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일

그녀의 생일.


잊지마 넌 흐린 어둠 사이
왼손으로 그린 별 하나


아침 6시, 울리는 벨소리에 그녀가 눈을 떴다.


"일어났어?"


"아... 어, 방금 일어났어."


"응, 그럼 좀 있다가 봐."


아침에 약한 그녀를 위한 그의 모닝콜이다.

이전에 그가 집으로 자신을 데리러 올 때까지 늦잠을 잔 적이 있다.

몇 번 당하더니 그가 자진해서 6시에 모닝콜을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모닝콜도 오늘로 끝인걸까?"


침대에 앉아서 휴대폰을 멍하니 쳐다보던 그녀는 생각했다.

평범한 이성친구 사이라면 매일 아침 6시에 하루도 빼먹지 않고 꼬박꼬박 모닝콜을 해주거나 하지는 않겠지.

그녀는 어제 그의 말을 밤새 곱씹어 보느라 밤잠을 설쳤다.


'이 관계가 우정만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해?'


그녀는 계속 뒤척거리다 결국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그의 질문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때로는 침묵이 어떤 말보다도 더 강력한 법.

그도, 그녀도 모두 그 질문의 답을 알고 있다.

그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일어나 몸단장을 시작했다.

그가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하는 시간은 7시 30분.

그녀는 여느 때 보다도 길게 느껴지는 1시간 30분을 보냈다.


-


"교복, 잘 어울리네."


집에서 나오는 그녀를 보고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단정해보이는 니트 위에 라인을 강조하는 블레이져가 그녀의 외모와 완벽하게 어울렸다.

너무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치마와 커피색 스타킹이 그녀의 늘씬한 다리를 부각시켜준다.


"전에 교복 맞출 때 같이 갔었잖아."


"그 때도 잘 어울렸고 지금도 잘 어울려. 고등학교 첫 날이니까 이런 말 해줘야 할 것 같아서."


"고마워. 너도 잘 어울리...나?"


"너무한거 아니야?"


그녀는 그와 가벼운 농담을 나누며 웃었다.

그리고 그의 태도가 평소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했다.


'어제의 말은 역시 그냥 해본 말인거겠지..?'


어색한 미소를 애써 숨긴 그녀는 그와 함께 버스를 기다렸다.

학교까지는 버스로 세 정거장 정도.

걸어가기는 조금 멀다. 

그는 원래 자전거로 통학할 생각이었으나 그녀가 자전거를 탈 줄 몰라 어쩔 수 없이 자전거는 고이 창고에 모셔뒀다.


"미안..."


"뭐가?"


출근길과는 정 반대 노선인지라 학생들 몇몇만 보이는 한적한 버스.

그의 옆자리에 앉은 그녀가 사과했다.


"넌 자전거타는게 더 편하잖아."


"내가 좋아서 너랑 가는건데? 너 아까부터 좀 이상하다. 정 미안하면 나중에 자전거 배우러 와. 내가 가르쳐줄테니까."


"이 나이 먹고 쪽팔리게..."


"탈 줄 모르는건 안쪽팔리고?"


"그럼 나 진짜 배우러 간다?"


그녀는 그제서야 굳어있던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속으로 또 한 번 내심 안심했다.

그의 태도와 대화를 통해 슬쩍 그의 마음을 떠본 것이다.

그의 마음을 거절해도 등교도 같이 하고 자전거도 배우러 갈 수 있겠구나.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겠구나.

내가 너무 이기적인걸까?

하지만 나는 그에게 먼저 뭔가를 해달라고 한 적이 없는걸.

항상 먼저 그가 먼저 해줬을 뿐이야.


삐익ㅡ

정차를 알리는 버스의 부저가 울리고 곧 버스의 문이 열렸다.

어느새 가득 찬 버스 안의 학생들이 뒷문으로 우르르 빠져나간다.


"안 내려?"


"어? 어, 어. 내려야지."


"뭐 두고 내리는거 없지?"


"내가 무슨 바보도 아니고 무슨 소리야."


"아니, 너 오늘 되게 정신 없어 보여서."


"...아닌데? 아니거든?"


"아니면 아닌거지 뭘 그렇게 기겁을 해?"


그는 멍하니 앉아있던 그녀를 불러 일으켰다.

그녀는 오늘따라 정신이 없어 보인다는 그의 말에 흠칫했다.

티가 많이 났나?


-


대강당의 뒷편, 각자의 반이 공지되어 있는 커다란 게시판에 학생들이 바글바글하다.


"거기! 서로 밀치지 말고 질서를 지켜서 확인하라고!"


머리가 반쯤 벗겨지고 뿔테 안경을 쓴 선생이 학생들에게 소리질렀다.


"저런 선생님은 진짜 어느 학교를 가나 있구나. 어디서 찍어내는 건가?"


"푸흡.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말고 빨리 우리 반이나 좀 확인해봐."


"잠시만 기다려봐, 앞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잘 안보인단 말이야."


게시판에 붙어있는 수많은 학생들 중 맨 뒤, 그가 까치발을 들고 게시판을 노려봤다.


"어,어... 나는 1학년 3반이고, 너는 잠시만... 어... 찾았다!"


"몇 반이야?"


"글쎄...? 몇 반일까?"


그가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씨익 웃었다.


"야! 장난치지 말고 빨리 말해줘! 아니다... 나도 3반이지?"


"어, 어떻게 알았어?"


"나도 말 안 해줄거야."


"그러지말고, 말해주라아..."


"네 입꼬리."


그의 애원에 그녀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네가 나를 좋아해서 표정 관리가 안 된다는 말을 면전에 대고 말하는 것은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부끄러운 일이다.


"아."


그의 입꼬리는 이 와중에도 정신을 못차리고 올라가고 있었다.


"포커페이스란거 힘드네."


"빨리 반에나 올라가자."


그녀가 빨개진 얼굴로 그의 손목을 잡고 반으로 끌고 올라갔다.


'왜 이러지...? 평소에 한 번도 이렇게 의식한 적 없었던 것 같은데. 어제 일 때문인가?'


-


그와 그녀는 반에 올라가서 적당히 중간 쯤에 자리를 잡았다.

괜히 뒷자리를 노리다가 무서운 친구들에게 찍히는 것도 사절이고 앞자리에 앉았다가 선생님의 총애를 받는 것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아서 잠시 잡담을 나누자 아까 강당에서 소리지르던 그 선생이 반의 앞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조용! 아주 그냥 첫 날이라고 신났어?"


그 뒤로 이어진 기나긴 OT는 뻔하디 뻔한 얘기만 이어졌다.

자신이 아주 무서운 선생이다 하는 어필,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열심히 공부하라는 잔소리, 그 외에 학교에 관한 아주 당연한 사실들 몇 가지.

그와 그녀는 적당히 소곤거리며 지루한 조례를 버텼다.


딩동댕동ㅡ


"자, 10분 쉬고 첫 시간에는 교과서를 나눠주고 임시 반장도 뽑고 할거다. 쉬는 시간이라고 사고치지 말고 조용히 앉아 있어."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지루한데 성격도 더러운 선생은 나갔다.


"입학 첫 날부터 수업은 좀 너무하잖아..."


그녀가 책상에 푹 엎어졌다.


"피곤해 보이는데 잠깐 눈이라도 좀 붙이던가. 선생님 오시면 깨워줄게."


"땡큐... 나 그럼 조금만 잘게."


어제 제대로 잠을 못자서 그런가, 하며 그녀는 책상에 잠시 책상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감은지 10초만에,


"스으...."


그녀는 잠들었다.

그녀의 잠든 얼굴을 잠시 멍하니 쳐다보던 그는 가방에서 담요를 꺼내 그녀에게 덮어줬다.

그 때, 갑자기 뒤에 앉아 있던 여학생이 그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그가 뒤를 돌아봤다.

뒷자리의 여자아이 둘이 매우 흥미진진하단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다.


"저기, 혹시 둘이 사귀는 거야?"


"...아니?"


"아, 미안 너무 갑작스러웠나?"


그러고는 뒷자리의 여자애들이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어느 중학교에서 왔고, 이름이 무엇인지, 그러고는 다시 물어봤다.


"아까 반에 들어올 때부터 계속 봤거든. 근데 둘이 엄청 사이가 좋아보여서 물어봤어. 둘이 손도 잡고 옆자리에 앉아서 속닥거리고 담요도 덮어주고."


"손은 안 잡았어. 얘가 내 손목 잡고 끌고 온거지."


"꺄아! 야, 그게 더 설렌다."


뒷자리의 여자애들이 꺄꺄 거리며 호들갑을 떨자 그가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댔다.


"쉬잇! 미안, 얘가 오늘 좀 피곤해보여서 조금만 조용히 말하자."


"아니야 아니야, 미안할건 없고."


"그럼 일단 둘이 사귀는건 아닌거네? 친구?"


"친구야 친구, 일단은"


'일단은'이라고 강조하는 그의 모습에 뒷자리 여자애들이 또 한 번 흥분했다가 그의 주의를 떠올리고 다시 조용해졌다.


"일단은, 이라고 말한거면 좋아한단거야?"


"야, 미친년아! 초면에 그런걸 물어보면 어떡해!"


"어. 좋아해."


너무도 당당하게 좋아한다고 말해버리는 그에게 되려 뒷자리의 여자애들이 당황했다.

잠시 이어진 침묵.


"...이런 이야기 처음보는 애들한테 막 해도 되는거야?"


방금 다른 여자애를 미친년이라고 타박하던 애가 좀 미안하다는 듯 물었다.


"고등학생씩이나 되서 누구를 좋아하는게 뭐가 어때서?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그리고 어차피 얘도 알고 있어."


"어, 뭐야! 근데 왜 둘이 안 사귀는거야?"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왜 안 받아줄까."


"뭐야, 벌써 고백했어?"


"10년 전부터 매년."


"...굉장하네."


그 후 그가 그녀들에게 대충 둘의 인연을 설명했다.

중학교에서는 전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둘이지만 고등학교에 올라오니 또 이야기해줘야 하는구나.

생각보다 깊디 깊은 그의 사랑에 뒷자리의 그녀들이 당황했다.

10년 전부터 좋아해서 매년 고백해오고 있다는 이 짧은 이야기에 그녀의 칭찬이 얼마나 들어가있는지.

그녀들이야 중학교 때부터 이어진 커플인가 싶어서 친구도 사귈 겸, 쉬는 시간을 연애 이야기로 보낼 생각에 적당히 찔러봤는데 이런 이야기가 돌아오니 당황할 만도 하다.

그가 깊게 한숨쉬었다.

그의 한숨을 본 뒷자리의 여자애들이 잠시 속닥거렸다.


"좋아, 결정했어. 시간이나 장소 때문에 여기서는 안되겠고 잠시 폰 좀 줘봐."


"폰은 왜?"


"왜긴 왜야. 우리가 너의 사랑을 응원하니까 그렇지."


그는 너무 빠른 접근 속도에 정신을 못 차렸다.

인싸들의 세계는 원래 이런 것인가?

그러고는 마지못해 그녀들에게 휴대폰을 내줬다.


"흐아아아아! 좀 개운해졌다. 선생님은 아직 안 오셨지?"


그 순간 그녀가 기지개를 쭉 펴며 일어났다.


"담요 이거 네가 덮어준거지? 고마워. 잘 썼어."


자신을 덮어주던 담요를 곱게 접어 그에게 전해주려고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 번호 저장했으니까 전화 걸어줘."


뒷 자리의 여자애들에게 번호를 따이는 그의 모습이었다.


-


아니 후회물로 시작했는데 둘이 꽁냥거리는거 쓰는게 왜 이렇게 즐겁지ㅋㅋ

그냥 순애물인데??

여자와의 대화는 화면 너머로만 해봐서 잘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