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주 작은 희망


불쌍한 사람들.

지하철 유리창 너머 저 멀리에 헐벗은 사람들이 노동하고 있는 게 보였다.


위-잉

멀리서도 들리는 짧은 사이렌 소리

노동을 하던 사람들은 동작을 멈추고 감독관에게 빵과 물을 받고 짧은 휴식에 들어갔다.


힘든 노동을 하고 오늘 저녁을 간신히 먹겠지.

아니면 싸구려 술을 사 먹고 아내와 자식들을 울리든.


짧은 감상이 끝나자 지하철도 멈춰 섰다.


사람들이 꽉 차 있는 에스컬리에터를 지나쳐 높디높은 계단에 올라섰다.


슬슬 땀이 나오려고 할 때 보이는 풍경은 도저히 세상이 망했다고 생각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키비타스 솔리스.

태양의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지하 5km에 지어진 도시를 환하게 비추고 있는 인공 태양이 보였다.


번쩍이는 전광판, 전광판 안에서 춤추는 연예인, 다정하게 걷는 모녀, 불만이 있는 듯한 남자, 담배 피우고 있는 행인 등.


휘황찬란한 도시에서 묵묵히 걸으면서 여러 건물을 지나 회색깔에 어두운 건물을 올려다 봤다.


'SCP재단청사 7동 - 제37K기지 정보실/윤리위원회/내부보안국' 


뚜벅. 뚜벅. 뚜벅.

구둣발 소리가 조용한 복도에 울려 퍼졌다.

아마 주말이라 더 조용하겠지.


자주 마주치는 경비대원에게 눈인사하고, 어두운 1층 복도에서 혼자서만 환하게 있는 락에 카드를 찍었다.


'띡-'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열리는 육중한 문


문을 열자 보이는 SCP 재단 로고


그리고 평소 친분이 있던 보안감독관 하나. 병사 여럿



"아 아영씨. 어제는 잘 들어가셨습니까?"


대꾸해주기도 귀찮았다.


"네에-"


귀찮아 보이는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다고 느꼈는지 검문 도중 더이상에 대화는 없었다.


2분 남짓한 긴 검문

검문이 귀찮아서라도 행정국이나 물류지원국으로 갔어야 한다는 상사의 말과 비위 맞춰준다고 과도하게 웃어대던 동료들이 떠올랐다.


"됬습니다. 이제 지나가시죠."


보안감독관이 턱짓하자 젊어 보이는 병사 하나가 문을 열었다.


병사들의 경례와 감독관의 인사를 뒤로하고 3갈래로 나뉘어 있는 곳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또 그냥 들어가면 내가 없을 때 동료들이 두고두고 씹겠지.


보안상 사무실마다 걸려 있는 키패드에 카드를 넣고 출근 버튼을 눌렀다.


좋은 아침이라 인사하는 동료들에게 형식적이고도 가식적인 인사를 한 후 자리에 앉았다.


어제에 온기는 온데간데없고, 차갑게 변한 컴퓨터를 보다 전원을 눌렀다.


오전 업무니 빨리 끝내자는 생각으로 '2027년 하반기 기록정보보안행정처 업무 공조' 파일을 누르던 중 생각에 잠겼다. 


인천.

인천 하면 뭐가 떠오를까?

방사능에 찌든 바다?

툭하면 나오는 괴수?

아니면 구시대 물품을 찾는 난민?


가족.

인천 집에 놓고 온 가족이 떠올랐다.

사태 전. 일이 끝나면 다 같이 모여 식탁에서 식사하던, 

지금 눈을 감았다 뜨면 다시 그 때로 돌아가고 싶은 아주 작은 희망을 품고 있다.


"아영씨! 정신 안차려요?"


정신 차렸어요. 너가 소리질러서


"죄송합니다."


"RAISA(기록정보보안행정처) 감독관이 나한테 하소연을 다했습니다. 좀 기록이 있을 곳에 있게 신경 좀 쓰라고. 이거 봐요. 이거 봐. 이 문서가 왜 여기에 있어?

내가 아영씨 교육할 때 이렇게 교육했어요? 내가 봤을 때는···"


왜 상사는 안바뀌는데

세상만 이리 바뀌었을까.


신은 내가 어지간히 미운가보다.

잠깐 가족과 함께 있고 싶다는 내 소원이자 희망은 무시하고, 지 살기 싫으니까 세상 뒤집어달라는 미친놈 소원은 들어주는 거 보면.


"··· 정신 좀 차립시다. 이거 다 아영씨 위해서 말하는 겁니다. 정신 계속 빼놓고 업무하면, 다음 번에는 징계입니다."


지가 실수한 거는 남한테 씌우는 놈이 뭐라는 거야?


"네"


·

·

·


욕 먹고, 욕을 곱씹으면서 증오감을 키우고, 부서지도록 키보드를 두드려도 아직도 낮 12시였다.


"자- 이제들 퇴근합시다."


아.. 주말 출근이라 빨리 퇴근하지.


이 지옥같은 생활에 조금이라도 기쁜 점은 공무원이라 주말에 출근시켜도 빨리 퇴근할 수 있다는 거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래요. 다들 내일 봅시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던 중 

문득, 다시 가족 생각이 났다.


사태 당시 재단 보안방침에 의해 구조대상자에서도 제외되었던 부모님은 괴수들에게 찢겨 죽었다.


하나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젊어서 벌어야 늙어서 쓴다는 신조 아래 살던 부모님.

두려웠다.

나도 어느새 내 인생을 뒤 돌아보니 부모님과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가족 생각은 지하철이 멈추고 서야 끝이났다.


걸어갈 기분이 도저히 아니여서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갔다. 현관문 앞에서 찝찝한 기분을 뿌리치고 도어락에 손가락을 가져댔다.


'삐리릭!'


경쾌한 알림음과 동시에 느껴지는 답답한 공기

공기청정기를 틀고 겉옷만 벗은 후 침대에 앉았다.

커튼을 쳐놔서 그런지 더 어둡고 조용했다.


조용하다 못해 공포스러운 적막이 두려워서 TV를 켰다.


[ 늘어만 가는 백수생활. 어려운 대학 생활. 줄어만 드는 통장금고.


청년 분들 걱정이 많으시죠?


이제 걱정마세요!


SCP 아카데미, SCP 행정교육지원처, SCP 청년생활저축금고가 청년 여러분들을 돕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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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P 재단 공익광고협의회 ]


'픽-'

헛웃음이 다나왔다.

이제는 별걸 다 따라하는 구나.


일명 '괴수 사태'가 일어나면서 괴수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각국 정부들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내분과 갈등으로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괴수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였고, 인간의 지식을 간단하게 부셔버렸다.


헬기에 미사일 공격으로도 안죽던 괴수는 모래 한 주먹으로 쓰러졌다.

이렇듯 사람과 사람의 전쟁에서만 쓸모 있던 전술은 무너졌고, 총칼은 살아남은 사람들끼리의 싸움에서만 쓰였다.


정부가 무너져 내리자 더 눈치 볼 것 없던 재단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어 해당 영토의 정부를 자처했다.


각 지역사령부들은 05평의회가 무너지기 전 선포한 가니메데 규약에 의해 서로가 구 정부의 국경선을 기점으로 지역을 통치하였다.

지역사령부들은 더 비옥하고 더 유리한 서로의 땅을 넘보니 옛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를 방불케했다.


사태 전까지만 해도 나는 많은 것을 몰랐다.

어둠 속에서 지구를 지킨다는 사명감으로 일하던 재단과 남을 먼저 돕던 이웃사람들은

어느새 추악한 독재집단인 재단과 자신의 가족을 잡아먹는 식인종들로 변했다.


아...

베란다 창문으로 휘황찬란한 태양이 꺼지고 가로등이 켜져있는 야경이 보였다.

태양의 도시인 이곳이 밤에는 달의 도시로 바뀐다는 이 도시가 왠지 내 눈에는 더욱 추악해 보였다.


꼭 저 달과 가로등이 아직도 지상에서 남아 괴수들에게 물어 뜯기고 있는 사람들의 피로 만들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아파트 맞은 편에 보이는 환한 흰 광고판에는 굵은 검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Safety(안전), Command(명령), Power(힘)


- SCP 재단


"크흐흐흐흐흑"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아니, 비명인 것만 같은 소리가 조용한 집안을 가득 채웠다.


#1. 아주 작은 희망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