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써놨다가 그냥 묵혀놓고 있었는데 챈에 관련 글이 올라와서 이참에 나도 의견을 올려본다.




173을 처음 쓴 놈은 뭔 생각이었을까.

그 길지 않은 글에 담긴 의도는 뭐였을까.

SCP 재단에 대해서 전혀, 조금도, 아주 티끌만큼도 모르던 시절로 돌아가보자.

그런 사람이 173을 읽으면 무슨 감정을 느낄까.



정답은 개씹소름이다. 아주 강렬한 소름을 유발하는, 파괴력이 있는 글이었기에 파생되고 파생되어 지금의 재단을 만들 수 있었겠지.

그러니 173 문서는 글을 구성하는 요소와 전체적인 설계를 다 뜯어볼 필요가 있음.



특수 격리 절차가 설명보다 앞에 있는 이유가 뭘까?

위키 어디선가 본 안내 페이지에서는 이렇게 설명함. 가물가물하지만 한 서너개 정도 읽었는데 설명은 대충 비슷했음.

"재단은 대상을 격리하는 단체이기 때문에, 직원 편의나 업무 효용성 등의 이유로 격리절차부터 적습니다."

근데 이건 173 한참 이후에 붙은 설명인데다가 썩 납득이 가는 설명도 아니야.

아니 솔직히 뭔지부터 설명하고 나서 어떻게 격리할지 설명하는 게 상식이잖아. 대체 뭔지를 모르니까 격리법을 읽어내려도 계속 물음표 상태임.

뭔소린지도 모르겠고 지루해서 특격차는 대충 훑고 설명부터 읽는 경험 다들 해보지 않았음?

근데 처음 173 써올린 사람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지금의 포맷을 만든 건 걘데 그냥 생각없이 쓴 걸까?



당연히 이건 독자에게 특격차부터 읽히면서 미지에 대한 궁금증과 두려움을 극한까지 뽑아내려는 장치임.

"아니 이게 대체 뭐길래 이렇게까지?"
"얘는 어떤 놈이길래 이런 해괴한 방법이 필요하지?"

뜬금없고 기괴한, 초현실적 분위기의 절차를 삽입할수록 효과는 강해짐.

그러니까 173의 "반드시 세 명 이상이 들어가야한다." "두 명 이상의 인원이 계속 시선을 마주하고 있어야한다."는 훌륭한 예시라고 할 수 있음.

4chan 호러 스레드에서, 173이 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읽으면 존나 흥미진진할 수 밖에 없잖아. 왜 자꾸 시선을 마주치래? 무섭게.



특히 173이 처음 올라왔을 땐 Special Containment Protocol이라는 이름부터 재단의 존재, 유클리드라는 등급명, 173이라는 일련번호조차도 미지의 것 투성이였음.

뭔가 더 있을 거 같고, 그래서 더 파보고 싶은, 그 살짝 두려우면서도 가슴 떨리는 감정을 유발하는 게 글쓴이의 의도였다는 게 명확해지지.

글에 나폴리탄으로 도배를 해놓은 거야. 아주 치밀하게. 이걸 이해 못하고 그냥 남들이 특격차 먼저 쓰니까 나도 먼저 써야지 하면 지루해지는 거임.



더 나아가서는
[데이터 말소]같은 장치도
O5 위원회의 존재도
이상한 이름을 달고 있는 기동특무부대도
은근슬쩍 이름이 언급되기 시작한 요주의 단체들도
결정적으로 SCP 재단이라는 존재 자체도 그런 맥락에서 창작된 거임.

뭔가 있을 것 같지만 그게 뭔지 아무도 몰라서 좋았던 거지. 베일과 빈칸의 미학. 특격차도 같은 맥락에서 작동함.



구체적인 정보가 없어야 돼. 얘는 왜 이렇게 생겼지? 기원이 뭐지? 정체가 뭐야? 얘네는 뭐하는 집단이지? 이런 부서는 왜 있지? 재단은 뭐하는 놈들이길래 이런 짓을 해?

이런 의문 투성이 상태가 특유의 맛을 내주고 있었음. 그러니까 당시 사람들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던 거임.


날고 기어도 재단의 근본은 나폴리탄이라는 것을. 그 핵심 재료가 없으면 아무 맛도 안 나.


이걸 이해하고 써야 좋은 특격차, 나아가서 좋은 SCP를 창작할 수 있다고 본다.




근데 요즘 재단은... 난 좀 불만이 있어.

사실 이 글도 요즘 재단에 대한 불만점을 쭉쭉 쓰다가 곁가지로 들어간 특격차 이야기를 발췌해서 업로드하는 거임.

그 불만 토로글을 다 업로드할진 좀 생각해봐야겠음. 잘 쓰면 의견 교환의 장이 될 수도 있지만 그냥 생때 개지랄이 될 수도 있잖아. 만약 올린다면 좀 더 다듬어서 오겠음.




특격차 얘기를 좀 더 해보자면 앞서 설명한 나폴리탄스러움을 강하든 약하든 넣어주는 게 베스트라고 봄. 물론 존나 어렵겠지.


아님 그냥 간결하게 써서 빨리 설명으로 넘기는 것도 방법이라고 봄. 모든 문서에 장황하고 매력적인 특격차를 강요할 순 없잖아. 짤막하게 넘기는 게 최선인 문서도 많음.


그리고 정 안 될 것 같으면 설명 뒤에 특격차를 넣는 파격적인 대안도 필요하다고 봄.

나는 이 지루한 특격차의 딜레마를 꽤 심각하게 보고 있어서, 이런 방법도 언젠간 필요해지지 않을까 싶음. 이것도 이것대로 색다른 재미를 줄 수 있겠지.


모바일로 써서 가독성 이상할 수 있음. 줄을 몇 번 바꾸는 게 좋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