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곡했다. 땅을 치고 통곡했다.

오열했다. 가슴을 치며 오열했다.


그의 시체를 눈앞에 두고 제정신을 차릴 수 없어, 울부짖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참담함만 가득했다.

그는 죽지 않았다는 착각에 어떻게든 가슴을 꾹꾹 누르고 심폐소생술까지 시도했지만 돌아오는 숨소리는 없었다.


거짓말이라고 해줘. 깜짝 놀래키는 장난이면 이제 그만해줘. 제발 숨 좀 쉬어 줘. 그의 몸을 흔들면서 애걸했다.

하지만 싸늘해진 시체는 대답이 없고, 떠나간 이의 혼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서서히 굳어가는 그의 몸을 안으며 한없이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왜 아무도 모르게 목숨을 끊어야만 했을까. 

떠오르는 의문과 절망 속에서 나는 어떻게든 그가 살아 돌아오기 만을 간절하게 바라고 또 바랬다.

그리고 그런 바램이 하늘에 닿아준 덕일까.


"반려를 잃은 슬픔, 그리고 하늘에 닿은 그 기도. 잘 보았습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중저음의 목소리, 집에 들이닥친 괴한으로 착각할 뻔했지만 주변에 괴한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감각적으로만 느낄 수 있는 기운이 눈앞에 존재하고 있다.


"누, 누구신가요?"


"저는 방관자입니다. 보이지 않는 차원 너머에 거주하며, 슬픔과 후회를 먹고 사는 빈곤한 방관자입니다. 본디 방관자는 개입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으나, 그대의 슬픔과 후회가 눈에 띄어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대에게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천사...? 천사님이신가요?!"


"무엇이라 불러도 좋습니다. 천사도 되고, 악마도 되며, 신이 되기도 하고, 한낱 거지가 되기도 하지요. 저의 존재를 명확히 하려 들지 않아도 됩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를 난해한 말들에 곤란한 감정이 들기도 했지만, 그 감정을 넘어서 남편을 살리고 싶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의 시체를 어떻게든 높이 들고, 멈추지 않는 눈물을 드러낸 채로 눈앞의 무언가에게 빌고, 또 빌었다.


"그럼 천사님...! 제 남편...! 제 남편을 살려주세요!"


"..."


"천사님!"


"미안합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는 건 불가합니다."


잠깐 보였던 희망의 불꽃이 다시금 빛을 잃었다. 그것에 대한 반동으로 몰려오는 절망감은 쉬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멈추지 않던 눈물이 더욱 거센 폭포처럼 흘러 내리고,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듯 아파온다. 허무하게 반려를 잃은 현실이 절망스럽다.


"흑... 으흑...! 흑...! 당신...! 왜 죽은 거야... 날 두고 왜..."


무거운 시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두 팔이 비명을 지르지만 어떻게든 견디고자 했다. 

하지만 그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진실은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가혹하지 않은가.

그의 시체를 끌어안고 있지만, 결국 그를 보내야 한다는 현실이 너무도 가슴 아플 따름이다. 정녕 이대로 그를 보낼 수밖에 없는 걸까.


"다른 방법은 있습니다."


"...네? 천, 천사님! 천사님! 대체, 대체 그게 무엇인가요?!"


"그대여, 진정하시길. 죽은 자를 다시 소생시키는 건 제 영역이 아니기에 불가능하오나.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이이는 목을 매단 채로 죽어있었어요! 어떻게 죽었는지는 안다구요!"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의 시체는 점점 차가워져 가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에게 분노했다.

후회스럽다. 그를 이렇게 허망하게 보내버린 것이 후회스럽다. 이야기라도 좀 더 나눠볼걸. 사랑한다고 말이나 좀 더 해줄걸.

그가 하고 싶었던 걸 해주면서 아쉬움 없이 지내게 해줄 걸. 나는 그에게 무엇 하나 준 게 없었다.


"하지만 그가 어째서 자살을 택하고 거기까지 다다랐는지는 대해서는 알 수 없죠."


"...읏!"


"그가 자살하기 직전까지 무슨 행동을 했는지, 어떤 말을 했는지.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 기운이 더욱 선명해진 것을 느낀다. 그 기운을 향해 손을 뻗어보지만 닿지는 않는다.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존재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천사인지 모를 존재는 방법을 제시해온다. 마치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처럼.

그럼에도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


"보여주세요."


"알겠습니다."


동시에 시야가 세피아 색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내가 안고 있던 그의 시체가 갑자기 멋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혹시 그가 살아난 걸까. 막연한 기대를 품어보지만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이게 무슨...'


나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세피아 색으로 물든 세계 속에서 입을 움직여도 봤지만 어떤 울림도 퍼지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한 경악과 동시에 모든 건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시체였던 그가 갑자기 역재생된 동영상을 보는 것처럼 붕 뜨더니 끈에 목이 매달리고, 한참을 그리 있었다.

그가 목을 매달고 오랜 시간 동안 유지되어 있었다는 반증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시체였던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괴로운 표정으로 되살아났다.

정확히는 되감아지는 시간을 보고 있을 뿐이기에 그는 단순히 죽기 전으로 돌아온 것일 뿐. 되살아난 것은 아니었다.


"아... 아아..."


과거를 엿볼 뿐이었으나 죽었던 그가 살아있는 모습을 보는 감격에 몸을 떨었다. 

단지 다른 시간 속에 존재하는 그에게 손을 뻗을 수 없다는 게, 그저 안타까울 뿐.


"대체 뭘 하는 거야 당신...? 대체 왜 목을 매단 건지 내게 가르쳐줘..."


그의 마음이 얼마나 몰려있었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하였을까. 그 괴로움을 함께 나누고 싶다. 이유도 모른 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허나, 그것이 무척 안일하고 추악한 위선이었음을 드러내는 진실이 날 선 비수로 변하여 내게 쏘아져 날아왔다.


"넌... 내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겠지."


"다, 당신?!"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두 눈이 동그랗게 뜨이는 그 순간에도 그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져갔다.


"너를 믿었던 내가 바보 같았어. 그래도 한 번만 더 믿어보자고 그렇게 나 자신을 다독였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되감기던 시간은 어느 시점에서 멈추고, 현실과 같은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듯 했다.

그 말인 즉 지금 보이고 있는 광경은 의미 그대로 과거 이 장소에서 벌어진 대화와 상황이 재생되고 있다는 것이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지만, 지금 겪는 순간이 너무나 생생해서 거짓이라는 판단은 들지 않는다.

대체 그가 자살한 순간에서 얼마나 이전의 상황인 걸까. 그걸 파악하기엔 제공되는 정보가 부족했다.


"내 월급을 꼬박꼬박 친정에 말없이 보낸 것도 이해할게. 그분들은 너라는 보물을 내게 넘겨주셨으니까. 상황도 좋지 않으셨고."


그는 세피아 색으로 물든 세계 속에서 누구를 상대로 하는지 알 수 없는 말들을 허공에 뿌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가 어떤 의미로 이 이야기를 꺼냈는지.


"상의는 해줬으면 싶었지만,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더라."


이어서 그는 대답했다.


"네 맘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 넌 왠지 내게 비밀을 들키는 걸 꺼려했으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비록 그 자리에 없었으나, 내게 전하고 싶었던 그의 말이었기에 나는 진심을 다해 받아들였다.

그깟 비밀 아무것도 아닌 거, 그에게 밝혔더라면 그는 지금도 숨을 쉬고 있었을까?

나는 내 마음에 솔직하게 자문해보지만 천천히 생각해본 결과, 대답은 아니오 였다.


"저번에 일이 바빠서 집에 일주일 동안 돌아오지 못했던 건 정말 미안한 생각 뿐이었어."


그는 당시 그 자리에 없었을 아내인 나에게 사과의 한마디를 꺼냈다.

미안하다니, 내가 더 미안한 걸 왜 당신이 미안해 해. 그런 생각만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지만, 그 탓인지 난 망각하고 있었다.


"내 형한테 부탁해서 가사 일을 좀 도와 달라 했었지 그때."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순간,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설마, 설마... 아니야, 아닐 거야. 그 이는 절대 몰라. 그때 있었던 일은 무덤까지 들고 갈 비밀이었는데...

불안감에 안절부절 못하는 동안, 그는 계속 허공에 말을 걸고 있었다.


"우리 형이 인기가 많긴 했어. 여자도 많이 사귀고, 돈도 잘 벌지. 성격도 뭐... 약간 모난 부분이 있긴 해도 좋은 편이고 말이야."


"아, 아니야... 그 사람은..."


"여자 경험이 많아서? 아니면 성격?아무튼 형은... 짝이 있는 여자를 유독 좋아했었지."


"아아악!"


비명을 질렀다. 듣고 싶지 않은 진실이 내 목을 향해 날을 드리우고 있다. 내 비명 소리에 모든 진실이 묻히길 간절히 기원했다.

하지만 세피아 색 세계에서 그는 어떤 방해도 없이 다른 시간 속에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난 두 사람을 믿었으니까. 애초에 별 일 없을 거라 생각해서, 고민도 없이 형을 집으로 보낸 건데."


심력을 크게 소진한 모습이다. 그는 크게 숨을 내쉬더니 슬픈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나를 바라보다니, 놀란 마음에 그에게 손을 뻗었지만 어쩐지 그에게 닿지 않았다. 그리고 곧 깨닫는다.

우연의 일치. 그가 날 인식해서 바라본 게 아닌, 단지 시선을 뻗은 방향에 내가 서있었을 뿐.

내가 보여서 바라보는 건 아닐 테지만 그의 심장을 옥죄는 듯한 시선에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일주일 동안 두 사람의 사이에 내가 끼어들 수 없는 무언가가 생겼다는 건... 한 눈에 봐도 알겠더라."


그렇구나. 그는 이미 알고 있었어. 나와 아주버님 사이에 있었던 더럽고 추잡한 일들을.

하지만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그 사람이랑 난 이제 아무런 관계도 아니란 말이야. 그 사람한테 벗어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아니라는 말만이 가슴 속에 메아리치고 있었지만 그에게 전달되는 일은 없었다.

내가 어떻게 괴로워하던 그는 멈추지 않는 시간처럼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나갔다. 그건 곧 자살을 위한 준비였다.


"일주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몰라. 그래서 네가 숨기고자 했다면, 아마 난 평생 몰랐을 수도 있었을 거야. 그렇지만... 그렇잖아?"


그는 허탈한 모습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삶의 의지가 완전히 꺾여버린 무기력한 자세. 

그의 모든 행동에는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살고 싶다는 의지가.


"형이 여자 잘 다루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너 또한 배덕감에 중독되었던 거지. 몰래 형과 메세지로 아양을 부리고, 자신의 알몸을 찍어서 보내고, 형이 원하는 주문은 알게 모르게 다 들어주고... 크흐흐..."


그는 말끝을 흐리더니 이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웃음을 흘렸다. 그건 여태 그에게서 보지 못했던 어두운 일면, 내가 만들어낸 불화.

평생 싫단 소리는 안 하고, 내 말이라면 곧 죽은 척이라도 해주는 헌신적인 그의 모습과는 완전히 이질적이고 광기 어린 얼굴이었다.


하지만 곧 그는 다시 얼굴을 피고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평온한 미소를 짓는다.

짧은 시간에 수도 없이 변하는 그의 표정은 심리적으로 얼마나 많은 감정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를 짐작게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나는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그가 무서운 게 아니라, 그에게 용서 받지 못할 상황이 선명히 그려지는 게 두려웠다.


"내 좆이 작다고 한 것도 인정할 게, 널 내버려두고 업무에만 미쳐 살았다는 것도 인정할 게, 가정에 대해 무관심 했다는 것도 인정할 게."


후우, 하아. 그는 크게 숨을 두어 번 내쉬더니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 순간부터 나는 귀를 틀어 막고 싶어졌다.


"형한테 미쳐 산 것도 이해할 게, 나한테 컵라면이랑 식은 밥을 내준 것도 이해할 게, 밤마다 친구 핑계로 몰래 형을 만난 것도 이해할 게."


"..."


"..."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나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가 나열한 나의 죄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무거웠다. 단순히 죄를 범했다면 차라리 나았을 지도 모른다.

어느덧 내 마음에서 떠오르는 한 문장. 나는 그 문장을 애써 회피하고자 했지만, 곧 이어 그가 내뱉은 한마디가 내 마음을 후벼팠다.


"그래... 다 이해해..."


"당신..."


"그렇지만, 그치만 말이야? 그치만!"


격앙된 그의 목소리가 집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의 눈가에 흘러넘치는 눈물을 보며 나도 눈물을 흘렸다.

그의 마음에 나는 비수를 꽂았다. 그의 마음을 살해했다. 그를 배신했다.

그래, 나는 그를 배신했던 거다. 배신했음에도, 이기적이었던 나는 그와의 안정된 삶을 원했다. 그야말로 이율배반적이다.


"흐흐... 크흐흐흐... 그치만 말이야...!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 건... 이해를 못하겠어!"


"...아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어떻게 계속 살고 있는 건지. 그 말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내 형에게 대답할 수 있는 건지. 그걸 단지 형의 좆대가리에 한 번 박혔다고 바로 내뱉는 게 너무 이해가 안돼. 잠시 애태운 걸로도 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욕하고 매도하고 무시하고... 형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개처럼 짖고, 신음 소리를 내고, 정액을 먹고, 포상으로 다시 좆에 꿰뚫리고... 이게... 이건... 그냥... 하하하..."


점점 치밀어오르는 감정에 이성이 잠식 당한 모습이었다. 횡설수설하면서 끝내 말을 잇지 못하는 그의 모습은 그저 처량하기만 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보지만, 닿지 않았다. 애초부터 닿을 수 없었다. 이미 우리 두 사람은 너무나 멀어져 있었다.

그가 스스로 멀어진 게 아니라, 내가 밀어냈기에 멀어진 것이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


"하아... 하아... 솔직히 말이야. 널 몰래 뒤따라가는 내 스스로에게 회의감이 든 적도 있었어."


"..."


그렇구나. 들킬 리 없다 생각하고 벌였던 어리석은 행위들을 이미 그는 생생히 지켜보고 있었다.

밤 늦게 아주버님의 호출을 받고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한 탓이겠지. 아니면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포자기에 빠졌을 수도 있고.

이젠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난 이미 역겹고 추악한 년이니까. 아까까지만 해도 그 이가 죽은 모습에 슬퍼하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슬퍼했다. 분명히 슬퍼했다. 그러나 그 슬픔조차 스스로 믿을 수가 없다. 난 미쳐버린 걸까?


"널 뒤따라가서 뭘 하겠다고, 따질 수는 있겠냐고. 스스로 생각해봤는데 그건 못할 거 같더라... 하하."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힘없이 웃었다.


"그래서 그런가... 너무 힘들어. 사는 게 의미가 없어. 네가 형의 몸에 깔려서 좋아 죽겠다는 듯이 소리를 지르는 걸 직접 보고 듣게 되니까..."


"미안해..."


"후회스러워..."


엇갈렸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던지는 한마디가 우연처럼 엇갈렸다.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사과했다. 닿을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는 후회했다. 스스로에 대해서 일까. 아니면 나에 대해서 일까. 분명 후자일 거다. 나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행복했을 것이다.

나 같은 더러운 년에게 속고 상처 받아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의 절망이 얼마나 깊고 어두울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나는 그저 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유서라도 남길까..."


그는 아무도 없는 허공에 울분을 토해낸 것이 부끄러웠는지 조금은 침착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아까와는 달리 혼잣말을 내뱉으며 준비를 끝마치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목을 매달기 위한 준비가.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자에 올라섰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목에 고리 모양으로 묶인 끈을 걸었다.

이대로 발을 박차는 순간, 그는 천천히 질식사 할 것이다. 처형대처럼 간단히 목이 부러져 죽는 게 아닌 것이다.

끝없이 괴로워 하고 고통만 가득한 죽음. 그것을 안식이라 부를 수는 없겠지.


"...병신아, 가자."


누구를 말하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 말 만을 남긴 채, 의자를 걷어찼다.

그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던 나는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말았다.


"...흑, 흑흑."


슬퍼서 울고, 계속 운다. 그가 괴로워하는 소리가 들린다. 어떻게든 산소를 요구하는 몸이 발버둥을 친다. 그 난리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서서히 느려지는 몸부림 소리, 숨을 쉬지 못하기에 소리조차 내지 못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계속 눈을 가렸다.

마치 그의 죽음을 방관하는 것처럼.


"후회합니까?"


천사의 목소리다. 아니, 단순히 천사라고 믿고 싶었던 자의 목소리였다. 그는 방관자. 단지 상황을 지켜보기만 할 뿐인 자였다.

그는 약속을 지켰다. 그 이가 죽기 전에 있었던 일을 생생하게 그리고 잔혹하게 내 눈에 새겼다.

그리고 그가 물었다. 후회하냐고, 후회하지 않을 리가 없다.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단호함이 느껴지는 질문.

저의가 보이는 물음에 화가 났지만,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오직 하나 뿐이었으니까.


"후회해요..."


"무엇 때문에 말입니까."


"그걸 꼭 물어보셔야 알 수 있는 건가요?"


"저는 방관자입니다. 보이지 않는 차원 너머에 거주하며, 슬픔과 후회를 먹고 사는 빈곤한 방관자입니다. 그렇기에..."


"됐어요! 당신은 제가 후회하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 아닌가요? 눈물을 흘리고, 땅을 치며 통곡하고, 잃은 남편을 그리워 하면서, 끝내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비관하며 평생 후회하는 것만 바라고 있는 게 아니냐고요!"


방관자의 말을 끊고, 나는 터져 나오는 분노를 그에게 쏟아냈다. 감정적이고, 논리도 없다. 그저 내 마음에 새겨진 상처에 울부짖고 있을 뿐이었다.

보이지 않는 기운이 눈앞에 있다. 그 기운은 마치 흡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침묵이 이어진다.


"...이제 볼 일은 다 봤다 이건가요?"


"그대여. 미안합니다. 혹시 설명을 요구하십니까?"


"그딴 거 필요 없어요. 당신에겐 그저 진절머리만 나니까요... 하지만... 남편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준 건 고맙네요."


이는 솔직한 내 마음이었다. 방관자라 불리는 이 정체불명의 기운을 쫓아내고 싶었지만, 반대로 이 자 덕분에 무엇을 속죄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한평생 그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더라도 부족하겠지. 나는 그를 간접적으로 살인한 것과 같았고 혹은 더 질이 나쁘기도 했으니까.

그 이가 죽기 전까지 보이던 얼굴이 선명히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터졌다. 내게 울 자격 같은 건 없는데도 말이다.


"그대여. 혹시 남편을 되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제 그만 저 좀 놔주세요. 그 이를 더 욕보이고 싶지 않으니까."


또 다시 들려오는 악마의 달콤한 꼬드김. 나는 당장이라도 그렇다고 대답할 뻔 했지만, 가까스로 침착을 연기할 수 있었다.

찰나에 수십 가지의 생각이 오고가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을 내놓았다고 생각했다.


"과거로 돌아가서, 남편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으십니까?"


"대체 무슨 낯짝으로 다시 남편을 만나라는 건가요?!"


그를 파멸로 몰아넣은 내가 어떤 자격으로 그와 마주할 수 있을까. 가자마자 울음이라도 터트리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애초에 울 자격도 없다. 내게 남은 건 오직 그에게 속죄하며 살아가는 것 뿐이다. 이 몸뚱아리가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그대가 본 것은 남편된 자가 목숨을 잃기 전의 광경일 뿐. 제안의 의미는 그대가 더 먼 과거로 가는 것입니다."


"더 과거로 가다니... 무슨 의미죠?"


"시점은 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대가 잘못된 선택을 하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건 가능합니다."


"아주버... 아니, 그 개새끼를 보지 않을 수 있는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과거로 돌아가 한 평생 그를 위해 살 것이라 맹세했다. 아니, 그 개새끼와 마주해도 절대 엮이지 않을 거야.

잘못된 선택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어.


"그대의 의지에 달렸습니다. 과거로 돌아가서 죽은 남편과 다시 재회할 수도 있고, 혹은 다른 남자를 선택할 수도 있으며, 혹은 누구도 선택하지 않을 수 있지요. 정해진 미래라는 건 없습니다."


"보내주세요. 과거로."


"신속한 판단과 선택. 현명하군요."


보이지 않는 기운이 마치 미소라도 짓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기분이 나쁘지만 지금은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 방관자라는 놈은 내게 새로운 희망을 줄 수도 있는 자니까. 가능한 빨리 맞춰주고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느 시점에 도달하게 될까. 적어도 그와 빨리 만날 수 있는 시간대였으면 좋겠다고 여겼다.

정말 한없이 이기적인 생각이었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빌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과거일 겁니다. 아니면 새로운 현재가 되겠군요. 모든 미래는 그대의 선택과 의지에 따라 변화할 겁니다. 육체 또한 과거의 것으로 돌아갈테니 걱정하지 마시길."


"혹시 당신도 따라오는 건 아니겠죠?"


"...저는 방관자 입니다. 보이지 않는 차원 너머에서 방관자들은 당신을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따라오지는 않는다는 걸까. 아니면 처음 방관자라는 자와 마주했을 때처럼 간절하게 바라면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걸까.

어느 쪽이던 나는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바라는 건 죽었던 남편과의 아름다운 재회지. 방관자라는 놈들의 장난감이 되는 게 아니니까.

각오를 다지고, 나는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어딘가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운이 느껴지고 동시에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새? 갑자기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다니? 그런 의문이 듦과 함께 눈을 뜨자, 전혀 다른 장소에 서있는 내가 있었다.


"어? 어라? 여긴..."


♪~ ♪♪~ 무언가 그리운 벨소리가 울려 퍼진다. 내가 있는 곳은 다름 아닌 교실. 무려 10년 전까지 내가 재학하고 있던 학교였다.

이름도 기억났다. OO고등학교, 나는 성적 우수, 행동 단정으로 한 반의 반장을 맡고 있었다. 무려 3년이나 연속으로.

게다가 눈을 감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서있었는데, 지금은 책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손에 연필이 쥐어져 있고, 책상엔 교재가 펼쳐져 있는 걸로 보아 공부중이었던 것 같다. 그럼 지금은 대체 언제지?


"저, 저기."


"응? 반장 왜?"


너무 갑작스레 되돌아온 학창 시절에 얼떨떨할 기분으로 주변에 지나가던 친구 한 명을 붙잡았다.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던 얼굴이었지만 어쩐지 이름은 떠오르지 않아서 어색하게 질문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오늘이 몇 월, 며칠이야?"


"응? 갑자기? 잠시만... 오늘 6월 19일 이네."


"아, 그렇구나. 고마워!"


"아니야 뭘, 이 정도 가지고. 반장도 가끔 날짜를 헷갈릴 때가 있구나."


웃으면서 떠나는 여학생의 모습을 기억에 담으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계가 있어서 살펴보니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점심시간이었던 걸까? 아마 점심을 먹자마자 바로 교실에 와서 공부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이렇게 부지런한 학생이었나...?

아무튼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섰다. 문 위에 걸린 팻말을 보니 1-3 이라는 숫자가 적혀있다. 1학년 3반. 파릇파릇할 나이군.

순식간에 17살 여고생의 몸으로 돌아오니 기쁜 건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이 상태로 남편에게 고백하면 그 이도 기뻐할 것이다.

그런 행복한 상상하며 그가 지내고 있을 3학년의 교실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사겨라! 짝! 사겨라! 짝!"


"야! 뜸 들이지 말고 대답해 빨리!"


"선배님 빨리 대답해요~!"


웅성대는 소리가 무척 커서 시선을 확 끌었다. 많은 사람들이 재미난 구경이라도 하듯 싱글벙글한 얼굴로 모여있었다.

무슨 재밌는 화젯거리길래 학생들이 이렇게 모여있을까. 궁금해진 나는 사람들이 모인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많은 인파로 인해 사람으로 벽이 세워진 상태라 비집고 들어가기도 힘든 상황에서 나를 알아본 학생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반장? 공부하고 있더니 너도 소문듣고 온 거야?"


"응? 무슨 소문?"


점심시간 시점에 과거로 돌아온 내게 소문은커녕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다.

눈앞의 학생도 내가 소문을 모르는 것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아무래도 공부벌레라는 인식 탓인지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다.


"공부에만 빠져 사니까 모를 수밖에, 아무튼 1학년 4반에 배우 하는 여자애 있잖아."


"배우...? 어, 잠시만 기억날 것 같은..."


"공부만 하다 보니 TV도 안보고 사는 모양이네. 그 요즘 대박난 드라마 하나 있는데 거기 주연이 그 여자애거든."


아, 듣다보니 대충 기억이 날 것 같았다. 

별다른 인연은 없었고, 드라마를 히트 시킨 주역으로 미디어를 타서 크게 출세한 학생 여배우로 기억하고 있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스케줄이 빡빡해서 최소한의 출석만 하고 졸업한 학생이었다. 그러니 인연도 없고, 기억도 흐릿할 수밖에.

그나저나 그 여자애가 소문의 주역이라면 설마 지금의 상황은 그 여자애가 원인이라는 건가?


"설마 걔가 누구랑 사귀기라도 한 거야?"


"아니, 정확히는 어떤 남자 선배님이랑 사귀겠다고 점심 시간 전부터 벼르고 있었어. 주변 애들이 다들 놀래서 소문이 학교에 전부 퍼진 거고."


"아아... 그렇구나. 그거 참 희한하네. 한 번 제대로 봐야겠어."


미디어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인물이 이성과 사귀겠다고 말한 거면 그 파장이 엄청날 것 같은데.

아마 지금쯤이면 그녀의 매니저가 골머리를 싸매고 있지 않을까? 연예계의 정확한 사정은 나도 모르지만 그녀는 고단한 길을 선택한 모양이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욱 호기심이 치밀었다. 애초에 지금의 상황은 내가 기억하는 한 과거에는 없던 일이었으니까.

아무래도 상황을 더 자세히 파고들어야 할 것 같아 인파 속을 비집고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와아아아아!"


"꺄아아아악!"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무언가 미묘하게 불안한 예감이 든 나는 억지로 틈을 만들어 들어갔다. 주변에서 짜증내는 소리를 내긴 했지만 내겐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이 인파를 끌어모을 정도로 화제를 부르는 여자가 대체 누구를 불러내서 고백을 했는지 확실하게 알아두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 겹, 두 겹, 세 겹,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의 틈을 넘어서 중심까지 들어서고, 나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보았다.


"음... 으음..."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서로의 입술을 맞대고 있는 모습, 말 그대로 키스였다.

키스하고 있는 여자아이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17세라는 아직 앳된 나이에도 성숙함이 드러나는 날렵한 턱선이 매혹적이었다.

코는 오똑했고, 피부는 티 없이 깔끔했다. 키스에 집중하고 있는 지 두 눈을 감고 있지만 속눈썹 또한 선명하게 드러나 매력적이다.

그래, 여자아이만 본다면 문제는 없었다.


"다, 당신..."


나도 모르게 과거의 호칭으로 그를 부르고 만다. 

많은 사람들의 환호성 속에서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키스에 집중하고 있던 그의 눈이 슬그머니 떠지더니 나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무뚝뚝하고, 냉랭하며, 언뜻 보면 적의가 가득 담긴 그의 시선 속에서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이 또한, 과거로 돌아왔노라고.


"서, 선배..."


"놀랐어?"


두 사람은 키스를 마치고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눈을 맞추었다. 그는 어느새 나의 존재는 아랑곳도 않고 있었다. 

그것의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무시, 그가 나의 존재를 의식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였다. 그것을 엿본 순간. 나는 깊고 짙은 절망이 사무쳤다.


"다, 당연히 놀라죠! 갑자기 키스를 하면 어떡해요?! 저, 저... 잘 나가는 연예인인데! 비싼 입술인데!"


"하하... 미안해. 그래도, 고마워... 나 같은 놈을 좋아해줘서."


"놈이라뇨? 선배랑 사귀는 저는 뭐에요 그럼! 이거 때문에 매니저한테도 억지 부렸고, 부모님한테도 억지 부렸는데. 아마 집에 돌아가면 저는... 꽥!"


"하하하!"


"푸하하하!"


그녀가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농담을 던지자 주변이 전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연기에 모두 흐뭇한 얼굴로.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도리어 울음을 터트리고 싶었다. 화를 내고 싶었다. 거기에 있어야 하는 건 나라고. 그에게 고백하려던 건 나라고.

자리를 빼앗긴 상실감에 몸을 떨었다. 당장이라도 박차고 들어가서 그의 옆자리에 서고 싶었다.


"그럼 저희 오늘부터 1일 맞죠? 그쵸?"


"어휴, 세상에. 내가 살면서 오늘부터 1일이라는 말을 듣게 될 줄이야."


"오예~! 선배랑 저는 오늘부터 1일! 꺅!"


그렇게 말하며 그에게 안기는 여자아이의 모습을 나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흐뭇하게 웃으면서 그녀를 품에 안고 모두에게 양해를 구했지만 오직 나에게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이게 내가 선택한 미래일까? 내 행동이 불러온 업보일까? 그를 배신한 댓가이자 형벌인 것일까?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떠나지 못했다. 그 이와 여자아이가 서로 행복한 모습으로 자리를 떠나고, 사람들도 하나 둘 씩 흩어지는 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말없이 그 자리에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 ♪♪~ 점심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벨이 울려 퍼진다. 소란스러웠던 주변은 곧 조용해졌다.

나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그대여. 바라던 미래는 찾으셨습니까?"


"..."


"과거로 돌아온 게, 그대 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군요. 방금 일은 애석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아직 미래는..."


"닥쳐."


또 다시 나타난 방관자. 하지만 더는 그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을 거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투명한 기운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는 나.

하지만 느껴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형체도 없고, 질량도 없다. 그러니 주먹을 아무리 휘둘러봤자 닿는 게 있을 리 없다.

그래도 나는 주먹을 날렸다. 팔을 휘둘렀다. 그렇지 않으면 가슴 속에 피어오르는 불길이 나조차도 집어 삼킬 것만 같기에.


"꺼져! 너희 방관자란 자식들은... 그저 내가 분노하고, 슬퍼하고, 절망하고, 끝내 후회하는 모습을 먹이로 삼는 관음증 환자들에 불과해!"


"말이 심하시군요. 저는 그대를 위해..."


"거짓말도 작작해! 내가 아니라 너희를 위해서 잖아! 그가 죽기 직전의 과거를 보여서 나의 죄업을 까발리고, 이제는 그를 과거까지 끌고 와서 나를 망가뜨리려 하고 있어! 틀림없다고! 너희는 그냥 괴물이야! 사람의 괴로움을 먹고 사는 추악한 괴물!"


"그대의 오만방자함도 더는 지켜볼 수 없군요. 그대를 위해 시간까지 되돌려준 저희에게 감사는 커녕,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멋대로 분노하고 저희에게 화풀이를 하시다니. 무척이나 실망스럽습니다."


방관자라는 놈은 퍽 아쉽다는 말투였다. 마치 나를 조금 더 요리했으면 더욱 완벽한 음식이 되었을 것이라는 느낌의 아쉬움이었다.

애초부터 이 자식들은 나와 그를 다시 이어줄 생각이 없었던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가 저런 여자아이와 사귀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 그럴 것이다. 나를 억지로 절망시켜서 그 감정을 먹고 싶을 뿐인 저질인 놈들. 이들의 속셈은 모두 파악했다.


"너희들이 아니었다면 그 이가 나를 무시할 리가 없어. 나를 보고도 단 한마디도 안 했을 리가 없어! 나를 그렇게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 보지 않았을 거라고! 맞아! 맞잖아?! 너희들 때문이야! 너희들이 내 남편을 죽인 게 틀림 없다고!"


"멍청하긴."


"...뭐?"


"오만방자함도 더는 지켜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대는 본인의 잘못을 전혀 반성하지 않는 군요. 남편에게 잘해주기만 하면 용서 받을 수 있을 거라는 달콤한 망상에 빠져서 멋대로 상황을 왜곡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용서는 누가 하는 겁니까? 그대가 하시는 겁니까? 남편된 자를 너무 바보로 보시는 게 아니십니까?"


이것들이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나를 속일 때는 언제고, 달콤하게 속삭일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뻔뻔하게 나를 몰아 붙이는 거지?

내가 반성하지 않는다고? 내가 멋대로 상황을 왜곡하고 있다고? 멋대로 분노하고, 화풀이를 하고 있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란 말이야!


"난 그의 아내야! 그와 오랜 시간 연애했고, 오랜 시간 함께 지냈고, 결혼도 했어! 그에게 반지도 받았어! 반지도... 반지? 어...?"


"그대가 남편 된 자와 함께 했던 미래는 사라졌습니다. 그대에겐 지금이 바로 현재. 과거의 물품인 결혼 반지 또한 그대가 버린 미래와 함께 사라진겁니다."


"...무슨 소리야. 대체 이게 무슨... 나는 그 이와 함께하는 미래를 선택하려고 온 건데...!"


"그대는 남편된 자와 함께 하는 미래를 선택하겠다고 하겠지만, 함께한다는 건 상호 간의 합의가 있어야만 가능한 선택입니다. 그런데 그대는 어떤 상의와 합의도 없이 멋대로 본인의 미래를 망상하고 그 미래를 확신했죠. 이게 오만하지 않다고 하면, 무엇이 오만하다는 겁니까? 그러면서 그대는 방관자에게 분노를 쏟아냈습니다. 억지를 부리셨습니다. 이런 대응을 받고도 도움을 드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무슨 소리야. 정말로 이해를 못하겠어. 나랑 그는 운명공동체가 아니었던 거야? 그가 나를 버리는 미래를 선택했단 말이야?

그럴 수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사실이 아니야. 이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어. 어떻게 저런 뻔뻔한 거짓말을 할 수가 있는 거지?

오만한 게 아니야. 억지가 아니야. 이건 당연한 거야. 그와 나는 결혼했던 사이라고. 죽어버린 그 이를 구하려고 과거까지 온 거란 말이야.


"그리고 미래는 사라졌다지만, 기억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대의 남편이었던 자는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기... 억?"


"그대가 반려를 허무하게 잃었던 기억이 있듯이, 그대의 남편이었던 자도 그대가 자신을 배신했고, 다른 남자와 몸을 섞었던 사실을 잊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아... 아아..."


"그 기억으로 인해 죽음까지 내몰린 인간이, 그 기억의 근원이 되는 대상에게 관심을 주는 일은 99.9% 확률로 있을 수 없겠죠."


그 말까지 듣고 난 뒤로 더는 사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뭐가 있을까.

도무지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만은, 이것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이런 건... 내가 원했던 현실이 아니야..."


"..."


"미안해... 당신... 미안해..."


왈칵 터지는 눈물, 떨리는 손과 발, 허물어지는 신체. 이윽고 현실을 깨닫고, 나는 울부짖었다. 절망했다. 후회했다.

용서를 구하고, 그와 함께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산산이 부숴지고, 내게 남은 건 차가운 현실 뿐.


"그대의 후회는 그럭저럭 괜찮은 맛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대가 더욱 짙고 훌륭한 감정을 키워낼 수 있길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방관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멋대로 떠났다. 선명하게 느껴지던 기운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공허함 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를 찾더라도 내가 바라는 미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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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줘서 고맙다.

앞으로도 좋은 글로 찾아올 수 있도록 할 게.

사실 1달 동안 쓰고 지우고 했던 글이 있었는데 3만자 정도 쓰다가 지금 봉인중이다.

아무래도 후회물보단 다른 주제의 글이 될 거 같아서...

고민이 많아질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