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거짓말


황제시여. 그 천사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당신 곁에 있나요? 아니면...





아르녹 아저씨. 


누군가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누가. 아르녹은 고개를 갸웃한다. 그가 사랑했던 형제와 전우들은 모두 죽었다. 하이브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거인. 이 구덩이 속에선 그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그를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 속에는 경멸과 공포가 담겨 있었다. 위대한 크림슨 세이버의 챕터 마스터에서 따온 이름은 제국의 기록에서도, 시민들의 입 속에서도 잊혀졌다. 아르녹은 고개를 들어 빛나는 수도원을 다시 바라본다. 수도원은 무너지고 있었다. 그의 기억 속처럼 아름답게. 


잠들어라, 거인아. 노력은 부질없음을 잘 알지 않느냐? 안식은 축복이다. 받아들여라.


붉은 로브를 입은 마법사의 말은 매혹적이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소리들이 그를 잡아끌어 고개를 돌렸다. 그럴지도. 아르녹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노력이 무엇을 바꾼 적이 한번이라도 있던가? 수도원의 바닥을 이룬 이 빠진 벽돌들이 하나씩 녹아내린다. 그 아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심연이었다. 드높은 아치가 무너지고, 엄숙한 조각상들이 뒤틀리고, 책과 양피지가 먼지로 변한다. 빛의 기둥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하이브컬트는 다 거짓말쟁이에요. 축복도 거짓말이구요. 

눈을 감으면 그렇게 바라던 황제가 네 곁에 있으리라. 너는 영원히 별빛 속에서 꿈꿀 수 있으리라. 그걸 원하지 않았느냐?


원했다. 아르녹은 생각한다. 목소리는 계속 그를 향해 다가왔다. 하지만 붉은 마법사가 굳센 방파제처럼 그 앞을 막아선다. 쏴아. 여린 파도 같은 목소리는 자꾸만 그 방벽에 부딪치고, 귓가에 닿기 전 포말을 그리며 무너진다. 아르녹은 귀를 기울여 덧없는 거품을 쫓으려 애썼다. 색으로 표현한다면 그 목소리의 색은 은빛이리라. 누구지? 기억이 날 것도 같았다. 


황제 폐하도, 천사도, 별도 다 거짓말이에요. 

잠이 들면 모두 네 것이다. 고통에서 눈을 돌리고 도망치기만 하면. 그러니 거인아….


아르녹은 목소리에 다가가려고 애썼다. 하지만 붉은 마법사의 단어가 뱀처럼 그의 발을 휘감는다. 그는 무어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지독한 피로로 턱 끝이 떨려서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내뱉을 수가 없다. 찬란하게 반짝이는 빛의 기둥이 세 발짝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어째선지 은빛 목소리가 너무나도 슬프게 들린다. 


이제 잠들어라. 내가 허락해주겠다. 의무를 내려놓고 영원히 잠들거라.

그럼 누가 우리를 지켜주는 거죠? 


그리고

유령들의 목소리가 돌아와 대답했다. 


천사가 너를 지킬 것이다.  


우미디아에서부터 그를 쫓아온 목소리. 그러나 목소리가 색으로 변하는 것을 바라보며 아르녹은 깨달았다. 정글에서 그들을 광기로 몰아넣은 악마의 저주는 아주 오래 전에 사라져 있었음을. 함선에서 도망친 이후부터 유령들의 목소리는 아르녹의 색을 띄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목소리였고, 그의 생각이었다. 아르녹은 다시 입을 연다. 낱말이 이어져 색을 만든다. 


"천사가 너를… 지킬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심해처럼 새까만 죄책감을 헤치고 목구멍을 기어 올라왔다. 은빛 목소리가 흔들리며 짧지만 아름다운 기억을 만든다. 등 뒤에서 찰랑이던 머리칼. 슬프게 웃을 때면 파르르 떨리던 입꼬리. 두려울 때면 커다랗게 뜨던 눈동자, 쓰레기나 다름없는 음식을 가득 집어넣고 오물거리던 볼, 찬바람에 자꾸만 찢어지던 입술, 그의 옷자락을 붙잡던 하얀 손가락. 너무나 작아서 쓰다듬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던 은빛 머리. 그래서 손을 올리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던 작은 머리. 아르녹은 바닥에 떨어트렸던 검을 잡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왜 움직일 수 있지? 잠들어라, 거인아. 잠들어!

"…내 이름은 거인이 아니야." 


어떻게? 왜? 아르녹은 그 질문을 너무 많이 했다. 너무나 많이. 스스로에게 했던 그 질문들이 녹아내리는 수도원과 함께 심연 속으로 사라진다. 마른 물감을 뜯어내듯, 환상이 조금씩 사라지며 추악한 현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쓰러진 조각상은 락그라인더로. 아름다운 아치는 부서진 벽의 그림자로. 양피지와 책은 잘려나가 피를 흩뿌리는 사지로. 그의 코앞까지 다가온 빛의 기둥은 보랏빛 갑각으로 뒤덮인 진스틸러로. 놈이 추악한 발톱이 달린 팔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마법사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더이상 놈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파고들지 않았다. 


"이건 말도 안돼. 나는 네 공포를 봤어! 두려움 속에서 익사하는 것을 느꼈는데!"

“나는 적을 추수하는 검이요, 별을 쫓는 사냥꾼이니." 


아르녹은 잃어버린 챕터의 경구들을 되뇌며 땅에 떨어진 두 자루의 검을 집어 들었다. 왼쪽에서 날카로운 발톱이 날아온다. 그러나 그가 더 빠르다. 아르녹은 짧은 검을 역수로 들고 사선으로 휘둘렀다. 피와 비명이 그의 얼굴로 튀어오른다. 잘린 손가락이 땅에 떨어진다. 두 번째 진스틸러도 손톱을 세워 그를 향해 찌르고 있다. 아르녹은 오른손에 든 파워 소드를 수직으로 휘둘렀다. 놈의 손이 절반으로 잘려나가며 피가 검을 적신다. 


"놈을 죽여! 죽이라고!"

"우리의 검날은 핏빛으로 붉도다." 


아르녹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쓰러지는 적들 사이로 세 번째 진스틸러가 달려온다. 놈은 공중으로 뛰어올라 그에게 팔을 휘두른다. 아르녹은 오른손의 파워 소드로 공격을 막아내고, 반 걸음 뒤로 물러나 놈의 무게를 흘린다. 그를 지나친 진스틸러의 몸이 뒤쪽으로 낙하하기 시작한다. 아르녹은 왼손의 부러진 파워 소드를 뒤로 젖힌 뒤 반원을 그리며 휘둘렀다. 중력이 그의 일을 도와주었다. 놈의 시체가 바닥을 구르며 대성당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피가 분수처럼 솟으며 점과 곡선으로 이루어진 그림을 그린다. 


"내 이름은 아르녹 세르바트." 


아르녹은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피와 불길이 그의 등 뒤에서 춤을 췄다. 높은 아치의 그림자가 붉은 갑옷 위에 짐승 같은 줄무니를 만들고 있었다. 마구스 세데스 드라큐벨드는 처음으로 순수한 공포를 느꼈다.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나는 죽음의 천사이니" 


누군가 거인에게 거미줄 권총을 발사했다. 거인은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공중에서 펼쳐진 끈적이는 하얀 그물이 순식간의 거인의 헬맷과 갑옷을 뒤덮었다. 마구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낮게 웃었다. 거인의 하얀 어깨 너머로 위대한 태조가 검은 천사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니 공포가 조금 잦아들었다. 마구스는 증오를 힘으로 바꾸어 강력한 정신 충격파를 발사했다. 거미줄 속에 갇힌 거인의 발치가 잠깐 흔들렸다. 불쌍한 거인의 정신은 공포 속에서 산산이 부서지리라. 마구스는 미소를 지으며 숨을 골랐다. 


뚜둑. 


하얀 거미줄이 뜯겨나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르녹은 앞으로 나아가며, 수천 번 되새겼던 문구를 다시 외쳤다. 수많은 제국민들이, 야나가 믿었던 단어들. 그가 기만이라고 생각했던 문장. 그러나 갑옷을 다시 입었을 때와 달리,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르녹은 그 문구 속에 담긴 진정한 뜻을 알 수 있었다. 



I SHALL KNOW NO FEAR

나는 공포를 견디는 법을 아노라



두 자루의 역장이 번뜩이자 앞쪽의 거미줄이 하얀 가루로 변해 떨어졌다. 아르녹이 달리자 등 뒤에 아직 매달린 거미줄들이 부러진 날개처럼 휘날렸다. 놈을 막아! 비명처럼 마구스가 소리쳤다. 일곱 마리의 변이체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고, 아홉이 죽었다. 


아무도 다시 날개를 펼친 추락자를 막지 못했다. 마구스는 다시 그에게 강력한 최면 싸이킥을 쏘아냈다.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두려움과 절망을 속삭였다. 그러나 천사는 멈추지 않았다. 천사는 망치와 탄환을 피하고, 변이체들의 팔을 자르고, 머리를 쪼개며 다가왔다. 어느새 거인의 그림자가 마구스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그는 검을 어깨 높이로 들어올리고 있었다. 더 이상 위대한 태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건 말도 안돼. 이건…!"


아르녹은 공포에 떠는 마구스의 가슴에 칼을 꽂아 넣었다. 등 뒤로 솟아나온 칼끝이 증발하는 피로 빨갛게 타올랐다. 붉은 로브를 입은 싸이커는 한 움큼 피를 토한 뒤, 손을 부들거리다 축 늘어졌다. 그의 손에서 강철 지팡이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대성당의 종소리처럼 청아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나는 훨씬 더 끔찍한 목소리를 들어왔다, 마녀." 


아르녹은 검을 뽑았다. 대성당의 잔해 속에 몸을 웅크린 보랏빛 그림자들은 그를 피해 도망치고 있었다. 그는 다시 출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소녀에게 돌아갈 시간이었다. 





==





괴수의 날카로운 손톱이 스톰쉴드의 역장을 두드릴 때마다, 썬더해머로 얻어맞는 것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한번이라도 제대로 맞으면 끝장나겠군. 늑대처럼 날카로운 감각이 위험을 알렸고, 레드메인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놈의 손이 허공을 가르며 섬뜩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레드메인은 전투의 흥분으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도끼를 휘둘렀다. 서슬이 퍼런 도끼날이 놈의 오른쪽 팔 중 하나에 적중했다. 놈의 갑각은 단단하긴 했지만, 파워 엑스의 역장을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놈의 반응이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레드메인은 도끼가 근육을 자르고 뼈에 박히기 전 놈의 팔이 반대쪽으로 홱 꺾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도끼를 다시 끌어당길 틈도 없이 놈이 손등으로 레드메인의 얼굴을 후려쳤다. 공처럼 튕겨나간 레드메인은 충격에 기절할 뻔 했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았다. 


부러진 코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입 안은 이미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고, 혀 위에 돌 부스러기 같은 것이 굴러다녔다. 이빨 몇 개가 으스러진 모양이였다. 레드메인은 고개를 돌려 피를 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괴수는 그를 비웃듯이 아까 그 자리에 멈춰서 혀를 날름대고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레드메인은 공포 때문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위대한 러스시여, 이게 마지막 싸움이 되지 않도록 해주소서. 그는 폐허 아래쪽에 쓰러져 있는 라구엘을 힐끔 돌아보았다. 사자 새끼랑 같이 죽었다간 선조들한테 된통 욕을 먹게 될 겁니다. 


"팔이 너덜거려 겁이라도 나더냐? 덤벼라, 이 괴물 자식아!"  


사실 너덜거리는 것은 레드메인 쪽이었지만, 오히려 그는 도끼로 스톰 쉴드를 두드리며 괴수를 도발했다. 만약 여기서 죽게 된다면, 펜리스 전사답게 웃으며 싸우다 죽으리라. 괴수가 손을 들어 올리자 다시 보랏빛 번개가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레드메인은 재빨리 몸을 웅크린 채 스톰쉴드를 내밀었다. 커다란 방패의 역장이 크게 요동치며 네 줄기의 번개를 튕겨냈다. 번개가 멎자마자 달려들겠지. 레드메인은 생각했다. 하지만 번개의 빛과 방패의 그림자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괴수는 날렵하고 민첩했지만, 육중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발밑이 희미하게 요동쳤다. 번개와 역장이 부딪치며 튀기는 불똥의 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진동이 움직이고 있었다. 오른쪽… 아니 왼쪽. 레드메인은 침을 삼켰다. 세 걸음. 전류가 날뛰는 소리가 거의 사라졌다. 두 걸음. 레드메인은 다리에 힘을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걸음. 그가 눈을 뜨자 놈이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괴수는 첫 번째 손을 수평으로 휘두르며, 반대쪽의 다른 손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쳤다. 레드메인은 방패를 들어 올려 첫 번째 공격을 막고, 그 충격을 추진력 삼아 측면으로 이동하며 두 번째 공격을 피해냈다. 그러나 괴수도 기민하게 반응했다. 놈은 레드메인과 반대 방향으로 몸을 회전하며 꼬리를 휘둘렀다. 레드메인은 스톰쉴드를 가슴 높이까지 치켜든 채 정면에서 꼬리를 받아냈다. 전속력으로 달려온 라이노에 부딪친 것 같은 충격과 함께 레드메인의 몸이 한참을 뒤로 밀려났다. 방패를 든 왼팔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고 어깨도 화끈거렸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레드메인은 도끼를 내리쳤다. 놈의 꼬리가 반쯤 잘려나가며 피가 사방에 흩뿌려졌다. 


놈이 고막이 터질 것 같은 괴성을 내질렀다. 한번만 더 내리치면 꼬리를 끊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레드메인은 욕심을 부리지 않고 한 발짝 물러섰다. 어디선가 인간 소녀의 비명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하지만 고개를 돌릴 여유는 없었다. 고통에 울부짖는 괴수는 몸을 웅크리고 세 번째 손으로 그의 다리를 노렸다. 스톰 쉴드의 방향을 돌려 막기에는 너무 낮은 위치였다. 레드메인은 도약해서 그 공격을 피해내며 괴수의 머리를 향해 도끼를 내리찍었다. 그러나 도끼가 놈의 머리에 닫기 전, 정면에서 네 번째 팔이 그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레드메인은 황급히 방패를 끌어 당겼지만 놈이 좀 더 빨랐다. 빌어먹을! 그는 이를 악물고 몸을 뒤틀었다. 


다이아몬드처럼 날카로운 손톱이 검은 갑주에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괴수는 그대로 공중을 향해 팔을 세차게 들어올렸다. 으드득. 갑옷의 일부가 뜯겨나가는 소리와 함께 레드메인이 공중에서 팽이처럼 회전하며 뒤로 날아갔다. 쾅 하고 등이 커다란 리만 러스의 잔해에 부딪쳤다. 레드메인은 숨을 헐떡이며 다시 자세를 잡고 일어섰다. 괴수가 다시 다가오고 있었다. 놈이 주먹을 쥐자 스페이스 울프의 상징이 그려진 숄더 패드가 종이처럼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그는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리만 러스의 차체가 길을 막고 있었다. 도망칠 곳도 없군. 레드메인은 입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어깨를 꿰뚫린 탓에 도끼를 든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적어도 아버지의 이름을 딴 전차 아래서 죽는다는 건 서사시로 남을만한 죽음이리라.


"누가 이 광경을 전해줄 수만 있다면 말이지!" 


괴수가 썬더울프처럼 맹렬한 기세로 레드메인에게 달려들었다. 놈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네 개의 손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레드메인은 리만 러스에 등을 댄 채 일곱 번의 공격을 연속으로 받아냈다. 잠깐의 틈을 노리고 도끼를 휘두르려 했지만, 끝이 너덜거리는 꼬리가 그의 손을 후려쳤다. 레드메인의 손아귀에서 도끼의 손잡이가 미끄러졌다. 다시 다섯 번의 발톱을 받아내자 스톰 쉴드의 역장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그가 공격을 막아낼 때마다 충격의 여파로 리만 러스의 차체가 들썩였다. 


여섯 번째 공격을 막아냈을 때, 스톰 쉴드가 연기를 내뿜으며 작동을 멈췄다. 놈이 승리를 직감한 듯 으르렁대며 등을 곧게 폈다. 제기랄! 레드메인은 고개를 숙여 다음 발톱을 피해낸 뒤, 방패의 모서리로 너덜거리는 놈의 꼬리를 내리찍었다. 뼈가 부러지고 살이 으깨지는 소리와 함께 가시가 달린 꼬리가 잘려나갔다. 레드메인은 만족감에 입술을 핥으며 소리쳤다. 혀끝에 부러진 송곳니가 닿았다. 


"날 죽이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이 둔한 벌레 새끼야!" 


이번 공격은 괴수를 제대로 자극한 모양이었다. 놈은 분노에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오른팔을 높이 들어올렸다. 가장 크고 날카로운 발톱이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레드메인의 동물적인 감각이 전력을 다해 울부짖었다. 피해야 했다. 레드메인은 반사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등에서 단단한 전차의 차체가 느껴졌다. 이런 제기랄. 놈이 손을 내리찍었고, 레드메인은 온 힘을 다해 옆으로 몸을 날렸다. 콰드득. 생전 들어본 적 없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리만 러스의 차체가 괴수의 발톱 모양으로 뜯겨나갔다. 


"안돼, 저리가!"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레드메인은 고개를 들어 뜯겨나간 전차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작은 소녀가 몸을 웅크린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손톱 끝에 스친 것인지 소녀의 가슴 부분부터 쇄골 위까지 이어진 상처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녀의 손과 다리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 소녀의 손과 다리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 소녀의 존재는 괴수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잠시 공격을 멈추고 소녀를 바라보며 혀를 날름거렸다. 몸을 웅크린 소녀는 괴수의 주먹 하나보다도 작아보였다. 하이브 거주민? 레드메인은 침을 삼켰다. 어차피 그가 받은 명령은 모든 거주민까지 죽이라는 것이었다. 레드메인도 그것이 외계 감염의 가능성을 완벽히 제거하는 방법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 은발 머리의 소녀는… 아직 순수해보였다. 레드메인의 머리에 옛 전장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곳도 여기처럼 하이브 행성이었다. 불과 황무지로 가득 찬 아마겟돈. 


괴수가 소녀를 짓이기려는 듯 팔을 들어 올리는 것은 본 순간, 레드메인은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제발 다시 작동해라, 이 고철 덩어리야!' 


그는 필사적으로 스톰 쉴드의 역장 가동 버튼을 누르며, 괴수의 발톱 앞으로 뛰어들었다. 다음 순간 방패에 다시 푸른빛이 일렁였다. 역장이 퍼져간다. 발톱이 내리 떨어져 방패와 부딪친다. 소녀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난다. 방패의 역장이 사납게 불똥을 튀기며 깜빡인다. 엄청난 무게에 레드메인이 무릎을 꿇는다. 손톱이 역장을 꿰뚫고 방패의 몸체에 닿는다. 


서걱. 


레드메인은 자신의 팔이 스톰 쉴드 손잡이를 거머쥔 채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피와 고통은 한 발 늦게 느껴졌다. 레드메인은 잘린 손목을 붙잡고 싶었지만, 오른손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괴수는 승리의 포효를 내지르며 레드메인을 걷어찼다. 레드메인은 리만 러스의 벽면을 따라 몇 미터를 밀려난 뒤 바닥에 처박혔다. 


"빌어먹을…." 


괴수의 발걸음에 바닥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끼기긱 끼긱. 놈이 발톱으로 리만 러스의 차체를 긁으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레드메인은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힘이 빠진 오른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결국 일어서는 걸 포기하고 고개를 들자 괴수의 하체가 눈에 들어왔다. 놈은 한 손으로 소녀를 붙잡고 있었다. 마치 그가 소녀를 구할 수 없음을 조롱하듯, 놈은 입을 열고 긴 산란관을 늘어뜨렸다. 소녀가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지만, 그때마다 소녀의 팔과 어깨에 상처만 늘어갈 뿐이었다. 소녀를 붙잡은 팔에는 그가 도끼로 찍은 상처가 남아있었다. 소녀만 구하려 하지 않았다면 완전히 잘라낼 기회가 있었을지도. 레드메인은 괴수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라구엘 놈이 인퀴지터 말을 들으라고 그렇게나 말했는데. 


'어차피 사자 새끼 말을 따르는 건 성미에 안맞으니까.' 


괴수의 그림자가 손을 들어올렸다. 레드메인은 길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런데 바닥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뭔가가 계속 다가오고 있었다. 빠르고, 육중한 무언가가. 마치…. 


"로그혼의 기억, 그리고 테라의 영광을 위해!" 


그래. 마치 스페이스 마린 같은. 

레드메인은 눈을 떴다. 

붉은 천사가 날아들었다. 




==




그 괴수는 아르녹이 마주쳤던 어떤 변이체보다도 거대했다. 부서진 중화기와 변이체들의 시체를 넘어 달리는 동안, 아르녹은 놈이 리만 러스의 차체를 뜯어내는 것을 지켜보았다. 안 돼.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데스워치 마린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오히려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괴수는 쓰러진 스페이스 울프를 걷어찬 뒤 소녀를 붙잡았다. 


괴수가 산란관을 빼내는 것을 본 순간, 분노가 그를 지배했다. 아르녹은 그렇게 빨리 달려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그렇게 달릴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검고 붉은 선으로 변한 풍경이 그의 등 뒤로 지나갔다. 아르녹은 순식간에 로브를 쓴 데스워치 마린과 중형 착암기를 들고 있는 교단원 시체를 뛰어넘고, 리만 러스가 있는 언덕을 올랐다. 아직도 사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의 소음이 그의 발소리를 흐리게 만들었다. 괴수는 그를 눈치 채지 못한 듯 쓰러진 스페이스 울프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놈이 걸을 때마다 피에 젖은 야나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언덕의 정상에 도달하자 아르녹은 검을 들어 올린 채, 전투 함성을 외치며 도약했다. 


괴수는 몸을 돌리고, 방패로 삼으려는 듯 야나를 쥔 손을 들어올렸다. 야나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르녹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놈의 팔을 똑바로 노려보며, 힘껏 당긴 팔을 내리쳤다. 검은 정확히 레드메인이 남긴 상처에 내리꽂혔다. 


팔이 떨어진 괴수가 고통의 괴성을 내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아르녹은 아직 펄떡거리는 손목을 발로 짓누른 채, 괴수의 손아귀에서 야나를 빼냈다. 야나의 어깨와 팔, 다리에는 커다란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야나는 아르녹이 입고 있는 파워 아머의 다리 위에 떨리는 손을 올렸다. 


"아… 아르녹 아저씨에요?" 


아르녹은 소녀를 바라본 뒤 언제나처럼 짧게 대답했다. 괴물이 고통을 견뎌내며 자세를 바로하고 있었다. 


"그래." 

"아저씨도 천사였어요?" 

"그래." 

"하지만… 그럼, 어…." 


아르녹은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하는 야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헬맷을 쓰고 있으니 그의 미소는 들키지 않았으리라. 가능하다면 오랫동안 이렇게 서있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았다. 아르녹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 위에 올렸다. 너무나 작은 머리 위에. 


"숨어서 기다려라, 소녀. 금방 해치우고 따라가겠다." 


소녀의 눈에 한 순간 눈물이 맺힌다. 거짓말쟁이. 아까도 그렇게 말했으면서. 야나는 조그맣게 중얼거렸지만, 아스타르테스의 청력은 목소리의 떨림까지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괴수는 이제 완전히 몸을 일으킨 상태였다. 놈이 포효하려는 듯 등을 곧게 피고 발을 구르는 것이 보였다. 아르녹은 소녀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어서!" 


아르녹의 고함에 소녀가 눈물을 닦으며 홱 뒤돌아섰다. 그녀가 마지막에 뭐라고 말했던 것 같지만, 괴수의 포효 소리가 모든 소리를 지워버렸다. 아르녹은 숨을 고르며 두 자루의 검을 단단히 붙잡았다. 이 괴수는 데스워치 분대 하나를 전멸시킨 것처럼 보였다. 이길 수 있을까? 아르녹은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여기서 쓰러지면 야나도 죽게 될 것임은 분명했다. 아르녹은 폐허 밑으로 뛰어내려가고 있는 야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은빛 머리칼이 불길 속에서 찰랑였다. 


야나가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괴수가 쇄도해왔다. 놈은 세 개의 발톱을 무시무시한 기세로 휘둘렀다. 아르녹은 침착하게 한 걸음 씩 물러나며, 검을 비스듬히 기울여 공격을 흘려내는데 집중했다. 괴수의 발톱은 힘으로 막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발톱이 검의 표면을 스칠 때마다 역장이 비명을 질렀고, 화학적인 섬광이 거세게 요동쳤다. 하지만 아르녹은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맹공이 끊임없이 날아들었다. 다섯 번, 여섯 번. 그는 괴수의 발톱을 막아내면서 반격의 기회를 엿보았다. 


먼저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쪽은 괴수였다. 놈은 짜증 섞인 괴성을 지르며, 오른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근육이 수축하며 손 끝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르녹은 오른손에 든 파워 소드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숨을 들이쉬었다. 탄환처럼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괴수의 발톱이 사선으로 내리꽂혔다. 검과 발톱이 부딪치며 다시 빛과 어둠이 번갈아 찾아왔다. 파워 소드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검이 부러질 것 같았다. 그러나 아르녹은 공격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는 검을 비틀어 괴수의 팔을 뒤쪽으로 넘기며 한 걸음 나아갔다. 발톱이 검과 떨어지며 땅에 박힌 순간, 아르녹은 한 바퀴 선회하며 검을 휘둘렀다. 파워 소드는 놈의 오른팔의 관절 부분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부러진 검이 가슴의 갑각을 잘라냈다. 놈이 비명을 질렀지만, 둘 다 치명상이라기엔 너무 얕았다. 


아르녹은 이제 놈의 품 안에 들어온 형국이었다. 첫 번째 공격은 아르녹의 오른쪽에서 시작됐다. 아르녹은 상체를 뒤로 젖혀 공격을 피해냈다. 곧장 등 뒤에서 발톱이 날아왔다. 아르녹은 앞쪽으로 구르며 놈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두 자루의 검이 다시 번뜩였다. 그러나 다리의 갑각은 상체보다 훨씬 단단했고, 역장은 갑각 끝자락에 간신히 생채기를 남기는데 그쳤다. 아르녹이 몸을 웅크린 채 자세를 잡은 순간, 놈이 그를 짓밟으려는 듯 발을 들어올렸다. 아르녹은 다시 앞으로 몸을 날리며 공중에서 검을 휘둘렀다. 가까이 있던 꼬리가 검의 궤도에 걸렸다. 몇 바퀴를 구르던 아르녹은 땅에 다시 발이 닫는 순간 미끄러지듯 멈췄다. 튀어 올랐던 피가 그와 괴수 사이에 떨어져 내려 긴 점선을 만들었다. 


고통 때문에 중심을 잃은 괴수가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는 것이 보였다. 놈은 빠르고 강력했지만, 조금씩 상처입고 있었다. 승산이 있었다. 아르녹은 숨을 고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자세를 고쳐 잡았다. 쓰러졌던 괴수는 비틀거리며 몸을 돌리고, 거리를 좁히려는 듯 몸을 웅크렸다. 왼쪽? 아니면 정면? 아르녹은 경우의 수를 계산해보았다. 어느 쪽이든 공격을 받아낸 뒤 반격을 시도할만한 공간이 충분했다. 아르녹은 입술이 바짝 말라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상처를 입히면 치명상을 가할 수….


그 순간 선명한 보랏빛이 번뜩이며 번개가 날아들었다. 아르녹이 반사적으로 들어올린 검이 첫 번째와 두 번째 번개 줄기의 궤도를 틀었다. 하지만 세 번째 번개는 아르녹의 왼쪽 다리를 관통했다. 네 번째 번개는 오른 어깨였다. 격통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번개가 지나간 자리의 금속이 빨갛게 녹아내리며 상처 위에 떨어졌다. 아르녹은 비명을 지르며 왼쪽 무릎을 꿇었다. 파워 소드의 손잡이가 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른손에 감각이 없었다. 


괴수가 다가오고 있었다. 커다란 그림자가 그를 덮었다. 괴수의 발이 역장이 사라진 파워 소드를 짓밟는다. 아르녹을 오랫동안 기다려주었던 검은 허망할 정도로 쉽게 부서졌다. 아르녹은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괴수는 손을 뻗어 그를 낚아챘다. 전차 바퀴에 깔린 것 같은 압력에 낡은 파워 아머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콰득, 백 팩의 배출구가 부서진다. 오른팔이 뒤틀렸다. 아퀼라가 갈려나간 가슴이 갈비뼈를 부술 듯 조여오기 시작했다. 아르녹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내려 애썼다. 괴수는 그 모습을 보며 수백 개에 달하는 이빨을 드러내고 낮게 웃었다. 멍청한 놈. 놈이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입 안에 산란관이 길게 늘어지며 아르녹의 목을 향해 다가왔다. 


"아저씨에게서 떨어져!" 


총알이라기보다는 화살이 날아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야나가 변이체 중 하나가 사용하던 니들 피스톨을 주워들고 언덕으로 돌아와 있었다. 작은 다트들이 부질없이 괴수의 갑각에 튕겨나갔다. 그 중 몇 개가 갑각 사이의 살갗에 적중했지만, 괴수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괴수가 다시 으르렁거렸다. 나약한 소녀의 부질없는 저항을 보며 비웃듯이. 독이 퍼지기 전까지는. 니들 피스톨의 다트에 발린 독이 퍼져나가자, 괴수의 몸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아르녹은 파워 아머를 조여오던 손아귀의 힘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놈은 야나를 보고 있었다. 기회는 지금 뿐이었다. 아르녹은 사력을 다해 왼팔을 들어올렸다. 부러진 검에서 파란 역장이 일렁였다. 괴수의 숨결이 느껴졌다. 충분히 가까운 거리였다. 


"도망쳐라, 소녀!" 


아르녹은 고함을 내지르며 괴수의 눈에 부러진 검을 꽂아 넣었다. 피와 안구액이 아르녹의 헬맷 위로 터져 나왔다. 그러나 괴수의 뇌를 관통하기엔 검의 길이가 짧았다.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괴수는 아르녹을 내던졌다. 아르녹은 수십 미터를 날아가 언덕 아래쪽으로 떨어졌다. 바닥을 구를 때마다 찌그러진 파워 아머가 그의 가슴을 찔렀다. 쿨럭. 갈비뼈가 박살났다. 헬맷도 어디론가 날아간 모양이었다. 고통에 머리가 멍했다. 놈은 어디 있지? 눈앞이 안개가 낀 것처럼 흐렸다. 아르녹은 본능적으로 괴수가 울부짖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린 채, 무기를 쓸 수 있는 물건을 찾기 위해 바닥을 더듬었다. 무언가 익숙한 것이 그의 팔에 닿았다. 


도망쳐야 해. 야나는 생각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괴수가 고통의 비명을 내지른 순간, 리만 러스 안에 있을 때처럼 다리가 얼어붙었다. 야나는 아르녹이 장난감처럼 멀리 날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피하라는 아르녹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게 전부였다. 괴수는 한쪽 눈을 가린 채 고통 속에서 닥치는 대로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저씨 말을 따라야 해. 피해야. 그때 괴수의 손이 바닥을 후려쳤고, 놈이 앞서 뜯어냈던 리만 러스의 잔해가 야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아."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파편들이 그녀의 오른손과 오른다리를 관통해 지나갔고, 둔탁한 잔해가 그녀의 가슴을 강타했다. 야나는 자신의 갈비뼈가 부러지고, 살이 잘려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비명을 지르거나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다. 소녀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구르다 쓰러졌다. 아저씨. 소녀는 마지막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뒤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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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는 어디있지? 아르녹은 언덕 아래에서 눈을 깜빡이며 소녀를 찾으려 애썼다. 자꾸만 흘러내리는 피가 그의 시야를 방해했다. 야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언덕 위에 보이는 거라곤 광분해 날뛰고 있는 괴수뿐이었다. 정신을 되찾으면 놈은 소녀를 쫓아가 죽이거나, 감염자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지금 처치해야만 했다. 하지만 아르녹은 걸을 수 없었다. 꺾인 왼발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른손은 간신히 움직일 수 있을 정도였다. 그에게 남은 기회는 많지 않았다. 


아르녹은 숨을 들이쉰 뒤, 온 힘을 다해서 짐승 같은 괴성을 내질렀다. 목 안에서 피거품이 올라와 기침을 해야만 했다. 그의 고함은 길지 않았지만, 괴수의 주의를 끌기엔 충분했다. 괴수는 난동을 멈추고 자신의 눈을 빼앗은 적을 증오스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상처 입은 먹잇감이 시체와 폐허 속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파란 빛을 내뿜는 검도 없었다. 갈가리 찢고, 가르고, 부숴라. 괴수의 본능이 소리쳤다. 괴수는 아르녹을 향해 마주 포효하며 언덕 끝자락까지 달려간 뒤, 아르녹을 향해 도약했다. 


아르녹은 떨리는 오른손으로 버튼을 누르고 패들을 당겼다. 1초. 낮은 회전음이 들린다. 천사와 괴수는 분노와 증오에 찬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2초. 허밍에 가까웠던 소리가 거칠고 사나워진다. 괴수가 구름이라도 되는 양 천사 위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르녹은 왼손으로 전방 손잡이를 붙잡았다. 3초. 소음은 포효로 바뀌고, 유압 실린더와 압력 펌프가 연기를 내뿜는다. 괴수는 이제 아르녹의 바로 위에 있었다. 놈이 세 개의 발톱을 동시에 치켜들었다. 


그리고 아르녹은 시체와 잔해 속에서 중형 착암기를 들어올렸다. 


착암기의 삼중 드릴이 충분한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선 3초의 구동 시간이 필요했고, 아르녹은 그것을 소리로 구분할 수 있었다. 그가 다시 패들을 당기자, 요동치던 드릴 날이 만개하는 꽃처럼 입을 벌렸다. 아르녹은 놈의 눈동자가 공포로 물드는 것을 보았다. 괴수는 궤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중에서 몸을 비틀었지만,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중력이 그를 드릴 위로 끌어당겼고, 이어서 갑각과 뼈, 살이 갈려나가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르녹은 이를 악문 채 괴수의 무게를 견뎌냈다. 모래처럼 갈려나간 살점과 갑각이 그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피가 비처럼 소나기가 되어 쏟아졌다. 아르녹은 괴수가 비명을 지르며 날뛰는 것을, 천천히 힘을 잃는 것을, 그리고 핏덩이가 되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철퍽.


그리고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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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앞의 전투는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끝난 상태였다. 마리우스 헥터는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패트리아크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레드메인의 킬-팀이 해낸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놈의 가슴에는 광산 작업용 착암기가 박혀 있었다. 이런 저급한 장비를 사용법을 아는 데스워치 요원은 없었다. 전장 곳곳에는 킬-팀 레드메인의 분대원들이 쓰러져 있었다. 넷이 죽었고, 다섯은 극심한 부상 때문에 반-동면 상태에 빠져 있었다. 레드메인은 어디있지? 마리우스는 분대원들에게 형제들을 수습하라고 명령한 뒤, 리만 러스의 잔해가 눈에 띄는 언덕 위에 올라섰다. 


마리우스는 그곳에서 레드메인을 발견했다. 그는 한 팔이 잘린 채 구석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라라맨의 장기 덕분에 피는 이미 멎은 듯 했다. 그곳에는 또다른 스페이스 마린도 있었다. 저 붉은 빛이 본래 파워 아머의 색일까, 아니면 온 몸에 뒤집어쓴 피 때문일까? 마리우스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의 모습은 참혹했다. 파워 아머는 곳곳에 구멍이 뚫린 채 뒤틀려 있었고, 갑옷은 안쪽에서 새어나온 피로 흉측하게 얼룩져 있었다. 오른팔은 아예 파워 아머의 틈새 바깥으로 뼈가 튀어나온 상태였다. 마리우스는 이 천사가 패트리아크를 쓰러트렸음을 직감했다. 


붉은 스페이스 마린은 작은 소녀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쓰러진 소녀 역시 심각한 상태였다. 은발 머리는 피에 젖어 검붉게 변한 상태였고, 한쪽 다리는 깔끔하게 잘려나간 상태였다. 오른손은 손가락 세 개가 없었고, 팔목도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찢겨진 옷자락 사이로 새빨간 피멍이 든 가슴이 보였다. 가슴의 굴곡이 뒤틀린 것이 갈비뼈가 여럿 부러진 모양이었다. 소녀는 아직 숨이 붙어있었지만,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 분명했다. 스페이스 마린은 온전한 소녀의 왼손을 붙잡은 채 기도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 제발 부탁드립니다. 만약 제가 당신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그걸 이 아이에게 주십시오. 단 한번만. 단 한번만 제 기도에 응답해주소서. 그리하면 저는 더 이상 원망하지 않겠나이다. 그리하면 저는 죽음으로 속죄하겠나이다. 

 

"스페이스 마린." 


마리우스가 그를 불렀다. 붉은 마린이 고개를 돌린다. 마리우스는 그의 표정에서 절망과 회한을 느낄 수 있었다. 일그러진 볼을 타고 눈물인지 핏물인지 모를 것이 흘러 내렸다. 


"나는 데스워치 킬-팀 헥터를 지휘하는 임페리얼 피스트의 마리우스 헥터라고 한다. 소속과 이름을 밝혀라." 

“나는… 크림…슨 세이버 챕터의 아르녹 세르바트…." 


아르녹의 목소리는 힘겨웠고, 피거품 때문에 부글거려서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마리우스는 그를 향해 한 발짝 나아가며 인상을 찡그렸다.


"크림슨 세이버? 그들은 파문당했다." 

"그래." 아르녹의 대답은 언제나처럼 짧았다. "그랬었지." 


마리우스는 착잡한 기분 속에서 잠깐 고개를 돌렸다. 크림슨 세이버는 이제 크림슨 슬러터라는 이름으로 제국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가 과연 타락한 자일까? 그는 데스워치를 도와 패트리아크를 쓰러트렸고, 죽어가는 소녀 앞에서 울며 기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의무가 있었다. 이 자가 크림슨 세이버의 일원이라면, 마리우스가 해야 할 일은 하나 뿐이었다. 


마리우스는 자신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파워 소드를 뽑아들어 그의 앞에 내던졌진 뒤, 자신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레드메인의 파워 엑스를 집어 들었다. 아르녹은 잠시 자신의 앞에 떨어진 검을 바라보았다. 부러진 그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소녀의 박동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아…저씨. 소녀가 고통 속에서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되찾았던 천사로서의 의지를 짓눌렀다. 마리우스는 그 광경을 씁쓸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일어나서 검을 들어라, 반역자. 그대도 죽음은 전사로서 맞이하고 싶겠지.”


아르녹은 그것이 마리우스가 할 수 있는 배려임을 알았다. 검을 잡고, 전사로서 결투 속에서 죽게 해주는 것.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겁쟁이로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반역자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사실이니까. 그는 의무를 피해 달아난 겁쟁이였고, 형제를 죽인 반역자였다. 그는 결투 속에서 죽는 영광을 누릴만한 가치가 없는 자였다. 대신 그는 두려웠다. 별과 별 사이도 여행해보지도 못한 채 이 어린 소녀의 심장 고동이 영원히 멈추는 것이. 아무도 그녀를 지켜주지 않았다는 절망 속에서 눈을 감게 되는 것이. 하지만 이제 아르녹이 소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 것도…. 


아니. 아직 있었다. 


"데스…워치. 나는… 처벌에 대한 인퀴지션의… 정식 재판을 요구한다." 


아르녹이 힘겹게 말했다. 마리우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정식 재판? 그러한 규정이 있기는 했지만, 반역자가 직접 요청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재판의 결과는 언제나 똑같았다. 죽음보다 끔찍한 고문. 죽음도 허락되지 않은 채 반복되는 회개의 시험들. 결투를 통한 죽음이 훨씬 깔끔하고, 명예로운 길이리라. 


"나는…저항하지 않…고 재판에 협력하겠…다. 우리 챕터에 대해서도… 모두 이야기…하겠다." 


마리우스는 아르녹의 눈을 마주보았다. 피에 젖은 그 눈동자는 마리우스가 지금껏 만났던 어떤 천사보다도 강인하고, 굳건해보였다. 옆에서 레드메인이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알겠다. 마리우스가 그렇게 말하고 인퀴지터 가이우스를 호출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린 순간, 아르녹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단 하나. 조건이… 있다.“


마리우스는 조건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 야나가 그를 부른 것만 같아서, 아르녹은 고개를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소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간신히 호흡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아르녹은 간신히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힙겹게 웃었다. 잠든 채로도 귀찮게 구는구나. 아르녹은 손을 뻗어 소녀의 머리 위에 올렸다. 피에 물든 그녀의 은빛 머리는 너무나 작고 여려서, 당장이라도 부서져버릴 것만 같았다. 


이제 혼자서 살아남아라, 소녀. 


아르녹이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말고. 

너는 언제나 성가신 아이였으니까. 


그렇게 거인은 소녀에게 거짓말을 했다. 

흐느끼는 목소리로.


참으로 형편 없는 거짓말쟁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