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공포

황제 폐하시여

어떻게 제가 이런 잘못을 저지르도록 방관하셨나이까

어떻게 당신의 검이 무고한 자를 베도록 놔두셨습니까

어떻게 악마가 당신의 천사의 눈을 가리도록 만드셨습니까

이것은 시험입니까? 

아니면..





밤을 알리는 사이렌이 들리자 아르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안은 싸늘했다. 곧 더 추워지겠지. 그는 생각했다. 견디기 힘들 정도의 추위는 아니었다. 하지만 회색빛 강철 벽과 시린 냉기는 그에게 안치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심한 상처를 입은 형제들이 석관에 안치되던 곳은 항상 이렇게 싸늘했다. 하지만 방의 크기는 안치실보단 석관 자체에 더 가까웠다. 아마 위대한 선조들도 이렇게 답답했겠지. 


아르녹은 꼬박 이틀을 방에 있었다. 밖은 너무 소란스러웠고, 그의 일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광산은 이제 바리케이트가 설치된 무기고로 변했다. 이제 하이브컬트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려주고 있으니 찾아오라는 방송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방송은 노골적이지만 효과적이었다. 이제 대집회 때 나서지 않았던 이들도 하나 둘 그들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르녹은 가지 않았다. 아르녹은 스스로와 싸워야 했다. 


목소리가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왜? 어째서? 어떻게? 목소리는 끝없이 그 질문을 반복했다. 아르녹은 목소리를 잠재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피와 폭력. 하지만 아르녹은 견뎌내려 노력했다. 참지 못할 때면 벽면을 후려쳤다. 고통이 느껴지면 목소리는 잠깐이지만 잦아들었다. 비명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비명이라니. 불쌍한 제국 사제들이 산채로 타오르는 소리를 들려주는 것은 끔찍했지만 효과적인 선동 방법이었다. 그들을 억압하던 절대자들이 잿더미로 변하자, 사람들은 자유와 혼돈을 만끽하기 시작했다. 흥분한 군중들이 거리로 나와 소리를 지르고, 총을 쏴댔다. 아무 것도 아닌 이유로 싸움이 벌어졌고, 제법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르녹도 마찬가지였다. 아르녹은 잠시 대성당에 있는 성물들이 떠올랐지만 잊어버리기로 했다. 어차피 황제는 그를 버렸고 그도 마찬가지였다. 다 의미 없는 집착일 뿐이었다. 


'이제 무엇을 하지?' 


그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그는 하이브컬트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이제부터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이브 통제권을 탈취하기 위해 상층부를 공격할 것이고, 운이 좋다면 성공하겠지. 하지만 거기까지 일 것이다. 어뎁투스 아스타르테스, 인퀴지션, 데스워치. 승천의 날이 오기 전에 그들 중 누군가가 이곳을 탈환하려 할 것이 분명했다. 그 때가 오면 하이브는 불바다로 변할 것이다. 시체로 벽을 쌓을 수 있을 만큼 많은 이들이 죽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아르녹도 그 시체 중 하나가 되리라. 괜찮은 최후야. 그는 생각했다. 전장의 불길 속에서 죽는다는 것. 반역자치고는 괜찮은 최후였다. 목소리가 그의 생각을 방해했다. 


천사여 그대의 속죄는 어디 있습니까? 


글쎄. 아르녹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때 복도 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발소리도. 맨발인 것 같았다. 아르녹은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가 그의 방문 앞에 멈춰섰다. 누구지? 하이브컬트의 일원일지도 몰랐다. 그를 끌어들이러 온 것일지도. 


천사여 어째서 


누군가가 그의 방문을 힘없이 두드렸다. 

동시에 목소리가 멎었다. 






==





발목이 심하게 아팠다. 야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입을 막았다. 바로 위에서 남자들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었겠지.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야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한참을 숨죽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야나가 떨어진 하수구로 오줌을 갈겼다. 야나는 벌레처럼 몸을 움직여 그곳에서 조금 떨어졌다. 하수구의 비린내가 너무 심해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갱단원들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야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수구는 어두웠고 형연할 수 없는 악취로 가득 차 있었다. 야나는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위쪽만큼 춥지는 않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몸에 온기가 돌아오자 왼쪽 어깨도 욱신거렸다.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빨간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떨어질 때 긁힌 모양이었다. 야나는 울먹이며 걷기 시작했다. 오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후회스러웠다. 하수구는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야나는 벽을 더듬으며 걸어야 했다. 오른발목이 너무 아팠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안쪽으로 연결된 철문이 만져졌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야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축축하고 좁은 복도가 여러 방향으로 뻗어 있었다. 다행히 군데군데 등불이 밝혀져 있었다. 복도에서는 기름이 타는 냄새와 젖은 살갗에서 나는 비린내, 썩은 가죽 냄새가 났다. 경비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구청 지하인걸까? 야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벽면 틈새마다 황갈색 이끼와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어디선가 사람들이 신음하는 소리가 났다. 물방울이 똑, 똑 하고 떨어질 때마다 야나는 몸을 바싹 움츠렸다. 


입이 바짝 말랐다. 강철 벽면에 조각된 해골 모양 장식품들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만 같았다. 여기가 정말 축복을 받는 곳일까? 야나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오히려 요릭 아저씨가 말했던 매음굴 지하 고문실의 이미지가 이와 비슷했다. 어쩌면 내가 잘못 찾은 걸지도 몰라. 야나는 생각했다. 아니면 신실한 자들이 애초에 다른 곳으로 갔거나. 


갑자기 복도가 왼쪽으로 꺾이더니, 12개의 문과 연결된 커다란 홀이 나왔다. 홀 맞은편에 새로운 복도가 어둠 속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곳의 공기는 아까보다 훨씬 축축했고, 사람들의 신음 소리도 더욱 선명했다. 메스껍고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피와 독한 약, 오물을 한데 섞어놓은 것 같은 냄새였다. 모든 문에는 동그란 창문이 달려 있었고, 밖에서 잠글 수 있는 핸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야나는 가장 가까운 문으로 다가갔다. 창문을 들여다보기 위해선 까치발을 들어야 했다. 


'황금 옥좌시여.'


어스름한 조명 아래 한 남자가 누워서 신음하고 있었다. 방바닥에는 빠진 머리카락이 개미떼처럼 흩어져 있었다. 침을 흘리며 벌어진 입가에는 짐승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돋아나 있었고, 얼굴은 보라색 점박 무늬로 뒤덮여 있었다. 엉덩이 사이에는 가시 같은 것이 돋아나 있었고, 팔 아래에도 커다란 혹이 솟아나와 있었다. 그는 땀방울을 뚝뚝 떨어트리며 고통인지 쾌락인지 모를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이 남자가 받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축복은 아니었다. 뭔가 끔찍한 것이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야나가 지켜보는 동안 남자의 몸은 발작하듯 경련하더니 혹이 풍선처럼 크게 부풀었다. 잠시 후 무언가가 혹을 안쪽에서부터 찢고 나왔다. 날카로운 손톱을 가진 보라색 팔이었다. 새로 돋아난 팔은 마치 갓난아기처럼 느릿하게 바둥거렸고, 남자는 킬킬 거리며 두 팔로 소중하게 그것을 감싸 안았다. 


'대체 저게 뭐지?‘


야나는 현기증과 구역질에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축복을 받으러 간 사람들은 모두 저런 존재가 되버린걸까?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야나는 불안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야나는 황급히 다른 방으로 다가가 까치발을 들었다. 그곳에는 한 여성이 으르렁대며 바닥을 긁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팔이 두 개나 더 돋아난 상태였다. 다행히 그녀는 야나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다른 방에 있을지도 몰라. 야나는 달렸다. 더 이상 발목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야나는 일곱 번째 방에서 어머니를 발견했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 앞에는 야나가 난생 처음 보는 괴물이 서있었다. 야나가 일전에 봤던 생명체가 워프의 저주를 받고 흉악하게 자라나면 저렇게 생겼을 것 같았다. 여섯 개의 다리를 가진 괴물은 곱추처럼 등을 구부리고 있는데도 성인 남성보다 훨씬 커다랬다. 등은 보라색 갑각으로 덮여 있었고, 손끝에 달린 손톱은 칼처럼 날카로웠다. 괴물은 두 다리로 서있었지만 사람이라기보단 짐승에 가까워 보였다. 가장 끔찍한 것은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날름거리는 긴 혀였다. 그 혀는 마치 하나의 생물처럼 움직이며 녹색 침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방구석에서 겁에 질려 있었다. 괴물을 바라보는 눈은 크게 확장되어 있었고, 손은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렸다. 입술에선 침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입었던 드레스는 너저분하게 찢겨져 있었고, 신발 한짝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괴물이 한 발짝 다가올 때마다 그녀는 벽으로 몸을 더 바싹 붙였다. 괴물이 다시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안돼!" 


야나가 소리치며 문을 쿵쿵 두드렸다. 괴물이 고개를 돌렸고 야나와 눈이 마주쳤다. 빨간 핏줄이 오른 샛노란 눈동자가 번들거리며 그녀를 노려본 순간, 야나는 엉덩방아를 찢고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생전 이렇게 두려워 본 적이 없었다. 괴물은 눈빛만으로 그녀를 갈가리 찢어버릴 것 같았다. 이빨이 마주치며 딱딱 소리를 냈다. 무서워. 그것이 야나가 생각할 수 있는 전부였다. 살려주세요, 어머….

어머니.


"야나!" 


방 안에서 들려온 어머니의 목소리에 야나는 숨을 삼키며 정신을 차렸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까치발을 들기는 더 힘들었지만, 야나는 둥근 창문에 매달리는 듯한 자세로 안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괴물은 한 팔로 어머니의 비쩍 마른 팔을 붙잡고 있었다. 혀가 날름거리며 그녀의 목덜미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안돼. 눈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를 놔줘. 


하지만 어머니의 눈은 아까보다 훨씬 또렷했다. 그녀는 공포를 극복한 것처럼 입을 앙다물고, 단호한 눈빛으로 야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망쳐. 목을 타고 괴물의 혀가 올라오는 것을 느낀 어머니가 신음하듯 내뱉었다. 괴물의 혀가 날카롭게 곧추섰다. 놈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머니가 다시 한번 크게 외쳤다. 


“도망쳐, 야ㄴ…!”


괴물의 혀가 부드러운 목덜미에 꽂히는 소리가 목소리를 끊었다. 비명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가 어머니의 목을 타고 새어나왔고, 그녀의 사지가 발작하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야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도망쳐. 어머니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야나는 흐느끼면서 복도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멈춰! 푸른 혀를 날름거리는 여성이 그녀를 붙잡기 위해서 달려오고 있었다. 야나는 방향을 틀어 달렸다. 좁은 복도가 계속 이어졌다. 등 뒤에서 부츠가 철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도망쳐. 어머니가 계속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도망쳐야 해. 또다른 코너를 돌려는 순간 어떤 남자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깨물었다. 남자의 아귀힘이 느슨해지자 야나는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쳤다. 남자가 발을 헛디디며 벽에 부딪친 뒤 바닥에 쓰러졌다. 


계속 달리다보니 어느새 하수구 문이 보였다. 야나는 몸으로 들이받듯 문을 열었다. 다친 어깨가 쓰라렸다. 하수구는 여전히 새까만 암흑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뒤에서 사람들이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도망쳐야 해. 야나는 자신이 떨어진 배수구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곳은 다시 올라갈 방법이 없었다. 반대쪽으로 가면 출구가 있을까? 어둠 때문에 알 수 없었다. 막다른 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대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야나는 황급히 어둠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가 누군가 쫓아오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이따금 무언가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야나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발목의 고통이 자꾸만 그녀의 걸음을 늦췄다. 저쪽이야!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도망쳐. 


도망쳐야 해. 하지만 어디로? 


어둠과 눈물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야나는 발을 내딛었지만 바닥이 없는 곳이었다. 멈추려고 했지만 욱신거리는 발목 때문에 균형을 잡을 수 없었다. 안돼. 야나는 그대로 하수구의 수로 속으로 빠져들었다. 


쿨럭. 끔찍한 냄새가 나는 오염 물질과 오수가 그녀의 코와 입을 막았다. 도망… 출렁이며 물이 흐르는 소리 때문에 추격자들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도망쳐야… 쿨럭. 


쿨럭.


야나의 은빛 머리칼이 새까만 수면 속으로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