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동행

어둠 없이는 빛도 없나니 

우리에겐 목적이 있노라.

거짓 없이는 진실도 없나니.

우리에겐 목적이 있노라

죽음 없이는 희생도 없나니

우리에겐 목적이 있노라. 

충성 없이는 단 하나의 챕터도 없으나

우리에겐 목적이 있노라.

그러나 황제 폐하 없는 곳에는 오직 공허 뿐이니

우리에게 목적도 없으리라.


- 스페이스 마린 의식 기도문 중







붉은 빛이 내리고 있었다. 


수도원은 타오르는 모습마저 아름다웠다. 황금 독수리는 날개부터 녹아내렸고, 굳건한 벽을 이루던 대리석과 돌도 먼지로 변해갔다. 그가 이름을 따왔던 옛 챕터 마스터의 조각상이 무너지는 모습은 어딘지 서글펐다. 붉은 빛의 기둥은 영원히 떨어져 있을 것만 같던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새빨갛게 물든 모습은 태양이 잠들기 전처럼 아름다웠다. 아르녹은 스트라이크 크루져의 차창에서 서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아르녹은 눈을 감았다. 끔찍한 아름다움 속에서 모성의 대지가 비명을 지르며 녹아내리고 있었다. 함선 안의 누구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르녹은 천사가 된 이후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어째서, 어째서.


아르녹의 머릿속에서 그 말이 계속 맴돌았다. 아르녹은 그것이 정글에서부터 그를 따라온 목소리인지, 자신의 생각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차가운 손아귀가 그의 목덜미에 닿았다. 천사여. 유령이 그에게 속삭였다. 모두 당신의 잘못입니다. 등에 내려앉은 그림자가 너무나 무거워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분노에 찬 형제들이 황제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이제 제국에 죽음을 고하는 천사가 되겠노라 소리쳤다. 다른 이들은 제 자리에서 고개를 떨어트리고 황제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래도 자신은 천사로서의 의무를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아르녹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는 복수도, 의무도 겁이 났다. 그는 헌신을, 목소리를 피해 도망칠 것이었다. 지상으로 추락할 것이었다. 그는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눈부시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들의 갑옷처럼 붉은 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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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녹의 문을 두드린 것은 온 몸이 오수로 범벅이 된 작은 소녀였다. 아르녹이 자신을 어떻게 찾았는지 묻기도 전에, 소녀는 거칠게 숨을 들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동시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르녹은 소녀의 목덜미를 잡아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소녀는 흐릿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섯 명의 사내가 계단을 올라왔다. 조잡한 뱀 문신이 그들의 팔을 타고 어깨까지 이어져 있었다. 사내들은 모두 오토 피스톨과 나이프로 무장하고, 낡은 플랙 아머를 입고 있었다. 선두에 선 남자가 입을 열자 파란 혀가 눈에 띄었다. 아르녹은 복도의 낮은 천장 때문에 허리를 굽힌 채 그들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네가 그 거인이로군?" 


선두에 선 남자가 다가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당당하게 어깨를 피고 혀를 날름거렸지만, 눈동자는 희미한 공포로 흔들리고 있었다. 복도에서 고깃덩이가 썩는 듯 한 냄새가 났다. 아르녹이 물었다. 


"너흰 누구지?" 

"이봐, 우린 그 조그만 꼬맹이를 잡아가기만 하면 돼. 여기로 도망쳤지? 하수구 냄새가 진동을 하니 거짓말 할 생각 말고." 

"그래, 소녀는 여기 있다." 


아르녹은 흘긋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숨을 고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표정. 오수 때문에 갈색으로 변한 머리칼. 떨리는 입술. 동정심이 깜부기불처럼 깜빡였지만 이내 꺼지고 말았다. 다른 이를 지키는 것은 아르녹이 오래 전에 포기한 일이었다. 왜인지 그를 뒤쫓던 목소리가 계속 조용했다. 


"순순히 꼬맹이를 넘겨주기만 하면 우리도 곱게 돌아갈 거야. 문제 일으키고 싶진 않겠지?" 


남자는 아르녹을 향해 오토 피스톨을 들어보였다. 아르녹은 오토 피스톨의 탄환도 머리에 정확히 명중하면 그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팔목을 비스듬히 꺾고 있는 모양새가 제대로 조준하는 법도 모르는 것 같았다.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아르녹은 그렇게 생각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아르녹이 겁을 먹었다고 생각한 것인지 남자는 기분 나쁘게 씩 웃었다. 여섯 명의 사내가 그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리와라, 이 쥐새끼 같은 것." 


팔을 붙잡아 강제로 일으켜 세우자 소녀는 고통 어린 신음을 내뱉었다. 소녀의 발목이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아르녹은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거인 아저씨. 소녀가 절박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르녹 아저씨! 사내들은 발버둥치는 소녀를 억지로 복도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소녀가 그의 옷자락을 붙잡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천사여, 어째서 외면하시나이까.


그때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서 소리쳤다. 


"뭐하는 짓이야?" 


아르녹은 자신도 모르게 그들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선두에 서있던 남자가 인상을 일그러트리며 오토 피스톨을 치켜들었다. 그의 혓바닥이 기분 나쁘게 날름거렸고, 조잡한 뱀 문신이 몸을 뒤틀었다. 


"덜 떨어진 하프-오그린 새끼야, 저리 비키지 못ㅎ… 아악!" 


아르녹은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손목을 붙잡았다. 듣기 거북한 비명 사이로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장 가까이 있던 다른 남자가 깜짝 놀라 단검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거의 동시에 우드득 하고 턱뼈가 부서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아르녹의 주먹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아드레날린이 치솟았다. 


나머지 사내들이 야나를 밀치고 각자의 무기를 뽑아들었다. 일단 싸움이 시작되자 아르녹은 망설이지 않았다. 아르녹은 남은 팔로 떨어진 오토 피스톨을 주우려던 남자의 머리를 걷어찼다. 그의 몸이 뒤로 날아가며 두 번째 남자와 부딪쳤다. 아르녹은 빠르게 거리를 좁히고 쓰러진 두 번째 남자의 머리를 짓밟았다. 뭉개진 얼굴에서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세 번째 갱단원이 날카로운 검을 수평으로 휘둘렀지만 너무 느렸다. 아르녹은 칼을 쥔 그의 손을 붙잡아 그대로 으깨버렸다. 


그 사이 방구석으로 도망친 놈이 아르녹을 향해 오토 피스톨을 겨누었다. 아르녹은 붙잡고 있는 세 번째 갱단원을 끌어당겼다. 탄환이 가슴에 날아와 꽂히자 그의 몸이 발작하듯 떨렸다. 아르녹은 놈이 허리에 차고 있던 오토 피스톨을 빼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총구에서 네 번의 불꽃이 번쩍였다. 비명과 함께 그에게 오토 피스톨을 겨누고 있던 남자와 야나에게 다가가던 마지막 남자가 바닥에 쓰러졌다. 


아르녹은 자신이 아직도 싸우는 방법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전투의 전율이 그의 등을 쭈뼛하게 만들었다. 한순간 많은 것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볼터 탄환이 약실에 들어가는 소리. 체인소드가 울부짖는 소음. 어깨 위에 전해지는 갑옷의 무게. 천사로서의 시간들. 그는 고개를 저어 기억들을 떨쳐내려 노력했다. 


"고, 고마워요 아저씨." 


소녀가 그를 올려다보며 감사를 표했다. 어느새 목소리는 다시 사라진 상태였다. 전투를 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소녀를 도와주었기 때문일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후자라면 목소리는 그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몸을 닦아라, 소녀." 


아르녹은 방구석에 걸려있던 넝마를 건네주며 말했다. 사방이 피투성이였다. 야나는 녹갈색 물감으로만 그린 사람 형상에 빨간 물감을 흩뿌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야나는 떨리는 손으로 천을 받아들었다. 그를 괴롭히던 목소리는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아르녹은 한때 이것이 자신의 수많은 맹세 중 하나였음을 떠올렸다. 제국의 시민들을 구하는 것. 아르녹은 자신도 모르게 예전과 같은 말투로 말했고, 나중에 그 사실을 후회했다. 


"너는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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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은 평균적인 노동자 숙소 크기였지만, 아르녹과 함께 있으니 무척이나 좁게 느껴졌다. 야나는 아까 보았던 광경이 잊혀히지 않았다. 생전 그렇게 빠른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야나가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을 동안 아르녹은 죽은 시체를 복도로 끌어냈다. 그는 갱단원들이 들고 있던 무기를 모두 챙겼다. 야나는 피웅덩이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채 열심히 오수를 닦아냈다. 썩은 냄새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녀의 머리칼은 본래의 은빛으로 돌아왔다. 


그 뒤는 침묵뿐이었다. 아르녹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어깨에 붕대를 감고, 발에 부목을 대주었다. 상처가 쓰라렸지만 야나는 입술을 깨물고 참았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처치가 끝나자 그는 돌아앉아 오토 피스톨들을 분해한 뒤, 부품을 닦고 조립하기 시작했다. 야나는 거인의 모습을 물끄러미 관찰했다. 그 다음은 날카로운 검날에 묻은 기름을 닦아내는 일이었다. 갱단원들에겐 커다랬던 칼도 거인이 들자 단검처럼 보였다. 흥분과 공포가 가라앉자 모진 추위가 파고들었고, 야나는 거인의 이불을 뒤집어썼다. 이불이 워낙 얇고 낡아서 추위는 가시지 않았지만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삼십 분의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야나였다. 


“아저씨." 

"그래." 

"아저씨 말대로 집에 가서 어머니를 기다렸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야나는 슬픈 눈으로 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러나 우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런 대화는 그에게 너무 낯설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야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이제 무얼 해야 되죠? 우리 집에는 식량도 물도 없어요. 알고 있던 아저씨들은 모두 하이브컬트를 따라 갔어요. 축복을 받으러 간 사람도 있구요. 하이브컬트는…." 


소녀의 목소리가 조금 거칠어졌다. 


“하이브컬트는 다 거짓말쟁이에요. 축복도 거짓말이구요." 

"그래.“

"황제 폐하도요. 황제 폐하도, 천사도, 별도 다 거짓말이에요." 

"그건…." 


아니야, 라고 말하려던 아르녹은 말을 멈췄다.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정글 행성에서 있었던 일 이후 그는 황제에게 부단히도 기도했다. 하지만 황제는 한번도 그의 기도에 응답해주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그럴 지도 모르겠구나." 

"그럼 누가 우리를 지켜주는 거죠?" 


야나는 고개를 들어 아르녹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추위 때문만은 아닐거라고 아르녹은 짐작했다. 모든 제국 시민들은 태어날 때부터 황제 폐하가, 제국의 사제들이, 천사들이 지켜준다고 교육 받았다. 물론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아르녹은 제국의 수호자들에게 있어 시민은 대체 가능한 소모품이라는 알고 있었다. 누구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누구도 그들을 지켜주지 않는다. 하지만 하이브에서 태어나 그것을 깨닫는 건 분명 큰 절망이리라. 


"모르겠다." 


아르녹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정말 알 수가 없었다. 과거라면 형제라고 대답했겠지만, 이제 그에겐 형제가 없었다. 이제 그를 지켜줄 사람은 없었다. 소녀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먼 곳에서 불꽃이 번쩍였다. 또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걸까? 상당히 먼 곳인지 폭음은 들리지 않았다. 반딧불처럼 날아오른 불씨들이 천천히 깜빡이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르녹과 야나는 나란히 앉아 불꽃이 꺼져가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이내 불빛은 모두 사라지고 다시 어둠이 내려앉았다. 


"아저씨는 왜 여기에 왔어요?" 


또 그 질문이로군. 아르녹은 생각했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하이브에 찾아온 이유를 궁금해 했다. 그때마다 아르녹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끔찍한 거짓말쟁이였고, 사람들은 금세 그의 거짓말을 눈치 채고 기상천외한 추측을 내놓곤 했다. 물론 그가 의무를 져버린 황제의 천사라는 것만큼 기상천외한 추측은 없었지만. 하지만 왠지 이 소녀에겐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도망칠 곳이 필요했다." 

"도망쳤다고요? 뭔가 잘못한 거에요?" 

"그래. 큰 잘못을 저질렀어. 그래서 다른 형제들도 함께 벌을 받게 됐지." 

"그럼 그 형제들은 어떻게 됐어요?" 

"누구는 죽었고, 누구는 더 끔찍한 곳으로 갔겠지. 잘 모르겠다." 

"그럼 아저씨도 혼자만 남은 거에요?" 


아르녹의 대답은 한 박자 늦었다. 마치 혼자라는 단어의 의미를 곱씹어보기라도 한 것처럼.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는 조금 서글펐다. 


"그래." 

"그렇구나." 


야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방 안은 고요했고, 야나가 움츠린 몸을 움직일 때마다 이불이 바스락 거리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어둠에 잠긴 방 안은 온통 회색조였고, 다른 색이라곤 하얗게 새어 나오는 입김뿐이었다. 무거운 냉기가 야나의 눈꺼풀을 내리 누르기 시작했다.


"아르녹 아저씨." 


소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르녹은 대답하지 않고 소녀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자고 가도 돼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발 머리의 소녀는 안심한 듯이 무릎을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다. 마치 공허처럼 빛도 온기도 없는, 어둡고 싸늘한 밤이었다. 하지만 그 날 밤만큼은 어떤 목소리도 아르녹을 괴롭히지 않았다. 오직 귓가를 스치는 고요한 숨소리와 하얀 입김 뿐.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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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에도 야나는 떠나지 않았다. 아르녹도 떠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아르녹은 마지막으로 남겨두었던 에너지바를 그녀에게 주었다. 소녀는 그걸 눈 깜짝할 사이에 먹어치웠다. 바깥의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었다. 아르녹은 야나를 위해서 빈 숙소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대집회 이후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식량이나 물이 남아있는 방도 있었다. 곧 두 사람은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어떤 날은 야나가 끔찍한 맛의 죽을 끓였고, 다른 날은 아르녹이 벌레나 시신, 가죽 등을 구워왔다. 에너지바를 먹을 수 있는 날은 운이 좋은 날이었다. 


4일 뒤 하이브 상층부 함락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듣자하니 상층부에 이미 잠입해있던 교단원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층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온 노동자들과 싸우는 동안, 요원들이 탈취한 전차와 중화기가 지휘부를 공격했다. 플라즈메 제네레이터가 모두 멈춰서 라스건의 파워팩조차 충전할 수 없게 된 방어군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상층부에서 일부러 멈췄다던 제네레이터를 왜 다시 가동시키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상층부가 완전히 함락되자 플라즈마 제네레이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살을 에는 듯한 추위는 조금 나아졌다. 며칠 뒤 하이브컬트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상층부로 올라가게 해주겠다는 방송이 나왔다. 위층에는 물과 식량이 풍부하다는 말은 아르녹과 야나에게도 매력적인 미끼였지만, 야나는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여기 있을래요. 전 괴물이 되고 싶지 않아요.“


다른 노동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회의적이던 사람들도 하이브컬트의 축복을 받기 위해 하나 둘 자신의 집에서 나왔다. 머지않아 하층부에는 새로운 질서가 생겨났다. 사람처럼 옷을 입었지만 네 개의 팔을 가진 보라색 괴물들이 아무렇지 않게 거리를 걸어 다녔고, 천사들의 조각상이 있던 자리에는 흉측한 괴물의 모습을 본 딴 조각상이 들어섰다. 아르녹은 인부들을 수송하던 골리아스 트럭에 오토캐논과 헤비 스터버가 설치되는 모습을 복잡한 기분으로 지켜보았다. 두 달 쯤 지나자 갱단과 노동자들이 정규군의 무장을 갖추고 돌아왔다. 질서 뒤엔 징벌이 찾아왔다. 그들은 하이브컬트에 협력하지 않는 이들을 붙잡아서 강제로 축복을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르녹은 이제 식량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빈 집을 찾아다녔다. 야나는 그림자처럼 그에게 바싹 붙어 다녔다. 어찌됐든 눈에 띄는 체격을 가진 아르녹이 하이브컬트의 눈을 피하기 위해선 야나의 지식과 기민함이 필요했다. 대신 아르녹은 틈틈이 그녀에게 싸우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녀는 재능은 별로 없었지만 열정적인 학생이었다. 드물게 아르녹이 "나아졌다" 라고 칭찬할 때면 그녀는 배시시 웃어보였다.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 목소리도 아르녹을 괴롭히지 않았다. 아르녹이 원하던 고요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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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집회로부터 세 달이 지났다. 하이브는 이제 하이브컬트의 것이었다. 가끔 최상층 첨탑의 극소수만이 무의미한 저항을 반복하고 있다는 방송이 흘러 나왔다. 컬트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지만, 아르녹은 첨탑에 있는 이들이 도움을 요청했을 거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승천의 날이 다가왔다. 그들은 그 말을 끝없이 반복했다. 하지만 아르녹은 알고 있었다. 그 날은 아니었지만 심판의 날은 분명히 다가오고 있었다. 


아르녹은 곰팡이가 잔뜩 핀 창고에 앉아 있었다. 창고 안은 빈 드럼통과 상자들로 가득 차있을 뿐 쓸 만한 물건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야나는 구석 자리에서 꾸벅 고개를 떨구며 선잠에 들었다 깨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짧았던 머리카락은 벌써 날개뼈 아래까지 자라서, 그녀가 고개를 흔들 때마다 빗방울처럼 찰랑거렸다. 야나는 그가 머리를 만지는 것을 싫어했다. 


'머리를 만지면 아저씨가 가라고 할 것 같아요.' 


아르녹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야나의 머리가 껴안은 무릎 위로 툭 떨어졌다. 에너지바를 구하지 못한 지도 오래되었다. 아르녹은 그녀의 체력이 한계에 가까워졌음을 알 수 있었다. 계속 이렇게 도망 다닐 수는 없었다.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검은 어둠 속에 드문드문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르녹은 대성당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한때 그곳에는 어둠 속에서 이정표로 삼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황제상이 서있었다. 이제 조각상의 머리는 절반 정도가 사라졌고, 갑옷도 뜯겨나간 상태였다. 그 모습으로 보니 황제도 그리 장엄해보이지 않았다. 무슨 변덕인지 아르녹은 고개 숙인 채 상처 입은 황제를 향해 기도했다. 정말 오래간만의 기도였다. 


황제 폐하. 만약 당신이 정말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면 부디 당신의 천사들이 오지 않도록 하소서. 저 소녀의 머리 위에 정화의 불길이 내리지 않게 해주소서. 단 한번만. 부디 단 한번만 제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아르녹은 눈을 떴지만, 답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야나가 다시 잠에서 깬 채로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녹은 그녀를 깨운 것 같아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자두어라." 아르녹이 말했다. "아무 일도 없다." 

"아저씨" 


야나는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불렀다. 아르녹은 그제야 소녀가 자신을 보고 있던게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소녀는 창 밖을 보고 있었다. 


"아르녹 아저씨. 천장이 붉어요." 

"뭐라고?" 


자리에서 일어난 야나가 그에게 다가오며 창밖을 가리켰다. 아르녹을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회색빛이어야 할 하이브의 한쪽 벽면이 빨갛게 변하고 있었다. 엄청난 두께의 락크리트와 세라마이트로 만들어진 벽면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싸늘한 한기가 아르녹의 등골을 타고 내려갔다. 아, 황제시여. 아르녹은 달려가 야나를 감쌌다. 거의 동시에 붉은 빛의 기둥이 하이브의 벽면을 꿰뚫었다. 


두 사람이 있던 건물은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풍압만으로 벽면이 무너져 내렸다. 아르녹과 야나는 락크리트 더미와 함께 건물 반대편으로 튕겨 날아갔다. 하이브의 용골이 녹아내리며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야나는 아르녹의 어깨 너머로 높이 솟아오른 건물과 석상들이 먼지로 증발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불기둥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시뻘겋게 달아온 금속들이 녹아서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이제 하이브 천장에 뚫린 커다란 구멍 너머로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정말 있었어! 야나는 고통도 잊은 채 중얼거렸다. 하이브에서 태어나 자란 야나는 처음 보는 밤하늘이었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어떤 별은 녹색으로, 어떤 별은 백색으로 빛났다. 그 뿐 아니었다. 십여 개의 유성우가 주홍빛 꼬리를 길게 남기며 하이브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야나는 황급히 아르녹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시 그를 불렀다. 


"아저씨." 


아르녹은 하늘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것은 유성우가 아니었다. 드랍포드. 주홍빛 꼬리 속에서 흔들리던 검은 동체를 보며 아르녹이 중얼거렸다. 황제는 이번에도 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열 대의 검은색 드랍포드가  역추진 쓰러스트를 분사해 하이브 건물 사이에 내려앉았다. 


죽음의 천사들이 왔고, 정화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