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 https://arca.live/b/regrets/25364409

2편 - https://arca.live/b/regrets/25604421 

3편 - https://arca.live/b/regrets/25618974


"청소부, 새 목표가 정해졌다. 빅토르의 서점으로 가봐라."

"...알겠습니다. 파더."


파더. 

노보시비르스크를 점거한 범죄 조직의 두목.


4년전, 한겨울. 이반과 그 패거리들이 하나둘씩 조용히 실종되던 그 시기에 나타났다.

긴 자락의 갈색 코트, 그 속의 방탄조끼, 군데군데 보이는 암기와 권총, 뒤따라오는 몇명의 보디가드.

분명 행동대장인 이반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지역 잡배들을 마무리지으러 왔던가.

축 처진 수탉들과 다를 바 없는 동네 부랑자들 사이로 걷는 독수리같은 모습의 파더는

그 지옥같은 도시에서 날 끄집어내줄 유일한 희망으로 보였다.

그를 보자마자 달려나가 절했다. 날 고용해달라고 애원했다.


이반 패거리들의 머리통은 그의 구미를 당기는데 충분했었나보다.

나이프를 휘둘러보라고 했다. 쉬웠다. 이미 몇번 휘둘러 봤으니까.

총을 쏴보라고 했다. 쉬웠다. 소질이 있었나보다.

무고한 사람을 죽여보라 했다. 쉬웠다. 깡패만 골라 죽인게 아니니까.

고문을 해보라고 했다. 즐거웠다.  죽어가는 꼴을 보고있자니 난 살아있다는게 실감된다.

죽기 직전까지 갔던 만큼, 삶의 소중함을 깨달은 거겠지.


'청소부'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고, 킬러 일을 시작했다.

단련으로 더 강한 힘을 얻었고, 훈련으로 더 많은 기술을 배우고, 공부해서 지식을 늘렸다.

오로지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할수 있는건 전부 했다.

이제 노보시비르스크에는 '청소부'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암살로 조용히 처리하는 의뢰가 있는가 하면, 선전용으로 화려하게 죽이라는 위험천만한 의뢰도 있었다.

피튀기는 싸움, 스쳐지나가는 총알들. 만신창이가 되는 몸.

극단적인 위험에서 솟구치는 아드레날린, 살아남았다는 기쁨에 터져나오는 도파민.

목숨을 저울질하는게 이렇게 매력적이라니.

광기어린 쾌락은 발레리와 나눴던 추억을 덮어씌워갔다.


-'발레리의 사랑만이 유일한 행복이었는데.'

-'난 발레리에 대한 미련 때문에 살고자 했었는데.'

-'...'

-'이젠 모르겠군. 꼭 발레리를 찾아야하나?'


발레리를 찾는다는 원래의 목적은 잃어갔고, 내 손엔 오로지 그걸 위한 '수단'만이 남아있었다.

이젠 수단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렸다.

발레리도, 평범한 삶도,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손에 피를 묻힌이상, 소소한 행복들은 더이상 쥘 수 없다.

이젠 생사를 넘나드는 스릴만이 내가 원하는 것이다.






"늙다리, 예약한 책 가지러 왔다. 넘버는 B2-E5, 저자는 '우보르쉬크', 제목은 '지하 무도회'."

"어서오십쇼 손님. 예약하신 책은 여기. 이번엔  각별한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빅토르는 매번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한다.

이 망할 노인네는 겉으론 서점을 운영하는 늙은 노인이지만,

의뢰 내용을 소설책으로 둔갑시켜 우리에게 전달하는 연락책이다.



"부모님을 죽인 놈들과 연결점이 있다는건가?"


늙은 빅토르가 말하는 '각별한 이야기'라는건 항상 개인사가 관련된 이야기였지.

예전부터 파더에게 부탁하여 나와 관련된 '각별한 이야기'를 내게 모두 몰아달라 하였다.

몇번을 거듭한 끝에, 점차 놈들에게 가까워지고있다.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목표의 비서가 관련되있을 확률이 좀 있지요. 어쨋든 즐거운 복수가 되시길."

"부모님에 대한 복수같은건 내 알바 아냐. 내게 총구를 들이대려 했던 개새끼들은 어쨋든 다 죽여야하거든."


사실이다. 부모님이 죽은건 이젠 별 감흥이 없다.

그냥 그놈들은 내가 도망치지 않았다면 나도 죽였을테니까.

내게 총구를 들이대려 했던 놈이다. 다시 안나타날 이유도 없다.

당하기전에 먼저 죽인다. 이게 내 방식이다.




...

...

좋아. 모스크바로 여행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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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사, 살려주세요...이 사업에서 손 떼겠습니다. 그냥 목숨만 부지하게 해주십쇼.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며칠전까지만 해도 거들먹거리던 남자가 내앞에서 빌어댄다.


"그러게 왜 먼저 임자가 있는 사업에 훼방을 놓으셨나요? 얘들아, 시멘트 준비됐지?"

"예. 지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아, 안돼 안돼!! 제발 살려주세요!!!"


하, 간도 큰 아저씨야.

모스크바에서 날 제끼고 마약을 팔아?

하여간, 머리가 나쁘면 이렇게 끝장나는것도 모르고말야.

이 자리에 오르기 얼마나 힘들었는데,


금괴 8개로 변변찮은 사업이나 할순 없었어.

모스크바라고 해도, 어디든 위험한 곳이란건 변하지 않아.

내 몸을 지키려면 나도 좋지 않은 일에 몸을 담글 수밖에 없었으니까.

사업은 나랑 꽤 적성이 맞았나봐. 아님 운이 좋았거나.

상트페테르브루크에서 빵이나 팔던 여자애가,

고작 4년만에 모스크바에서 가장 큰 마약 조직의 리더에 오를지 누가 알았을까?

아무도 상상 못했겠지.

설령 그 똑똑한 올레크라고 하더라도.

...

...

보고싶어, 올레크...

나, 성공했어. 비록 깨끗하진 않지만.

부족한 것도 없어. 원하는건 다 가질 수 있어.

너만 빼고...


미안해.

죽는게 너무 무서워서.

도망쳐버렸어. 자살 시도조차 못했어.

한동안 복수도, 너도 잊고 살았어.


하지만 이젠 달라.

내가 반드시 그놈들한테 복수해줄게.

네 죽음을 기릴 수 있는 모든걸 할게.

그러니까.

단 한번만이라도, 널 볼수 있다면.

네가 아직까지 살아있다면, 더 성숙한 모습이 된 네 얼굴을 볼수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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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겁없는 마약상이 실종된 날로부터 며칠 후,

모스크바에서는 성대한 만찬회가 열렸다.


유사시 방공호로 사용되었던 만큼, 지하철은 튼튼했고, 전쟁이 휩쓸고 지나갔음에도 비교적 온전한 상태였다.

아름다운 건축양식으로 꾸며진 지하철역들은 파티를 열 장소로 안성맟춤이었다.


파르크포베디 역을 중심으로 모스크바를 지배하는 여러 조직들의 간부가 한데 모였다.

청부살인 집단, 무기 밀매 조직, 고리대금업자 집단 등등.

모두 마약 조직의 새로운 보스를 맞이하기 위해.


"마드모아젤의 사업 감각은 정말 대단하지. 이렇게 순식간에 보스가 되고말야."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하! 역시 모스크바의 모든 마약을 손바닥에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칭찬이 일색인 와중 청부업자 조직의 보스가 앞으로 나와 발레리를 환영했다.


"마드모아젤! 정말 축하합니다! 이렇게 빨리 보스에 오르다니 역시 대단한 수완입니다."

"고마워요, 표트르. 모두 당신 덕분이에요."

"송구스럽군요 마드모아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순간에 내 비서는 대체 어딜간건지. 사과드립니다."

"금방 나타나겠죠. 신경쓰지마요. 찾으면 제게 다시 인사라도 하러 오세요."

마드모아젤이라.

발레리는 자신이 그렇게 불리는 것을 좋아한다.

떠오르기만 해도 비참해지고 죽고싶어지는 과거를 접고 화려한 현재를 만끽하고 있는것 같으니까.

마드모아젤이라고 불리는것에 취해, 저 멀리 지나가는 창백한 안색의 남자를 보고도 의심없이 지나쳤다.



그녀를 위해 열린 자리에서, 발레리는 짧은 연설을 시작했다.


"친애하는 가족 여러분. 오늘 저는 모스크바의 기반을 다져놓은 우리 패밀리의 새로운 리더가 된것에 대해 이자리를 빌어 매우 행복..."




그순간,


-----탕!


총성과 함께 비서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청부업자 조직의 보스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뭐 뭐야! 어떤 새끼야!"

"보스! 보스가 죽었다! 청부업자 보스가 당했다!"


뒤이어 모든 전등이 꺼지고 다시 몇발의 총성이 울렸다.


"아아악!"

"씨, 씨발! 안보여!"

"역 밖으로 나가! 여기있으면 개죽음이야!"

"보스를 지켜라! 밖으로 안전하게 모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발레리를 포함한 모든 간부들도 허겁지겁 밖으로 나왔다.

살아나온 조직원들 역시 간부들을 에워싸고 보호하기 시작했다.


-'이제 괜찮은거지?! 안전한거 맞지?!'

-'누구야, 감히...'


발레리의 공포심은 상황이 안정되면서 점차 분노로 변했다.


"감히 내 파티를 망쳐! 누구야! 어떤 자식이야!"


그녀는 아우성을 지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가 자신의 데뷔극을 박살냈는지 미친듯이 찾았다.

그러던중, 유독 수상한 느낌을 풍기는 허름한 옷차림의 남자가 눈에 띄었다.


-'저놈이 틀림없어!!!'


그 남자는 멀지않은 곳에서 서둘러 자동차 문을 열고 있었다.

그녀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려 입을 떼려는 동시에,

남자도 그 시선을 의식했는지, 고개를 돌려 그녀쪽을 봤다.


-'......'

-'.....어?'


발레리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창백한 피부, 은빛 머리칼.

초점이 없는듯한 퀭한 눈동자.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는 섬뜩한 인상.


-'올레크...?'


발레리의 눈에 비친 그 남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올레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