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을 멋대로 각색한 내용이므로 원작 고증 개판임

- 창작은 창작일 뿐, 작가는 나치 사상을 지지하는 사람이 아님

- 술 마시고 써서 내용 엉망이니 감안해주길 바람




 "있잖아, 파트라슈."


 석벽에 전시된 자애로운 구세주의 화상을 감상하던 소년이 말했다. 해진 구두에 얼굴을 묻고 있던 갈색 털의 충견은 주인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짓무르고 부르튼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그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년은 초점을 잃은 멍한 눈동자로 벽을 빤히 응시했다. 


 해쓱한 얼굴은 각질이 일어 거칠었고, 더러운 금발 머리는 곧 바스라질 듯이 푸석푸석했다. 얇은 옷은 혹독한 한파를 막아주기에는 터무니 없이 부족했고, 수중에는 단 한 푼의 돈도 없었다. 굶주린 개는 힘이 없어 주인의 발치에서 헥헥거렸고, 굶주린 주인 또한 힘없이 주저앉아 곧 다가올 비참한 운명만을 기다릴 뿐이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랬어. 착하게 살면 결국 보답받게 된다고. 주님께서 모든 걸 보고 계시니, 죽으면 천국으로 가서 다 보답 받는다고. 할아버지도 늘 똑같이 말씀하셨고. 그래서 매일 기도하면서, 힘들고 배고파도 참고 노력했어. 주님께서는 모든 걸 보고 계실 테니까. 천사들이 날 데리러 오면, 내가 배고프고 힘들었던만큼 보상받을 테니까."


17세기의 화가 루벤스가 그린 성화는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뼛속까지 시린 겨울의 추위가 엄습한 대성당과는 달리, 붓과 물감으로 태어난 성스러운 세계는 홀로 봄이었다. 배고픔도, 아픔도, 그리고 억울함도 없는, 오로지 주님께서 보살피시는 영겁의 천국. 억압받고, 천대받고, 굶주림에 시달리는 지상의 죄인들이 목놓아 부르짖는 바로 그 세계가 그림 속에서 소년을 기다렸다. 


 이대로 눈을 감고 잠의 세계로 빠져들면 주님의 아름다운 정원에서 깨어날지도 모르지. 엄마가 기다리고 할아버지가 기다리는, 모든 고통을 뒤로 하고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는.


 "근데 말이야."

 

 파트라슈를 쓰다듬던 손길이 문득 잦아들었다. 총기가 사라진 멍하던 눈동자에서 작은, 아주 작은 불씨 하나가 튀었다.


 "정말 그 말이 맞을까? 진짜 주님이 계셔서 모든 걸 내려다보고 계실까? 만약 그렇다면, 우린 왜 이렇게 배고프고 힘들까?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주님이 날 이렇게 혼내시는 걸까? 그런 생각해본 적 없어?"


  헐벗고 궁핍하던 세월이 주마등처럼 소년의 눈앞을 스쳐갔다. 무일푼으로 거리를 전전하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누명을 쓰고 두들겨 맞고, 마지막으로 간직한 꿈마저 부정당한 고난의 세월이. 


 "어쩌면 그건 그냥 거짓말이 아닐까? 우리 같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지어낸 거짓말. 신도, 천사도 사실은 없는 걸지도 몰라. 있는 건 오직 우리처럼 기도만 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어."


 소년의 동공에 차츰 총기가 돌아왔다.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예정된 별세를 향해 나아가던 신체가 돌연 다시 움직이며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느덧 소년의 눈동자는 특유의 초롱초롱한 생기를 되찾았다.


 "만약 그게 다 거짓말이라면, 파트라슈. 결국 우리는 당하기만 하고 끝나는 거잖아. 잘못한 것도 없고, 죄 지은 것도 없는데 그냥 참고 견뎌야 하는 거잖아. 그러다 이런 곳에서 죽는 게 정말 성당에서 말하는 대로 행복하고 참된 걸까?"


 마을사람들에게 당한 수모, 끔찍한 고통과 따돌림, 그 생생한 기억을 상기할 때마다 소년의 심장이 쓰라리게 아팠다.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하던 통증은 점점 커져 마치 칼로 도려내는 듯, 창으로 쑤셔박는 듯 욱씬거렸다. 이미 메말라버린 눈물샘에는 물기조차 맺히지 않았지만, 무뎌진 감각은 새롭게 살아나 두근두근 박동을 뛰게 했다.


 그리고 그 통증은 또 다른 감정으로 전이되어 활활 타오르는 맹렬한 불길을 소년의 가슴 속에 질렀다.


 "그럼 우리만 너무 억울한 거잖아? 나쁜 건 우리가 아니었는데, 우린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다 잊고 용서해야 돼? 내가 왜?"


 마지막 질문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구세주에게 던진 것이었다. 십자가에 매달려 만인을 구원했다는 그리스도는, 그러나 현실의 버려진 소년에게 응답하지 않았다. 그저 늘 그랬던 것처럼 묵묵히, 대성당을 찾는 신도들을 바라보며 벽 속에 박혀있는 게 다였다. 그림 안의 예수는 소년에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성화를 바라보던 소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지를 털고 시린 손을 한번 주무른 후, 그대로 미련없이 대성당을 빠져나갔다. 꼬리를 축 늘어뜨린 파트라슈는 쫄래쫄래 그런 주인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잠시 후, 화가 루벤스의 그림이 걸린 대성당에 화염이 치솟았다.


 화르륵, 불꽃이 거대한 석조 건물을 통째로 집어삼킬 기세로 혓바닥을 쉿쉿 놀렸다. 시뻘건 화염은 지옥에서 강림한 악마처럼 주둥이를 벌리고 사방팔방을 새카맣게 물들였다. 당황한 마을 주민들이 앞다투어 물을 날랐지만 한번 기세를 탄 불길은 쉽게 잡힐 기미가 없었다. 미처 방화범을 색출할 틈조차도 없이 긴박한 상황이 이어졌다.


 화재가 내뿜는 빛이 얼마나 강한지 대성당 주변은 마치 대낮처럼 밝았다. 한참 멀리 떨어진, 소년과 개가 서있는 언덕에서도 선명히 보일 정도였다. 이슥한 시각, 팻말 하나만 외로이 설치된 마을 어귀에 인적 따위는 없었다. 덕분에 지친 소년과 개가 유유히 빠져나가도 눈치채는 이조차 없었다.


 우뚝 갈림길에서 멈춘 소년은 이글거리는 저너머의 화마를 주시하며 침묵을 지켰다. 붉은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굴곡이 마치 자신을 배웅하며 손을 흔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을 남겨두고 떠난 엄마와 할아버지가 소년에게 보내는 마지막 작별인사인 것만 같았다. 


 갑자기 정지한 주인을 불안하게 눈여겨보며 파트라슈가 허벅지에 얼굴을 비볐다. 낑낑, 침울하게 신음하는 개의 귀를 소년이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파트라슈, 넌 어떡할래? 따라오기 싫으면 안 가도 돼. 가서 나보다 더 좋은 주인을 찾아."


 개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마치 마음이 통한 것처럼 파트라슈는 끈질기게 들러붙으며 소년의 제의를 온몸으로 거부했다. 결국 소년도 무릎을 꿇고 파트라슈를 포옹하며 항복을 선언했다.


 "그래, 알았어. 같이 가자. 어디를 가든, 우리만은 늘 함께인 거야."


 소년의 선언에 안심했는지 파트라슈가 혀를 내밀고 꼬리를 흔들었다. 불 탄 대성당의 망루가 와르르 무너지는 굉음이 들려왔다. 마을과 역사를 함께 한 유서 깊은 교회는, 이제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중이었다. 


 요란히 내려앉는 대성당 지붕을 응시하던 소년이 비로소 발길을 뗐다. 그렇게 소년과 개는 어둠이 잠식한 숲길로 자취를 감추었다. 휘영청 보름달이 뜬 야심한 밤, 올빼미 우는 울음만이 을씨년스럽게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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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트베르펀 교외의 작은 마을은 예전부터 그리 유명한 곳은 아니었다. 그저 농부들은 곡물을 수확하고, 목장 주인은 우유를 짜고, 사내와 처녀들은 시시때때로 시시덕거리는 지극히 평범하고 아담한 농촌이었다. 그나마 내세울 만한 명소가 17세기 화가의 성화를 간직한 대성당이었으나, 그조차 원인불명의 화재로 전소되면서 최소한의 특색조차 잃고 말았다. 


 화재를 전후로 마을에서 실종된 우유배달 소년의 이름이 간간이 구설수에 올랐지만 금세 사람들은 흥미를 상실했다. 


 그런 악독한 짓을 저지르기에는 너무 유순한 아이였고, 또 시야를 벗어난 꼬마의 거취까지 궁금해할 만큼 사람들의 관심사가 널널하지도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저 마을사람끼리 평화로운 한 때를, 또 다시 찾아오는 내일을 맞는 것이 전부였다. 아이들은 자라나 맺어지고, 영글은 보리를 거둬들이고, 늙은이들은 흔들의자에 앉아 애틋한 과거를 반추하는 그런 소중한 한 때를.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귀중히 여기던 그 안정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전쟁에 대한 소문이 처음 퍼질 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막연히 헛된 선동으로 치부했다. 특별한 근거는 없었다. 그저 목전으로 다가온 총칼의 존재를 애써 외면하려는 부질없는 발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책 속의 허구가 아닌 실재하는 현실이었다. 이웃나라 독일을 점령한 광기의 물결은 국경을 넘어 주변국가까지 범람했고, 이는 곧 탄압과 학정으로 이어졌다. 


 전차를 타고 철모를 쓴 군인들이 봇물처럼 벨기에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의 무기는 강력했고, 투지는 열렬했으며, 무엇보다 벨기에인들을 능가하는 조직과 장군들이 있었다. 그들의 총칼 앞에서 준비되지 않은 벨기에의 군대는 추풍낙엽처럼 스러져갈 따름이었다. 그리고 국왕 레오폴드 3세가 항복을 외치면서 최종적으로 전 국토가 독일의 치하에 들어갔다.


 벨기에 곳곳에 하켄크로이츠 깃발이 휘날렸고, 독일군의 주둔지가 일정 구간마다 세워졌다. 침략자들의 행패는 나날이 늘어갔지만 누구도 항의할 수 없었다. 혀를 잘못 놀린 대가로 이마에 바람구멍이 뚫리는 세상이었다. 어지간히 용감하거나 살 의지를 내려놓고 미치지 않은 이상, 누구도 선두로 나설 수는 없었다.


 세계 2차대전이란 그런 전쟁이었다.


 그들의 마을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지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마을의 통치자가 여럿 바뀌었지만, 적어도 마을은 아직은 제 모양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물론 그것은 작은 바람 한줄기에도 와장창 깨질 수 있는, 지극히 위태롭기 그지없는 안정이었다. 


 "저기 온다!"


 도열해 있던 독일 병사 하나가 외쳤다. 저멀리 흙먼지를 날리며 장교들이 타는 차량이 달려오고 있었다. 아군의 존재를 확인한 독일군은 서로 뭐라뭐라 소리치며 새로 부임한 대장을 맞을 채비를 했다. 활기찬 군화 소리와 독일인 특유의 강하고 억센 목청으로 길가가 시끌벅적했다. 


 그들의 모습을 마을 사람들은 그저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그저 이번에 새로 온다는 주둔 장교가 합리적인 인물이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수족이 잘린 정복지의 주민들을 상대로 총구를 들이밀어도 막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끼익, 목적지에 도달한 차량이 멈추었다. 대기하던 병사가 문을 열어주자 탑승한 장교가 터벅터벅 여유로운 동작으로 하차했다. 그와 동승했던 커다란 덩치의 맹견 또한 크르릉, 사나운 울음을 흘리면서 함께 내렸다. 그러더니 사냥감을 노리는 번견처럼 주민들을 쓱 훑어보며 살벌한 송곳니를 드러냈다. 


 바짝 긴장한 마을 사람들은 꿀꺽 침을 삼키며 갓 도착한 주둔 장교를 세심히 관찰했다. 


 독일군 장교답게 깔끔히 다림질한 제복을 입고 가슴에는 철십자, 허리춤에는 루거 권총을 패용한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나이는 얼마 안 되는지 제법 앳된 외양을 지녔다. 하지만 훤칠한 키와 듬직한 어깨 덕분에 인상 자체는 꽤나 위압적인 축에 속했다.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눈매를 번뜩이며, 이름 모를 신임 장교는 군모를 벗고 짧은 금발 머리카락을 털었다. 


 생김새만 보면 굉장히 늠름하고 멋진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꽉 다문 입술과 냉랭히 빛나는 파란 눈동자 속에는 도무지 정감이 가지 않는 비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먹이를 낚아챈 채 무정하게 바라보는 맹금과도 같은 독기가 냉랭하게 서린 자였다. 그런 그가 훅 주변을 둘러보자 주민들은 괜히 오금이 저려 시선을 내리깔았다.


 재차 군모를 뒤집어 쓴 젊은 장교에게 독일 병사 하나가 다가와 빠릿빠릿한 경례를 건넸다. 장교가 경례로 화답하자 병사가 말했다.


 "근무 이상 무! 잘 오셨습니다, 다스 중위 님!"


 다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매우 낯익은 성씨였다. 대다수 주민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넘겼으나, 그럭저럭 잔뼈가 굵은 치들은 금세 같은 성을 지닌 누군가를 떠올리고 신임 장교를 다시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뒤이어 상대를 알아본 그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세월이 흐르면서 성장하고 많이 바뀌었으나, 근본적인 골격과 태는 사라지지 않았다. 비록 풍파를 맞으며 날카롭고 예민하게 닳았지만, 여전히 그의 얼굴에는 한때 화가를 꿈꾸던 순수한 소년의 흔적이 잔존하고 있었다. 


 네로 다스, 대성당 화재 이후 감쪽같이 실종된 바로 그 아이가 성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수고하네."


 별 감흥 없는 무덤덤한 어조로 네로가 대꾸했다. 그러자 독일 병사가 앞장서 그가 머무를 처소로 안내했다. 뒷짐을 진 거만한 태도의 장교와 그의 우람한 충견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동안, 네로를 알아본 이들은 재빨리 주변 사람들과 그 정보를 공유했다. 마을에서 그리 핍박받고 자란 소년이 나치 장교가 되어 귀환했다는 소식은 곧 마을 전역으로 퍼졌다. 


 이에 관해 사람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으로 갈렸다. 일부는 그래도 나고 자란 고토이니 잘 보살피지 않겠냐는 의견을 제시했으나, 나머지는 극심한 두려움에 시달렸다. 10년도 더 지난 옛일이지만 네로가 이곳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살았는지 모두들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가 앙심을 품고 복수를 계획한다면 이를 저지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마을의 철물점 주인과 우유 유통업자가 갑자기 사라진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