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https://arca.live/b/regrets/23805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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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고 싶었어, 오랜만이야.


내가 보고 싶었다고...?

10년 만에 갑자기? 

이해가 되지 않는다.

중학교 졸업 앨범들을 보다가, 내 이름을 누군가와 착각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나보다 조금씩 키가 컸던 너였는데, 이제는 너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눈에서는 눈물이 구슬처럼 떨어지고 있었지만, 입은 활짝 웃고 있었다.

네가 이렇게 우는 것을 처음 보았다.


날 끌어안은 너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꽃잎에 앉아 있는 등에를 바라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서 너를 떨쳐내려고 했지만, 너는 나를 거미줄에 걸린 먹이처럼 팔로 둘둘 싸매고 있었다.


- ...잘 지냈어?


간신히 너를 떨어뜨리고, 아까 하려다 끊긴 인사말을 이어나갔다.

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가락으로 눈썹에 붙어있는 눈물을 닦아내었다.

그저 손가락을 눈 주위에 가져다 댄 것뿐인데,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아마 이 자리에는 분명, 지금 너의 행동들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남자가 있을 거다.


- 널 이렇게 다시 보게 된 게, 얼마- 


- 12년 만이야. 


- 세월 한번 빠르네.


너의 대답도 빠르고 말이지.


웃기게도, 널 만나기 전까지는 너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는데, 

널 대면하자마자 그 생각이 사라져 버렸다.

굳이 내가 걱정하지 않더라도, 넌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였을 테니까.

어디를 가더라도 주목을 받았을 너였을 테니까.

지금 너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슬프지만 세월이 흘러서 어린이가 어른이 되면, 그 '급'이라는 것이 확 벌어지게 되는 법이다.

어머니의 말대로였다.

분명 난 너에게 많이 부족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우는 거라고 하는데, 틀린 말 같다. 키울 꿈조차 못 꾸겠는데 말이지.


- 어떻게 지냈어?


내가 물어야 할 말은, 네가 묻고 있었다.

이제는 차갑게 식어버린 너에 대한 감정을 담아서 건조하게 대답했다.


- 대한민국 일반적인 남성의 삶을 살아왔지 뭐. 


평범한 인문계고 졸업, 남자라면 끌려가야 하는 군대를 제대.

이름만 공대인 4년제 대학교 이과 졸업생.

그리고 중소기업 취업. 

아마도 네 주변에는 별로 없는 유형이니 신기하게 보일 거다.


너에 대해서 물으려고 했을 무렵, 예약해두었던 코스 요리가 나왔다.

고급스러운 식기에 먹으면 배고플 것 같은 양에 음식들이 플레이팅 되어 나왔으며, 

얼음 통에 담겨 있는 와인이 나왔다.


- 아, 이거 칠레산 와인인데 제법 맛이 괜찮아. 특히 미트 소스 파스타랑 치즈하고 어울리거든.


뭐 때문에 신난 것인지 모르겠지만, 생글생글 웃으면서 음식들에 대해 설명을 열심히 해주었다.

하지만 내 귀에는 별로 들어오지 않았다.

뭔가 국밥이랑 후춧가루랑 사이다가 그리워지는 맛이어서 말이지.

젓가락과 숟가락, 그리고 스테인리스 물컵에 담긴 냉수까지 그립고 말이야.


- 오랜만이네, 너하고 이렇게 같이 식사하는 게.


- 중학교 때 번호 순으로 급식 먹게 했던 시절 후로는 처음이겠지.


기분 좋게 취한 상태의 너는, 뭔가 그립다는 표정을 지으며 학창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고등학교 때가 아닌, 나와 함께 있던 중학교까지의 시절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흑역사의 시절이기도 한 그때를 말이다. 


일상생활에 치여서 뇌에 아무 생각 없이 살던 그때가 그리울 때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별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학창 시절에 찌들었던 염세주의적 중2병을 생각하면 이불을 뻥뻥 걷어차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말이지.

너하고는 급식 시간에 뭔가 말하면서 먹었던 것도 없는 거 같고 말이야.

그래서일까, 하지 않았던 일을 하려니 너무나도 어색했다.

친근하게 다가오는 너를, 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너 말이지, 나름 반에서 주목 좀 받던 애였던 거 알아?


- 주목은 개뿔, 중2병 걸린 찐따 보는 거였겠지.


- 뭐라고 해야 할까, 종말론 주장하는 사이비 교주 보는 거 같았으니까. 

  노래도 저기 뭐야, 영국 밴드 노래 듣다가 나중에는 음악만 나오는 그런 장르 들었잖아.

  책도 나중에는 인간실격 그런 거나 보고.


- 넌 뭘 그런 걸 다 기억하고 있냐. 아니 잠깐, 내가 그때 듣던 음악은 어떻게 아는 거야?


- 너 잠들어 있을 때 몰래 이어폰 빼서 들어봤지롱.


너는 활짝 웃으면서 와인 잔을 다시 비우고는, 중학교 때 갔던 수련회에 대해서 떠들어대다가 그 시절 유행했던 노래들을 부르려고 한다.

클래식 음악이랑 오페라 노래나 들을 것 같던 너였는데.

그래서 그때 노래 전혀 모를 줄 알았는데.


- 그건 그렇고, 너는 와인 잘 안 마시네? 나 혼자만 취하고. 심심하잖아.


- 이런 거 마셔본 적 없어서 말이지. 와인 잔도 처음 구경했어. 그리고 나 취하게 해서 뭘 어쩌려고?


내 말에 취기가 올라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네가 이렇게 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


- 좀 걸을래? 바다가 보고 싶어.


호텔에 짐을 맡기고, 택시를 불러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파도 소리가 들려오자 유치원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너를 힐끗힐끗 쳐다보는 모습들이 보인다.

...역시.

초등학교 시절,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난 너의 옆에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


- 내가 유학 갔던 곳 말이야, 산도 없고 바다도 없는 그런 곳이었어. 그런 곳 한가운데 대학교가 딱 있는 거야. 


기억이 난다. 

아마 그 대학교에 대한 유학생에 글을 읽어본 적이 있었다.

학교 건물 근처에 풋볼 경기장만 있고, 거기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옥수수밭만 있다고 했었지.


- 바다 이렇게 와본 것도, 우리 유치원 때 소풍 온 거 이후로 처음인 거 같아. 

  아 맞다. 그때 너랑 나 반 아이들하고 떨어져서 길 잃는 바람에, 헤맸던 거 생각나? 너 그때 '엄마~' 하면서 울었잖아.


- 넌 왜 자꾸 내 흑역사를 박박 긁어대냐.


- 헤헷.


나의 발걸음 속도에 맞춰 걸어주고 있는 너를 보며 생각했다.

기분 좋다는 듯 웃고 있는 너의 그 예쁜 머리를 열어보고 싶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체 나를 뭐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에 대해서.

억지로 가짜 웃음을 만들고 있는 나와는 대조적인 너를,

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말이야.


*****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은 꺼내지도 못한 채, 술과 옛날이야기에 취한 너를 데리고 호텔로 돌아왔다. 

캐리어를 끌고 호텔 객실에 데려다준 후, 잘 지내, 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려는 나를,  

넌 커피 한 잔만 하고 가라며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네 곁에 있는 것이 불편해서 얼른 돌아가고 싶은 마음 뿐인데,

너에 대해 참고 있던 것들이 폭발할 거 같은 것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데.

그래도 난 너를 떨쳐내지 못했다.


객실에 놓여 있는 캡슐 커피가 내려지는 것을 보며 기다리는 동안, 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내 얼굴을 힐끗 쳐다보다 고개 숙이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 메일을 왜 안 보냈었던 거야? 무슨 일 있는지 걱정했었어.


네가 할 소리는 아니지 않아?

웃기지도 않는구만.

네가 답장 보내지 않아서 그만두었던 건데.


- 세상이 생각보다 날 비참하게 만들지는 않더라고.


...그리고 날 비참하게 만든 건, 내 편지에 대해 답장 한 번 없던 너였지.

내가 보낸 편지들을 휴지통에 버렸거나,

내가 보낸 메일들을 스팸 처리했을 지도 모를 너 말이다.


커피잔을 가져다주고, 너와 마주 앉았다. 

너는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숙였고, 그렇게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무언가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해?


갑작스러운 질문.

아름답게 성장한 너의 그런 말에 분명 심장이 두근거린다거나, 얼굴이 붉게 변한다거나 해야 하는데,

내 몸에는 아무 반응이 없었고, 그저 헛웃음만이 튀어나왔다.

어떻게 생각하냐고?

나와는 급이 다른 고귀하신 분.

10년 동안 연락이 없다가 돌아온 여자 사람 (옛) 친구.

그렇기에,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 라고 선언할 예정인 인간. 

이라고 생각 중입니다만.


- 너와 떨어지고 나서야 깨달았어. 진짜 나를 봐주었던 것은, 너밖에 없다고. 


지금 장난치는 거지?

아니면 너는 아----주 위대한 사람이라서, 사람 감정을 아주 우습게 보거나.

사람 가지고 노는 것에 대해서도 정도가 있지.

밤에 외로워지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주변에 네 속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건지.

자신의 속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고 애정이란 밥을 주걱으로 퍼서 입에 쑤셔 넣어줄  남사친 정도 가지고 싶었나 보다. 

어렸을 적에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소꿉친구니까,

지금까지 답장 없어도 10년 넘게 연락을 편지와 메일을 보내준 호구이니까,

계속 그 관심을 빨아먹으면서 살고 싶은가 보다.

조건에는 딱 맞기는 하네.

자기가 무슨 짓을 해왔고 앞으로 뭘 하더라도 다 이해해 줄 거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져서 말이다. 

이게 그, 어장 관리라는 건가 보다.

내가 그 대상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사회생활을 통해 갈고닦은 얼굴에 철판 까는 능력이 한계치를 넘어섰다.


- 어떻게 생각할 거 같아?


나도 놀랄 정도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나온다.

그 탓일까. 너는 약간 놀랐는지 커피잔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 난 지금 되게 당황스러워.  10년, 아니 네가 아까 12년 만이라고 말해줬지.

  12년 만에 처음으로 답장 보낸 게, 느닷없이 나를 보고 싶다고 하는 거였잖아.

  지금까지 내가 보낸 편지와 메일에는 어떤 답변도 없던 네가,

  이제서야 날 만나고 싶어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나올까 말까, 엄청 고민했어. 

  나오지 않으려고 했지만, 너희 부모님이 네가 날 보고 싶어한다고 전화를 하셔서 나온 거야. 


- 아... 미, 미안해. 내가 좀 갑작스러웠지? 미안해. 아하하...


예상치 못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너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하긴, 너한테 이런 반응을 보였던 남자는 네 주변에 없었겠지.


-  난 네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온 건지 몰라. 궁금하긴 했어.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너는 그동안 대체 뭘 하고 지냈던 건지 말이야. 하지만 이제는... 상관 없어졌어, 아무래도.

   난 말이지... 이제 너에 대해서 어떤 감정인지, 모르겠어. 아니 그런 감정이나 있는 건지.

   너도 그럴 거라 생각했어. 그저 나란 소꿉친구가 있었지, 정도로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왜냐하면, 지난 10년 동안 넌 나를 없는 존재 취급했을 테니까.


마음에 수년 간 쌓여있었던 것들을 전부 토해내고 지껄이고, 뱉어낸다.

이제서야 배배 꼬여 있던 실타래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 저, 저기? 뭔가 오해가... 잠깐 진정을...


-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지? 답변은 해줘야겠지.

   첫째, 지금 너와의 자리, 불편해. 

   둘째, 지금 너의 행동들, 난 이해가 되지 않아. 

   셋째, 난 이제 너에게 아무 감정이 없어. 가 볼게. 커피 잘 마셨어.


실제로는 한 모금도 안 마셔서 아깝기는 하네.

태어나서 처음 캡슐 커피 먹어보는 거다만.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내 팔을 붙잡는다.

호텔 레스토랑에서처럼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면서,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이렇게 우는 줄도 아는구나.

내가 알고 있던 네가 맞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나에 대해서 모르듯이, 나도 너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 없는 인간이었나 보다.

이름만 소꿉친구였던, 그런 관계였었나 보네.

서로 똑같은 족속들이었구나.


- 가지 마...  잘못 했어.  유학 기간 동안 깨달았어. 너밖에 없었단 말이야..

   내 학벌이나 능력을 보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봐준 것은 네가 유일한 사람이었단 말이야.

    내 곁에 있어줘. 제발....


남녀 차별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뭔가 서로 역할이 뒤바뀐 거 같은데.

내 팔을 붙잡은 너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 넌 그동안 내가 보낸 편지나 메일에 대해 짤막한 답장 한번 준 적이 없었지.  

   아니, 그보다 내 편지들을 읽기는 했어? 그냥 버린 거 아냐?


- 아니야!!! 그런 적 없어! 그럴 리가 없잖아!!!

 

네가 소리 지르는 모습을 처음 본다. 

오늘 정말이지, 너의 새로운 모습들을 많이 보고 있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심정이다.


- 나는 너한테 어울리는 남자가 아니야. 너도 그렇게 생각할 날이 올 거야. 

   그리고 나, 여자친구 있어.


- 엣....


날 붙잡고 있던 너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