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이제 민재 씨도 성희 씨에 대해서 알았으니, 오늘 온 이유에 대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며 캐롤라인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하얗고 기다란 무언가를. 질 나쁜 학교 교사들이 부모님들한테 종종 요구하고는 한다는, 우리 집 식탁 위에서 저번 주에도 보았던 그것.

 

 "저번에는 민재씨가 리돌 양을 맡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탐탁치 않아 하시는 것 같아서 그 자리에서는 일단 이 봉투는 제가 회수했었습니다. 지금 보니까 이제는 같이 사는 것에 대해서 따로 불만은 없으신 것 같아 다시 전달해 드리려고 이렇게 갖고 왔습니다."

 

 허, 그래도 약속한 건 지키네 그랴. 

 

 "일단 일반적인 성인 여성 1명의 생활비를 기준으로 하여 넉넉하게 넣어 드렸습니다. 혹시라도 금액이 모자라시거나 하면 일을 더 하십시오."

 

 ...?

 

 "제가 지금 뭘 잘못 들은 건가요?"

 

 "그리고 성희 씨 말입니다만."

 

 아니 사람이 어이없어하고 질문을 하면 좀 대답을 하고 이야기를 돌리던가 하라고 좀.

 

 "성희 씨는 제가 원래부터 알고 있던 분이었습니다만, 우연히 이 곳으로 이사를 하셨더군요. 제가 달에서 온 사람이 있다고 하니 만났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내비쳤습니다. 그래서 같이 잘 지내시면 좋을 것 같아서 이렇게 오늘 같이 오게 되었습니다."

 

 애매하다.
 이 아줌마, 얘기하는 스타일이 자기 할 말만 쏟아내는 스타일이어서 저번에는 그저 대처하기가 까다로운 편이었지만, 지금은 까다로우면서, 애매하다.

 물론 지금 암묵적으로 리돌은 우리 집에서 살고 있다. 그것이 반 협박에 의해서 이루어진 사항일지라 하더라도, 일단은 살고 있는게 맞다. 그것이 설령 이 갈색머리의 외국인이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 준 사항이라 하더라도. 그런데, 처음에 리돌과 같이 온 것은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내가 거절하는 것을 방지하러 온 것이라고 하면, 지금은 그 상황을 못박으러 온 것이다. 리돌이 사는 생활비까지 지원해 주면서.

 

 그리고 방금 말한 부분에서 '우연히 이 곳에서 이사를 했다' 라는 부분도 너무나도 거슬린다. 아마도 이 아줌마가 어떻게 사주를 해서 내 쪽으로 알선을 한 것 같은데, 이 쪽은 심증의 영역이라 뭐라 말은 못하겠다. 하여튼 지금 주변에 이런 엄청난 미인까지 소개를 해 주면서 나를 회유를 하고 있는 거다. 

 

 이젠 진짜 빼도박도 못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 아까 계단 밑에서 두 사람을 만났을 때, 일말의 기대감 같은 것도 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혹시나 이 달나라 소녀를 데려갈 사람을 찾아준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기대감. 하지만, 지금 그 생각은 말도 안 되는 사항으로 판명되었고, 이제 나에게 남겨진 것은 가혹한 현실에 대한 인정. 그것 단 하나.

 이런 저런 생각에 잠시 대답 없이 침묵만이 식탁 위에 가라앉았다. 리돌은 여전히 의심 어린 눈빛으로 금성에서 온 미인을 쳐다보고 있었고, 성희 씨는 여유있는 웃음으로 같이 리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캐롤라인은, 침묵을 깨는 한 마디를 던졌다.

 

 "저, 민재 씨?"

 

 "아, 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아이스크림 하나만 사 주십시오."

 

 "네?!"

 

 아니, 지금 그게 이 단락에서 나올 이야기인가? 나는 다시금 어이가 터지는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서 말을 이어 갔다.

 

 "농담입니다. 너무 심각하게 무언가를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아서 잠깐 분위기를 환기해 보았습니다."

 

 누가 그런 말을 농담으로 알아 듣겠냐. 

 

 "딱히 더 하실 이야기가 없으시다면, 저는 리돌 양과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잠깐 밖에 있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두 분이서 이야기를 좀 나누고 계시죠. 그럼, 리돌 양."

 

 그렇게 말을 끝낸 캐롤라인은, 리돌을 끌고 문 밖으로 나갔다. 리돌은 문을 나설 때 까지도 여전히 불안한 듯한 눈빛으로 나와 성희 씨를 번갈아가면서 쳐다보고 있다.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건지, 참.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나와 성희 씨 단 둘 만이 남았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어색함이 만들어 낸 일말의 침묵이 다시 자리잡았다. 허, 참. 저 언어 통하지 않는 아가씨 하나, 그리고 말은 통하지만, 도저히 대화라고 생각할 수 없는 문장을 구사하는 아가씨 하나. 이렇게 둘을 제외하면, 여자랑 단 둘이 대화해 본지가 도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물론 이 아가씨도 자기가 외계인이라고 주장은 하고 있지만, 내가 일평생 전혀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미인하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심장이 미친듯이 떨려 온다. 당최,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 되는 것인가.

 나는 일단 궁금한 점을 물어보면서 이야기를 꺼내기로 하였다. 
 
 "금성인이라고 하셨는데 한국말을 꽤 잘..."


 "저, 민재 씨한테 사과해야 할 게..."

 

 ....오디오가 물렸다.

 

  "아, 먼저 얘기..." "아, 먼저 얘기..."

 

 미치겠구만. 이제는 대사도 똑같다. 한 번만 겹치면 어떻게든 되겠는데, 두 번이나 이렇게 되니 이야기가 이어질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원래 말주변이 그래 좋지 않은지라, 얼굴만 붉히면서 식탁을 노려다 보았다. 그나마 성희 씨가 나보다는 좀 더 사람 대하는 기술이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녀는 웃음기를 잃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민재 씨, 우린 좀 마음이 맞는 것 같네요. 이렇게 말이 계속 겹치는 걸 보니."

 

  갑자기 기분이 마구마구 좋아지면서, 하늘로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평서문으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단순하지만, 지금 내 마음을 그대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네?! 마음이 맞는다굽쇼?! 미인께서 이렇게까지 나한테 관심을 가져 주신다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아! 영광입니다!"

 

 "네? 뭐라고요?"

 

  ...이런 것도 무슨무슨 조절장애 같은건가? 생각한 그대로 말이 나왔다. 불행중 다행인 것은 마지막 단어만 튀어 나왔다는 것.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시점에 이게 무슨 망발인가. 성희 씨가 나를 어떻게 보겠어. 창문 밖으로 뛰어 내리고 싶은 심정이다. 진짜. 

 나의 내면에서 심적인 자살충동이 오는 지금 이 시점에도 성희 씨는 그저 호호 웃고 있을 뿐이었다. 

 

 "민재 씨 참 재미있는 분이네요. 여자 분들한테 인기 많으시죠?"

 

 28 평생동안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이야기에, 들뜨던 마음은 가시고 가슴이 마구마구 아파지면서 안구에 무언가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내 눈 앞에 있는 이 사람은 천생 천사인 건가 아니면 사람을 말려 죽이려는 악마인 건가. 진실은 칼자루를 쥔 사람을 찌를 수 있는 양날의 검과 같은 것. 나는 마음 속의 눈에서 흐르는 피눈물 때문에, 도저히 꽉 다문 이빨을 펴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새어 나오는 웅얼거림 뿐이었다.

 

 "으늡...느드..."

 

 성희 씨는 그렇게 고개숙인 채 대답을 씹어 돌리는 나를 보고서는, 고개를 한 번 갸웃 하고는 그대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어쨌든, 제가 방금 말하려고 했던 거는, 민재 씨한테 사과할 게 있다는 거에요."

 

  나는 정신이 약간 돌아오고 나서야, 한 템포 늦게 그 말에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어떤... 사과 말이죠? 딱히 성희 씨가 뭘 잘못 하신 것 같지는 않은데..."

 

 성희 씨는 한숨을 한 번 쉬고서는 말을 이었다.

 

 "민재 씨, 리돌 양하고 사귀시는 게 맞죠?"

 

 마음 속의 무언가가 휘청, 하고 꺾였다. 역시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그렇게 보일 수 있는 건가?

 

  "아, 아, 아, 아뇨! 제가 왜 저 애랑 사귑니까. 쟤는 그저, 이 집에 늘러붙어 있는 식객 같은 거에요. 뭐 동거를 하고 있으니 그렇게 보일 수는 있으실 텐데, 절대, 네버, 네버 아닙니다. 진짜."

 왠지 모르게 절대적인 부정을 하고 싶어 진다. 그것은 눈 앞에 있는 절세미인이 나의 연애사에 대해서 오해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첫 번째요, 그리고 저 말귀 못 알아 듣는 아해가 나에게 무언가 여자로서의 어필이 되지 않는 다는 점이 두 번째이다. 내 말을 들은 성희 씨는 무언가 안도한 듯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다행이다. 난 또 두 분이 사귀는 중이면 어쩌나 하고 너무나도 고민했어요."

 

 이, 이게 무, 무슨 말이지? 지금 설마 내가 애인이 없다는 것이 다, 다행이라는 건가? 내가 솔로이기를 바라는 건가 지금? 방금 한 얘기와, 지금까지의 말하는 뉘앙스를 종합해서 이야기를 풀어 보자면, 서, 서, 설마, 내가 조 좋다는....?

 마음 속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휘저었다. 아서라, 이건 도끼병 말기 증상이다. 그러나 사람이 이 정도로 행복회로가 가동되면 비록 당연히 거절당할 것을 이성으로는 알고 있지만 망상은 폭주하게 된다. 그리고 나도 일단은 교양있는 현대인인지라, 확신 없이 이런 마음을 함부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차후에 그닥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허나 마음은 정직하더라도 입은 언제나 진실을 이야기 하지 않는 법. 다른 화제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해 보려 하였으나, 나는 떨리는 가슴만큼이나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 그런데 그건 왜, 왜 물으시는 거죠?"

 

 "방금 전에, 제가 금성인이라고 말씀드렸죠?"

 

 "네. "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믿고 있지는 않지만. 

 

 "저희 금성인의 특징 중 하나가, 근처에 모든 생물들의 페로몬과 성적 충동을 억제하는 파장이 나오는 거에요. 쉽게 말하자면, 저를 중심으로 반경 몇 미터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욕이 전혀 일어나지가 않게 되는 거죠."

 

 ...? 잠깐. 내가 아까 비슷한 고민을 했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보자면 이건 음... 지구의 판타지 소설에서 비슷한 말을 찾아 보자면 염력과 같은 거에요. 의식하지 않고 있으면 그냥 자연스럽게 몸 주변으로 퍼져 나오는 거고, 이게 생각하고 집중을 하게 되면 몸 안으로 그 기운이 모이게 되요. 다른 사람한테 영향을 직접적으로 줄 수 있는 파장을 조종할 수 있는 거죠..."

 성희 씨는 여기까지 말하고서는, 말 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설마...?

 

 "잠깐만요. 그렇다면 성희 씨가 주변에 있게 되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전혀... 에.. 그러니까... 그럴 생각이 안 든단 말인가요?"

 

 성희 씨는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것보다 그러니까, 지금 이 아가씨가 사과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 집 아래로 이사를 왔기 때문에, 내 성욕이 완전히 없어져 버렸기 때문인 거야? 아니, 이건 리돌이 만능권총을 꺼내들 때 보다 훨씬 더 황당한 이야기다. 그거야 사람이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보고 나서 믿습니다 가 되어 버린 경우긴 하다. 그런데, 밑도 끝도 없이 처음 우리 집에 온 손님이 자기 때문에 나는 성 불구자가 되었다고 느닷없이 설명하고 나서니, 도저히 뭐라고 할 말이 없다.