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림자



우리는 모두 황제 폐하의 자식이니

경배하고, 찬양하고, 일하라.

그러하면 황제께서 지켜주시리라.

별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공포로부터.





조명이 어두워지는 시간이 되자 거리는 더욱 음울해졌다. 야나는 이 시간에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높이 솟은 건물들의 그림자가 징검다리처럼 자꾸만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하이브는 밝을 때에도 안전하지 않은 곳이었다. 어제는 두 명의 사내가 하이브 갱단에게 살해당했고, 며칠 전에는 야나 또래의 어린아이가 시체로 발견됐었다. 일손이 부족해서 야나도 그 시체를 쓰레기장에 내다버리는 걸 도와야 했다. 그들은 커다란 기계에 찢겨나간 것처럼 끔찍한 몰골이었다. 


그러나 야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아직 깨어있을 시간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골목길을 따라 조심히 움직이기로 했다. 골목의 철판들은 밟을 때마다 병자 같은 신음소리를 냈다. 온 사방에서 오물들이 썩는 냄새가 났다. 


이 골목은 야나의 집보다 한 층 아래에 있었다. 정유 가공소와 비밀 교회가 있는 층이었다. 한때는 제국 병사를 육성하기 위한 훈련소도 있었지만, 지금은 매음굴로 변한 상태였다. 아버지가 보시면 실망하시겠지. 야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제국군에서 정확히 무엇을 하러 간 것인지 알지 못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야나는 이 골목을 지날 때마다 아버지가 하는 일에 대해서 상상하곤 했다. 그녀의 상상 속에서 아버지는 의무병이었다가, 전차 조종수였다가, 근엄한 장교가 되기도 했다. 심지어는 아버지는 황제 폐하의 천사인 적도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언제나 온갖 외계인과 맞서 싸우는 영웅이었다. 황제를 위해서가 아닌, 야나를 위해서. 


야나는 매음굴 근처 골목에 다다랐을 때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여기는 위험한 곳이었다. 붉은 불이 켜진 방의 창문에서 기분 나쁜 신음과 웃음소리가 새어나왔고, 벽에는 사람들에 게워낸 토사물들이 껌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저번에 죽은 아이도 이 근처에서 실종되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이 매음굴 지하에 사람들을 감금하고 고문하는 곳이 있다고 말했다. 제국 병사들이 사용하던 방들. 돌아가야지. 야나는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며 몸을 돌렸다. 


"어디가니, 꼬마야?" 


누군가가 말했다. 여기야 여기. 야나는 위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검은 머리를 길게 땋은 여성이 창문 밖으로 상체를 내밀고 있었다. 그녀는 좋게 말해도 예쁘다고 하기는 힘든 얼굴이었지만, 풍만한 가슴과 흉터 없는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하이브에서 저렇게 매끈한 피부를 보긴 쉽지 않았다. 그녀는 야나의 놀란 눈을 마주보며 킥킥 웃었다. 


"아버지를 찾아왔니? 안쪽 어딘가에 계실지도 몰라." 

"아니, 아니에요. 길을 잘못 들었어요." 

"머리칼이 새하얘서 인기가 좋겠네. 에너지바 필요하지 않니?" 


그녀가 품 안에서 고형 에너지바 하나를 꺼내 흔들며 말했다. 야나의 입에 침이 고였다. 물론 필요했다. 어머니가 마지막 남은 식량까지 비밀 교회에 기부해버렸으니까. 배가 무척 고팠다. 하지만 야나는 한 끼 식량에 속을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필요 없어요!" 


야나는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다. 뒤에서 여성이 깔깔대는 소리가 들렸다. 골목은 어두웠고 비린내가 나는 웅덩이가 발치에서 찰박였다. 황제가 정말로 위대한 신이라면, 왜 자신의 병사들을 모집하던 곳이 매음굴로 변하도록 놔둔 것일까? 아버지가 돌아오면 저 곳도 원래대로 돌아갈 텐데. 아버지가 돌아오면 어머니도 이상한 집회에 나가지 않을 텐데. 아버지가 돌아오면… 하지만 그는 여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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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는 한참 뒤에야 발을 멈췄다. 여기가 어디지? 주변에 익숙한 건물이나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벽은 기분 나쁜 보라색 이끼로 덮여 있었고, 바닥에는 녹이 잔뜩 끼어 있었다. 공기는 너무 탁해져 숨 쉬기가 힘들었고, 발밑에서는 유황 냄새와 시체 썩은 내가 심하게 풍겨왔다. 아무래도 하수구 지대 근처인 모양이었다. 침착해야해. 야나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길이 있을거야. 문득 캄캄한 골목에서 무언가가 철퍽거렸다. 


야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리고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였지? 그녀는 귀를 기울였다. 파이프를 따라 오물이 흐르며 나는 웅웅거림을 제외하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구부린 채 골목을 바라보며 어둠 속에서 움직인 형체를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움직이는 건 오직 바닥에서 새어나오는 뿌연 연기뿐이었다. 골목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어쩌면 긴장해서 잘못 들었을지도 몰라. 야나는 생각했다. 그래, 내가 오물 웅덩이를 밟았다던가, 작은 기어가 돌아가는 소리를…


그녀의 등 뒤에서 작은 무언가가 첨벙대는 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야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돌리며 엉덩방아를 찧고,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살려주세요!" 


그러나 그곳에 있는 것은 건장하고 흉악한 범죄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야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작은 생명체였다. 그녀가 두 손으로 껴안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털 하나 없는 부드러운 머리에 보라색 갑각으로 덮여있는 그 생명체는 녹색 눈을 반짝이며 야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나는 처음 보는 생명체였다. 


"안…녕?" 


야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생명체는 호기심에 찬 눈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녀를 마주보았다. 적대적이진 않은 것 같았다. 야나는 아주 오래 전에는 하이브에도 고양이라는 생명체가 살았다던 요릭 아저씨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 생명체가 고양이인걸까? 확실히 네 발로 걷는 모양새가 이야기와 비슷해보였다. 


"내 이름은 야나야. 너는… 어디서 왔니?" 


야나는 앉은 채로 생명체에게 조금 다가갔다. 그러자 생명체는 낮은 쇳소리를 내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입 안에 흉측하게 자라난 날카로운 이빨들이 보였다. 어디선가 비린내가 났다. 이 생명체가 정말 고양이라면 어떻게 혼자서 살아남은 걸까? 


"겁내지 마렴. 난 널 해칠 생각이… 꺅!" 


야나가 손을 뻗자 생명체는 날카로운 괴성을 내지르며 팔을 휘둘렀다. 면도칼처럼 날카로운 손톱이 야나의 손등을 스쳐 지나갔다. 피. 빨간 피가 어둠 속으로 튀어 올랐다. 야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손등의 상처는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팠다. 어째서?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생명체를 바라보았다. 그 작은 짐승은 야나를 보며 으르렁 거리다가, 이내 두 발로 거미처럼 벽면을 타고 기어올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고양이는 모두 저렇게 사나운걸까? 야나는 울먹이며 생각했다. 나는 그저 친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어디선가 골리아스 트럭의 엔진 소리가 들렸다. 야간 조가 투입되는 시간인 모양이었다. 집에 돌아갈래. 야나는 생각했다. 지금쯤 어머니도 술에 취해 잠들었을 거야. 


야나는 다시 골목을 걷기 시작했다. 손등에서는 피가 계속 흘러내렸다. 흉터가 남을 것 같았다. 집에 가서 어머니가 먹다 남긴 술로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아야지. 요릭 아저씨가 가르쳐줬던 대로. 야나는 울지 않으려 애쓰며 걸었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손등에서 피가 방울지며 떨어져 내렸다. 똑. 


똑. .

똑. 


어두운 골목의 천장에 매달린 누군가는 그 핏방울을 쫓아 하얀 머리의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긴 혀를 날름거리자, 녹색 침이 입가를 타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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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눈 안에 들어온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곧 비가 내릴 것 같았다. 다행이군. 그가 생각했다. 해가 진 정글은 습하고 음침해서, 비라도 내리면 조금 나을까 싶었다. 그의 시야가 다시 빠르게 요동쳤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여 컬티스트의 검을 피한 그는 체인소드를 휘둘렀다. 비명이 톱날이 회전하는 엔진 소리를 압도할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다. 그는 손잡이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또다른 놈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놈은 푸른 역장이 일렁이는 공업용 픽을 들고 있었다. 스카웃 아머를 꿰뚫기에 충분한 무기였다. 그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볼트 피스톨을 들어올렸다. 놈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탄환이 나가지 않았다. 대신 잔탄이 없음을 알리는 빨간 경고등이 반짝일 뿐이었다. 


놈의 눈이 희망으로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평범한 인간을 것을 고려하면, 놈이 전력을 다해 휘두른 픽은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어쩌면 악마의 힘이 깃들어 있는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는 훨씬 더 빨랐고, 훨씬 더 침착했다. 그는 첫 번째 공격을 피하며 체인소드의 손잡이를 놓았다. 픽이 바닥을 때리며 돌이 튀어 올랐다. 놈은 기세를 몰아 측면을 향해 픽을 휘둘렀지만, 그는 빈손으로 무기의 윗부분을 붙잡았다. 


놈이 픽을 빼내기 위해 낑낑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죽음의 천사였고, 놈은 비천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는 천천히 볼트 피스톨을 들어 올린 뒤, 그것을 둔기 삼아 강하게 내리쳤다. 놈이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나 두개골이 으깨지는 소리가 목소리를 집어삼켰다. 그의 이마에 튄 피는 따뜻했다. 


놈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아마도 목숨을 구걸한 거겠지. 나약한 컬티스트 놈들은 언제나 그랬다. 죽음 앞에서 당당한 명예나 신념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전투라고 부를 수도 없겠군요, 서전트." 그의 곁으로 다가온 익시르 형제가 말했다. "캡틴께서 이미 서쪽을 정리하셨습니다." 

"그럼 우리는 저 벙커들을 청소하면 되겠군." 


그는 손등으로 이마의 피를 닦으며 지하로 이어지는 벙커 입구를 가리켰다. 플라스틸과 세라마이트로 겹겹이 강화된 문은 조잡해보였지만 효과적이었다. 문 위에 놈들이 커다란 악마의 상징을 그려놓은 것이 보였다. 무엇으로 그린 것일까. 피? 


"센노르 형제. 녹여버려라." 


그가 분대원에게 명령했다. 

센노르의 붉은 머리칼은 피에 젖어 더 새빨갛게 보였다. 멜타건의 고열은 컬티스트들의 장갑판을 종잇장처럼 쉽게 도려냈다. 그는 볼트 피스톨의 탄창을 갈며 다른 형제들에게 자리를 잡으라고 손짓했다. 이제 벙커 속에 숨은 겁쟁이들을 처리할 시간이었다. 그는 단숨에 문을 박차고 안쪽에 파쇄 수류탄을 던졌다. 폭발. 연기. 하지만 비명이 없었다. 


무슨 일이지? 그는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벙커는 낮고 좁아서 고개를 숙인 채 움직여야 했다. 사방이 연기로 가득했다. 다른 몇몇 형제들이 그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피비린내가 없었다. 적은 어디있지? 그는 먼지가 걷히길 기다리며 중얼거렸다. 뭔가 잘못됐어. 그때 연기 너머 어디선가 노리쇠를 당기는 소리가 났다. 철컥. 


"서전트! 조심하십시오!" 


고작 1년 전에 배속 받은 신참인 로단 형제가 소리치며 그를 밀쳐냈다. 헤비 볼터의 총구와 눈이 마주친 로단의 표정은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소용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손을 뻗었다. 불꽃과 폭음. 헤비 볼터의 탄환이 연이어 스카웃 아머에 박히는 것이 보였다. 로단의 몸이 실이 끊긴 인형처럼 춤을 추며 뒤로 떠밀리다가, 결국 벙커의 벽면에 부딪치고 말았다. 로단은 또다른 탄환이 머리를 터트리기 전까지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총성 때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로단의 얼굴을 본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놈들이 헤비 볼터의 탄창을 가는 소리가 들렸다. 분노가 그의 머리를 잠식했고, 그는 괴성을 내지르며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적은 그의 보폭으로도 스무 걸음 이상 떨어져 있었다. 다른 형제들이 쏜 볼터 탄환이 섬광처럼 그를 스쳐지나갔고, 컬티스트 둘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열세 걸음. 헤비 볼터 사수는 아직 멀쩡했다. 놈은 공포에 질린 채 서둘러 탄창을 끼워 넣고 있었다. 

열 걸음. 그는 볼트 피스톨을 들어 올려 발사했다. 급탄수가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진다. 

일곱 걸음. 놈이 덮개를 닫고 노리쇠를 당긴다.

다섯 걸음. 그는 다시 방아쇠를 당겼지만 탄환은 헤비 볼터의 몸체를 스치고 지나간다. 

세 걸음. 놈이 손잡이를 잡고 가늠좌를 당기는 것이 보인다. 

두 걸음. 그는 볼트 피스톨을 발사했고, 놈도 방아쇠를 당겼다. 


빛이 먼지를 헤치며 나아가 놈의 머리에 박혔지만, 반대쪽에서 더 크고, 빠른 탄환이 날아왔다. 콰직하고 스카웃 아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폭발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튕겨져 나간 몸이 벽에 부딪친 뒤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고통만이 선명한 가운데, 감각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총성. 비명. 분노. 

피비린내. 

그때 누군가 그에게 속삭였다. 


천사여, 어째서?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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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 꿈이었다. 어째서? 아르녹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수많은 고통스러운 수술을 받았고, 그 결과물 중에선 꿈을 꾸지 않는 것도 있었다. 그를 더 나은 전사로, 더 뛰어난 천사로 만들어주던 수술들. 하지만 이제 그는 전사도, 천사도 아니었다. 그는. 


"이봐, 거인! 네 차례야!“


발린이 손짓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락그라인더는 효율적으로 터널을 만들어내는 차량이지만, 섬세함은 부족했다. 락그라인더의 드릴도저 블레이드가 지나간 자리에는 엄청난 양의 잔해가 남았고, 인부들이 효과적으로 작업하기 위해선 그 돌들을 옮겨야 했다. 2m가 넘는 덩치를 가진 아르녹은 누구보다 이 작업에 능숙했다. 그는 남들보다 두 배는 큰 손으로 돌 더미들을 집어 수레에 싣기 시작했다. 


단순하지만 고되고, 끝이 없는 작업이었다. 락그라인더는 광맥을 찾을 때까지 끊임없이 터널을 파냈고, 아르녹은 계속 움직였다. 땀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지만, 그를 황제의 천사로 만들어주었던 기관들 덕분에 몸은 쉽게 지치지 않았다. 아르녹은 다른 인부들이 두 번 교대할 때까지 일을 계속했다. 오전 작업을 놓친 분량을 채우기 위해선 오늘 밤새 이렇게 일해야 했다. 적어도 감독관이 지정해준 양은 그랬다. 


"천천히 해, 아르녹. 아무리 자네라도 그렇게 일하다보면 쓰러질거야." 


늙은 요릭은 그가 막 치우려던 돌 위에 걸터앉더니 껄껄 웃었다. 요릭은 이곳에서 가장 나이 든(아르녹을 제외한다면) 노동자이자 가장 영악한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 쉬고, 언제 일해야 감독관의 눈 밖에 나지 않는지를 알고 있었다. 아르녹은 가지지 못한 재주였다. 


"요릭." 


아르녹은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자네는 언제나 커미사르처럼 인사하는군, 아르녹." 

"그대는 커미사르를 본 적이 있소?" 


요릭은 이곳에서 유일하게 그를 거인이라고 부르지 않는 남자였다. 아르녹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할 만큼 넉살이 좋은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고. 


"아니, 물론 본 적 없어. 하지만 이야기를 들었지." 

"당신은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군." 

"하하, 그래, 친구. 나는 이야기를 좋아하거든." 


친구? 그에게는 아직도 낯선 단어였다. 오랫동안 그의 삶에는 두 가지 관계 밖에 없었다. 형제, 그리고 적. 


"하지만 난 자네의 이야기를 몰라. 자네는 늘 입을 다물고 있으니까." 


아르녹은 조금 전에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목소리도. 한때 그를 미치게 만들었던 그 목소리…. 아르녹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내 이야기는 그대가 알 필요 없소." 

"캐물으려는 건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그런거지. 자네처럼 크고 강한 친구가 여기까지 흘러 들어왔다면 사정이 있을테니까" 


아르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목소리가 없었다면….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사이에 내기가 걸려있기도 하고 말이야. 베스는 자네가 탈영한 하프-오그린이라더군. 쿨란은 자네가 하이브 상층부 귀족들의 애완동물이었을 거라고 하고. 나는 자네가 로그 트레이더 였다는 데 걸었어." 

"모두 틀렸소.“


그는 요릭을 노려보며 쏘아붙이듯 대답했다. 모두 모욕적인 추측이었다. 그의 시선을 받은 요릭이 작게 숨을 삼키는 것이 보였다. 


"이제 다시 일하고 싶은데." 


아르녹이 한 발짝 다가갔다. 요릭의 눈이 공포로 작게 떨렸다. 


"자…네를 화나게 할 생각은 아니었네, 아르녹. 난 그저… 자네도 우리와 생각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던 거야. 어느 쪽이든 자네도 황제 폐하께 실망한 사람 같았다는 거지." 

"…실망?" 


아르녹은 움직임을 멈췄다. 아르녹은 지금껏 황제 폐하와 황금 독수리를 바라볼 때마다 느꼈던 좌절감과 울분을 표현할 단어를 떠올렸다. 실망. 바로 그것이었다. 그 정글 행성에서 벌어졌던 일 이후, 그가 느꼈던 감정은 실망이었다. 하지만… 누구에게? 


"그래, 실망 말이야." 


그렇게 말한 뒤 요릭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이제 다른 인부들은 터널 입구를 경계하는 모양새로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들어보게. 자네가 어떤 사정을 가지고 이 지옥 구덩이에 왔는지 모르겠지만, 황제 폐하께서 자네를 가호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잖나. 자네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세. 우리 모두 그렇지. 다른 가르침이 있다네. 선택 받은 소수를 위해서가 아닌,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한 가르침 말이야." 


헤레틱. 아르녹은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이 사내가 내게 이단의 가르침을 전파하려 하는 건가? 하지만 그는 주먹을 휘두를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정글에서 보았던 것들이 떠올랐다. 기도. 악마의 상징. 그리고 목소리. 


천사시여, 어째서? 


아르녹은 놀라서 크게 눈을 떴다. 지금 이건 환청인가? 아니면….


"우린 사방에 퍼져있지만, 우리에겐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해. 강인하고, 성실한 사람 말이야. 자네도 황금 옥좌에 실망했다면, 우리 가르침을 한번 들어보게. 응?" 


아르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요릭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요릭은 그것을 당혹과 고뇌로 여긴 것인지 계속해서 말했다. 


"별의 자손께서 오실 거라네. 우린 준비를 하고 있어. 그때가 되면 자네도 구원 받을 수 있을거야. 만약 관심이 있다면… 포피스 홀의 213번 건물로 찾아오게. 이걸 보여주면 자네를 입장 시켜줄거야." 


요릭은 그에게 작은 매달 하나를 꺼내 보인 뒤, 아르녹의 작업복 주머니에 밀어넣었다. 광산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철을 조잡하게 가공해 만든 물건이었다. 가운데에는 사납게 생긴 벌레가 입을 벌리고 몸을 웅크린 듯 한 상징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아르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제발 황제 폐하시여. 제가 환청을 들은 것이길. 그것이 돌아오지 않기를. 목소리가. 


천사여

"생각해보게나. 응? 우리는 악마 숭배자 같은 것이 아니야. 그저 새로운 구원을 바라는 것 뿐이라네." 


요릭은 아르녹의 팔을 두드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녹은 요릭과 다른 인부들이 어두운 터널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있었다. 황제에게 기도하며.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황제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황제는 언제나 그를 실망시켰다. 이번에도. 


어떻게 그걸 정당화시킬 수 있습니까? 


목소리가 돌아온 것이다. 그를 미치게 만들었던 목소리가. 

이곳에 온 뒤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목소리가. 

아르녹은 자신의 품 안에서 그가 준 매달을 꺼내보았다.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어떻게?

"요릭!" 


아르녹은 떠나가던 요릭의 이름을 큰 소리로 외쳤다. 

그가 황급히 발을 돌려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듣고 싶소. 안내해주시오." 


이단. 아르녹은 중얼거렸다. 이것은 이단이야. 아니면 또다른 거짓인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아르녹은 목소리를 없앨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다시 미쳐버리기 전에 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