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연설


나는 황제의 방패요 적을 치는 검이니

제국을 위협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형제와 신민을 수호하리라



모질게도 추운 날이었다. 삼일 만에 기운을 차린 어머니는 야나에게 토사물 같은 냄새를 풍기는 갈색 죽을 만들어 주었다. 죽의 표면에는 차갑게 식은 기름이 둥둥 떠다녔고 안에 있는 고깃덩이들은 시체처럼 질기고 비렸지만, 굶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방 안은 숨은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올 정도로 추웠다. 야나는 처음 겪어보는 날씨였다. 하이브 상층부에서 플라즈마 제네레이터를 멈췄기 때문이란다. 어머니가 그렇게 말했다. 야나는 하층부에 있는 제네레이터를 어떻게 상층부에서 멈춘 것인지, 왜 그런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기적인 상층부의 돼지 놈들이 우릴 모두 얼려 죽이려는 거야. 어머니의 말투는 마치 비쩍 마른 전도사 같았다. 


물이 끊긴지는 한 달이 지났고, 5일 전부터 에너지바도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로 상층부에서 하층부 사람들을 죽이려는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하층부 사람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버텨내고 있었다. 하수구 물은 역겨웠지만 여러 번 정수하면 어떻게든 마실 수 있었다. 벌레 고기도 마찬가지였다. 야나는 그 모든 것에 금세 적응했다. 그 사이 비밀 교회에 오는 사람도 몇 배로 늘어났다. 이백 명이 넘는 인원을 감당할 수 없어서, 교회는 집회 장소를 매음굴로 옮겼다. 덕분에 야나는 매음굴 지하를 탐험해볼 수도 있었다. 그곳은 어둡고 축축하며 잠긴 문이 많았지만, 고문이나 비명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요릭 아저씨는 거짓말쟁이야. 그녀가 입술을 삐죽거리자 요릭은 넉살 좋은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건장한 남성이나 노인들도 참석하기 시작했다. 하층부에 내려오는 자원이 적어질수록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많아졌다. 이제 집회는 더 이상 비밀이라고 부르기도 힘들었다. 사람들은 유행처럼 자신의 옷이나 장비에 벌레 문양을 그리고 다녔다. 야나가 자주 입고 다니는 옷에도 어머니가 그려준 상징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보다 더 특별한 날이었다. 오늘은 "대집회" 날이었고, 어머니는 아침부터 들떠 있었다. 다른 거리의 신도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날이라고 했다. 야나는 여전히 전도사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인다는 건 제법 신나는 일이었다. 


“오늘은 몇 배나 많은 사람들이 신실한 자 로 뽑힐거야. 야나. 이쁘게 차려입고 오렴." 


야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옷장에서 가장 좋은 드레스를 꺼내 입었다. 목에 하얀 레이스 장식이 달린 검은 드레스였다. 낡은 작업복을 가공해 만든 검은 모자도 썼다. 움직이긴 불편했지만 상층부 사람이 된 기분이라 야나는 신이 났다. 거실로 돌아오자 어머니 역시 어디 있었는지 모를 고운 옷을 입고 있었다. 붉은 실크 드레스에 검은 허리띠, 보랏빛 코르셋을 입은 어머니는 교양 있는 귀부인처럼 보였다. 


야나는 항상 집회에 가는 것을 싫어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오늘은 전도사의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도 집중해서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귀족들은 그런 지루한 이야기를 나누는 걸 좋아하니까. 야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은 나도 교양 있게 앉아 있을 테야. 신이 난 그녀는 어설프게 귀족 흉내를 내며 도도한 걸음걸이로 어머니를 따라 집을 나섰다. 

하지만 그 걸음걸이를 유지하기엔 날씨가 너무 추웠다. 야나는 금세 몸을 움츠린 채 손을 모으고 입김을 불어넣었다. 문득 빨갛게 딱지가 진 손등의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는 고양이를 봤다는 야나의 말을 믿지 않았다. 고양이는 모두 죽었단다. 아주 오래 전에. 어머니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어쩌면 그건 고양이가 아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고양이가 아니었다면, 그건 대체 뭐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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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테라의 옥좌시여. 야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야나는 평생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하이브 하층부의 전 거주민이 모두 모인 것만 같았다. 오전 작업 시간인데도! 사람들은 좁은 골목에, 건물의 창문 위에, 작은 지붕 위에 앉아있었다. 군중들의 종류도 다양했다. 광부나 여성 외에도 공장 노동자나 운송자, 감독관들도 있었다. 모두 기대에 찬 눈빛이었다. 


야나는 광장 구석에 백여 명의 갱단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멀리서도 그들의 파란 혓바닥이 똑똑히 보였다. 악명 높은 블루텅 갱단이 분명했다. 저들도 이 집회를 들으러 온 걸까? 갱단원 중에는 코가 낮고 이빨이 날카로운 돌연변이들도 보였다. 그들과 눈이 마주치자, 야나는 왠지 섬뜩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보렴, 야나! 어머니가 말했지? 황제의 노예가 되길 거부한 사람이 이렇게나 많지 않니."


광장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은 경외와 감탄, 기쁨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니 평소엔 이상하기만 하던 전도사의 설교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야나가 어머니에게 대답하려고 입을 연 순간 귀에 거슬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언덕 근처에서 빈 포탄피를 두드리는 소리였다. 군중들이 술렁이며 흥분에 찬 목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어머니!" 


넓은 어깨를 가진 남자가 야나와 어머니 사이를 헤치고 지나갔다. 야나는 어머니의 손을 놓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덕에 가까이 가려는 사람들이 파도를 이루며 야나를 어머니로부터 밀어내기 시작했다. 야나는 사람들의 발과 배에 치이면서도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앞을 볼 수가 없었고 몸을 가누기는 더 힘들었다. 누군가 팔꿈치로 야나의 이마를 치고 지나갔다. 야나의 모자가 땅에 떨어졌고, 순식간에 사람들의 발에 짓밟혀 넝마로 변해버렸다. 야나는 모자 쪽으로 다가가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파도는 자꾸만 그녀를 더 멀리 밀어냈다.


야나는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군중에서 빠져나오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광장 바깥 쪽으로 갈수록 사람들의 수는 점점 더 많아졌다. 숨이 막혔다. 누군가의 발이 다시 야나의 얼굴을 때렸다. 입 안에서 피 맛이 났다. 눈물이 핑 돌았다. 두꺼운 장화가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밟았다. 야나의 발이 철판을 따라 미끄러졌다. 안돼. 야나는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감쌌다. 


하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크고 강인한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붙잡고 있었다. 비켜라. 낮고 굵은 목소리가 위압적으로 명령하자, 사람들은 웅덩이에 돌을 던진 것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야나는 고개를 들었다. 낡고 더러운 작업복을 입은 거인이 한 손으로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그 이방인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조심해라, 소녀." 


거인이 냉담한 어조로 말한 뒤 손을 놓아 주었다. 온 사방이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거인의 주변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떨리는 눈으로 거인을 흘겨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특별한 역장이 펼쳐져 있는 것 같았다. 야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고, 모자도 마찬가지였다. 야나는 일단 이곳에 있기로 마음먹었다.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다간 다시 휩쓸릴 것 같았다. 그녀의 검은 드레스는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 상층부의 귀족 같았던 기분이 사라지자, 추위가 더 모질게 느껴졌다. 


누군가가 쓰레기 언덕 위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 누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모은 걸까? 야나도 그 사람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까치발을 세워도 사람들의 어깨 말고는 보이지 않았다. 야나는 너무 작았다. 그때 그녀가 알고 있던 전도사와는 전혀 다른 낮고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 페하의 이름을 대신하여 말하는 제국 정부와 상관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복종할 지어다. 모든 인간은 황제신의 신성한 질서의 일부이다. 우리 모두 이 교리를 알고 있습니다." 


웅성거림이 조금씩 잦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그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또렷했다. 


"그러나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플라즈마 제네레이터의 오염을 견디고, 위층에서 사용하던 물과 공기를 마시고, 썩은 고기보다 못한 식량을 배급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광산에서 단단한 암석을 캐고, 프로메슘을 정제하며 위험을 무릅쓰죠. 우리 상관이 기름진 배를 불리며 안락한 방에서 고급술을 마시고 있을 때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에게 복종해야 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나는 이제 팔짝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여전히 쓰레기 언덕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거인이 그녀의 목덜미를 붙잡아 들어올렸다. 가만히 있어라, 소녀. 그는 위압적으로 이야기한 뒤 야나를 자신의 어깨에 올려 주었다. 그제야 언덕 위에 올라선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감사합니다, 거인 아저씨. 야나가 속삭였지만 거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언덕 위의 남자는 전도사들보다 훨씬 화려한 붉은 로브 위에 가죽 허리띠를 두르고, 금속과 보석으로 장식된 영대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머리는 매끈한 대머리였지만 눈썹 사이에서 정수리까지 이어진 갑각 같은 삽입물이 눈에 띄었다. 로브 위에 입은 플랙 아머에서 뻗어나간 목보호대에는 날카로운 장식들이 달려 있어서, 커다란 짐승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야나가 지금껏 들었던 어떤 사제보다도 진실 되게 느껴졌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원래 그런거야. 내 아버지의 아버지도, 그 아버지의 아버지도 그랬어. 형제자매들이여, 아닙니다. 당신들의 조상은 이 행성에 위대함을 이룩하고자 온 용기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하로 내몰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자기 배를 불리기 바쁜 돼지들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누가 그들에게 그런 권리를 주었답니까? 그 신성한 질서는 누가 결정한답니까? 황제가 그들을 하나하나 뽑아주었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그들은 그저 황제의 이름을  이용해 우리를 기만하고, 착취하고 있을 뿐입니다!" 


누군가가 그래 맞아! 라고 외쳤다. 분노와 흥분은 빠르게 번졌다. 모두가 생각은 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못하던 말들이었다. 문득 야나는 황제교의 사제들이 생각났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교회 이야기를 꺼내면 황제교의 사제들이 와서 잡아가 죽인단다. 집회가 끝나면 요릭 아저씨가 그렇게 말하며 겁을 주곤 했다. 이건 공개적인 자리가 아닌걸까? 아니면…….


"이제 그들은 우리를 죽이려 합니다. 물도, 식량도, 에너지도 끊긴 걸 모두 알고 계시겠죠. 이대로면 우리 모두 죽고 말 겁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황제교의 사제들, 상층부의 귀족들… 좋은 옷과 갑옷, 식량과 공기를 누리는 그들이 과연 이 행성의 주인입니까? 왜 우리가 여기 앉아 죽음을 받아들여야 합니까? 우리는 그들의 수를 압도합니다. 우리는 그들보다 강인합니다. 우리는 그들보다 절박합니다."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어린 야나조차 그들의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뭔가가….


"이제 새 뜻을 받아들여야 할 때입니다. 우리를 지하에 처박고 죽게 버려둔 황제가 아니라 우리의 진정한 구원자를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별의 자식들이 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아, 별의 자손들을 찬양하라! 승천의 날이 가까이 왔으니 이제 우리도 준비해야 합니다." 


갑자기 멀리서 큰 폭음이 들렸다. 한 번, 아니 두 번. 비죽비죽 솟아오른 회색 건물들 사이로 까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야나는 단번에 그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다. 아니 이곳에 있는 모든 군중이 그랬다. 황제교의 대성당이었다.


"보십시오. 이미 신실한 자 들과 그 자손들이 거짓된 황제의 우상을 부수고, 우리를 기만하던 사제들을 사냥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아둔 자원은 모두 우리의 것이 될 겁니다. 우리는 상층부를 뒤엎고, 우리의 것을 되찾을 겁니다. 깨끗한 물과 신선한 공기, 하늘과 별! 이제 하늘과 별이 우리 것이 될 겁니다! 승천의 날이 올 때까지!" 


사람들이 고함을 질렀다. 승천의 날이 올 때까지! 승천의 날이 올 때까지! 언덕 위에 선 남자의 시선이 군중을 훑고 지나갔고, 잠깐이지만 야나와 눈이 마주쳤다. 야나는 갑자기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더 이상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상했다. 야나는 어머니와 함께 집에 가고 싶었다. 어머니. 어머니는 어디있지? 


"여러분 중에 이미 축복을 받고 태어난 자들도 있습니다. 위대한 태조(太祖 Patriarch)께서 명하시니, 전장으로 나가 형제들과 함께 싸우십시오!" 


가장 열정적이던 이들이 함성을 내지르더니, 군중을 헤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나가 이름을 알고 있는 이들도 꽤 있었다. 축복을 받고 태어난? 그게 무슨 뜻일까. 어머니가 언제나 받고 싶어 하던 그 축복을 말하는 걸까? 


"만약 믿음을 가졌지만 아직 신실한 자로 뽑히지 못한 이가 있다면, 앞으로 나오십시오. 승천의 날이 가까웠으니 원하는 자는 누구든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별의 자손의 일부가 되십시오. 그러면 확실한 구원이 올 것입니다!" 


가장 먼저 나서서 무릎을 꿇은 사람은 광부 아르곤이었다. 마른 창부인 리스가 뒤따랐다. 퉁퉁 부은 밀주 양조사, 한 팔이 없는 심부름꾼 소년. 뼈만 남은 프로메슘 노동자. 그리고 야나의 어머니. 사람들이 계속해서 걸어 나왔다. 연설을 마친 남자는 한명 한명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도문을 읊어주었다. 멀리서 다시 폭발 소리가 들렸다. 연기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앞으로 나선 사람들은 갱단의 인도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골목에 들어가기 직전 야나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울고 있었지만,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만큼이나 행복해 보였다. 


연설이 끝나고,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싸우러, 어떤 사람들은 축복을 받으러, 어떤 사람들은 쓰레기 더미 위의 남자 앞에 무릎을 꿇고 몰려들었다. 그들은 모두 보랏빛으로 눈을 빛내며 더 많은 가르침을, 구원을 갈구했다. 모든 것이 뭔가 이상했다.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거인과 야나 뿐이었다. 거인은 조각상처럼 미동도 없이 서있었다. 그는 두꺼운 입술을 꽉 깨문 채 험상궂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나는 어머니를 쫓아가고 싶었지만, 내려갈 수가 없었다. 거인 아저씨. 야나가 속삭였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뭘 보고 있는거지? 야나는 그의 시선을 쫓아 고개를 돌려보았다. 

거인이 보고 있는 것은 연설을 하던 남자도, 타오르는 성당도 아니었다. 그는 광장 교차로의 부서진 황동 석상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조각상들.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황제의 천사들. 팔은 떨어져 나갔고, 가슴의 황금 독수리는 부서졌으며, 칼도 부러진 천사들. 거인은  그 천사들을 보고 있었다. 


야나는 그의 모습이 부서진 조각상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




아르녹은 아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모든 것이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요릭의 권유를 받아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이건 명백한 이단이었다. 소규모도 아니고 하이브 하나를 통째로 뒤엎으려는 규모의 이단. 연설을 한 남자는 대중을 사로잡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어떻게 유지하는지도. 게다가 아까부터 머리를 파고드는 감각은 싸이킥이 분명했다.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인들은 자신들이 조종당하는지도 모를 것이 분명했다. 


이들이 믿는 별의 자손이나 태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황제의 올바른 믿음에서 벗어난 것만은 분명했다. 멈춰야 해. 아르녹의 내면이 속삭였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분노가 끓어올랐다. 할 수만 있다면 광장의 모두를 짓이겨 곤죽으로 만들고 싶었다. 불경한 언어를 내뱉는 저 연설자의 입을 갈가리 찢고 싶었다. 


어떻게?


하지만 목소리가 그의 분노를 잠재웠다. 내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자격이 있을까? 황제 폐하를 대신해서 싸울 자격이. 아르녹은 분노와 당황, 절망을 느낄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손에 목을 졸리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그는 연설을 막지 않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불경함이었다. 형제들이라면 그를 비웃고, 비난했을 것이다. 인퀴지터라면 그를 이단으로 낙인찍었으리라. 아니 그는 이미….


천사여, 당신은 맹세를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목소리. 목소리는 유령처럼 그를 쫓아오며 과거의 잘못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가 저지른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무고한 자를 죽이고, 그들의 피에 취했던. 그것이 아르녹이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였다. 어쩌면 이들도 무고할지 모른다. 어쩌면 이들은 그저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시민들일지 모른다. 내가 보는 것은 모두 사악한 악마의 기만에 불과할지도.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정당화시킨단 말입니까?

"닥쳐라, 망령!" 


아르녹은 뒤늦게 자신이 실제로 소리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깨에 앉은 소녀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은색 머리칼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성가셨지만 순수한 아이였다. 겁을 줄 생각은 없었다. 아르녹은 소녀를 내려준 뒤 사과했다. 


"미안하다, 소녀." 

"아니에요. 올려주셔서 고마워요." 


소녀는 그렇게 인사한 뒤 몸을 돌렸다. 아르녹은 소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골목으로 사라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아르녹은 축복이라는 것을 받으러 갈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어차피 황제는 단 한 번도 그의 기도를 들어준 적 없었다. 그는 더 이상 황제의 천사가 아니었다. 아까 느낀 분노와 좌절감도 그 시절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나도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할지도. 형제들이 그러했듯이. 


"아저씨." 


떠난 줄 알았던 소녀가 어느새 다시 그의 곁으로 와있었다. 아르녹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작은 소녀는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르녹이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혼자 축복을 받으러 갔어요. 오래 전부터 받고 싶어 했거든요." 

"그래." 아르녹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어머니가 축복을 받을 수 있어서 기뻐요. 하지만 축복 받으러 간 사람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래."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르녹은 걷기 시작했다. 소녀가 쫓아올 수 있을만큼 느린 걸음이었다. 


"어머니가 안돌아오면, 집에 아무도 없어요. 전 혼자 있는 건 싫어요." 

"그래서?" 


왜 대답해 준거지? 아르녹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소녀가 어떻게 되든, 나와는 관계 없는 일이야. 곧 제국군이 소식을 듣고 올 것이고, 전투가 벌어지겠지.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고, 아마도 이 소녀도 죽게 될 거야. 그러니…. 


"저는 어머니 같은 믿음이 없지만, 그래도 가서 축복을 받아도 되는 걸까요?" 

"아니." 


아르녹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하고 깜짝 놀랐다. 자신도 축복을 받을지 고민했던 것 치고는 너무나도 단호한 목소리였다. 마치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는 것처럼. 


소녀의 걸음이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왜 그녀를 말렸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고개를 돌리자 소녀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아마도 누구든 어른이 괜찮다고 말해주길 바란 질문이었을 것이다. 겁에 질린 어린아이가 으레 그렇듯. 


"집으로 돌아가라, 소녀." 아르녹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어머니를 기다려." 

"하지만…." 


이 소녀는 아르녹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소녀 앞에서는 그의 감정이 필요 없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아르녹은 다시 한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 위에 올렸다. 은색으로 반짝이는 그녀의 머리는 너무나 작아서, 맨 손으로도 으깰 수 있을 것 같았다. 


"돌아가라, 소녀.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말고." 


그가 말했고, 소녀는 그 말에 따랐다. 소녀는 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향해 걸어가며, 그때처럼 몇 번이고 그를 돌아보았다. 곧 전투가 벌어질거야. 아르녹은 생각했다. 그러면 축복을 받았던 아니던, 소녀는 벌레처럼 죽게 되리라. 어째선지 가슴이 칼에 베인 것처럼 쓰렸다. 


아 천사여. 이제 와서 당신이 누구를 동정한단 말입니까?


목소리가 그를 비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