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인 줄 알았다. 태양이 아니라 달이 휘엉청  빛나고 있었다.
새벽 한 시였다.
평소에 잘 보이던 달의 크레이터와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 정도로 밝았다.
오늘 그믐이라 뒷면이 밝아야하는 날인데.
이것도 scp의 변칙일 것이다.
열은 흡수하고 빛은 모아서 한꺼번에 방출하는지 태양만큼이나 밝은데 서늘했다.
궁금해서 찾아보니 복사냉각을 응용한 어쩌구라는 기술이 있었다. 적외선을 차단하고 가시광선만 내보낸단다.
이 괴물이 내는 빛에 그런 원리가 반영되어 있다면 그 피떡괴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더 찾기 쉬울 것이다.
어떻게 됐는지 확인해야겠다.

봉우리에 올라 내가 불지른 집을 확인했다.
옆 동까지 번지지는 않았지만 집이 있던 동 절반이 까맣게 그을려 있었고 아직 검은 연기가 서너줄기 올라오고 있었다.
이렇게 오래 탈 줄은 몰랐지만 함정이 헛되지 않았으니 다행이었다.

봉우리를 내려가니 배꼽시계가 울렸다.
이런 상황에도 무슨 일 있냐는 듯 언제나와 같이 울리는 배꼽시계가 부끄러울만도 했지만
그저께 까지만 해도 꼬박꼬박 시간 밥을 먹던 삶을 살던, 내게 마지막 남은 일상의 흔적 같이 느껴졌다.
참치통조림을 까 먹고 마지막 남은 물을 마셨다.

 괴물들이 찾기 힘들게 근처 봉우리 살짝 밑 평평하고 봉우리 안쪽으로 오목한 지형에 은신처를 만들었다. 철골을 박아넣고 차를 넣을 수 있도록 경사지게 땅을 팠다. 그 위에 천으로 천장과 그늘을 꾸몄고, 밧줄과 철골을 연결할 것이 필요해  문고리들을 빼  철골 구멍에 박았다.
철골에 박은 문고리들과 방화문들을 밧줄로 도르레처럼 연결해 당기면 문이 차고문처럼 천장쪽 안으로 열리게 만들었다.
 문 바로 옆에는 유리창과 카메라 렌즈, 은색 돗자리, 검은색 옷으로 열이 모이게 만들고 그 옆에 옷꾸러미로 싼 부탄가스와 기름병, 혹시 몰라 라이터까지 놓아두어 언제던 폭탄겸 방화용으로 사용 할 수 있게 했다.
자살할거지만 내 죽음은 내가 정한다는 마음으로 아주 열심히 생쇼를 했다.
이제 반항심에 가까운 오기가 아니면, 밥먹는 것 말곤 살 이유가 없다.

자잘한 방비까지 다 마치니 오전 7시였다. 밝아도 너무도 밝은 하늘을 보니 태양이 두 개였다.
개새끼. 지 눈 하나라고 지금 눈뽕하네.
동쪽과 서쪽에 해가 하나씩 있었다.
그래도 배는 고파와 밥을 먹었다.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 것도 오지 않았다.
정찰을 위해 봉우리에 다시 올라 주위를 둘러보고는 내려왔다.
그리고 할 일이 없어 누웠다.
머리가 멍했다.
연락이 끊긴 적이 없던 핸드폰은
전파는 통했으나 전화와 메시지는 한 통도 오지 않았고,
갱신 알림도 오지 않았으며 몇몇 사이트들은 서버가 망가졌는지 들어갈 수도 없었다.
재단도 어제 파란 빛을 마지막으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격리 실패나 다른 무엇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겨우 이정도 위기에 망할 재단이 아니었으니 무언가 더 큰 위기가 닥쳤다고 보는 게 맞으리라.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것도 이상했다.
첫 날, 재단은 3일 후 세계가 멸망한다는 것을 알리고 재단의 실체에 대해서 고백하곤 scp에 대힌 대응 방법은 알리지도 않은 채 폭동에 대한 녹색 진정빔만 쐈다. 마치 대응을 완전히 포기한 것처럼 굴어 나도 삶을 놓고 나약해졌었다.

 그런데 이튿 날 살덩어리 벽이 나타나려 하니 정보를 전달하고 파란 빛을 쏘아주며 적극적인 대응을 했다. 마치 사람들의 생존률을 올리려는 것 처럼. 그런 것 치곤 너무 늦고 미적지근한 대응이었기는 해도, 적어도 대응 방법은 알려줬다.

첫 날, 꿈에 대해 언급조차 없었던 것을 보면, 어쩌면 이튿날부터는 재단에서도 구름눈깔이 나오는 악몽을 견딘 사람만 살아 남았던 것 아닐까?
......
평소 같았으면 결론이 날 때 까지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을 재단에 대한 추측더미는
세계멸망 시나리오의 현장에 있는 지금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재미도 없었고.

사실, 안전하게 자살하려면 지금이 적기였다.
좀 전 봉우리 위에서 봤던 마을은 처참했다. 각 마을 꼭대기에 오른 육벽들은 할 일을 마친듯 녹아내려 하나로 뭉쳤다. 그리고 새로운 뭔가가 탄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불지른 우리 동네도 마찬가지였다. 매케한 연기가 승리의 상징처럼 올라오던 불길이
어느새 살점과 피로 잠겨 꺼져있었고 두번째로 사람들이 떨어져 내렸던 가장 높은 아파트 옥상이 살점으로 뒤덮혀 부화장 같은 게 만들어져 있었으니.

그래도 여긴 어울리지 않게 평화로웠고 점심을 먹을 시간은 있었다.
여기가 내 무덤이 될지언정.
마지막 만찬이다.
모든 통조림들과 반찬을 꺼내 꾸역꾸역 먹었다. 목이 마르면 밥을 오래 씹고 침을 고아 삼켰다.
맛을 느끼지 못하더니 촉각이 더 선명해져 그럴까?
이에 갈려 스러지고 삼키면 사라지는 살덩이가 내 미래 같았다.
두려움이 마음 한 구석에서 스멀거리며 올라왔다. 더 크고 강하게 씹었다. 죽더라도 엿 좀 크게 먹이고 죽고 싶었다. 방법을 고민했고, 결정했다.
 폭발물이 가득한 곳으로 유인해 무너뜨리기로.
 불태워도 살아나고 길이 없어도 잘 다니는 새끼들이니 썩 좋은 방식은 아닌 것 같았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굶주림과 숭배당하는 것 밖에 모르는 괴물이 그런 감정이 있지는 않겠지만
 눈 앞에서 먹이가 조롱하다 수저 다 날리고 먹지도 못하게 사라져버리면 없던 감정도 생길 것 같았다. 그렇게 믿는다.
진짜 죽으면서 그난리를 쳤는데 아무것도 아니면 너무 슬픈데.

도구들을 챙기고 시동을 걸었다.
불을 일으키려면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준비를 해야 했다.
조금 더 가서 있는 산 밑은 평소에 폐공장과 트럭이 많다. 그리고 양심도 없어서 가끔은 쓰레기처리나 폐기물 처리를 안한건지 공장 전체에 검고 무지겟빛 나는 뭔가가 들러붙어 공기가 퀘퀘하고 맡으면 어지러운 냄새를 풍겼다.
 
생각하다보니 도착했다.
여전히 냄새가 독했다.
을씨년스러운 황량한 이곳을 마지막으로 화려하게 사용하기 위해 방독면과 장갑을 끼고 드럼통을 카트에 싵고 스타렉스에 넣어 나르고 구석에서 니퍼와 절단기로 철제들을 잘라 함께 배치했다.
드럼통 안에 든 게 고기나 피만 아니면 무엇이던 괜찮았다.
그렇게 공장단지 순회를 마치니 폐공장 1개와 컨테이너 폐창고 2개가 가득 찼다.
마신 것 없이 일해서 벽에 기대 숨을 고를 정도로 어지러웠지만
 재난이 일어나고 처음으로 얼굴에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이제 시작이다.
방독면과 장갑을 벗어던지고
스타렉스 안에서 의자를 젖히고 누워 사람과 석양과 밤을 앗아간 빛나는 달을 노려보며 인생의 마지막 잠을 청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아침.
달에서 묘하게 붉은 빛이 돌았다.
덕분에 푸른 하늘도 조금 색이 바랬다.
빨간색은 단파장이라 흩어져야 정상이지만 알게 뭐람. 이제 죽는데. 더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근처 봉우리에 올라 목표를 확인하니, 하이브는 이미 비어있었고, 피찌꺼기들만 바닥에 뭉쳐있었다.
미끼로 쓸 고기도 줍고 마실 것도 챙기고 무엇보다 하이브에서 나온 변종들을 확인하기 위해
주변 시장으로 출발했다.

점점 시장이 가까워짐에 따라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말라붙은 검붉은 핏자국이 거리 온 곳에 튀어있고 하수도가 피로 잠겨 역한 비린내를 풍기는 것을 제외하고는 개미 한마리 없이 말끔했다.
전기가 나간 냉장고에서 물을 한 병 꺼내어 마셨다.
육류가 남아있는 곳은 없었다.

따끔.

눈을 깜빡였다.
아까부터 눈이 따가웠다.
점점 뭔가..
뭔가 아, 너무 밝다.
그리고 점점.. 붉어진다.
나는 녹색 플라스틱 차양이 검푸른 색으로 물들어 가고 온 세상이 선홍색으로 잠식되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발치까지 밀려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붉어지자
모든 것이 너무 아득해보였다.
그제서야 우주의 원리를 알 것 같았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그저 운좋게 태어나 운좋게 자랐으며 운이 좋아 여태까지 살아남았다.
그게 다였다.

살덩이들이 나를 놓친게 아니라 잡을 필요가 없었던 거였다.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기 싫었다.
오만했다.

피부가 팽창했다.

모든 곳의 피가 끓어올랐다.

꿈틀거리며 여태까지 그래왔듯 위로,
더 위로 올랐다.

피와 육편으로 만들어진 탑이 온갖 높은 곳에서 쌓아올려졌다.

경배하라.

엿? 먹일 수 없다. 저건 그런 감정같은 허접한 개념이 적용될 수 없다.
나는 애초에 큰 운명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존재였다.

scp들이 현실에 존재하는 세계였음에도.

죽음을 미루고 멈출 수도, 되돌릴 수도, 저걸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개인적인 복수도, 반항도 할 수 없었다. 해낼 능력이 없었다. 그 누구도.

저건 달이 아니다. 커다란 개념이다.

배꼽시계가 울리고ㅡ배가 고팠다.

 허기와 숭배받음이 그것의 본질인 이유는..
저것이 생명이기 때문이었다.

죽음이 아니었고, 차원이 아니었고, 삶이 아니었고, 물질이 아니었고 아니었지만, 맞았다.
삶도, 죽음도, 의식도, 의지도 빼앗기고 빼앗기고 빼앗겨서 질주하는 피만 남는다.

의미는 없다.
붉은 피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