망인데?"


그래, 너도 싸가지가 없어서 그렇지 실력 하나는 출중하니까. 


"저 새끼들이랑 거래하면 그쪽 여자들이 어떻게 될지 몰라? 정신 나갔어?"

"제정신이고, 그 정도는 알아."

정희원이나 유상아의 손에 목이 달아나겠지,


"아는 인간이 그래? 차라리 아까 진짜로 죽어버리지 그랬어?"


난 이미 한번 죽어봤다는 말은 안하는 게 좋겠지.


"칼 치워. 얘기하러 왔으니까."

"그런건 나영이 통해서 말해, 나도 바빠."

"걔 한테는 따로 할 말있어, 그리고 네가 뭐가 바빠?"


내 말에 이지혜가 못 마땅한 듯 킬을 치웠다.

돌아보니 이미 이지혜는 1층 개찰구를 넘어가는 길목을 막고 서 있었다.


"용건만 말해."

"네 도움이 필요해서 왔어."

"내 도움?"

"오늘 공필두 일행을 박살 낼 거야."

"....진심?"


이지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저씨 만으로는 안 될걸. 그쪽이 다 덤벼도 안될거고."

"네가 도와도?"


이지혜는 자존심이 상한 듯 고개를 돌렸다.

아마 유중혁에게 나서지 말란 말을 들었겠지.

지금의 이지혜는 공필두를 이길 수 없으니까.


"방법이 있어. 너랑 나영이라는 얘가 필요해."

"....사부가 여기 지키라고 했어."

"내 방법대로면 그건 걱정 안 해도돼."

"사부 말이 더 중요해."

"이곳 사람들 목숨보다?"


이지혜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어제 그 남자애, 죽었어. 알지?"

".....알아."

"도깨비들이 건 패널티 때문에 죽었지."

"그 얘긴 왜 하는 건데?"

"운이 좋았다면 살 수도 있었어. 오늘도 우리한테 쪼르르

달려와서 네 잘난 사부의 무용담을 떠들어댈 수도 

있었지."

"....어차피 다들 죽을 사람들이었어."

"유중혁이 그렇게 말하든?"


이지혜는 이제 손까지 떨기 시작했다.


"그 말이 맞아, 결국에는 죽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렇게 뻔뻔하게 말할 수 있는 나도 참 역겹다는 생각이든다.

금호역에서도, 지하철에서도 그런 사람은 없었으니까.


"네가 돕는다면 지금은 죽지 않을지도 몰라."


필히 이지혜는 얼굴을 찡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 일테지.


"....지하철에서 네가 나온 영상을 봤어."


이지혜의 작은 어깨가 움찔댔다.


"반 친구를 죽이고 살아남는 영상이었지."


[인물'이지혜'가 동요합니다.]

실제로 멸살법에서는 이지혜가 속한 태풍여고가 

학살당하는 것이 실시간으로 송출되었었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하는 말은 반은 진실이다.......


그래, 나는 역겹다 못해 쓰레기다.


"....그만."

"너도 네 절친한 친구에게 그러기는 싫었을 거야. 

그렇지?"


[인물'이지혜'가 크게 동요합니다.]


"아저씨가 뭘 알....."

"그거 네 친구가 부탁한거지?"


[인물'이지혜'가 고통스러워합니다.]


"......닥쳐."

"맞나보네."

"닥치라고! 네가 뭘 알아!"

"그래, 난 아무것도 몰라. 지금 이것도 그냥 아무렇게나 

지껄이다 얻어걸린거고."


이지혜의 경련이라도 일으키는 듯한 손은 이제 칼이라도

뽑아들 기세였다.


"하지만 기왕 지껄이는 거, 꼭 이말을 해주고 싶다.

만약 오늘도 네 진심을 외면한다면,

넌 평생 후회할 거리를 또 하나 가지게 될거야."

"......"


나는 곧장 방향을 돌려 2층을 향했다.

나는 '등장인물'은 알지만 '인간'이지혜는 모른다. 

그래도 내가 모르는 이지혜라면.


"잠깐."


결코 무언가를 쉽게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 한번 지껄여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