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보이지 않는 황야의 한 끝, 그곳에는 창과 갑옷으로 무장한 일련의 병력이 주둔한 채 반대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 있는 것은 또 다른 황야의 끝, 그곳에서 펄럭이는 깃발과 뽀얗게 일어나는 흙먼지들이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말밥굽 소리에 한 기사가 말했다.

 

“대략 1천 8백 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음...”

 

 그 맨앞에 선 남자는 수염이 정정한 늙은 귀족이었다. 화려한 장식이 새겨진 갑옷과 가문의 녹색 문양이 새겨진 어깨받침을 맨 그는 옆에 서있는 여기사를 보며 말했다.

 

“어떠냐, 세나. 우리가 이대로 녀석들과 결전을 치러도 된다고 보느냐?”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이미 초전에서도 저들의 전력을 확인했지 않나요. 저들은 우리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음.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노귀족은 이번에는 오른쪽에 서있는 방금 전의 청년 기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카를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

“저희가 우세라는 세나 아가씨의 생각에는 동의합니다.”

 

 카를은 살짝 그 여기사, 세나의 눈치를 살피더니 말했다. 

 

“그러나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굳이 포기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살펴본 즉 이번의 녀석들은 초병 정도에 불과합니다. 저희와 싸워 조금이라도 대등하다는 생각이 들면 다음 번에는 본격적인 침공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녀석들이 우리를 조금이라도 두려워할 때, 전투를 피해 그 두려움을 유지시키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흐흠...”

 

 노귀족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저 멀리서 일어나는 흙먼지와 그 안에 있는 서쪽의 이민족들을 자세히 살피고 있었다. 그러기를 몇 분이나 지났을까, 그는 말했다.

 

“경의 말이 옳다. 철군하도록 하자.”

“아버지!”

 

 세나가 소리쳤다. 그녀는 말했다.

 

“검을 빼들고 아무 것도 내려치지 않는다면 그 검을 빼드는데 드는 수고로움만이 남게 됩니다. 저와 센트리올의 기사들은 준비가 철저합니다. 적의 사지를 베어버릴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어찌 물러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녀의 뒤에 서있는 수십여 명의 기사들, 그들은 모두 창을 쥐고 적들의 뒷모습을 분노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센트리올 공작령을 노려온 적들이다. 그들을 눈앞에 두고 철군한다는 것은 명망 높은 그들에게 받아들이기 힘든 결정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공작은 타이르는 말투로 말했다.

 

“칼을 빼드는 수고로움이 있을 지라도 나중에 적을 내려칠 때를 대비해 힘을 아껴두는 것이다. 우리는 이번에 적의 침략 소식에 급하게 병력을 모아 도착했고, 말을 타지 않는 보병들은 지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저들과 싸웠다 피해라도 입는다면 그건 초전의 승리로 한껏 달아오른 기세를 뒤집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노공작의 말은 확신에 차있었다. 그걸 뒤집기 힘들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자 세나는 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 저 멀리서 꽁무늬를 흔드는 적들을 향하는 것이라는 것을 눈치챈 그는 이번에는 딸을 향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세나야, 용감한 모습은 보기 좋다만 우리는 우리 뒤에 있는 영지민들을 지키기 위해 온 것이란다. 결코 저들의 땅으로 쳐들어가 그 뿌리를 뽑아버리기 위해 온 것이 아니야. 초전의 승리로 만족하자꾸나.”

 

 그 말에 세나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만은 없었다. 게다가 노공작은 그 말이 끝난 직후 속 깊은 기침을 하며 의자에 주저 앉았다.

 

“아버지...”

 

 세나는 그를 바라보며 곧이어 그 반대편에 서있던 카를에게 고개를 돌렸다.

 

“카를 경, 아버지를 모셔다드리세요.”

“그러지요. 아가씨.”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그는 주변의 기사들에게 명령해 가마를 가져오도록 했다. 곧 힘겹게 가마에 오른 노공작은 기사 둘의 호위 속에 가마를 타고 진영 깊숙한 곳으로 사라졌다. 

 

“자네들도 일단 위치로 돌아가게. 철군 명령을 내리셨으나 그것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단속을 철저히 시키도록 하고.”

“예, 단장님.”

 

 기사들이 물러나자 카를 역시 자신 측 기사들에게 말했다.

 

“너희들도 가보거라.”

“예.”

 

 센트리올의 기사들과 카를의 기사들, 양쪽이 물러나자 남은 것은 카를과 세나 뿐 이었다. 보초병들의 위치를 확인한 세나는 카를을 보며 말했다.

 

“아까 너무했어, 카를.”

“미안...”

 

 쓰게 웃는 그에게 세나는 미소를 지었다. 한 발짝 그 옆으로 다가간 그녀는 말했다.

 

“나 화났는데. 아까 대놓고 면박 준 누구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한 번만 안아줘.”

 

 그 말에 카를은 주변의 시선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그녀가 속삭였다. 

 

“아버지는 널 여기 남기고 싶어 하셔.”

“알고 있어.”

 

 덤덤한 대답이었다.

 

“여기 있으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다시 센트리올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해봐. 아버지도 네 말이라면 들어주실 거야.”

 

 그 말에 카를은 천천히 한숨을 쉬며 말했다.

 

“명령이잖아.”

“앞으로 몇 년을 못 볼 수도 있어.”

“내가 여기 안 남으면 센트리올의 절반이 날아가.”

 

 적들의 사정권에는 센트리올의 서부 절반이 들어간다. 최근 인구 황폐화를 겪는 그 지방을 그대로 방치했을 때의 결과는 불보듯 뻔했다. 그가 말했다.

 

“네가 이어받을 센트리올의 절반이 날아가. 그건 나도 원하지 않아.”

 

 노공작에게 세나는 하나 뿐인 외동딸이다. 아들이 없는 그는 세나에게 전통적으로 영주의 장자가 맡았던 기사단의 단장을 맡겼다. 설령 사위가 들어오지 않아도 세나에게 영지를 주도적으로 상속시키겠다는 밑작업이었다.

 

“카를.”

“응?”

“난 네가 영주가 되는 것도 반대하지 않아.”

 

 상속권을 얻기 위해서는, 유일한 상속권자와의 결혼이 강제된다. 

 

“나는 그냥 서쪽 변방 가문일 뿐이야. 만약 내가 그런 일을 하려고 한다면 동부 전체가 반발할 거야.”

“그 정도는 저지할 수 있어. 센트리올 가문의 역사를 무시하지 마.”

“너희 가문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적어도 지금은 불가능하다는 거야.”

 

 두 사람의 나이는 둘 다 갓 20살, 18세에 치루는 성년식을 한지는 시간이 꽤 흘렀지만 아직 전면으로 나서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세나는 조급했다. 

 

“네 말도 이해는 가. 그런데 우리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아버지의 건강이 더 나빠지기만 할 거라는 안좋은 예감이 들어. 아버지의 건강이 나빠지면...그 뒤는 별로 생각하고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그 다음에는 너와 결혼하는게 더욱 힘들어질 거야.”

 

 

 카를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서쪽 벌판, 그 너머에는 이민족들의 세계가 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한 기마 민족, 그들은 끝없이 이동하며 셀트리올 공작령의 서방 영토를 공격해온다. 방어선이 뚫리기도 수십 번, 이 영토는 점차 황폐해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매일같이 쇠약해지셔. 그리고 거기에 이 지역의 소식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이민족의 침공은 셀트리올 공작령이 대응해야 하는 최우선 과제, 침략 소식은 건강이 좋지 않은 늙은 영주를 더욱 더 쇠약하게 만들었다.

 

“저 야만족들 때문에...”

 

 어깨에 기댄 세나의 시선이 날카로워지자, 카를을 얼핏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본 세나는 뒤늦게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미안해.”

“괜찮아.”

 

 검은 머리에 검은 눈, 그들과 똑같은 외모를 한 카를은 몇 대 전에 서쪽에서 이주한 가문 출신이었다. 그들은 이민족의 침입이 계속될 때마다 센트리올 정계에서 많은 핍박을 받아왔다. 

 

 그런 관심이 그 영주의 아들을 중앙 정계로 불러들였고 그것이 세나와 카를의 관계의 시발점이 되었으니 카를은 오히려 그들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서쪽 평야를 바라보던 카를은 이내 조용히 선언했다. 

 

“5년 안에 돌아갈 거야.”

“5년?”

“응. 절대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 돌아갈게.”

 

 그는 센트리올의 정치에서 끊임없이 언더독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자신을 사랑해준 사람은 이 공국에서 제일 위에 있는 공작의 딸이다. 그녀의 옆에 있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준비가 필요하다. 

 

 카를은 그런 준비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설령 5년 동안 그녀의 옆자리를 비우게 되더라도, 그만큼의 고통을 감내할 준비를 할 것이다. 

 

 그녀의 마음이 변하지만 않는다면, 그는 영원히 그녀와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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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물 이렇게 시작하는 거 맞냐 얘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