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그런 아이였다.

교실 한구석에 앉아 있어도, 천사가 강림한 것처럼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버리는 그런 존재.

그저 곁에 있기만 해도, 자석에 이끌린 것처럼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존재.


서양 모델을 보는 것 같은 새하얀 피부.

또렷한 이목구비.

가느다라면서도 매끈한 팔다리.

마치 깃털이 떠다니는 것 마냥, 요정과도 같은 행동 하나하나.


넌 말이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특별한,

그런 아이였다.


******


우리 사이의 인연은 유치원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그저 같은 동네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유치원 버스를 탈 때 같이 탄다는 이유만으로,

너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악연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았다.

저주라고 부르는 것이, 더 맞았을지도 모른다.

너와의 관계는 내 발목에 채워진 족쇄와도 같았으니까.

너의 소꿉친구, 라는 이름이 박음질 되어 있는 목줄이 채워진 느낌이었으니까.


일본 만화 클리셰에는 그런 것이 나온다.

모든 것이 완벽한 히로인이, 유치원 때 울보였던 자신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소꿉친구인 주인공을 좋아하는 이야기.

하지만 난 그런 만화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런 만화의 흔히 나오는 남자 주인공보다도 훨씬 찌질하고 못난 아이였으니까.


어렸을 때 발표하는 것조차 두려워 벌벌 떨고, 툭하면 눈물부터 흘리는 울보였다.

화장실 가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못해 참다가 소변을 지린 적이 있었다.

그에 반해 넌 연극 대표로 나서서도 떨지 않고 척척해냈고, 

공부도 잘했으며 달리기도 잘했다.

소풍 갔을 때 담력 테스트한다며 귀신의 집을 들어 갔을 때, 하나도 무섭지 않다며 내 손을 끌고 가기도 하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를 기억한다.

너희 부모님의 부탁으로, 학예회 준비로 늦은 시간까지 남아 있던 너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였을 것이다.

주황색 크레파스가 색칠해가는 하늘을 보며 너를 기다렸다.

창문에서 네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렸었다.

석양이 감싸고 있는 해맑게 미소 짓는 너의 얼굴이 보였다.

무엇보다 밝게 빛나고 있던 너의 얼굴을 본 순간, 난 깨닫고 말았다.

난 네 주변에 있을 놈이 아니라는 것을.

9살밖에 되지 않은 꼬맹이라도, 깨달을 수 있던 사실이었다.


*****


너의 주변은 늘 특별한 아이들이 모였다.

뭔가 하나라도 뛰어난 아이들, 평균보다 상위에서 노는 아이들이 모였다.

아니, 특별한 아이들은 아니었지.

진짜 특별한 것은 너였으니까.

다른 아이들이 귀족이라면 너는 여황제였고,

다른 아이들이 브라만 사제라면 너는 신 그 자체였으니까.


그에 반해, 나는 평균에서 약간 하위에 머무는 그룹에 속하게 되었다.

학교 선생들의 매와 벌점 깎이는 것이 두려워 숙제는 꼬박꼬박 하고 예습 복습을 하면서도, 성적은 늘 평균 부근에서 맴돌았다.

쪽지시험을 보면 늘 남아서 깜지를 써야 했다.

예체능이 뛰어나지도 않았다.

그냥 중간.

음악 실기 시간, 내 앞 번호였던 너는 플루트를 가지고 와서 불렀고, 나는 리코더를 가지고 침 흘리며 시험을 보았다.

피아노 학원에 가서도, 네가 순식간에 콩쿠르에 나가도 되겠다는 평을 들을 때 나는 체르니 30번을 계속 연습했었다.

그렇다고 게임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글쓰기 대회에서도 끽해야 장려상을 받은 것과 일기를 꾸준히 써서 칭찬을 받은 것이 전부였다.

너는 백일장 대회를 나가면 매일 우수상을 받았지만.


네가 상위 그룹 아이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하는 쉬는 시간에는, 인생 현타 올 때 들으면 좋을 라디오헤드의 음악을 끼고 살았다.

네가 아이들의 질문을 받아 문제를 알려줄 동안, 나는 마루야마 겐지의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를 읽고 있었다.

너 때문에 염세주의에 찌든 중2병이 초등학교 시절부터 찾아왔다. 


너의 특별함 때문에, 너의 위대함 때문에.

나 자신이 너무나도 비참하고 초라하게 느껴져 목을 매달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엄마 친구 딸과 엄마 친구 아들은 지상 최강의 존재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넌 너무한 존재였지.


널 계속 봐왔기 때문에, 자살할 생각 따위 버렸다. 

경외감이 들면 죽고 싶은 생각조차 못 하는 법이다.


*****


넌 늘 내 곁에 있었다.

난 그 이유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아니, 너도 모르겠지.

그저, 출석체크 번호 앞 번호와 뒷번호의 관계.

그저, 같은 동네.

그런 이유였다.

너도 아마 그렇게 생각하겠지.


네가 날 알아봐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네가 날 특별하게 생각해 줬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곧 사라졌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저 하교를 같이하면서, 말 몇 마디 나누고, 내일 보자는 인사를 하고 헤어지는 사이.

때로는 먼저 하교하면서 너희 집에 네가 늦게 온다는 사실을 전해주는 사이.

그 정도의 거리감이, 적당했다.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넌 점점 내 주변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당연히 그랬어야 했고, 그럴 운명이었다.

내가 네 곁에 없어야 하는 것이 우주의 순리이듯이, 너도 내 주변에 없어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였다.

넌 나와 살고 있는 세계가 다르니까.

앞으로 너와 내가 살아갈 세계는 다를 테니까.


네가 고등학생이 될 무렵,

너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간다는 특목고에 당당히 합격했다고 했다.

그래서, 3년간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한다고 했다.

졸업식 날, 너희 부모님에게 아부를 떠는 우리 부모님의 극성에 의해, 그동안 모았던 용돈을 털어 만년핀을 선물로 주었다.

나조차 써본 적 없는 국산 만년필을, 너에게 주었다.

너는 이거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다며, 어색한 표정으로 감사를 표했다.

바보 같이 나도 몰라, 라고 말하며 웃었다.


너는 네가 가는 고등학교가 교칙이 빡센 학교라, 핸드폰도 허용되지 않는 학교라며 불평했다.

그래서 내가 편지 써주겠다는, 부모님의 반 협박 섞인 약속을 해버렸다.

그렇게 몇 마디 나누지도 못하고 헤어졌다.

너와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아이들과 선생들이 많았으니까, 비켜줘야지.


******


편지 쓴다고 약속했었지만, 막상 너에게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전까지 편지를 쓰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공부가 어렵다, 학교 선생들이 맘에 안 든다, 일진들이 있었고 그걸로 학교에서는 퇴학과 관련되어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 등등.

너에게 들려줄 이야기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해봤자, 너에게 들통이 날테니까.

방학을 학원 수업과 게임을 하는 것으로 보낼 때쯤, 너희 부모님으로부터 핀잔을 들었다.

내 편지가 오지 않아서, 네가 심심하다는 이야기였다.

그 약속을 흘려들은 줄로만 알았는데, 너희 부모님과 너 모두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너희 부모님에게 아부를 떨고 있는 부모님은 나를 혼냈다.



너에게 들려줄 이야기 따위는 없었기에, 그래서 될 대로 돼라지, 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썼다.

그저 일기, 그저 내 감정 쓰레기통이 되기 직전 수준에 글을 말이다.

네가 막 써버린 편지를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고, 고전 명작을 읽는 모습을 상상했다.

웃기게도, 의무감으로라도 쓰다 보니 텅 빈 편지지에 쓸 이야기가 늘어났다.

학교 급식에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단체 식중독에 걸렸던 일,

낡은 온풍기와 라디에이터가 고장 나서 불난 것처럼 김이 교실을 가득 채워서 도망쳤던 일,

요로 결석 걸린 친구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학교 땡땡이쳤던 일,

모의고사에서 대충 찍고 잤더니 잭팟이 터졌고 담임에게도 욕을 먹었던 일,

처음으로  컴퓨터 부품 사서 조립해본 일,

주말 느닷없이 심심해서 자전거로 목적지 없이 페달 밟고 어딘가 갔다 왔던 일 등등.

그저 내게 있던 일들에 대한 기록들을, 너에게 보냈다.


알고 있었지만.

너는 단 한번도 내게, 답장을 하지 않았다.

답장할 시간조차 없는 너라 생각했기에, 별 기대를 안 하고 있었다.

아니 , 읽는 것도 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에미넴의 Stan처럼, 여전히 전화도 메일도 답장 없는 너에 대해 좆같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는 거짓말이고.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몇 번이고 베푼 호의를 무시 당하면 빡치는 법이다.


고등학교 3학년 새해가 시작될 때쯤, 너희 부모님으로부터 연하장을 받았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예쁜 글씨체가 담겨 있는 연하장.

그리고.

앞으로도 편지를 써주렴, 이라는 너희 부모님의 부탁과 함께 네가 있다는 주소지를 받았다.

과연 넌 나를 뭐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욕설을 담은 편지를 쓰다가 몇 번이나 구겨버리고, 동시에 너에 대한 내 감정들도 접어버렸다.


*******


시간이 흘러, 난 대학생이 되었다.

나는 그저 내 성적의 맞춰서, 그저 그런 대학을 갔다.

대학 입학 후 중학생 친구를 만나 술 한잔하는 날, 너는 이미 고등학교 2학년 때 조기 졸업을 하여, 포스텍에 들어갔다고 전해 들었다.

역시 넌 대단해,라는 푸념을, 그리고 존경심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상상 속으로나마 너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는 말을 하면서 말이다.


습관이 무섭다고 했었나.

대학생이 되고 나서도, 난 너에게 꾸준히 편지를 썼다.

군대에 가서도 편지를 썼다.

할 수 있는 유일한 취미 수단이 편지 쓰기였기 때문에,

가족과 너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약간의 과장을 섞어 보냈다.

네가 속한 세계에서 군대를 다녀온 사람은 얼마 없을 테니까 말이다.

컵라면도 부셔 먹으면 맛있다, 

내 어깨의 참새가 앉은 줄 알고 신기해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나방이었다,

군대 와서 진짜로 뱀을 구경했다,

고라니 울음소리가 생각보다 시끄럽다 등에 이야기 써서 보냈다. 

내 스스로 광대가 되는 것도 생각보다는 재밌었다.


복학 후 얼마 안되어.

너희 부모님으로부터 유학을 갔다며, 편지 보내는 대신 메일을 써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 생각을 했다.

넌 과연 나 따위에 글을, 보고는 있는 것일까.

너희 부모님은 내가 너와 아직도 친하다고 생각하시는 걸까.

여전히 너희 부모님에게 아부를 떠는 우리 부모님은 그런 것 정도는 무리가 아니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말이다.

그리고....

넌 언제나 답장이 없고 말이야


********


세월이 지나면 누군가와의 약속도, 그 사람과의 애틋함도, 분노도, 추억도 옅어져 가는 법이다.

너에게 보내는 메일 횟수가 차츰 줄어들어 갔다.

핑계라면, 내 인생이 바빠져 그럴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빵꾸 난 학점 메꾸기와 취업 준비로 바빴으며,

취업에 성공하고 나서는 업무에 적응하기에 급급했다.

세상 사람들마다 각자의 삶이 있고, 각자 바쁜 때가 있는 법이다.

그렇게 일상에 치여, 한동안 너를 잊고 살았다.

부모님도 더 이상 내 앞에서 너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어쨌든 사회라는 곳에서 사람 구실은 하고 있는 나를 굳이 건드리지 않았다.


가끔가다, 그런 녀석이 있었지 하고 너를 떠올렸다.

넌 얼마나 대단한 존재가 되었을까.

부러운 게 아니라, 궁금했다. 

어떻게 지내는지.

너라는 존재는 마치, 소중한 보물 상자 안에 넣어두고, 그 보물 상자를 머리 한 구석에 너무나도 잘 보관해 놓아서 말이지.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린, 그런 존재가 되었다.


한동안 메일에 접속조차 않은 내 계정에 들어갔다.

2년이 넘게, 너에게 쓴 메일이 없었다.

단 한 번도 답장이 없던 너에 대한 분노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제는 너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살아는 있는 걸까, 같은.

용기를 내어, 다시 메일을 보냈다.

내용은 별거 없었다. 

나에 대한 근황과 푸념 섞인 일상들을 담아 메일을 보냈다.

어차피 읽지 않을 거지만, 별거 없는 내 삶의 기록들을 남기고 싶었기에, 매주 한 번씩 너에게 보냈다.


지옥 같은 곳에서도 인연은 싹 트는 법이고, 짚신도 짝이 있는 법이라고 했다.

3개월 차이로 들어온 내 후배 여직원과 썸을 타게 되었다.

너와 비교한다면, 정말 별 볼일 없는 그녀였다.

나처럼 인서울을 간신히 졸업하고, 외모도 평범하고 일반인 코스프레를 하는 인간.

취미 생활이 따로 없는 게 공통점이었던 집순이인 그녀와 회사 불평을 하면서 커피 몇 번 사준 것으로 인연이 시작되었다.


*******


어느 날, 너에게 다시 메일을 보낸 이후 얼마 되지 않아서.

너로부터 답장이 왔다.

10년이 넘는 세월 중 처음 받는 답장이라 당황했다. 

무슨 일이지 하고 메일을 열자, 거기에는 장문에 내용이 있었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며, 메일을 받아 기쁘다고 했다.

이제 좀 있으면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며, 

나를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 있었다. 

예약한 항공권에 있는 착륙 시간과, 만날 장소까지 미리 예약한 너를 보며 혼란스러웠다.


왜? 어째서?

나 따윈 잊고 지낸 게 아니었어?

왜 이제서야?


시간이 너무나도 흘러버려 약한 시냇물 줄기가 건널 수 없는 거대한 강이 되어버렸기에,

너를 만나는 것이 두렵고도 어색했다. 

거절하려고 답장을 쓰려던 순간.

지방으로 내려가셔서 소식이 끊긴 너희 부모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네가 날 꼭 만나고 싶어 한다며, 제발 만나줄 것을 부탁했다.


어머니에게 솔직히 말씀을 드리자, 스스로 판단하라고 하셨다.

성인이 된 지금 만나는 것은 뭔가 급이 맞지 않는 거 아닐까, 하며 걱정해주셨다.

부모님이 내가 너와 친하게 지내길 바랐던 것은 학창 시절과 취업 전에 그녀의 인맥이 뭔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였다면서.


******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약속 장소로 나갈 준비를 했다.

한때 소꿉친구였던 네가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었고, 

오늘 너와의 만남으로써 더 이상 메일을 보내는 것을 그만두어 폐를 끼치지 않겠다고 말할 준비를 했다.


넌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10년이 넘는 세월 내내, 너에게 하소연성 메일을 보내는 나를 찌질하게 보지 않을까.

너와 계급이 봉건시대 왕과 노예 수준으로 벌어진 나를 보며 비웃지 않을까.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려고 날 보자고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들을 했다.


예약한 곳은 딱 봐도 연예인들이나 쓸 법한 공항 근처에 호텔 레스토랑이었다.

내가 들어가려 하자 호텔 프런트에서 날 막아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너의 이름을 대고,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산뜻한 향수 냄새와 주변 사람들의 시선 쏠림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많이 변했지만 분명 어렸을 때의 얼굴이 남아 있는 네가 걸어오고 있었다. 

예상대로.

넌 역시, 아름다워져 있었다.

나와 이 공간에 함께 있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로.


- 잘 지냈...

인삿말을 꺼내기도 전에, 넌 눈물을 흘리며 날 껴안았다.

혼란스러워서,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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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생이 너무 바빠 요즘 글을 못씀

근데 왜 정전요

글 잘쓰는 애들 다 어디 갔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