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밤


황제시여. 그 천사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당신 곁에 있나요? 아니면...




그녀는 이따금 슬픈 꿈을 꾸었다. 꿈속은 언제나 밤이었다. 검은 물길 속으로 가라앉는 밤, 날카로운 발톱이 벽을 오르내리는 밤, 빨간 방 안에 앉아 꾸벅이며 잠드는 밤,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는 밤, 반짝이는 불씨가 민들레 씨앗처럼 퍼져가던 밤들. 꿈속에서 그녀는 매번 다른 밤을 보았지만, 언제나 머리 위에 내려앉는 커다란 손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기나긴 밤의 푸른 색채와 비린 향기, 머리카락을 누르던 무게가 너무나 슬퍼서, 그녀는 항상 울면서 잠에서 깼다. 


눈물은 언제나 금방 멈췄다. 한번 눈을 감았다 뜨기만 하면, 밤의 기억과 손의 무게도 함께 사라졌다. 그녀는 언제나 손의 주인이 누구일까 궁금했다. 아침이 오면 그런 궁금증도 먼지처럼 사라졌지만, 가끔 찾아오는 어둡고 싸늘한 밤이면 깨어있을 때도 그 손길이 떠올랐다. 그럴 때면 그녀는 슬퍼서, 정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슬퍼서 좁은 방 안에서 어린아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앉아 밤을 지샜다. 


곁에 누군가 앉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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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송선 안은 어두웠다. 유일한 빛이라곤 천장에 설치되어 있는 것은 구형 전등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이따금 불이 나갔다. 투명 헬맷을 쓰고 꽉 조이는 안전장치를 매고 있자니, 갑옷 속에 갇힌 화물이 된 기분이었다. 덜컹. 수송선이 다시 심하게 흔들렸다. 


"대체 어떻게 우주에서 이렇게 함선이 흔들릴 수 있는 거죠? 우리가 소행성 지대를 지나는 것도 아니잖아요?" 


오르도 제노스 소속의 어콜라이트, 야나는 두려움을 잊기 위해 투덜거렸다. 그들은 임페리얼 네이비에서 포로를 수송할 때 사용하던 낡고 오래된 제국 수송선을 타고 있었다. 이 배는 파손 시 공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예비 격벽도 없었고, 구획 별로 차단시킬 수 있는 기능도 없었다. 까딱하다간 춥고 어두운 우주로 빨려나간다는 생각을 하자 등골이 오싹했다. 


"로그 트레이더 놈들이 제멋대로 부품을 바꿔 달아놔서 그렇겠죠. 저라면 이 함선이 갑자기 분해된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겁니다.“


카디가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농담조로 이야기했지만, 오히려 설득력 있는 가설만 제시한 셈이었다. 야나는 눈을 감고 침을 삼키며 즐거운 생각을 하기 위해 애썼다. 귀여운 이름과 달리 카디는 오른쪽 눈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상처를 가진 병사였다.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저격수였고, 수많은 외계인들과 근접전을 벌이고도 살아남은 베테랑이기도 했다. 그녀는 카디가 마음에 들었다. 카디는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농담을 던질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임무 중에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선 카디 같은 사람이 꼭 필요했다. 깔끔하게 기른 수염이나 커다란 체격,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도 제법 매력적이었다. 딱 하나. 너무나 노골적인 호색한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말이다. 


"하지만 걱정 마십쇼. 그런 일이 벌어지면 제가 아가씨를 꽉 껴안아 구해드릴 테니 말입니다. 혹시나 해서 말인데, 그 상황에서도 제가 손대면 안 될 부위가 있으면 미리 말해주시겠습니까?" 


공포 속에서는 함께 있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기 쉽다던데. 그게 사실이라면 야나는 아직 충분히 무섭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매력적인 남성이었지만, 그녀는 달콤한 말 몇 마디에 얼굴을 붉히기엔 너무 냉소적인 성격이었다. 


"음, 글쎄요. 머리부터 발끝 사이 전부로 하죠." 


야나는 그렇게 대꾸하고 가이우스를 돌아보았다. 선실이 이렇게나 요동치는데 그는 매우 편안해보였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불빛이 음울하게 흔들릴 때마다 그의 황금빛 파워 아머가 번쩍거렸다. 


"그러니까 제 말은 말이죠, 우리는 크루져도 징발할 수 있었잖아요. 왜 꼭 이런 고철을 선택했느냐는 거죠." 

"우리가 아니다." 가이우스가 정정했다. "내가." 

"그래요. 가이우스님은 크루져도 징발할 수 있었잖아요. 됐죠? 느리고, 흔들리고, 어둡고. 꼭 우리에 같은 짐승이 된 기분이라구요." 


카디가 그녀의 칭얼거림을 들으며 낄낄 댔다. 잘한다, 우리 아가씨. 야나는 상대가 누구든 주눅 드는 법이 없었다. 상대가 스승이자 직속상관인 가이우스라도 마찬가지였다. 표현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가이우스도 그런 그녀의 성격을 마음에 들어 했다. 모든 인퀴지터라면 누구든 의심하고, 처단할 수 있는 예리함과 행동력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물론 아직은 그 성격이 이십대의 혈기와 뒤섞여 대형 사고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얼마 전 그녀가 엉덩이를 더듬은 행성 총독의 가랑이 사이를 의족으로 걷어찼던 일은 정말 걸작이었다. 그 사건은 카디에게도 경각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야나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크루져를 징발했다면 이번 여정은 훨씬 빠르고 편안했을 것이다. 방도 따로 배정받았을 것이고, 밤이면 그의 몸을 데워줄 여성 승무원도 하나쯤은 있었으리라. 가이우스가 눈을 뜨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 차가웠다. 


"크루져를 징발하려면 삼 일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게 전부에요? 그럼 삼일 더 쉬고 오면 좋았을걸!" 

"네겐 의무보다 휴식이나 편안함이 더 중요한가, 어콜라이트?" 

"그건… 아니지만. 임무 중에 약간의 즐거움을 챙기는 것도 금지된 건 아니잖아요…." 


정곡을 찌르는 가이우스의 말에 그녀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눈을 흘겼다. 어휴, 까칠한 아저씨 같으니라고! 당장 불평을 쏟아내고 싶었지만, 이미 그녀는 입을 잘못 놀렸다가 옥좌 요원으로의 승급이 1년이나 늦어진 상태였다. 대신 야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가이우스를 흉내 내는 것처럼 팔짱을 꼈다.


"그리고 크루져는 승무원도 더 많이 필요하고, 눈에도 더 띄지. 우리가 가는 곳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 

"어디로 가는 건데요?" 


야나가 물었다. 가이우스는 잠깐 입을 다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워치 포트리스." 


야나는 그 말을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 했다. 카디는 플라스틸로 만든 안전 장치가 없었다면, 그녀가 펄쩍 뛰었으리라 짐작했다. 가이우스는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데스워치를 만나러 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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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항해 속에서 그녀는 또다시 꿈을 꾸었다. 그녀는 리만 러스 전차 안에 있었다. 그녀는 전차장이 된 기분을 느끼고 싶어 해치를 열고 상반신을 내밀었다. 그곳에 보라색 갑각을 두른 커다란 괴물이 서있었다. 제노스! 야나는 소리치며 허리춤에 차고 있는 무기를 뽑으려고 했다. 하지만 허리엔 아무 것도 없었다. 당황한 그녀가 고개를 들자 괴물은 아까보다 훨씬 커져있었다. 아니 리만 러스도 그랬다. 그녀는 자신이 작아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그녀는 어린 소녀였다. 그녀는 인퀴지터의 갑옷이 아니라 노동자들이나 입는 누더기를 입고 있었다. 바이오닉이어야 할 오른팔과 오른손은 하얀 피부로 덮여있다. 그녀는 괴물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공포를 느꼈다. 발이 미끄러진다. 


그녀는 리만 러스 전차 안으로 떨어졌다. 안은 어두웠다. 바깥쪽에서 누군가가 괴물과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귀를 막았다. 쾅. 쾅. 리만 러스의 차체가 몇 번이고 흔들렸다. 불청객이 문을 두드리는 것처럼. 쾅. 쾅.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그 비명의 괴물의 것이길 바랬다. 쾅. 잠시 후 바깥이 조용해졌다. 


아저씨? 


그녀가 누군가를 불렀다. 그때 커다란 발톱이 차체 안으로 쑥 밀려 들어왔다. 그녀는 발톱 자국 사이로 괴물이 웃으며 혀를 날름대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비명을 질렀지만 도망갈 곳이 없었다. 그녀는 누군가를 애타게 불렀다. 간절하게. 


하지만 누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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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컹. 마그넷 암이 수송선을 붙잡자 선체가 잠깐 요동쳤다. 바깥에 공기가 돌아왔음을 가장 먼저 알려준 것은 소리였다. 기계가 움직이고, 강철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수송선의 벽면을 뚫고 전해져왔다. 야나는 어린아이처럼 초조한 표정으로 해치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가이우스는 벌써 짜증이 난 모양이었고, 카디는 천천히 장비를 챙기며 혀를 찼다. 생일 날마냥 들뜬 표정이라니. 아직도 어린애로군. 


"오, 테라의 옥좌시여. 황제 폐하, 아 세상에.“


야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만 좀 날뛰십쇼. 어린애도 아니고." 

"그래요. 맞아. 인퀴지터의 수행원으로서 위엄을 지켜야겠죠? 그래요.“


야나는 숨을 내쉬며 침착하게 자리에 서는 듯 싶더니… 몇 초 지나지 않아 다시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카디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녀의 눈은 기대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카디는 야나가 이렇게 흥분한 광경을 처음 보았다. 


"그렇지만 카디, 응? 저는 항상 황제의 천사들을 직접 보고 싶었다구요! 미니스토룸의 사제들이 항상 이야기하잖아요. 고귀하고, 공포를 모르는 위대한 전사…." 


응? 내가 전에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던가?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두 사람이 그녀를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렇죠. 그렇게들 부르기도 하죠." 카디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들도 우리와 똑같아요. 외계인의 총과 칼에 맞으면 팔다리가 날아가고, 죽는 친구들입니다." 

"하여튼 산통 깨는데 일가견이 있다니까." 


야나는 투덜거리며 카디의 어깨를 놓았다. 연기가 스며들며, 유압식 펌프가 움직였다. 해치가 천천히 내려가며 워치 포트리스의 웅대한 격납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게 솟은 아치, 공중을 떠다니는 서보 스컬, 자동으로 움직이는 서보-암과 흑요석처럼 새까만 조각상. 그러나 그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해치 앞에 두 줄로 늘어서 있는 검은 천사들이었다. 그들의 키는 카디보다도 한 뼘 이상 컸고, 어깨는 거의 두 배 넓이였다. 천사들의 대열 끝에는 수염이 하얗게 샌 천사가 긴 창을 들고 서있었다. 가이우스가 해치를 따라 내려가며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환대에 감사하오, 워치 커맨더." 

"그대는 곧 우리의 형제요, 인퀴지터." 


그의 목소리는 무겁고 날카로웠으며, 반짝이는 외눈에는 헤아리기 힘든 지혜가 담겨 있었다. 이봐요, 아가씨! 장엄한 천사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야나는 카디의 목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두 사람은 이미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야나는 황급히 해치를 뛰어 내려갔다. 그녀가 오른쪽 발을 내딛을 때마다 무거운 의족이 쿵 쿵 거리는 소리를 퍼트렸다. 


“작전 개요는 이미 들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소." 


워치 커맨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형제들을 파견할 것인가에 대해선 이견이 있소. 안쪽에서 자세히 이야기하도록 하지. 따라오시오, 인퀴지터." 


문득 야나는 시선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것은 검은 갑옷을 입은 천사들뿐이었고, 그들은 모두 헬맷을 쓰고 있었다. 그때 가이우스가 몸을 돌리고 그녀를 불렀다. 


"야나! 너는 여기 남아있도록." 

"네? 왜요?" 

"데스워치까지 투입하는 작전에서 네 이상론을 들어줄 여유는 없으니까. 이번 작전은 내 방식대로 진행할 것이다. 신속하고 확실하게. 실용적인 방법으로." 


네, 그러시겠죠. 야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생각했다. 사실은 그냥 내 생각을 듣고 싶지 않은 거겠지! 인퀴지터 가이우스는 언제나 실용적인 지휘관이었다. 그는 외계 종족들을 증오했고, 그들을 죽일 수 있는 기회는 절대 놓치지 않았지만 – 필요하다면 그들의 장비나 무기를 사용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가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은 언제나 효율이었다. 


하지만 야나는 달랐다. 야나는 황제의 빛에서 눈을 돌린 사람도 다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그녀의 가장 근본적인 믿음이었다. 덕분에 작전을 수립하는 날이면 야나는 언제나 가이우스와 말싸움을 벌였다. 물론 가이우스는 그녀의 상관이었고, 대부분의 작전은 그의 뜻대로 진행되었지만.

인퀴지터 가이우스와 워치 커맨더, 카디가 격납고 너머로 사라지자, 해치 앞에 서있던 검은 천사들도 각자 이동하기 시작했다. 야나는 거대한 천사들이 절도 있는 걸음으로 멀어지는 것을 한참 멍하니 지켜보았다. 


"어, 잠깐. 저는요? 저는 어디에 가있어야 하는 건데요?" 


뒤늦게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야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열에 참가했던 천사 중 하나가 아직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그 스페이스 마린을 향해 달려갔다. 그녀는 뛰면서 그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했다. 데스워치? 아니면 스페이스 마린? 


"저기, 저기 천사님!"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우스꽝스러운 호칭이었다. 그래도 그의 주의를 끄는 데는 성공한 모양이었다. 검은 갑옷을 입은 데스워치가 몸을 돌리며 물었다. 


+ 무슨 일인가, 어콜라이트 + 

"인퀴지터 님이 회의를 하시는 동안 제가 기다릴만한 곳이 없을까요?" 


기왕이면 요새 안내를 해주시면 더 좋구요! 라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천사는 잠시 고민하는 듯 멈춰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헬맷을 쓰고 있는 탓에 도통 표정이나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잠시 후 그가 몸을 돌렸다. 


+ 따라와라, 개인실로 안내해주겠다 + 

"아, 감사합니다!" 


야나는 활짝 웃으며 천사를 따라 걸었다. 검은 갑주를 입은 스페이스 마린의 걸음걸이는 상당히 빨랐지만 야나가 따라 걷기에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또다시 원인 모를 기시감이 그녀를 자극했다. 침착해, 야나. 그녀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인퀴지터의 수행원다운 점잖음을 보여주는 거야. 아주 조금이었지만 야나는 노력했다. 하지만 침묵 속에 걷기엔 워치 포트리스가 너무 넓었고,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다. 


"저기, 천사님. 천사님은 무슨 챕터에서 오신 건가요?" 


천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계속 걸었다. 

마치 무언가에 늦기라도 한 것처럼.


"천사님들은 일격에 오크를 두 동강 낼 수 있다는 게 사실이에요? 저도 오크랑 싸워봤지만, 그게 가능할 것 같지가 않더라구요. 그 놈들은 외계인이라기보단 맹수 같았어요." 


하지만 야나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더 강한 기시감. 


"카디 말로는 천사님들은 심장이 두 개라면서요? 그건 정말이에요?" 

+ 그렇다 + 


천사의 대답은 낮고 간결했다. 그가 대답해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야나는 깜짝 놀랐다. 좋아! 소통은 대화의 첫 걸음이지. 야나는 더욱 들뜬 목소리로 궁금했던 것들을 두서없이 내뱉기 시작했다. 


"그럼 방사능이나 독구름을 그냥 들이마실 수 있다는 건요?" 

+ 사실이다 +

"와… 그럼 심한 부상을 입으면 피가 얼어붙어 멈춘다는 것도 사실이에요?" 

+ 그래 + 


야나는 되는대로 궁금증을 털어놓았다.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고, 어느새 그녀는 개인실 앞에 도착했다. 데스워치 마린은 문을 열어주고 발을 돌렸지만, 야나는 어째선지 계속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성은 그녀에게 방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했지만, 감정이 멋대로 발을 움직였다. 천사는 다시 자신을 쫓아오는 야나를 힐끔 돌아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러지? 야나는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알 수 없었다. 어린 소녀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에, 야나는 과장된 몸짓으로 팔을 흔들며 말을 이어나갔다. 


"천사님들은 모두 굉장하네요! 전 그게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니, 거짓말이라기 보단 과장이랄까…. 신앙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사제들의 과장 말이에요. 공포를 모르는 죽음의 천사! 어떤 고난에도 의무를 져버리지 않는 고귀한 황제의 검!" 


턱. 갑자기 천사가 멈춰선 탓에, 연극이라도 하는 것처럼 팔을 휘저으며 이야기하던 야나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 했다. 하지만 오른쪽 다리의 평형 기능 장치가 작동해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천사는 이제 고개를 돌려 야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뭔가 잘못 말했나? 야나는 조심스럽게 천사를 마주보았지만, 헬맷 때문에 시선을 읽을 수가 없었다. 

천사가 다시 입을 열었고, 너무나도 짙은 기시감이 몰려들어 그녀의 시야를 흔들었다. 


+ 아니, 그렇지 않아. +


천사의 목소리는 조금 서글펐다. 


+ 나는 고귀하지도, 공포를 모르지도 않아. 나는.. +


천사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야나는 걱정과 두려움이 섞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뭔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손을 들어올렸다. 야나가 놀라서 몸을 움츠리자, 손이 야나의 눈높이에서 멈췄다. 무얼 하려는 거지? 야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천사를 바라보았다. 


천사는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세상이 빙글 도는 듯한 현기증에 그녀가 휘청거렸다. 오른다리의 평형 유지 장치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바닥에 쓰러졌을 것이 분명했다. 천사는 떨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올려 묶은 그녀의 은발도 바라보았다. 목덜미에 남은 상처의 흔적도. 기계로 대체한 그녀의 오른손과 오른발도. 이렇게나 컸는데도, 그녀의 머리는 너무나도 작아서 금방 부서질 것만 같았다. 


+ 돌아가라, 소녀 + 


야나는 천사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슬픔? 아니면 기쁨일까? 야나는 구분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입을 열어 대답하려고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밤. 우주의 차창 밖은 언제나 밤이었다. 슬프고 싸늘한 밤. 꿈속처럼 외롭지만 기쁜 밤. 


마치 예지 능력을 갖기라도 한 것처럼, 야나는 천사가 다음에 뭐라고 말할지 알고 있었다. 


+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말고 + 


천사는 그렇게 말한 뒤 발을 돌려 계속 걸어갔다. 천사의 마지막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흐렸다. 야나는 멍하니 서서 검은 갑옷을 입은 거인이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가 워치 포트리스의 그림자 속으로, 밤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소녀는 오랫동안 서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꿈결 같던 밤이 그녀를 덮치자, 야나는 이유도 모른 채 눈물을 흘렸다. 


아저씨. 그녀의 입이 멋대로 움직여 중얼거렸다. 

아저씨. 그녀는 계속 누군가를 부르며 울었다.

아저씨. 그녀는 손이 닿았던 은빛 머리를 감싼 채 계속 울었다. 


그게 누구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야나는 계속 울었다. 

지워진 기억이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있는 것처럼.


머리 위에 내려앉았던 무게는.


그 온기만큼은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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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종종 올리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