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귀환


밝혀지지 않은 곳에, 나는 빛을 가져오리라  

의심이 있는 곳에, 나는 믿음을 뿌리리라 

분노가 있는 곳에, 나는 방향을 주리라









황제 폐하, 당신의 종이 기도 드리나이다. 


그 목소리들이 멈추지 않나이다. 그들이 저를 끊임없이 도살자, 살인마라고 부르나이다. 그들에게 해명하려 했습니다. 진정으로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제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저 끝없이 제게 왜 그랬느냐고 묻습니다. 왜? 어째서? 어떻게? 지금도 목소리가 제 귀에 속삭이나이다. 


페하, 제발. 저를 구원해주소서. 



제가 부단히 기도하나이다. 저희는 기만당했으니 자비를 베푸소서. 저 뿐만 아니라 챕터 전체가 그러했습니다. 이제 목소리는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밤이면 그들은 제가 저질렀던 일들의 진실을 보여주나이다. 저는 그것을 거부할 방법이 없습니다. 저는 제가 수백의 무고한 생명의 목숨을 빼앗는 광경을 몇 번이고 다시 보았습니다. 저는 목숨을 구걸하는 이들을 비웃고 칼을 꽂았나이다. 도망치는 이들을 비난하며 총탄을 박았나이다. 제 갑옷이 무고한 제국민들의 피로 빨갛게 물들었나이다. 


그러나 황제 폐하,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를 이끌어야 할 챕터 마스터는 우리를 버렸습니다. 저는 그곳으로부터 수천 광년을 도망쳤지만 영혼들은 저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이제 그들의 분노와 슬픔이 제 목을 조르고 있습니다. 저는 잠들지 않은 곳에서 눈을 뜨고, 뽑은 적 없는 검을 든 채 깨어납니다. 그들이 무언가를 죽이길 원하고 있나이다. 아, 그들이. 그들이 슬픔을 달랠 제물을 원하나이다. 


하지만 폐하. 이곳에는 저와 살아남은 형제들뿐입니다. 


저희는 아직 당신의 이름을 져버리지 않았나이다. 저희들은 당신의 가르침을 등불 삼아 어둠을 걷고 있습니다. 몇몇 형제는 이미 그 불을 꺼버렸나이다. 하지만 저는 아직 당신을 믿나이다. 그러니 늦기 전에 저를 구원해주소서. 제발. 



저는 두렵나이다. 목소리에 굴복해 제가 다른 형제들을 해칠까 두렵나이다.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형제들의 피를 탐할까 두렵나이다. 


저는 평생을 당신의 이름 아래 공포와 싸우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 공포는 제가 극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이렇게 간절히 비나이다. 



황제 폐하, 저를 구원해주소서. 


제발. 




폐하.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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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의 잔해가 소나기처럼 아르녹의 머리 위를 떨어졌다. 그는 전력을 다해 출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야나를 포대자루처럼 들쳐 메고 있었다. 조심해요! 뒤를 보고 있던 야나가 소리쳤다. 변이된 두 남자가 그를 바짝 뒤쫓아 왔다. 한 놈이 예리한 손톱을 휘둘렀다. 야나는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야나의 목 대신 은빛 머리칼이 몇 가닥 잘려나갔다. 놈이 두 번째 팔을 휘둘렀다. 까득. 이번에는 블랙 카라페이스에서 소름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르녹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붕괴하는 건물이 그의 일을 대신해 주었다. 커다란 돌더미가 첫 번째 남자의 머리 위로 떨어졌고, 예리한 철판이 떨어지며 두 번째 놈의 길을 막았다. 놈은 철판 위로 기어오르려 했다. 하지만 철근이 놈의 등을 관통한 뒤 땅에 꽂혔다. 


아르녹은 가까스로 몸을 날려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의 어깨에서 떨어진 야나는 몇 바퀴를 더 굴렀다. 거친 강철 바닥은 아르녹의 왼팔을 갈아내며 흉측한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그는 고통을 견뎌냈다. 고통은 천사가 된 그가 가장 먼저 익숙해진 것이었고, 마지막까지 잊지 않았던 것이었다. 아르녹은 자리에서 일어나 야나를 향해 다가갔다. 그녀는 몸을 웅크린 채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일어나라, 소녀. 움직여야 한다." 


아르녹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나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팠지만, 그의 말을 따르려 애썼다. 파괴와 죽음이 파도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프로메슘 불꽃으로 이루어진 파도는 하이브컬트의 교단원들과 부딪칠 때마다 하얀 포말 대신 볼터 탄환의 폭발을 흩뿌렸다. 무엇도 그 파도를 막을 수 없었다. 교단원들이 건물에 숨으면 멀티 멜타의 열선이 건물을 통째로 무너트렸다. 어떤 이들은 골목에 숨어 천사들을 덮칠 기회를 엿봤다. 그러면 천사들은 위험 요소가 있을만한 곳에 프랙 캐논을 발사했다. 유탄 속에 가득 찬 산탄이 비산하며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고깃덩이로 만들었다. 


야나는 도망치는 동안 타오르는 잔해 너머에서 천사들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야나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지만, 검은 갑옷을 입은 천사들은 진정 죽음을 몰고 다녔다. 그들이 쏘는 볼터는 거의 빗나가지 않았다. 어떤 이는 불타오르고, 어떤 이는 제자리에서 파르르 떨다 움직이지 않는다. 야나는 괴물 하나가 천사를 노리고 3층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보았다. 천사는 그것을 눈치 챘지만 피하지 않았다. 놈이 천사를 향해 팔을 뻗기도 전에, 불타는 날개를 펼치며 날아오른 다른 천사가 칼을 휘둘렀다. 파란 빛이 번뜩이자 피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너무나도 일방적이었다. 


그들은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생명체들을 확실하게 살해하며 전진했다. 질문이나 대화는 없었다. 그저 죽음뿐이었다. 야나는 구청 지하에서 도망칠 때보다 더 큰 공포에 몸을 떨었다. 하이브에서 태어난 야나에게 죽음은 익숙한 것이었지만, 이런 형태의 죽음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아르녹은 정 반대였다. 이것은 그가 하이브컬트의 정체를 깨달은 이후 매일 밤마다 상상하던 형태의 죽음이었다. 상상 속에서 마지막으로 어뎁투스 아스타르테스다운 영광스러운 전투를 벌였다. 많은 외계인을 죽였고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다. 황제의 천사에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오히려 과분한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상상 속에서 그는 데스워치가 이끌고 온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죽음이 현실로 다가오자 아르녹은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음을 깨달았다. 그의 상상 속에는 은발 머리를 한 작은 소녀가 없었다. 그녀가 비참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는 결과를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생각하지 않은 것이리라. 그는 마주하기 힘든 진실 앞에선 언제나 고개를 돌리고 도망쳤으니까.  


아르녹은 어깨에 매달린 채 공포에 떨고 있는 작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 짧은 기억들이 조각조각 이어졌다. 어설프게 무기를 잡던 자세. 칭찬하면 짓던 소리 없는 미소. 에너지바를 반으로 나누길 고집하던 목소리. 잠을 자는지 확인하려고 눈앞에서 흔들던 손. 겁에 질리면 커지는 눈동자. 호기심으로 떨리던 입술. 쉽게 절망하지만 그보다 더 빨리 떨쳐내던 소녀. 그의 머릿속에서 죄책감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소녀. 아르녹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대성당의 부서진 황제상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소녀, 겁먹을 필요 없다." 

"아저씨?" 

"너는 살아남게 될 것이다." 


아르녹이 말했다. 뒤에서 파도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르녹은 다시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고,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온갖 소음과 비명 속에서도 그는 고요했다. 


"그럼 누가 우리를 지켜주는 거죠?"


아르녹은 이제 그 질문의 답을 가지고 있었다. 


천사가 너를 지킬 것이다. 


아르녹은 달렸다. 야나는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검은 등에 머리를 바싹 붙인 채 떨어지지 않으려 애썼다. 

붉은 밤, 야나의 긴 은발이 바람을 따라 거인의 등 뒤에서 날개처럼 펄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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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과 바람이 힘을 합쳐 천 년 동안 두드렸던 벽이었다. 구백년 전에 해일이 지상을 뒤덮었을 때에도, 육백년 전 화산재가 하늘을 덮었을 때에도, 이백년 전 대륙이 갈라졌을 때에도 벽은 견뎌냈다. 행성의 땅을 거닌 모든 생명체들은 그 벽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위대한 강철의 벽은 붉은 빛줄기 앞에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녹아내렸다. 


천 년 동안 기다렸던 드라추의 냉혹한 밤은 하이브 안으로 파고들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영하 45도의 싸늘한 바람이 거대한 구멍 사이로 밀려들었다. 플라즈마 제네레이터가 만들어내는 열기가 전력을 다해 저항하고 있었지만, 냉기는 차근차근 하이브를 점령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검은 갑옷을 입은 천사들은 차가운 밤과 꼭 닮아 있었다. 


+ 여섯 팔의 반신이 올라오신다! 태조를 찬양하라! 별의 자손께서 오시고 계신다! +


거리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쉴 새 없이 불경한 기도문이 흘러나왔다. 인퀴지터 가이우스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사자의 문이라고 적힌 아치 아래 서있었다. 하지만 아치 위에 사자는 없었다. 그저 뒤틀린 앞발과 끝이 잘린 꼬리가 돋아난 회색 돌덩이가 올라가 있을 뿐이었다. 주변에서 피어오른 검은 연기들이 우리 마냥 조각상을 가두고 있었다. 


상층부는 불길 속에서도 장엄함을 잃지 않았다. 처음 지어졌을 때 이곳은 홀리 테라의 그리폰 길만큼이나 아름다웠으리라. 그러나 이제 스페이스 마린들을 묘사한 장엄한 조각상들은 포탄으로 조각났고, 독수리와 그리폰의 날개는 꺾여 있었다. 가이우스는 랜드레이더 리디머가 교단원들이 숨은 회랑으로 접근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플레임캐논 스톰이 백색에 가까운 불꽃을 토해내자 10미터에 달하는 황금 황제상이 반짝이는 눈물을 흘리며 녹아내렸다. 


사방이 시체로 가득했다. 그의 곁에 쓰러진 변이체 중 하나는 가슴이 꿰뚫린 상처에도 죽지 않고 바둥거렸다. 놈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채 부러진 팔을 휘두르려 애쓰고 있었다. 놈은 끊임없이 피를 토해내며 중얼거렸다. 여섯 팔의 반신이 올라오신다. 태조시여, 찬양합니다….. 가이우스는 무덤덤하게 놈의 머리를 짓밟아 으깨버렸다. 놈은 곧 조용해졌다. 


"데스워치." 그가 복스를 열고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보고하라." 

+ 킬-팀 라파엘. 적의 기갑 부대와 교전 중입니다. + 


목소리 뒤에서 배틀 캐논이 발사되는 굉음이 들렸다. 


+ 한 명이 부상당했지만 심각하진 않습니다. 상황 종료까지 예상 시간 12분. +

+ 여기는 킬-팀 레드메인. 퓨어스트레인 무리를 추격 중이다! 누구든 작전 구역 E-7 으로 달려와! 적이 건트 떼 마냥 바글거리니까! +


가이우스는 손목에 설치된 스크린을 통해 각 분대의 위치를 살펴보았다. 이번 작전의 성공여부는 얼마나 빨리 상층부를 점령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레드메인은 이미 본래 위치에서 벗어나 하층부와 연결된 수직통로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또다른 분대를 계획에서 이탈시킬 수는 없었다. 가이우스는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나머지 팀은 각자의 임무를 수행 중이다. 스스로 해결하라, 레드메인."


복스 채널로 레드메인의 거친 욕설이 들려왔다. 그때 가이우스는 수직통로가 하층부의 중심지역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층부 대성당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퓨어스트레인 진스틸러들은 항상 태조를 지키려고 한다. 어쩌면 그들이 태조를 불러낼 미끼가 될 수도 있겠군. 더 좋은 계획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정정한다. 레드메인. 적을 수직통로로 몰아넣어라." 그는 신속하게 복스 채널을 바꿨다. "여기는 인퀴지터 가이우스. 킬-팀 헥터. 하층부에 있나?”

+ 예스, 인퀴지터. 목표 지점에 도착했습니다. +

“대성당으로 이동한 뒤 경계선을 유지하라.”

+ 킬-팀 헥터. 적을 섬멸하며 이동하겠습니다. +


가이우스는 스크린 안에서 분대가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도망치는 퓨어스트레인 진스틸러들을 쫓다보면 , 이 하이브를 멸망으로 이끈 태조 – 패트리아크도 모습을 드러낼 것이 분명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거리는 녹아내린 강철과 돌, 그리고 외계인들의 시체 냄새로 자욱했다. 물론 모든 시체가 흉측한 외계인은 아니었다. 하이브 방어군의 제복을 입은 자도 있었고, 귀족 같아 보이는 자도 있었다. 그들이 하이브컬트에 협력했을까? 알 수 없었다. 진스틸러 컬트 중 일부는 일반 제국민과 구분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가이우스는 단 한 명의 감염자라도 살아남는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없었다. 한번 컬트가 자리 잡은 하이브는 어차피 구제가 불가능했다. 가이우스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철저한 정화. 하늘에서는 함선들이, 지상에서는 데스워치가 벌이는 철저한 사냥. 단 하나의 우주선도, 단 하나의 생명도 살아나갈 수 없는 박멸. 


박멸. 


그것이 이 행성에서 벌어지는 일을 가장 잘 묘사하는 단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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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위험해요, 아저씨.“


야나가 건물 잔해 속에 웅크리고 앉아, 깨진 유리창 사이로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리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검은 천사들은 교단원들의 탄환을 갑옷으로 받아내며 계속 전진했다. 세 마리의 변이된 광부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들은 작업복으로 사용되는 플랙 아머를 입고 있었지만, 괴물처럼 갑각에 덮인 팔이 여러 개 돋아나 있었다. 가장 첫 번째 놈이 발파 폭약을 집어던졌다. 검은 천사가 몸을 돌리며 쏜 탄환이 그의 배를 관통했지만, 발파 폭약의 폭발은 막지 못했다. 


굉음과 함께 가장 가까이 있던 천사의 갑옷이 산산조각으로 으깨졌다. 세상에. 야나는 입을 막았다. 천사는 핏덩이로 변해 바닥에 흩어졌다. 야나는 천사도 죽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천사들은 강인하고 민첩하고 예리했지만, 교단원들은 이곳의 지리에서 훨씬 익숙했다. 무너진 건물 잔해에서 채굴 레이저가 날아왔다. 하수도의 입구를 열고 튀어나온 이들이 중형 착암기와 쇄암기를 휘둘렀다. 제국을 위해 단단한 암석들을 부수던 광산 장비들이 이곳에선 천사들의 갑옷도 쉽게 잘라내는 무기가 됐다. 


"여길 통과해야만 한다." 


아르녹은 300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대성당의 입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르녹은 입구까지 가는 길에 지나쳐야 할 생명체의 숫자를 세어 보았다. 교단원이 열일곱. 그 중 둘은 스페이스 마린만큼 커다란 덩치를 가진 혐오스런 변이체이었다. 그들은 인간이라기보단 야수에 더 가까워 보였다. 하이브컬트는 데스워치에 접근에 대비해 중화기들을 설치하며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남은 기회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야나의 말이 맞았다. 그녀를 데리고 가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대성당 안쪽에도 그림자들이 꾸물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볼터 탄환이 폭발하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간이 가고 있었다. 아르녹은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이 숨어있는 잔해 왼편에 다 타버린 리만 러스의 잔해가 있었다. 포탑은 바닥에 내리꽂힌 채 찢어져 있었고, 열린 해치에는 교단원 시체 하나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장갑판만큼은 여전히 튼튼해보였다. 주변에 그보다 더 안전해 보이는 장소는 없었다. 아르녹은 결정을 내렸다. 


"소녀." 


야나가 벽에 등을 바싹 붙인 채 그를 돌아보았다. 


"저 전차가 보이나?" 아르녹은 리만 러스를 가리켰다. "저 안으로 들어가라." 

"아저씨는요?" 


야나가 되물었다. 야나의 눈에 해치는 아르녹이 들어가기엔 너무 좁아 보였다. 조그만 야나라면 모를까, 아르녹이 리만 러스 위에 올라타는 모습은 눈에 띌 것이 분명했다. 아르녹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손을 뻗어 야나의 머리 위에 올렸다. 은색으로 반짝이는 그녀의 머리는 너무나 작아서,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것만 같았다. 


"가라." 아르녹이 말했다. "가서 기다려라." 

"하지만…." 


그제야 아르녹은 왜 야나가 머리를 만지는 것을 싫어했는지 깨달았다. 강한 기시감이 아르녹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이런 일이 두 번 있었고, 그때마다 아르녹은 이렇게 말했다. 돌아가라, 소녀.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말고. 아르녹은 거짓말을 했다. 


"어서. 나도 뒤따라갈 것이다." 


아르녹은 끔찍할 정도로 거짓말을 못했지만, 이번 거짓말은 제법 훌륭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야나는 떨리는 눈으로 그를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녹은 그녀가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야나는 거미처럼 커다란 전차 위로 기어올라 해치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몸집에 워낙 작아 시체가 걸려 있는데도 큰 어려움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철컥. 교단원들이 중화기 설치를 거의 끝내고 있었다. 오른쪽 시야 구석에서는 검은 갑주가 점처럼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르녹은 어둠 속을 뛰쳐나와 달렸다. 뒤에서 야나가 소리를 지른 것 같았다. 교단원 중 한 놈이 그를 눈치 채고 몸을 돌렸다. 아르녹은 재빨리 칼을 꺼내 놈의 머리를 내리쳤다. 갑각 사이로 파고든 검날이 깊숙이 박히자, 사내가 뒤로 고꾸라졌다. 더 많은 교단원들이 그를 돌아보았다. 아르녹은 방아쇠를 네 번 당겼다. 쓰러지는 형체들 사이로 스페이스 마린만큼 커다란 변이체가 무거운 파워 픽을 들어 올리는 것이 보였다. 아르녹은 그 장비에 익숙했고, 무엇이 단점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는 첫 번째 공격을 피하는데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가 홱 몸을 돌린 순간 픽이 그의 바로 옆에 내리꽂혔다. 아르녹이 픽의 몸통 부분을 밟고 몸무게를 더하자, 픽을 들어올리던 변이체의 몸이 휘청했다. 아르녹이 휘두른 칼과 놈의 세 번째 주먹이 거의 동시에 꽂혔다. 놈의 힘은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 아르녹은 1미터 가량을 튕겨나갔다. 하지만 관자놀이에 칼이 꽂힌 놈은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아르녹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볼터 탄환이 날아와 옆의 교단원 하나의 몸에 박혔고 놈이 새파란 불덩이로 변했다. 데스워치의 시야 내에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두 번째 변이체가 괴성을 지르며 무기를 들어 올렸지만, 아르녹은 고개를 최대한 숙인 채 전력을 달리기만 했다. 놈이 파워 픽을 휘두르기도 전에 일곱 발의 탄환이 놈의 등에 꽂혔다. 


아르녹은 빗발치는 탄환이 자신에게 맞지 않기를 빌며 달렸다. 볼터 한 발이 그의 등을 스치고 지나간 것 같았다. 50미터. 아르녹은 잠깐 고개를 돌렸다. 교단원들은 그를 쫓는 걸 포기하고 데스워치를 향해 중화기를 발사하고 있었다. 데스워치 역시 채굴 레이저를 피해 몸을 숙이고 있었다. 지금이 기회였다. 아르녹은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대성당의 부서진 황금 문이 발치에서 요란스러운 소리를 냈다. 대성당 안쪽은 희미한 등불로 밝혀져 있었고, 적의 수는 많지 않았다. 아르녹은 괴성을 내지르며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대성당 지하의 카타콤에 도착하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을 죽여야 했다. 함께 광산에서 일했던 이도 있었다. 장엄한 대성당의 기둥과 통로 속에서 하나를 죽이면 또 다른 놈이 튀어나왔다. 누군가가 그의 가슴에 오토건을 적중시켰다. 탄환이 낡은 블랙 카라페이스를 꿰뚫고 오른쪽 심장에 박혔다. 하지만 아르녹은 파워 해머를 주워 그의 머리를 부쉈다. 변이체 한 놈이 휘두른 발톱은 그의 오른쪽 눈을 앗아갔다. 뼈로 만들어진 검을 휘두르는 놈도 있었다. 검은 빛으로 번쩍이는 그 칼은 아르녹이 들고 있던 해머 자루를 종이처럼 쉽게 잘라냈다. 아르녹은 놈의 팔을 붙잡아 반대로 그의 배에 박아 넣었다. 그의 발톱이 아르녹의 등으로 마구잡이로 할퀴었고, 아르녹은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끝없이 느껴지던 전투 끝에 그는 카타콤에 도착했다. 그곳은 이미 죽은 자들뿐이었다. 아마도 사제들이리라. 하층부의 시민들은 이곳에 묻힐 자격도, 돈도 없었다. 처음에 방문했을 때 이곳은 황제를 믿는 이들의 엄숙한 안식처처럼 느껴졌었다. 하지만 이제 이곳은 그저 섬뜩한 침묵으로 가득 찬 무덤으로 보였다. 아르녹은 어둠을 헤치고 가장 깊숙한 곳으로 나아갔다. 그곳에 한때 이 행성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스페이스 마린을 기리는 석관이 있었다. 챕터 마크는 없었다. 아마 시민들의 눈으로는 구분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대성당을 뒤덮은 온갖 파괴에도 불구하고 석관을 내려다보는 천사상은 온전한 상태였다. 


아르녹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석관을 끌어내렸다. 오래된 석관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이 조각났다. 그 안쪽에 그것이 아직 남아있었다. 먼지와 거미줄에 뒤덮인 빨간 갑옷. 두 자루의 검. 그의 볼터. 그가 버렸다고 생각했던 천사의 상징들이. 


'우리는 공포에 맞서는 보루이니..' 


그는 잊어버렸던 말씀을 되뇌이며 갑옷을 입기 시작했다. 변이체들이 낮게 으르렁대는 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피 냄새를 쫓아오고 있는 것이리라. 


'우리는 인류의 수호자이니.‘


놈들의 발톱이 벽감에 안치된 해골들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긴 시간에도 불구하고 갑옷은 그의 몸에 딱 맞았다. 서보 기어가 천천히 회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백팩의 표시등들이 반짝이며 작은 불빛이 카타콤 안쪽을 비추었다. 그는 헬멧을 머리에 썼다. 


"그리고 우리는 공포를 모를 지어니"


아르녹은 그것이 거짓말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구절을 소리 내어 말했다. 아이렌즈에 녹색 불빛이 들어오며 어둠을 밝혔다. 두 마리의 변이체가 벽을 타고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한 놈의 팔은 낫으로, 다른 놈의 팔은 둔기로 변이되어 있었다. 그는 파워소드를 집어 들었다. 역장이 펼쳐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과거라면 황제 폐하를 향한 기도문을 되뇌이며 그 분의 영광을 떠올렸으리라. 지금 그는 부서진 전차 안에서 떨고 있을 작은 소녀를 떠올렸다. 우미디아에서 그가 죽인 수많은 시민들을 떠올렸다. 지금은 들리지 않는 목소리도. 변이체 중 한 마리가 괴성을 내지르며 그를 향해 뛰어들었다. 오랜 거짓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공포를 모를 지어니.


아르녹은 검을 휘두르며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전투 함성을 외쳤다. 


"로그혼의 기억과 테라의 영광을 위하여!" 


크림슨 세이버의 아르녹 세르바트.


먼지 덮인 낡은 거인은 어둠 속에서 최후의 전투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