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하는 항구를 나와 거리를 걷던 도중, 택시를 잡아 탄 뒤 30분쯤이 지났을 때 니시카타 5초메 15번지에 도착했다.


항구에서 나온 직후에, 유경하는 북쪽으로 걸어 가 시바(芝) 공원 근처에서 택시를 잡고 히비야 공원 근처의 도로를 지났다. 황거 외원의 도로 부근을 지나친 뒤 칸다 강을 건너고 얼마 후에 니시카타 5초메에 도착하였고, 유경하는 거기에서 택시를 세우고 값을 지불한 뒤 15번지까지 걸어 갔다. 


걸어 가다가 중간에 택시를 잡아 탄 이유는, 유경하가 지도를 보고 계산해 보았을 때 항구가 있는 미나토로부터 니시카타까지는 12킬로미터가 떨어져 있을 뿐더러 도보로는 대략 1시간 50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겨우 그게 택시를 잡아 탈 만한 이유가 되냐며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지만, 유경하는 이틀 동안 여객선의 흔들림 탓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피로가 극에 달한 상황이었기에 약간이라도 휴식이 필요했다.


“열쇠- 열쇠가, 여기... 있다.”


유경하는 조선에서 출발했을 때 받았던, 그 집의 열쇠를 가방에서 꺼냈다. 열쇠는 전혀 사용하지 않은 듯 녹이 하나도 슬지 않은 채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 철커덕.


유경하가 야나기(柳)라고 적힌 흰 문패가 달려 있는 대문에 달린, 작은 열쇠 구멍에 열쇠를 집어넣고 돌리자 금속이 접촉하는 듯한 질감의 소리가 울리며 문이 열렸다.


“이렇게나 넓은 집이었다니.”


대문을 열고 들어간 직후, 유경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들어간 그 곳에는 큰 2층짜리 일본식 가옥 하나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집의 넓이는 대략 60평은 될 정도로, 사람 한 명이 살기에는 너무 컸었기에 놀랄 만도 했었다. 


‘옛날 주인은 도대체 무엇을 하던 사람이었던 거지?’


유경하는 조약돌이 깔린, 현관으로 가는 정원의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며 집의 외관을 올려다 보았다. 집의 구조는 검은 기와가 깔리고 각 층마다 창이 달린,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의 구조를 하고 있었지만 넓이, 특히 정원의 넓이는 다른 가옥들과는 명확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보통 일본식 가옥의 정원은 상대적으로 크지 않고 가옥이 작은 정원을 감싸고 있어 집 안에서 바라보는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이 유경하가 봐 온 일본식 가옥들의 일반적인 형태였다. 정원의 넓이가 크다면 그에 비례하여 가옥의 넓이도 크거나 여러 채가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 집은 정원의 한 가운데에 있을 뿐더러 정원의 넓이에 비하면 가옥의 넓이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비록 가옥의 크기가 다른 집에 비해 넓다고는 하지만 딱 한 채가 자리하고 있을 뿐, 그 집 말고 정원에 다른 큰 구조물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서양 저택을 지으려다 취소하고 새 건물을 지은 걸까?’


오히려 이 집의 정원은 유경하가 살았던 경성의 서양식 저택과 더욱 유사했다. 최소한 유경하의 집과 혼마치의 다른 저택들은 대다수가 이런 형태의 정원과 유사한 건물 배치 방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것이 독일식인지, 프랑스식인지, 영국식인지는 주인 외에 아무도 몰랐지만 유럽식의 정원들이 비슷한 건물 배치를 공유한다는 것 정도는 유경하도 알고 있었다.


정돈된 잔디가 땅 위로 자라난 정원 한가운데의 길을 걸어 간 끝에는, 

유경하가 살 집으로 들어가는 현관문이 있었다. 유경하는 대문을 열었던 그 금색의 열쇠로 현관문의 잠금을 풀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유경하는 문을 열고 조심스레 현관으로 들어갔다. 혹시나도 옛 집주인이 아직 남아 있을까 싶어 조용히 일본어로 인사를 하자 집 안에 경하의 목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아무도 없구나.’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이내 주변을 둘러보던 유경하의 눈에 들어온 것은 현관 옆쪽의 신발장 위에 올려진 작은 종이 하나뿐이었다. 유경하는 그 종이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고선 내용을 보았다.


‘이 집에서 편히 지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경하는 종이에 적힌 글을 읽고 마음속으로 참 친절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옛날 이 집에 살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런 넓은 집에서 몇 명이 살고 있었던 것일까? 여러 명이 살았다면 글을 쓴 건 누구였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유경하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벗어 현관 한쪽에 정리해 두고, 깔끔히 청소된 복도의 마루를 걸어 가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집 안 곳곳에는 책장, 탁자, 옷장 등 다른 집처럼 여러 가지 가구가 놓여 있었다. 가구들은 조금 오래돼 보였지만 쓰지 못할 정도로 낡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급하게 새 것을 준비했다기보다, 옛날부터 쓰던 것들을 깔끔하게 관리하고 있는 듯한 아늑함이 집 안에 감돌고 있었다.


유경하는 바깥을 보는 창이 달린 복도를 지나며 정원을 보았다. 집 뒤편에 자리한 정원의 한켠에는 물이 흐르는 호수 하나가 있었다. 조선에서 살았을 때 잉어를 호수에 길렀던 기억이 떠올라 멈춰 서 쳐다보았지만 이 집의 호수에 물고기는 한 마리도 없었다. 


호수에 자라고 있는 생물이라고는, 그저 붉은 연꽃 하나와 연잎이 자라 수면 위에 떠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정원 구조는 일본식인가?”


유경하는 천천히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다가 정원이 보이는 층계참의 창문을 내려다 보았다.


호수와 그 주변에 난 풀들을 뒤로, 단풍나무와 벚나무가 심어져 자라고 있는 구도의 배치를 보았을 때, 정원 넓이와 건물 배치 구조는 서양식이었지만 정원 구조 자체는 유경하가 봐 온 일본식 정원이 맞는 듯했다.  


조선인이 일본인이 살던 일본식 가옥과 정원이 딸린 집에서 살아 간다는 것이 어쩐지 모순된 듯하다고 생각하면서 유경하는 계단을 계속해서 올랐다. 


동시에 옛 주인도 자신이 조선인인 것을 알았다면 그리 친절하게 편지를 써 주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지만 유경하는 그것을 신경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내 방은 여긴가 보네.”


유경하는 이내 2층에서 가장 넓은 방의 문을 열었다. 먼지 하나 쌓이지 않은 흑갈색의 나무 바닥 위를 천천히 걸어 들어가며, 넓이는 13평 정도 될 법한 방 안을 천천히 둘러 보기 시작했다.


문 바로 건너편의 벽을 차지한 창문 앞으로는, 1인용 치고는 조금 넓은 서양식 침대 하나가 놓여 있었다. 단단하고 질 좋은 나무로 되어 있는 침대 위로는 순백색의 매트리스와 베개, 시트가 올려져 있었다.


그 침대의 바로 옆에 놓인 옷장에는 조선에서 살았을 때 입었던 옷들이 전부 정리되어 깔끔한 상태를 유지한 채로 걸려 있었다. 코트, 자켓, 셔츠, 바지부터 온갖 옷들이 전부 하나도 빠지지 않고 완벽하게 존재함을 확인한 뒤, 유경하는 방 한가운데에 놓인 상자들로 시선을 돌렸다.


두꺼운 골판지로 이루어진 정사각형의 큰 상자들은, 벽 하나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큰 책장과 옷장 사이의 정확히 가운데에 놓여져 있었다. 미약한 오후의 일광에서 아주 약간의 그림자를 만들어 낸, 어쩐지 무거워 보이는 그 큰 상자들 중 하나를 유경하는 천천히 열어 보았다.


“아, 책들이구나?” 


그 박스들 안에 들어 있던 내용물은 조선에서 출발할 때 보내 두었던 책들이었다. 1937년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 영어나 일본어로 된 의학 전문서들과 소설, 조선어로 되어 있는 몇몇 책들과 아주 드물게 불어와 스페인어로 되어 있는 책들이 박스 안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다만 유경하가 가지고 있던 책의 종류는 앞서 말한 것보다도 더 많았고 그 수가 너무 방대해 사람들도 그것을 도저히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었는지, 박스 밖으로 꺼내지 않고 그냥 방에 둔 듯 했다.

 

“어쩔 수 없지.”


유경하는 이내 책들이 포장되어 있던 박스들을 열고 천천히 책들을 책장에 꽂으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조선에서 나올 때 짐으로 보낸 것이라고는 책들이나 옷들, 필기구 같은 것과 몇몇 중요한 물건들만이 고작이었기에 정리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책장의 맨 윗 칸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일렬로 늘어 놓아 정리하고, 그 바로 아래 4칸에는 의학 서적들을 일본어, 영어, 조선어 순으로 하나하나 정리해 꽂아 놓았다. 나머지 아래 5칸에는 소설들과 시집이나 여러 가지 책들을 전부 하나하나 꽂아 넣음으로서, 유경하는 모든 책을 정리하는 데 성공했다.


“다른 방은 어떻게 되어 있는 걸까.”


유경하는 방 바닥에 누워 있다가 이 집의 구조가 궁금해져 몸을 일으켰다. 집의 새 주인이 되었으니 집에 대해서도 알아 두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 경하는 방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동시에 천천히 미닫이로 여는 창문들이 달려, 한쪽 벽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복도의 끝으로 걸어가 보았다.


“여기는... 발코니?”


복도 끝에는, 난간이 걸쳐져 있고 마룻바닥으로 된 발코니와, 창문을 경계선으로 안쪽에 의자와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는 공간이 있었다. 햇빛이 들어오는 동쪽에 위치해 있어 식물들을 기르기 위해 쓸 법한 공간이었지만 식물을 기르는 화분은 없었다. 전의 집주인이 가져갔는지, 아니면 옛날부터 기르지 않았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유경하는 1층으로 내려갔다. 거실, 주방, 욕실, 화장실 등도 살펴 보았지만 다른 집들과 특별히 다른 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 장소에서 경하가 알아낼 수 있었던 사실은 전의 주인이 먼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아주 깔끔하게 정리를 해 놓은 뒤 이 집에서 떠났다는 사실 말고는 없었다. 


손님을 접대하는 응접실 정중앙에는 검은 흑단나무로 된 탁자 하나와, 정원이 보이는 창을 마주본 족자 하나가 걸려 있었다. 방 곳곳에는 여러 무늬가 입혀진 도자기 꽃병이 놓여 있었지만 병 안에는 물도, 꽃도 들어 있지 않았다.


“괘종시계...인가?”


경하는 이내 방을 돌아다니다, 벽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큰 괘종시계를 보았다. 거의 170센티미터는 넘을 듯한 높이의 괘종시계는 경하의 키보다 아주 약간 더 컸다.


시계 안에 달린 금색의 추가 움직이며, 금색의 판에 달린 초침과 분침과 시침으로 현재의 시간을 정확하게 표시하고 있었다. 태엽을 감기 위한 열쇠는 시계를 보호하는 유리 문의 손잡이에 달려 있었고, 시계의 판에는 ‘31일마다 한 번씩 감을 것’ 이라고 태엽 구멍 아래에 작은 글씨의 영어로 쓰여 있었다.


‘정원에도 가 볼까.’


유경하는 현관으로 가 신발장을 열었다. 미리 조선에서 보내 둔 짐들은 이미 도착해 전부 정리되어 있었기에 신발장에도 경하의 신발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경하는 들어왔을 때 신었던 구두를 다시 신은 후, 문 밖으로 나가 정원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짧게 깎인 잔디가 밟히는 소리가 나며 유경하는 발걸음을 옮겼다. 집 뒤편에는 벚나무와 단풍나무가 각각 세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올해의 날씨가 평년보다 조금 추운 탓인지 아직 벚꽃은 완전히 만개하지 않은 채로, 나뭇가지에 달린 꽃봉오리는 여전히 오므린 채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유경하는 몸을 돌려 처음 들어왔을 때 보았던 호수를 보았다. 일본식 형태로 된 작은 호수에는 섬처럼 된 작은 돌 하나가 호수 중앙에 놓여 있었다. 그 돌 위에는 작은 소나무 하나가 뿌리를 내린 채 자라고 있었으며 호수의 수면에는 붉은 연꽃 하나와, 연잎 여러 장이 떠 있었다. 


“.....”


유경하는 멍하니 호수의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짧은 흑발과 흰 셔츠를 입은 모습은 왜인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예전부터 거울이 자신을 비추는 것과, 물 속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지만 이제는 전부 옛날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냐아, 냐,  냐아....-


‘.....고양이?’


집으로 돌아가려 복도의 입구로 향하던 유경하는 발걸음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