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전장


명예가 나의 삶이요

의무가 나의 운명이요

실패가 나의 두려움이요

영원한 봉사가 나의 서약이로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다 져버렸으나






함선의 대기 속에 녹아든 불안감은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 의심과 분노, 광기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무겁고 답답했다. 그러나 모두는 형제들이 희생자의 유령 따위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황제의 천사였고, 누구보다 굳건한 의지와 신념을 가진 전사였다. 모든 것이 오해에 불과하리라. 이 모든 굴욕과 모욕을 견뎌내고 나면 불명예를 씻을 날이 올 것이다. 어떤 이들은 모성의 빛이 깜부기불처럼 희미해져 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수많은 절망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천사들은 너무나도 오만했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해나이까? 


그들은 자신의 생각만큼 강인하지 못했다. 모두가 그랬다. 1중대 베테랑 켈리안은 워프 항해를 시작한 지 삼일 만에 목소리에 굴복했다. 그는 파워 소드를 꺼내 서전트 길람의 목을 베고, 아포세카리 디켈리안의 등을 찔렀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해선 누군가 죽어야 했고, 함선 안에는 그의 형제들뿐이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천사여, 모두 당신의 잘못입니다


광기는 손쓸 도리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형제가 형제를 죽이고, 검과 검이 부딪쳤다. 함선은 마지막 아스트로패스가 죽기 직전에 워프에서 빠져나왔다. 배 안에는 우미디아에 파견되지 않았던 형제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대부분 스카웃에 불과했다. 붉은 갑옷을 입은 어뎁투스 아스타르테스들은 날뛰는 가축을 도살하는 것처럼 신병들을 죽였다. 켈리안이 격납고에 도착했을 때 아르녹은 파워 소드의 손등 보호대로 신병의 머리를 으깨고 있었다. 고작 십여 년 정도 훈련받았을 뿐인 그 스카웃은 죽기 직전까지 황제 폐하를 외치며 검을 놓지 않았다. 


그들은 명예로운 전사처럼 싸웠고, 하찮은 벌레처럼 죽었다.


켈리안은 괴성을 지르며 아르녹에게 검을 휘둘렀다. 아르녹은 어설트 마린이던 시절 이후 그와 결투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전보다 훨씬 빨랐고, 상상 이상으로 날카로웠다. 서슬 파란 역장이 몇 번이고 그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전율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켈리안의 검 끝이 그의 헬멧을 스치고 지나가며 긴 회색 자국을 남겼다. 


천사여, 그대는 날개가 꺾인 살인마입니다. 

그대는 붉은 학살자입니다. 

그대는. 


아르녹은 그를 걷어차고 반 발짝 뒤로 물러난 뒤 검을 눈높이로 끌어당겼다. 뒤로 물러난 켈리안도 손잡이를 양손으로 고쳐 잡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합창하듯이 비명을 질렀다. 천사여 천사여 천사여. 두 천사가 온 힘을 다해 휘두른 검이 부딪치자 귀청이 찢어질 듯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강렬한 섬광이 격납고를 보랏빛으로 물들였다. 


두 사람의 검술은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아르녹이 든 검의 역장이 아주 조금 더 강인했다. 빛이 벼락처럼 번쩍이며 켈리안의 파워 소드가 반쪽으로 쪼개졌다. 아르녹은 그의 파란 눈동자가 공포로 커지는 것을 보았다. 시간을 길게 늘여놓은 것처럼 모든 것이 천천히 움직였다. 멈춰야 해. 아르녹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수만 번을 반복했던 근육의 움직임이 뇌의 신호보다 빨랐다. 아르녹은 감탄스러울 정도로 완벽한 동작으로 켈리안의 목을 베어냈다. 그는 같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났던 형제의 머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순간 목소리가 잠잠해졌다. 


아르녹은 정신을 차리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황제 폐하, 제가 대체 무슨 짓을. 아르녹은 차마 켈리안의 눈을 마주볼 수 없어, 바닥에 떨어진 두 동강난 검을 주워들었다. 역장이 꺼진 검날 위에 핏방울이 방울져 흐르고 있었다. 


황제 폐하, 제가 기도했지 않습니까. 제가 간절하지 않았나이까? 아니면 제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아르녹은 스페이스 마린이 된 이후 처음으로 구역질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통신을 통해 천사들이 서로를 죽이는 소리가 들렸다. 비명과 웃음, 괴성과 총성. 여기서 빠져나가야만 해. 아르녹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강철과 세라마이트로 만들어진 협곡 사이에 걸린 끊어진 전선에서 불똥이 떨어졌다. 그러나 차창 너머의 어둠은 소름끼칠 정도로 고요했다. 그 속에서 반짝이는 두 개의 행성이 커다란 눈동자처럼 학살의 현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르녹은 그곳이 무슨 행성인지 알지 못했다. 가능하면 아무도 없는 곳이길. 


가장 가까운 드랍 포드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두 명을 더 쓰러트려야 했다. 아르녹의 분대원이었던 펠론이 첫 번째 상대였다. 그는 곤죽이 된 챕터 수행원의 시체를 뛰어넘으며 파워 마울을 수직으로 내리찍었다. 아르녹은 파워 소드로 공격을 막아내고 반대손을 전력으로 휘둘러 턱을 후려쳤다. 펠론은 저만치 날아가 쓰러진 뒤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아르녹은 그가 죽지 않았기를 바랐다. 


두 번째로 길을 막아선 것은 헤비 플레이머를 든 쿨토르 형제였다. 터미네이터 아머를 입은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몸을 돌린 뒤 헤비 플레이머를 들어올렸다. 압축된 프로메슘이 분사되며 끔직한 열기가 파워 아머 사이로 파고들었다. 아르녹은 피부가 녹아내리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아르녹은 파워 소드로 세 번의 공격을 가했지만 모두 튕겨 나왔다. 터미네이터 아머의 서보기어가 사납게 울부짖었다. 그는 바닥을 뒹굴며 가까스로 파워 피스트를 피해냈다. 그는 미끄러지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반대 손에 든 켈리안의 파워 소드를 작동시켰다. 두 동강이 난 검에서 펼쳐진 불안정한 역장이 뱀의 혀처럼 넘실거렸다. 


+ 닥쳐, 제발 닥쳐! + 


쿨토르가 복스 그릴을 통해 소리쳤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리라. 아르녹은 쿨토르를 죽이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는 파워 피스트를 들어 올리며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르녹은 숨을 들이마신 뒤 오히려 쿨토르의 가슴 쪽을 향해 뛰어들었다. 파워 피스트는 강하지만 둔했고, 교묘함도 부족했다. 아르녹은 일부러 멀쩡한 파워 소드를 든 손을 높게 치켜들어 공격을 유도했다. 파직거리는 주먹이 날아들자 그는 검을 들어올렸다. 그는 파워 소드로 이 공격을 막아낼 순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역장이 부딪치며 빛이 번쩍인 순간, 아르녹은 무게 중심을 반대발로 옮기며 검을 끌어당겼다. 잠깐이지만 타점을 놓친 쿨토르가 휘청거렸다. 아르녹이 노리던 기회였다. 그는 터미네이터 아머의 목 부분을 향해 켈리안의 검을 찔러 넣었다. 불안정한 역장이 부드러운 목의 피부를 꿰뚫고, 피가 빨간 연기로 증발하는 것이 보였다. 입 안에서 피거품이 부글거리는 소리가 복스 그릴을 타고 생생하게 울렸다. 아르녹은 고개를 돌린 채 검을 빼냈다.


마침내 드랍 포드에 올라탄 아르녹은 안전장치를 내려 몸을 고정시켰다. 점점 더 많은 형제들이 격납고로 오고 있었다. 피가 튀어 오르고, 빛이 번뜩였다. 사방이 죽음으로 가득했다. 서로를 도륙하며 괴성을 지르는 형제들의 모습은 스페이스 마린보다는 코른 버저커들과 닮아 있었다. 아르녹은 드랍 포드의 문을 닫았다. 커다란 역삼각형 문이 닫히고, 유압식 펌프가 외부 공기를 차단하자 전투의 소음도 함께 사라졌다. 


빨리. 목소리가 돌아오기 전에 빨리. 아르녹은 가장 가까이 있는 행성을 목적지로 입력시켰다. 드랍 포드의 머신 스피릿이 자동으로 항로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몇 초에 불과한 시간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어서. 당장이라도 귓가에서 목소리가 속삭일 것만 같았다. 어서. 어둠 속에서 발사 준비 완료를 알리는 녹색 불빛이 점등되자, 아르녹은 버튼을 눌렀다. 


고정 장치가 열리고, 잠금쇠가 해제된다. 둔중하고 익숙한 떨림. 아르녹은 헬맷과 연결된 홀로그램을 통해 함선이 멀어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공허한 어둠 속에서 화려하게 타오르는 엔진 불꽃은 유독 눈에 띄었다. 


함선은 계속 작아졌다. 아르녹의 형제와 의무, 명예, 믿음과 함께. 

네 개의 밝은 빛. 하나의 커다란 고리. 빛나는 작은 점. 

그리고 이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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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을 나가는 것은 들어오는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적이 계속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아르녹이 움직일 때마다 갑옷에 쌓인 먼지가 파르르 떨어져 내렸다. 오랜 방치에도 불구하고 테크마린의 손길이 깃든 검과 갑옷은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아르녹은 카타콤의 입구에서 걸어 나오며 볼터를 꺼내들었다. 시각장치 위에 조준 눈금과 탄도 계산 후의 예상 경로가 겹쳐졌다. 하나, 둘, 셋. 그는 적의 위치를 파악하며 재빨리 방아쇠를 당겼다. 볼터 총구에서 섬광이 번뜩이자, 세 마리의 변이체의 머리가 안쪽에서부터 터져나갔다. 아르녹은 그리움과 전율로 몸서리쳤다. 진정한 천사가 얼마나 강인한지를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붉은 천사에 당황한 적들은 총을 닥치는 대로 발사하기 시작했다. 오토건, 헤비 스터버, 샷건… 모두 민간 등급의 화기였고, 파워 아머를 뚫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것은 없었다. 오히려 번쩍이는 총염이 그들의 위치를 정확히 알려주었다. 아르녹은 강철로 만들어진 소나기 속을 헤치며 침착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적이 내리는 것이 비라면, 그가 쏘는 것은 번개였다. 그가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엄폐물이 무너지고 전투복이 조각났다. 십여 초 만에 스물 한 명의 적이 쓰러졌다. 시야 위에 겹쳐있는 탄창 표시기의 색이 붉게 바뀌자 아르녹은 능숙하게 탄창을 갈아 끼웠다. 누군가 그에게 파쇄 수류탄을 던졌다. 그는 왼팔을 들어올려 헬맷을 감쌌다. 불꽃과 쇳조각이 우박처럼 그의 갑옷을 두드렸다. 


그들은 공포를 모를 지어니 


그 문구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아름다운 거짓. 아르녹은 두려웠다. 잊히는 것이. 이곳에서 죽는 것이. 소녀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공포는 그림자처럼 그의 등 뒤를 떠나는 법이 없었다. 어두운 대성당의 아치 아래를 지날 때면 두려움도 함께 몸을 부풀렸다. 그러나 공포는 그를 더욱 현명하게 만들었다. 그는 처음으로 명예나 의무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싸웠다. 그러자 누구도 그를 막지 못했다. 


출구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볼터 탄환이 대성당 벽면에 만들어놓은 작은 구멍들 사이로, 지평선에서 이글거리는 화염이 노을처럼 붉게 스며들었다. 스페이스 마린의 점프 팩이 대기를 가르는 특징적인 굉음이 가까이서 들렸다. 데스워치가 바로 지척까지 도달한 것이 분명했다. 그들이 야나를 발견하기 전에 리만 러스의 잔해로 돌아가야 했다. 그의 걸음이 빨라졌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때 또다른 변이체들이 그로테스크하게 뒤틀린 혀를 날림거리며 기둥 뒤에서 뛰쳐나왔다. 볼터로 제압하기에는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놈들은 세 개의 팔로 광산 작업용 중장비들을 들고 있었다. 무겁고, 둔중하지만 치명적인 무기였다. 놈들의 노란 눈동자가 광기로 번들거렸다. 


"태조님께서 명하셨다! 죽어! 천사는 모두 죽어야 해! 죽어!" 


아르녹은 볼터를 한 손으로 고쳐 잡고, 긴 세이버 형태의 파워 소드를 뽑아들었다. 파직. 전류가 낡은 회로를 일깨우자, 파란 역장이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직은 아니야." 


데스워치는 이들의 특성과 약점을 모두 파악하고 있겠지. 하지만 아르녹은 무지했다. 이들이 사용하는 독이 어떤 종류이고, 누가 이들에게 명령을 내리며, 갑각이 보호하지 못하는 부위가 어디인지 따위는 알지 못했다. 대신 그는 이곳의 사람들을 알았고, 그들이 사용하는 장비가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착암기의 3중 드릴이 충분한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선 3초의 구동 시간이 필요했고, 그는 소리로 매 초를 구분할 수 있었다. 놈이 착암기를 들어 올리자 그는 피하는 대신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가슴의 아퀼라가 섬뜩한 소리와 함께 깎여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재빨리 파워 소드를 하부 압력 펌프 사이에 꽂아 넣었다. 거친 작업을 할 때면 언제나 저 부분이 문제였다. 아르녹의 예상은 맞았다. 불똥이 튀어 오르며 압축된 공기가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터져 나오더니, 착암기는 거짓말처럼 작동을 멈췄다. 그는 볼터의 총구를 놈의 복부에 밀착시킨 채로 방아쇠를 당겼다. 


다른 놈이 아르녹을 향해 갱도 작업 때 사용하는 파워 해머를 내리쳤다. 무겁고 강력하지만 균형이 맞지 않는 도구였다. 그는 빙글 돌며 공격을 피해냄과 동시에, 파워 소드의 손잡이 부분에 원심력을 실어 망치의 측면을 가격했다. 파워 해머의 궤도가 크게 뒤틀리며 바닥에 내리꽂혔고, 변이체의 가슴과 얼굴이 무방비 상태로 드러났다. 심장부터 인중까지 수직으로 세 발의 탄환이 박혔다. 탄창 표시기가 붉은 빛으로 깜빡였다. 


무쇠로 만든 파도가 돌 더미를 가르며 밀려드는 소리. 골리아스 락그라인더가 분명했다. 아르녹은 고개를 돌렸다. 발파 폭약의 압도적인 폭음. 드릴 도저 블레이드가 잔해를 박살내는 소리. 돌 더미와 먼지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위이이잉. 하지만 소리. 소리가 들렸다. 놈들이 중형 채굴 레이저를 그를 향해 겨누고 있었다. 아르녹은 채굴 레이저의 연사속도가 느리고, 특정 재질의 암석을 관통하기 위해선 두 배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르녹은 락마이트 합금 기둥 뒤로 뛰어들었다. 아름다운 케루빔들의 조각이 새겨진 기둥이었다. 아르녹이 숨을 고르며 탄창을 가는 데에는 2초가 걸렸다. 그가 등을 떼고 몸을 돌리자마자 레이저가 기둥을 관통했다. 날개 달린 케루빔들이 흉측하게 녹아내렸다. 


레이저의 장전 시간은 잘해야 10초 내외였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는 헤비 스터버를 파워 아머로 받아내며 놈들에게 다가갔다. 첫 번째 볼터 탄이 조종석 해치 위의 있던 사수를 쓰러트렸다. 아르녹은 높이 도약해 뒷자석에 오르며 검을 휘둘렀다. 채굴 레이저의 조준 장치를 붙잡고 있던 팔이 날아갔다. 충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아르녹은 그대로 방향을 틀어 트럭의 상부를 향해 발사했다. 안쪽에서 살이 증발하는 역한 냄새가 새어나왔다. 


이제 문은 코앞에 있었다. 타오르는 하이브의 불길의 빛이 그의 갑옷을 비출 정도의 거리였다. 교단원이 구성했던 조잡한 방어선은 완전히 박살나 있었고, 검은 갑주를 입은 스페이스 마린들이 그 시체 위를 걷고 있었다. 그들은 진스틸러들과 싸우고 있었다. 변이된 교단원들보다 훨씬 짐승에 가깝지만, 훨씬 사나운 종이었다. 방패와 도끼를 든 스페이스 울프가 데스워치 마린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 거리에서도 늑대 특유의 거친 수염과 머리칼만큼은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다. 


이제 그는 저 외계인들을 쓰러트리고, 스페이스 마린들을 돌파해 야나에게 가야했다. 과연 가능할까? 그들은 본능에 따라 싸우는 교단원과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레니게이트 챕터 소속의 마린과 외계 감염의 가능성이 있는 소녀를 놓아주진 않으리라. 소녀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싸워야만 했다. 그는 숨을 고른 뒤 볼터를 허리춤에 넣고, 검날이 부러진 짧은 파워 소드도 꺼내 들었다. 검은 아치까지 한 발짝. 그는 발을 내밀었다. 검의 역장이 바닥을 음울하게 비췄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관절 사이사이에 모래가 들어찬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누군가 그의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 유령들의 목소리가 돌아왔나? 아니, 달라. 유령들의 손길은 언제나 차갑고, 절박했으며, 증오에 차있었다. 이것은 간악하고, 위압적이며, 불경한 목소리였다. 아르녹은 이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이건…. 


멈춰라. 내가 명령하노니, 멈추어라.


아르녹은 뻣뻣하게 굳은 몸을 돌려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붉은 로브를 걸친 남자가 서있었다. 금속과 보석으로 장식된 영대, 짐승의 아가리 같은 형상의 목보호대. 대집회 날 광장에 나타났던 그 연설자였다. 


마녀. 


그는 아르녹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는 것처럼 뒤틀린 미소를 지어보였다. 뱀처럼 날카로운 눈의 눈동자가 보라색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는 변이체를 작게 축소시킨 듯 한 짐승이 고양이처럼 앉아있었다. 어둠 속에서 기둥을 타고 두 마리, 아니 세 마리의 진스틸러가 그의 옆에 내려앉았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고, 머리는 깨질 듯이 고통스러웠다. 그의 목소리가 귀가 아닌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거인아, 왜 저항하느냐? 네 목숨은 가치가 없고, 네 싸움도 의미가 없다.


대답하려 했지만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언어가 망치가 되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시야가 흔들리며 모든 것이 일그러졌다. 숨을 들이쉬자 오래된 책과 양피지의 냄새가 느껴졌다. 붉은 로브를 입은 싸이커가 그를 향해 한 발짝 다가왔다. 부츠가 돌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반가웠다. 피부에 내려앉는 마른 공기도 너무나 익숙했다. 


네 잘못을 보아라.


그는 이제 대성당이 아니라 요새 수도원에 서있었다. 갑옷 대신 맨 몸이었다. 창밖으로 하늘까지 이어진 빛이 보였다. 모든 것을 녹이는 불의 기둥. 수도원의 성벽과 조각상, 형제들이 먼지로 변하고 있었다. 놈의 말이 맞았다. 이것은 모두 아르녹의 잘못이었다. 이제 와서 그의 목숨 따위 의미 없는 것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구역질이 났다. 아르녹은 격한 피로감을 느꼈다. 빛의 기둥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잠들거라, 거인아. 잠들면 다 잊혀질 것을.


그래. 잠들면 모두 잊혀질 것이다. 그의 잘못도, 목소리도. 눈꺼풀이 천천히 감기기 시작했다. 아르녹은 무릎을 꿇었다. 어느새 싸이커는 그의 앞까지 다가왔다. 그가 아르녹의 검은 머리 위에 앙상한 보랏빛 손을 올린다. 세례를 내리는 모양새로. 이제 빛의 기둥은 영광의 홀을 집어 삼켰다. 그가 이름을 따왔던 영웅, 아르녹의 조각상이 그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며 녹아내린다. 


잠들면 별이 네 시체를 감싸리라. 별의 자손이 너를 인도하리라. 검은 우주와 찬란한 은빛 낙원으로.


그가 손을 떼자 눈이 완전히 감긴다. 유령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를 괴롭히던 죄책감도 사라졌다. 아르녹은 편안해졌다.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졸음이 그를 심연으로 끌어당겼다. 아르녹은 안도감에 입을 벌린 채, 남자의 마지막 말을 반복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찬란한 은빛 낙원으로. 은빛 낙원으로. 그 아름다운 은빛….


아저씨.


목소리. 

겁에 질린 목소리의 부름에 그는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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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팀, 내 위치로 집결해라! 늑대의 시간을 위하여!" 


레드메인은 진스틸러의 발톱을 스톰쉴드로 막아낸 뒤 도끼로 놈의 머리를 내리쳤다. 푸른 날이 두개골을 찢고 어깨까지 파고들어 박혔다. 그가 도끼를 뽑아들기 전에 또다른 진스틸러가 방패의 사각에서 뛰어들었다. 그는 가까스로 공격을 피해냈지만, 그가 소중하게 관리한 붉은 수염이 뭉텅이로 잘려나갔다. 


이 크라켄 빨판에 빨려죽을 외계인 쓰레기가! 분노가 치민 그는 도끼를 놓고 놈의 한쪽 팔을 붙잡았다. 놈이 반대 손을 휘두르자 스톰 쉴드의 역장이 번쩍였다. 레드메인은 틈을 놓치지 않고 놈의 목에 송곳니를 박아 넣었다. 혀가 아릴 정도로 쓴 피가 입안을 적셨다. 진스틸러는 잠깐 동안 바들거리다가 축 늘어졌다. 레드메인은 시체를 집어던지고 살점을 뱉어냈다. 


"오질나게 맛도 없군." 

"돌아가면 순수함 여부를 검사 받아야할 거다, 늑대." 


라구엘이 다가오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쏘아붙였다. 레드메인이 도끼를 뽑기 위해 몸을 숙이자 새로운 놈이 달려들었지만, 라구엘의 볼터가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잔해 사이로 떨어진 두 개의 헬파이어 탄피에서 희미한 연기가 솟아올랐다. 


"어차피 네 녀석은 여기서 죽을 테니 보고할 사람도 없을 거야. 이 외계 쓰레기들이 보고하면 또 모를까!" 


레드메인이 도끼를 휘둘러 라구엘 쪽으로 접근하던 변이체의 목을 날리며 외쳤다. 놈은 광산에서 쓰는 작업용 드릴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등에 라구엘의 로브가 닿는 것이 느껴졌다.


"모욕적이로군, 레드메인. 분대장이 되더니 판단력을 잃었나?" 


라구엘이 방아쇠를 당겨 레드메인의 등을 노리던 두 놈을 쓰러트렸다. 한 놈이 니들 피스톨을 발사했지만 레드메인의 파워 아머를 뚫진 못했다. 


"내 판단력은 언제나처럼 탁월하지, 다크 엔젤! 그게 바로 네가 아니라 이 몸이 분대장이 된 이유고." 


레드메인은 꿈틀거리는 시체의 머리를 짓밟고 고개를 돌렸다. 


"헥터 분대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또 코덱스라도 뒤지고 계신가?" 

"글쎄."


라구엘 역시 고개를 돌려 폐허로 변한 동쪽 능선을 바라보았다. 진스틸러들을 대성당으로 몰아넣는 포위망을 완성하기 위해선 헥터 분대가 필요했지만,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몇 분 전부터 심한 방해 전파 때문에 복스 채널도 먹통이었다. 


"레드메인, 이 지점을 계속 사수할건가? 헥터 분대가 제때 도착하지 못하면 우리가 여기 있는 의미가 없다." 

"그래, 그건 맞는 말이야. 하지만 우리가 이동하면 인퀴지터 나으리가…," 


대성당 쪽을 바라보던 레드메인은 의외의 광경에 말을 멈췄다. 입구 안쪽에서 붉은 갑옷을 입은 스페이스 마린이 변이체들을 쓰러트리고 있었다. 그는 날렵하고 예리했으며, 놀라울 정도로 맹렬했다. 외계인들은 레드메인이 이름도 모르는 이상한 도구들을 들고 휘둘렀지만, 그는 모든 무기의 약점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벽을 뚫고 나타난 락그라인더를 제압했을 때 옆에서 짧은 감탄사가 터졌다. 라구엘도 같은 것을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 행성에는 우리뿐 아니었나? 어느 챕터지?" 

“갑옷에 붉은 칠한 놈들이 한 두 놈인가?" 레드메인도 기억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아무튼 대단한 실력이군."   


불타는 락그라인더를 뒤로 하고, 붉은 마린이 아치 아래 섰다. 그는 숨을 골랐다. 그러나 그는 발을 내딛지 못했다. 그의 몸이 딱딱하게 굳더니,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그의 뒤쪽에서 붉은 로브를 입은 남자가 걸어 나왔다. 놈의 눈에서 불경한 빛이 번뜩였다. 싸이커! 레드메인은 송곳니를 드러낸 채 으르렁댔다. 보고 받은 지휘관 중 하나가 분명했다. 세 마리의 진스틸러가 사악한 마법사의 명령에 따라 발톱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라구엘! 맞출 수 있겠나?" 

"물론이다." 


레드메인이 싸이커를 가리키며 외쳤다. 라구엘은 이미 볼터를 들어 올린 채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가 첫 번째 방아쇠를 당겼다. 잠깐의 정적 후 왼쪽의 진스틸러가 피를 튀기며 쓰러졌다. 라구엘은 고개를 든 싸이커와 눈이 마주쳤다. 완벽한 기회였다. 라구엘은 조준경을 놈에게 옮기고 방아쇠에 올린 손가락에 힘을 줬다. 하지만 싸이커는 라구엘을 마주보며 웃고 있었다. 어째서?


"라구엘, 피해!" 


갑자기 늑대가 소리쳤다. 라구엘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고, 그 순간 보라색 번개가 그의 갑옷을 관통했다. 파워 아머와 로브가 녹아내리며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극심한 고통이 척추를 타고 전신에 퍼졌고,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바닥에 쓰러진 라구엘의 몸이 폐허를 따라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볼터가 손에서 미끄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철퍽. 그의 헬멧이 피웅덩이 사이에 처박혔다. 천천히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라구엘은 레드메인이 도끼를 들고 울부짖는 것을 보았다. 그곳에 스페이스 마린보다 두 배는 큰 키를 가진 괴수가 서있었다. 놈은 다시 팔을 뻗어 레드메인에게 보랏빛 번개를 쏘아냈다. 레드메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번개가 뒤쪽에 있는 리만 러스의 잔해에 오렌지빛 구멍을 만들었다. 어디선가 여자아이의 비명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작은 소음은 귀를 찢을 듯 한 괴수의 포효에 묻혀 사라졌다. 


방패로 막아내, 레드메인.


라구엘은 그 광경을 지켜보고 싶었지만, 자꾸만 눈이 감겼다. 복스 그릴이 피로 차오르고 있었다. 막아내라고, 늑대 놈아. 라구엘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중얼거렸다. 어디선가 하이브컬트의 변이체들이 소리치고 있었다. 황제교의 합창을 조잡하게 모방한 듯 한 불경하고 증오스러운 찬송. 놈들은 노래했다. 



태조께서 오셨도다! 위대한 태조께서 오셨도다! 

거짓된 믿음의 천사들에게 죽음을! 

천사들에게 죽음을!

죽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