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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음... 아, 맞다. 차라도..."


"..."


"으아아앗!"



애매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점내의 난방이 돌아가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정적을 깬 것은 케르나양이었다.

우당탕하고 쏟아지는 찬장의 차 박스. 그 미묘한 배려가 웃겨서 나도 모르게 누그러진다.

진짜 웃기네. 지금 이 상황에서?


금새 다시 현실이 웃음기를 날린다. 건조기에 들어간 굴처럼 쭈그러지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러네. 적어도 바깥보다는 따뜻하네.



"...아... 이, 일단 차라도 드시고 진정하세요 사장님."



내밀어진 손에는 어설프게 타온 우롱차가 하나.

급하게 타오느라 몇 번이고 물 속에서 춤을 췄던 티백. 이제는 물결의 흐름에 휩쓸리듯이 몸을 살랑이고 있다.

스파 욕조에서 쏘아지는 따뜻한 수압에 커어, 하고 한껏 목소리를 토해내는 아저씨같기도 하다.



"...응. 고마워. 케르나양. 몹쓸 꼴을 보였네..."



웃기네. 정말 웃기는 꼬라지다. 고개를 떨구고서, 케르나양의 배려에 잠시 잠긴다.

뜨겁다. 한 모금도 안 되게 입 안을 데우는 듯한 양만 가지고서 내려 놓는다.


"..."

"아뇨, 뭐. 그럴 수도 있죠... 그리고 그것보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찻잔.

먹고 간 것을 아직 치우지 않은 테이블.



"무슨 일이 있으셨던거에요? 아까 그 손님..."



케르나양은 내 앞으로 와서 앉는다.

우리 사이에는 그릇이 비워진 소바가 두 개. 깔끔하게 비워진 그릇. 아무렇게나 놓여진 나무 젓가락.

그 너머에 케르나양은 녹색 눈동자를 살짝 떨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찻잔 안의 소용돌이는 아직 일고 있고, 나는 고개를 드려다가 눈이 맞는다.


닮은 표정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처음 내가 트레이너가 되겠다고 했을 때의 어머니라던가, 한창 현역일 때 만났던 진이라던가.

그만둔다고 말했을 때의 아사나기라던가.



"..."


"아, 아니~ 뭐 꼭 알고 싶은 건 아니구요~ 그, 그럼..."




급하게 탄 우롱차.

되게 맛이 없구나. 뜨겁고, 써.


넘어가고 난 뒤의 이 묘한 텁텁함이 혀뿌리에 남아서...


케르나양은 괜한 말을 했다는 듯이, 내 침묵을 보고선 발을 뺀다.

흣차, 하고 일어서는 케르나양은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카드 리더기와 그외 물건들을 꺼내고...



"있지. 케르나양."




"네?"




"나 예전에 중앙의 트레이너였어."






케르나양이라면 괜찮겠지.

앞으로도 같이 해나 갈 직원이니까.

말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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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네...? 아... 중앙의... 트레이너..."



어라, 의외로 미묘한 대답이 돌아온다.




"그래서요?"




"아까 그 손님은... 내 담당 우마무스메였어."



"그... 그렇겠죠? 아무래도?"




그래. 한 때, 아니. 어쩌면 내 전부였던 우마무스메다. 난 신입이었고,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케르나양 너무 눈치가 좋다고 해야할까. 맥락상 그럴 수 밖에 없겠지만, 뭔가 김새네.

딱히 놀라는 리액션을 바란 건 아니지만.




"그래. 슈퍼 크릭. 그 아이는 흔히들 말하는 유망주였거든."

"...아..."


"성공적인 데뷔, 제비꽃 스테이크스에서 1착. 이대로라면 봄 클래식 3관도 노려볼 만 했어."


"트레이닝 수치나 메뉴.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 자신의 기량에는 문제가 없었어.

이대로 사츠키상, 그리고 더비까지 출주 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


그래. 트레이닝할 때의 타임이나, 컨디션은 모두 최고조였다. 다른 선배 트레이너들을 졸라서 성사시킨

병합훈련 때도 문제 없이 침착하게 자신의 레이스를 이어나갔다. 이대로라면 아무 문제 없어.

그러니 더 높은 곳으로, 더, 더.



"난 그 때 처음이었거든. 이게 변명거리도 안 된다는 것 쯤은 알아.

신입 트레이너였으니까, 미처 생각을 못 한거야."


"아니지. 그냥 내가 트레이너 실격이었던거지."


"그건 내가 열심히 해서...가 아니라, 우마무스메. 그러니까 크릭이 내 열의를 일방적으로 받아준 거라는 걸."



오른손이 갈 곳을 잃고, 무릎 위에서 떨린다.

나는 왼손으로 덮어 살짝 가리다가, 어쩌지도 못하고 양 손을 다 내려놓는다.



"사츠키상을 위해서, 그리고 더비를 위해서... 이게 분명히 크릭을 위한 일이라고.

아니지. 그냥 잘 되니까 내가 날 위해 몰아붙인거지. 하하..."


"제비꽃 스테이크스에서 1착은 했지만. 그 여파로 크릭은 왼쪽 다리를 골절 됐지."


"무리를 하고 있었던거야. 그 전 부터.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럴 거다. 아마.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런 거 전혀 몰랐고, 우마무스메의 신체라면 금방 회복할 거라고 생각했지."


"트레이너니까... 믿었지만, 그녀 자신을 전혀 생각 안 한거야."


"어떤 의미로... 사람으로써 보지 않았던 걸지도 몰라."


"달리는 것만이 우마무스메의 전부가 아닌데..."


"..."



"그렇게 함께 국화상에서 재기하기를 목표로 재활을 이어나갔지."


"그 때, 겨우 알게 된 거야."



입을 떼자.

여기가 제일 중요하니까.



"..."



이상하네. 아까 우롱차를 마셨는데. 목은 마르지 않는데. 입 안이 바싹바싹 마른다.

입술도 젖어있는데, 입을 떼면 전부 갈라져서 피가 흘러나올 것 같아.

눈 앞의 우마무스메. 후자 케르나는 살짝 침울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다.

앞으로 쳐진 갈색 귀가, 머리칼과 섞여 끝이 보이질 않는다.




침을 삼키고, 입을 연다.




"난, 그 역경 속에서도 열심히 해나가는 여자아이를... 학생을... 우마무스메를..."



말하자.

말하자.


"..."


"사랑하고 있었어."


"결과가 나오면 칭찬해주니까. 그녀도 기뻐하니까."


"이런... 이런 나도, 해낼 수 있으니까. 결과가 나오니까..."



"그녀를 몰아붙여서 그 지경까지 몰고 간 주제에, 정작 그녀 자신은 보지 않고 있었던 거야."





아니야.

그게 아니잖아.


포장하지 마.



무섭다.

눈 앞에서 내 이상을 눈치 챘는지, 살짝 고개를 들이미는 우마무스메.

우마무스메. 우마무스메.



"아...아...아... 아니야..."


"나, 나는... 사랑했어..."


"힘들어도, 날 받아주는... 담당 우마무스메한테..."




"욕정했어... 그런... 쓰레기였다고..."




"네...?"





"크릭이 재활을 하는 동안 어떤 마음으로, 어떤 기분으로 열의를 쏟고 있는지 아는데!

그걸 뻔히 아는데!"



목 안쪽이 뜨겁다. 가래라도 끼었나. 부글부글, 용암 같은 게 있어서 기분 나쁘다.



"정작 그 상황을 몰아 간 나는... 그녀의 몸을 보면서..."


"나한테 점점 의존하며, 힘겹게 웃는 크릭을 보면서!"




양손이 어느새 테이블 위로 올라와있다.

무언가를 쥐듯이.

아니면 호소하듯이.


아무것도 쥐면 안 되고, 아무것도 호소하면 안 되는데.


범죄자가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터져 나온 감정은 이미 제멋대로다. 녹이듯이, 태우듯이

용암은 점내에 흩뿌려진다.




"욕정...! 했다고...!"


"트레이닝을 하고서 땀에 젖은 그녀의 몸을 껴안고 싶다고, 키스하고 싶다고,

차라리 레이스를 그만 두게 되면 그녀는 좀 더...!"


"차라리 영원히 재기할 수 없다면...!"


"...사장님..."



케르나양의 눈동자는 떨리고 있다.

분명히 날 경멸하고 있겠지.

하지만, 마음 속에 남은 유일한 자존심 하나.



"이런 놈을 어떻게 트레이너라고 하겠어?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치는 놈이냐고!"


"이런 놈을...!"


"...후우...후우...하..."




"그래서... 그만 뒀어."





고개를 든다.

케르나양은 고개를 떨구고 있다. 빈 소바 그릇을 보고 있다.

아니, 그냥 날 보고 싶지 않아서. 같이 일하던 사장이 이런 놈이니까 보고 싶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뢰를 밟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그럼... 손을... 대신거에요?"



"...아니. 그렇게 되기 전에 무서워서 도망쳤어."



"..."



"믿어 줘. 케르나양. 나는 맹세코 자기 학생에게 손을 대는 쓰레기가 되고 싶지 않았어.

그러지도 않았고."



얄량한 자존심이다.



"그렇지만, 가르치던 학생을 역경에 밀어 넣고서 나 몰라라 도망친 쓰레기는 맞아."



"...그런가요..."



"그럼, 그런 뒤에..."


"그래, 그 후로는 그 후로 트윙클 시리즈도 우마무스메도 나한테 있어서 그냥 트라우마밖에 안 되니까.

그저 흘러가는대로 본가 일을 도왔어. 그리고 널 만났고."



"지금은... 그럼 괜찮으신거에요?"



"모르겠어..."



"..."


"..."




정적이 이어진다.

찻잔 안에 티백은 착 가라앉아서, 이젠 살랑이지도 않는다.

잔을 들어 이 조용한 입 안을 채우고 싶어서 손을 뻗었다가, 내려 놓는다.





"그렇게 6년이야. 그리고... 슈퍼 크릭이 다시 나타난 거야..."


"사장님을 보러... 온 건가요?"


"아니."



고개를 젓는다.



"우연이었어. 나는 그녀가 뭘 하는지, 현역인지, 은퇴했는지도 몰랐으니까."


"애초에 알지 않으려고 애썼지..."




"사장님을... 욕하던가요?"



"아니."



"그럼 아무 상관 없는..."



"아니."






그럴지도 모르지만,






"난 크릭한테 사과 해야 해. 내가 일방적으로 용서를 구하는 건지는 몰라도.

하지만... 염치도 없는 주제에, 그녀를 마주하면 잊었던 감정이 새어나와서...

어른스럽지 못하게, 아니... 그저 나를 지키고 싶은 건가? 하하..."



"..."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다.

찬란한 학생 시절. 누구보다 빛나야 할 클래식 시즌을 망쳐버린 쓰레기가.

이제 와서 자신을 비난하지 말아달라며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다.




"...도망쳐도 돼요..."



"어...?"



케르나양의 말에 그녀를 쳐다본다.

그녀는 어느새 고개를 들고서 나를 올려다 보고 있다.




"싫은 일이 있으면 도망쳐도 된다구요."


"반드시 사과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올바르게 앞만 봐야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 말과 함께 그녀는 고개를 돌린다. 창밖을 바라보듯이. 창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옆 건물과의 사이에 작은 틈새뿐.


그녀의 옆 머리가 돌린 고개에 뒤늦게 따라붙는다. 눈가가 가려져서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거기서 다시 생각해보면 되잖아요."



"...별 거 아니잖아요. 그냥 일을 그만 둔 건데. 왜 그렇게 쫄아있어요?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그냥 그 조건이 안 맞아서 그만 두는 사람이 한 둘이래요?"



"..."




찻잔에 이제 움직임은 없다.

왼손으로 찻잔을 들이킨다.


이제 적당히 식은 우롱차를, 미네랄 워터라도 되는양 벌컥벌컥.

입 안에 가득차는 향. 코를 뚫고 나올 것 같은 투박한 내음.



일을 그만 뒀다라.




여러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고...





하지만.





"고마워, 케르나양."



비운 찻잔을 내려 놓는다.

웅웅, 하고 돌아가는 난방은 아직도 적막한 점내를 데우고 있다.




"뭐가요. 그냥 아저씨 푸념 들어준 건데요 뭘."



"아니. 그거만으로도 고마워. 케르나양은 겉보기와 다르게 엄청 어른스럽네.

내가 배워야겠어..."



"무슨... 소리를...!"




자리에서 일어선다.



"읏차, 그러면... 저녁장사 준비나 할까?"



자리에서 일어서 기지개를 편다.



"잠깐만요 사장님! 모처럼 이야기 들어 줬더니, 상담비를 먹튀 하시면 어떻게 해요?"



그런 나를 좇아서 일어서는 케르나양. 내 등을 쿡쿡 찌르며 아까의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장난을 쳐온다.

상담비라...


허리를 틀어서, 그녀를 향해 오른손 검지를 내밀어서.



"야키니쿠?"


"야키니쿠!"



케르나양도 검지를 내밀어서 호응한다.

하하, ET 같아서 뭔가 웃기네.


그런 뒤에 나는 등을 돌리고서 조리실로 다시 걸어간다.




"..."



"잠깐만요 사장님! 설마 규우카쿠는 아니죠?"


"..."


"모처럼이니까 비싼데로 하라구요!"


"규우카쿠 냉면 좋아하잖아?"


"야키니쿠라고 했지 냉면이라고 안 했어요!"



다다다, 쫓아와서 두두두. 가볍게 등을 두드리는 케르나양.



"아아아아아~ 아아아아~ 알았어~~"




그녀가 투닥이는 등의 울림을 가지고 놀듯이 목소리를 낸 뒤에 겨우 장난을 그만 둔다.




"하아, 진짜~ 기대했더니 장난 좀 치지마요. 진짜."


"알았다니까. 고마워. 케르나양."





고마워 케르나양.

덕분에 뭔가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 들어.


하지만...







'말해 준 건 사장님이면서...'











"응?"


"아니에요. 얼른 밑 준비나 하자구요~"





"응."







크릭에게 사과는 해야겠지.

설령 일방적이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