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 인증)

6월에 있었던 즉흥 경연에 출품해서 감사하게도 1위 먹은 작품 쓴 사람임.

재단챈은 한위키랑은 다르게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자기 작품이나 기본적인 작법에 대한 글을 올릴 수 있는 것 같아 좋았는데 이 참에 나도 후기 써볼까 싶어서 찾아왔음.


http://scpko.wikidot.com/3day-writting-hub - 경연 페이지 링크(다른 출품작들도 퀄리티가 상당하니 읽어보는 것을 권함)

http://scpko.wikidot.com/scp-755-ko - 본인 작품 링크(안 읽어보신 분은 스크롤 내리다 스포일러 당하지 말고 일단 읽어보셈)


아마 주제 5개 처음 공개되었을 때 나 포함해서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 다 벙쪘을 거라 생각함. 물리적 실체가 있는 것과 없는 것, 명사와 동사,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들이 뒤죽박죽 섞여있었으니까. 주제들 하나하나를 따로 놓고 봐도 매우 애매모호했을 뿐 아니라 그 다섯 가지를 서로 연결짓기가 참 난감했었음. 물론 주최자는 그걸 예상하고 주제들을 선정했겠지만.


참여한 사람들마다 가장 집어넣기 어렵다고 느낀 주제가 따로 있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최종보스는 '숭앙하는'이었음. 애초에 '숭앙하다'가 현대에 일상적으로 쓰이는 표현이 아닌 것도 있지만 얘가 다른 주제들과 가장 따로노는 놈임. '욕설'이랑 '가시'라는 단어는 뭔가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느낌이 있고, '구체화'랑 '각도'는 긍정/부정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그런 부정적인 인상을 따라가게 되어 있는데, 이 시점에서 작가가 연상하는 아이디어는 대체로 다크한 쪽으로 흘러가게 됨(출품작들 읽어보면 알겠지만 대체로 누가 죽는다거나 심리적으로 상처를 받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톤이 어두운 이야기가 많음).


근데 여기에 갑자기 '숭앙하는'이 끼어드는 거야. 얘는 긍정적인 인상이 너무 강한 나머지 거의 엄숙함까지 느껴지는 단어임. 심지어 네이버 국어사전에 '숭앙'이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예문도 막 "마을의 풍습을 바로잡고......" 이런 건데, 얘를 앞서 틀을 잡아놨던 부정적 인상의 아이디어에다가 집어넣으려고 하면 당연히 설계가 어그러지지. 주제 완용에 성공한 SCP 4개는 '이렇듯 서로 충돌하는 주제들을 어떻게 한 SCP에 자연스럽게 집어넣을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 나름대로의 답을 내놓은 작품들이야.


사실 고백하자면 나는 일종의 편법으로 그 문제를 회피함. 문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다른 주제들은 다 SCP 자체의 변칙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숭앙하는' 혼자 딴 데서 튀어나옴. 그렇게 분리시켜 놓은 덕분에 암울한 톤으로 계속 진행되다가 마지막에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결말을 만들기는 편했지만.


일단 그렇게 '숭앙하는' 혼자 다른 데 빼놓기로 결정하니까 나머지는 빠르게 진행됐음. "자신들이 숭앙하는 어떤 요소(성품? 미덕? 뭐 그런 거)를 찾아 인류를 시험하는 외계의 존재"라는 설정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그러면 '시험'이 될 만한 어떤 사건이 있어야겠지. 가시와 모욕적 표현이 관여된 K급 대량 학살 사태를 만드는 것으로 '시험' 부분은 패스. 그리고 그 중에 시험을 통과해 숭앙의 대상이 되는, 말하자면 서사의 주인공이 하나 있어야 했음. 또 주인공이 시험을 통과하려면 일단 시험을 받아야 하니까, 주인공을 폭력적 충동에 굴복하기 직전까지 몰고 갈 정도로 주변 상황이 극단적이어야 했지. 미래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그런 극한 상황을 조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이면서, 동시에 주인공이 자신에게 주어진 시험을 극복하게 하는 일종의 동기 역할 또한 하는 캐릭터야. 

(등장인물이 실질적으로 2명뿐인 이야기에서 1인 다역은 어쩔 수 없는 법) 


사실 원래는 미래를 단순한 수동적 인물상이 아니라, 좀 더 입체적이고 능동적인 반동인물로 넣을 계획이었는데, 그렇게 하다가 잘못하면 글이 장황해지기 쉽고, 시간은 72시간밖에 없고, 또 그때 위키닷이 반쯤 맛이 가 있던 참이라 심적으로 압박이 심해서 '그냥 빨리 완성해서 투고하고 끝내자'라는 느낌으로 덜 중요한 요소는 싹 다 포기했기 때문에 이렇게 돼 버렸음. 


밤을 샜더니 뇌가 강제로 셧다운 신호를 보내고 있어서 여기까지만 쓰고 이만 줄이겠음. 읽어 준 모두 ㄱ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